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우린 불안 속을 걸었다 / 점
지금 가장 잘나가는 배우를 꼽자면 스물다섯의 그 남자다. 평범한 집안에 태어나 전혀 평범하지 않은 외모로 단숨에 스크린은 물론 안방까지 장악한 스물다섯의 남자. 토요일 저녁이면 무한도전을 보기 위해 있던 약속도 다음 날로 미뤘던 것처럼, 수목 미니시리즈 <화제의 아르바이트생>도 마찬가지였다. 화제의 아르바이트생. 줄여서 화알바. 금요일 아침 인사는 어제 화알바 본 사람, 이라는 풍문이 돌 만큼. 제목 그대로 화제였다.
본부장, 사장, 이사, 실장 등 직급이란 직급을 한 번씩은 달아본 리히트의 차기작이 화알바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회 초년생의 눈물겨운 아르바이트 이야기. 더불어 그 안에 피어나는 로맨스. 파격적이라면 파격적인 이미지 변신이었다. 매끄러운 스포츠카 대신 만원 버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그의 모습은 신선했다. 말려 올라간 셔츠 안으로 손을 넣고 가려운 곳을 벅벅 긁는 움짤은 삽시간에 커뮤니티 전체로 퍼졌다. 얼마 전 종영한 모 드라마도 서민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이긴 했으나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질타를 받았다. 월 70은 받을 것 같은 원룸과 S사의 플립 스마트폰은 기본에 B사의 바지, G사의 가방, C사의 지갑 등. 수도 없이 많은 명품 아이템을 매회 갈아치우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화알바 속