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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 / 매의른
“어쩌다 또 이렇게 된 거지. 대체… 사고 없이 넘어가는 때가 없구나.”
인간계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오류가 나버린 포털 탓에 인간계 오지에 불시착해버린 매니저와 키르는 망연자실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던 매니저는 다급하게 본부에 연락해보았으나 들려온 소식은 그다지 희망적이진 않았다. 큰 문제는 아니나 시릴이 포털 복구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꼼짝없이 적어도 꼬박 하루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희망적인 점이라면 다른 임무에 투입된 사신들은 다행히 지부에 돌아갔다는 점과 이 오지에 같이 있어야 할 사신이 키르라는 점이었다. 무인도에 이어서 또다시 이런 사태라니 절망했지만, 그래도 키르와는 비슷한 상황을 한번 같이 겪어봤기에 안도감이 드는 아이러니함에 매니저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매니저의 한숨에 동조하듯 시선을 바닥에 떨군 키르는 사태에 대한 화를 누르고 매니저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재빨리 생존책을 강구했다. 더운 여름에는 평소만큼의 활동을 하기엔 저번 명계 더위로 열사병에 한참을 시달렸던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더위를 피하자고 해가 지기를 기다리기에는 밤의 숲은 잔인하도록 매정하다. 다행히 인간계 중에서 비교적 평화롭고 깊지 않은 숲에 있어 저번 무인도처럼 마물이 튀어나오거나 않겠지만 가까운 거리에 인가의 흔적도 없어 최대한 빨리 먹을 것과 마실 물, 숙소를 마련해서 야영을 해야 했다. 항상 상비하고 다니던 비상용 생존 도구들로 당장 필요한 것은 금방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선 키르는 곧장 근처에 들리는 물 흐르는 소리에 집중했다.
“매니저, 물과 식량을 비축하는 것이 좋겠다. 혼자 있기에는 위험하니 같이 가야 한다. 괜찮겠나?”
“흠… 그래, 원혼의 기운은 없지만, 확실히 어디인지도 모르고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같이 이동하는 게 좋겠어. 근처에 물가나 먹을 만한 게 있는지 찾아보자.”
생각보다 빠르게 비관하던 모습이 이성적으로 돌변한 매니저를 보며 역시, 알 수 없지만 강한 사람이다 싶어 키르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야말로 꼭 상처하나 없이 지켜내겠다고 다짐하며 매니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드시 지켜주겠다. 걱정 마라.”
“푸흐, 알았어. 자, 날이 지기 전에 빨리 갑시다.”
건네는 손을 뿌리치기도 민망하기도 하고 뭔가 주위에 있거나 멀어질 수도 있으니 지금만큼은 의지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이 선 매니저는 내민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맞잡아오는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 괜히 부끄러워지는 마음이 들어 서둘러 이동을 재촉했다. 키르 또한 내심 자꾸 얼굴이 달아오르고 간질거렸지만 이건 매니저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함이라고 스스로 말하며 더위에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걸으며 주위를 정찰해본 결과 다행히 위협이 될 만한 동물이나 원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극히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지만, 방심을 늦추지 않으며 걸어가자 멀지 않은 곳에 어렴풋이 들려오던 물소리의 근원인 꽤 넓은 시냇가를 발견했다. 유속은 아주 빠르진 않지만, 유리처럼 맑고 투명해 언뜻 깊이를 알기 힘들어 나뭇가지를 주워 곳곳에 쿡 찔러보자 아주 얕진 않지만 들어가기 적합하다고 판단이 되었다. 잡은 손을 잠시 놓고 매니저에게 있는 물통을 달라고 하려 키르가 고개를 돌리자 매니저의 얼굴이 얼핏 굳어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제야 불현듯 매니저가 과거에 물가에서 동생들을 잃어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떠올린 키르는 그것도 잊고 제 손으로 물가에 데려왔다는 자책감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매니저가 물을 무서워하는 걸 잠시 잊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 매니저. 마실 물과 고기를 잡아 올 테니 물가에서 조금 떨어진 그늘에 쉬고 있어라.”
“아… 아니야, 나 괜찮아. 키르만 일하게 할 수는 없어. 나도 도울게.”
매니저는 키르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굳어졌던 얼굴을 풀며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키르는 쥔 손에 살짝 다시 힘을 주었다가 풀고 가져온 모포 중 하나를 깔아 당황하는 매니저를 앉히고는 다시 놓았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도와주려는 것이 굳이 지금일 필요는 없다. 나중에 매니저가 무섭지 않을 만한 일을 할 때 도와주면 돼.”
“… 배려해줘서 고마워, 키르. 대신에 나중에 내가 꼭 도울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알았지?”
키르의 단호한 배려에 매니저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마음을 살포시 미소로 답해 보였다.
“그래. 매니저는 강하지만 힘이 드는 일은 내가 하겠다.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푸흐, 알겠어. 저번 키르처럼 더위에 쓰러질 수는 없지! 하하, 생존! 맞지?”
“… 그 얘기는 하지 마… 그래, 생존은 중요하다. 매니저와 함께 돌아가야 한다.”
행여 키르가 본인을 많이 걱정할까 봐 너스레를 떨어 보이자 키르가 매니저의 장난기를 읽은 것인지 화답하듯 미소를 지었다. 강한 여름 햇살과 시냇물에 반사되어 키르에게 얼핏 비치는 모습이 그의 미소를 더욱더 맑고 해사하게 보이도록 했다. 매니저는 키르의 이런 순수하고 저돌적인 표현과 아이 같은 표정을 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마치 여름 햇살에 무방비하게 녹아내리는 초콜릿처럼 긴장이 녹아내려 곳곳에 뒤덮인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달아오른 매니저의 뺨이 본인이 그런 것은 모르는지 더우면 물을 떠다 주겠다는 속절없는 말에 매니저는 실소를 터뜨리고는 키르답다고 생각하며 사양했다.
키르는 매니저가 여름 날씨에 더워지기 시작한 것이라 확신하며 서둘러 물을 조금 뜨고 붕대로 쓰려 가져온 천을 적셔서 매니저에게 열을 식히라고 기어이 가져다주고 다시 물가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서는 재빠르게 모리에게 사둔 휴대용 사냥도구로 생선 몇 마리와 가재와 흡사한 생물 몇 개를 접이식 통에 담은 후 수통에 두 명이 하루 정도는 충분히 쓸 수 있을 정도의 식수를 담아냈다. 순식간에 먹을 식량과 식수를 마련하느라 입고 있던 옷이 물에 젖어버렸지만, 물을 짜내고 다시 입으면 여름 볕에 금방 마르겠다고 생각한 키르는 아무 생각 없이 웃옷을 훌렁 벗어 물을 짜내고 세게 털어냈다. 오히려 이 무더위에 차라리 시원하고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털어낸 옷을 입으려다 키르는 그늘에 쉬고 있는 매니저와 눈이 마주쳤다. 어찌 된 영문인지 매니저의 얼굴이 붉은 기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더 달아올라서는 고개를 홱 돌리자 더위가 식지 않은 것인지 걱정이 되어 옷도 입기 전에 다른 천을 찾아 찬 물을 적셔 가져갔다.
“매니저, 얼굴의 열이 가라앉질 않는다. 많이 더운가? 새로 물을 적셔왔다. 아까 쓴 것은 이리 줘.”
매니저는 나지막이 부르는 음성에 문득 새로 적신 천을 받으려 다시 키르 쪽을 보았다. 급하게 가져오느라 상의를 벗어둔 채 물이 뚝뚝 떨어지는 키르에게서 매니저는 낚아채듯 물에 적신 천을 받고 이제는 뜨거워진 쓰던 천을 건네주고는 부끄러워 붉어진 얼굴을 새 천에 가리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 신경 써줘서 고마워… 그런데 그 … 위에 옷은... 흠! 입는 게 좋을 것 같아.”
“아, 미안하다.”
사실 아무렇지 않았지만 묘한 긴장감이 도는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머쓱해진 키르는 내팽개친 옷과 마련해둔 식량들을 가지러 갔다. 매니저는 식량과 식수를 구하러 간 키르를 미안하고 고맙게 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햇볕에 그을린 그의 까만 피부와 달을 닮은 그의 눈동자가 아름다워 홀린 듯이 빤히 보던 중에 키르가 갑자기 웃옷을 벗는 바람에 당황해 얼굴이 달아올랐던 하필 그때 눈이 마주쳐서 들킨 듯한 창피함에 황급히 고개를 돌려서 모면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또 무방비할 때 순수하게 파고들어 오고는 본인은 모르니 매니저는 어쩐지 치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 마음을 알아챌 리가 없는 키르는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는 옷을 대충 걸치고 구한 식량과 물을 들어 매니저에게 갔다. 물기 때문에 그의 탄탄한 몸에 딱 붙어버린 옷 때문에 분명히 다 가렸는데도 매니저의 얼굴은 어쩐지 더 홧홧해졌다. 매니저는 최대한 시선을 피하며 키르에게서 짐을 뺏어 들으려 했지만 문제없다는 그의 말에 머쓱해져 잠자코 그 뒤를 따라 이동했다. 매니저는 키르가 짐을 들고 있는 덕에 아까처럼 손잡고 가지 않아 문득 다행이라고 생각되어 안도했다. 그랬다면 이미 발갛게 달아오른 볼이, 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더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돌아가는 길에는 좀 더 여유 있게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는데 아까는 무심코 지나쳤던 나무들 사이에서 까만 열매가 눈에 띄었다. 예전에 인간계 식물도감에서 본 블랙 커런트라는 열매였다. 그동안 인간계에 종종 임무 겸 갈 일이 있던 터라 혹시 몰라 구별법과 용도에 대해 꼼꼼히 읽어둔 매니저는 열매 몇 개를 따 주머니에 열매 다발을 몇 송이 따서 넣었다. 그 사이 키르는 오면서 설치해둔 덫을 수거했다. 생각보다는 미미한 수확에 한숨을 쉬며 걸린 닭과 비슷한 조류를 재빠르게 손질하여 담아온 물을 살짝 흘려 핏물을 완전히 닦고 여분의 가방에 넣었다.
쨍하게 머리 위를 내리쬐기만 하던 햇빛의 색감이 점점 다채로워질 때쯤 포털 근처의 베이스캠프에 다시 돌아오자마자 키르는 짐가방에서 압축 텐트를 꺼내어 재빠르게 설치했다. 항상 임무를 갈 때마다 유난히 큰 가방을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녀 매번 조금 핀잔을 줬었는데 그의 생존 고집 덕분에 이렇게 잘 활용할 수 있어서 무안하기도 미안하기도 한 매니저였다.
“키르가 매번 생존 도구를 가지고 다닌 덕분에 이렇게 잘 쓰네. 항상 가지고 다닐 필요 없다고 핀잔줘서 미안해. “
“그저 난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미안하지 않아도 된다. 만약을 위해 준비했을 뿐이다.”
“키르가 매번 하는 말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인정할 수밖에 없네. 고마워, 키르.”
“매니저가 좋으면 나도 좋다.”
또, 또. 이렇게 예고 없이 들어오는 직설적이고 순수한 대답에 매니저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히려고 황급히 땔감으로 쓸 마른 나뭇가지를 주변에서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준비를 도우려는 그녀를 보고 키르는 살짝 웃으며 매니저가 들어가 쉴 수 있도록 가져온 압축 모포를 텐트 안에 깔고 여분을 쌓아두었다.
“키르, 여기 땔감 좀 모아왔는데… 아니, 텐트는 언제 이렇게 친 거야? 대체, 생존에서는 키르를 따라갈 사람이 없구나. “
“해가 오래 남지 않았다. 해가 지기 전에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매니저는 텐트에 들어가 쉬는 게 좋겠다. 체력을 낭비하면 안 돼.”
“그럼 키르 너는? 이건 불공평해. 아까 물가에서도 네가 다 했잖아.”
“충분히 도왔다. 아까 열매도 따고 지금 이렇게 땔감도 모아왔다. 매니저는 이미 많이 도왔다.”
“그래도 나 혼자 가만히 쉬면 내가 더 불편해. 같이 무사히 돌아가려면 서로 도와야지. 대신에 내가 힘든 일은 꼭 도와달라고 말할 테니까 내가 재료 손질이랑 요리하게 해줘. 이건 양보 못 해.”
“… 알겠다.”
매니저가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한다면 거절할 방법을 모르는 키르는 결국 매니저를 온전히 쉬게 하는 데는 포기했다. 대신 땔감을 내려놓고 텐트 근처에 앉은 그녀가 앉은 곳을 지는 햇볕이 덥히지 않도록 가림막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는 포털 주위와 텐트 근처로 동물이 습격하지 않도록 덫을 설치하고 땔감을 더 만들어와 불을 지폈다. 그동안 매니저는 큰소리치기는 했지만, 양념이 없어 어쩌나 고민하며 키르가 가져온 짐들을 뒤척거리다 소금과 휴대용 술병에 담긴 와인을 발견하고 자신의 가방에서 아까 따온 블랙 커런트 주머니를 꺼냈다.
도대체 소금이나 술은 왜 가지고 온 건지 어디서 구한 건지 의문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 덕분에 그나마 없는 재료로 요리를 할 수 있어 꾹 참았다. 눈을 질끈 감고 살아있는 생선을 손질하려는 데 덜덜 떨리는 매니저의 손을 본 건지 키르가 어느새 낚아채어 빠르게 손질해 핏기를 물에 씻어내 요리하기 좋게 두고 가버린 통에 매니저는 살짝 민망해져 괜히 투정을 부렸지만 내심 고마워하며 와인에 열매를 짓이겨 만든 양념을 만들어 손질된 고기와 생선에 꼼꼼히 발랐다. 그리고는 그새 키르가 나뭇가지를 깎아 만들어 놓은 꼬치에 고기들을 끼워 넣었다.
모닥불에 양념한 고기들을 잘 세워놓고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해가 거의 져 제법 어스름해졌다. 매니저는 아주 조금 남아있는 햇빛 잔상이 어둠과 뒤섞여 신비로워 보여 넋을 놓고 잠시 바라보다가 그사이에 주변 보초를 서고 있는 키르를 불러 옆에 앉히고는 하늘에 손을 뻗어 가리켰다.
“키르, 이미 네가 몇 번을 순찰한 덕분에 충분히 안전한 것 같으니까 이제 노을 좀 봐. 명계랑은 또 다르게 예쁘지 않아?”
“언제 어디서 습격을 할지 모른다. 지켜야 한다.”
“어차피 우리 먹는 동안은 보초 못 서잖아. 비록 포털 때문에 여기에 갇히긴 했어도 이렇게 같이 예쁜 노을 보니까 좋아서 그래. 노을은 한순간이라서 지금 놓치고 다음에 보려면 늦을 수도 있다고. 한번 봐. 분홍색, 보라색, 어두운 밤 하늘색 전부 뒤섞여서 예쁘지?”
“… 같이.”
매니저의 말과 말간 미소에 간질거리는 마음과 함께 웃음이 새어 나온 키르는 이내 매니저 옆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으로 여유롭게 쳐다보는 노을이었다. 밤의 어둡고 푸른 빛이 지는 햇빛의 따뜻한 색채를 제법 많이 밀어내어가고 있었지만, 그 뒤섞인 모양이 퍽 아름다워 새삼 음미하며 눈에 담았다. 그리고 그와 꼭 닮은 아름다운 빛의 잔상 아래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예쁘다, 매니저.”
매니저는 자신을 말하는 건지 하늘이 예쁘다는 건지 헷갈리게 자신을 바라보면서 말하는 키르때문에 지는 노을빛보다 더 볼이 발갛게 물들어 어색하게 웃으면서 괜히 굽고 있는 고기를 확인했다. 키르에게 있어 매니저는 생존에 급급한 자신의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게 해 항상 곁에 두고도 여태껏 보지 못한 아름다움과 행복을 가르쳐주었다. 그럴 때면 자신이 죽을 때까지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던 키샤가 떠올랐다. 이 생각과 감정들을 미리 알았더라면 키샤에게 좀 더 좋은 형이 될 수 있었을까 문득 생각에 잠기던 키르의 적막 사이로 매니저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자, 다 익었다! 한번 먹어봐!”
“… 달고 맛있어. 고마워, 매니저.”
잠깐의 침묵에 어색해질까 봐 황급히 익은 고기를 건넨 매니저는 내심 맛을 걱정하다가 해사하게 웃는 키르를 보고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고 자신도 먹기 시작했다. 다행히 예상보다 생선과 고기 둘 다 양념과 잘 어울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먹을 것 같은 맛에 뿌듯해졌다. 생각해보면 꽤나 낭만적인 식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이렇게 기분 좋게 예쁜 걸 보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 와인 한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매니저는 요리하고 조금 남은 와인과 블랙커런트를 가져와 대충 휴대용 물통에 나눠서 담고 키르에게 건넸다.
“짠, 후식으로 칵테일. 어디에서 들었는데 와인에 이 블랙 커런트 열매를 섞은 술을 섞으면 그 술을 키르라고 한대. 신기하지?”
“나와 이름이 같은 술이라니 뭔가 기분이 이상하군. 고마워, 매니저.”
“흠… 그런데 와인은 왜 들고 온 지 모르겠지만 잘 썼으니 뭐라고 반박할 수는 없네. 덕분에 제법 분위기도 나고. 비록 포털 때문에 이렇게 고립된 거라도 이렇게 예쁜 하늘 보면서 맛있는 거 먹고 맛있는 술 마시니까 꽤 좋다. 달아.“
매니저에게 술을 건네받아 한 모금 마시니 그 달콤하고 알싸한 맛이 씻겨 내려갔다. 술 자체가 단 것인지, 이렇게 여유롭게 주변의 공기를 느끼며 먹어본 적이 없어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매니저가 옆에 있어 그런지 모르겠지만 초콜릿을 먹었을 때보다 더 달큰한 느낌에 그는 살짝 취기가 올라오는 듯 해가 이제 넘어갔음에도 다시 조금 더워졌다.
“에이, 벌써 해가 져버렸네. 노을은 찰나라서 놓칠 뻔했는데 그래도 끝자락이라도 즐겨서 다행이야.”
“지는 해가 이렇게 예쁜지, 항상 밤이 오는 것에 준비하느라 보지 못했었다.”
“하하, 그럼 이제부터 놓친 만큼 더 많이 노을을 즐겨야겠네.”
“그래, 같이.”
키르는 항상 이렇게 매니저에게 새롭게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웠다. 다가올 추위와 위협에 대비하느라 주변의 아름다움과 찰나의 순간들을 즐겨본 적이 없는 자신에게 매니저는 늘 그것들을 어떻게 발견하는지, 어떻게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려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그의 동생 키샤의 많은 부분과 닮았다. 흰 사슴을 만나기 전에, 아니 키샤가 말을 잃기 전에 그녀에게서 배운 것들을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섞인 상념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매니저에게서 항상 많은 것을 배운다. 매니저가 나에게 알려주는 것들은 전부 색다르고 아름답다. 미리 알았더라면 키샤를 더 이해하고 믿을 수 있었을까, 흰 사슴과 상관없이 그 애를 잃는 일 따위 없었을까 하는 후회감이 든다.”
비슷한 이유로 동생을 잃은 아픔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매니저는 그 누구보다도 그를 깊이 이해하는 마음에 안쓰러워 보이는 그를 토닥였다.
“아니, 키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키샤가 만약 지금도 곁에서 키르를 보고 있다면 이렇게 동생을 생각해주고 믿어주는 다정한 형이 있어서 정말 고맙고 든든했을 거야. 키샤에게 하나뿐인 형이니까. “
자신에게 말하듯 위로의 말을 전하던 매니저는 문득 밀려오는 동생들의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 지려 해 애써 얼굴이 보이지 않게 가렸다.
“매니저의 동생들도 매니저가 누나여서 고맙고 매니저가 행복해지길 바랄 거야. 그러니 이제 자책하지 마. 매니저가 전에 나에게 말해준 것처럼 과거의 기억에 위축될 것 없다. 매니저는 강하고 친절한 사람이다.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어. 나중에 동생들을 행복하게 만나야 동생들도 안심할 거다.”
“믿어야지, 키르가 하는 말인데. 당연히 믿어.”
그 역시 자신에게 말하는 듯 매니저에게 위로를 건네고 살짝 자신에게 기대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아이를 어르듯 여리고 작은 등을 투박한 손으로 살살 토닥였다. 이 작은 등에 짊어진 자신과 같은 아픔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는 키르는 처음으로 제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가 오늘따라 더 안쓰러웠지만, 함께 공감해주는 그 느낌이 그에게는 제법 따뜻한 위안이 되었다.
먹먹하던 마음이 진정될 때쯤 어두워진 하늘에 보석들을 흩뿌려 놓은 듯 크고 작은 별들이 수놓아졌다. 그리고 이내 습관처럼 어두워진 숲에서 방향을 잡을 때 쓰던 길잡이 별을 찾아낸 그는 아른하게 남아있는 취기인지 붉어진 뺨으로 너무 예쁘지 않냐며 자신의 어깨에 기대 작은 별들까지 하나하나 짚어대는 매니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푸스스 미소가 지어지는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저 유난히 큰 별들은 길잡이 별이라고 한다. 길을 잃었을 때 유용해 밤의 숲에서 나오게 해주어 낙오되지 않도록 도와주지. “
“응, 예전에 얼핏 들은 적이 있던 것 같아.”
“그래, 우리 부족에는 저 별 아래에서 삶의 길을 잃고 어두워졌을 때 빛이 되어준 사람에게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고 염원하는 풍습이 있다.”
“와, 키르네 부족 되게 낭만적이구나! 너무 로맨틱하고 의미 있다.”
그들 위에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초승달처럼 눈꼬리를 휘며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는 그녀를 담아낸 그의 눈이 달빛이 메운 잔잔한 밤의 호수처럼 빛났다.
“밤의 숲은 고독하고 위험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정신없이 헤맬 즈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서 길잡이 별을 찾아. 저 별이 이끄는 대로 가면 안심하고, 결국에는 길을 찾게 돼. 마치 매니저가 나를 믿어주고, 이 낯선 세상에서 잘 생존해 나가도록 이끌어줄 때처럼.”
매니저는 반짝이는 밤하늘을 담아 빛나는 그의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낮고 깊은 그의 목소리에 잠겨 가만히 그의 말을 담았다.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앞으로도 키르가 길 잃을 일이 없도록 내가 계속 옆에 있어 줄게.”
그 또한 그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어쩐지 밀려오는 안도감과 기쁨에 온 얼굴과 가슴께가 간지러워진 그는 그녀를 사랑스럽게 내려보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들의 열대야가 식을 줄 모르는 한 여름날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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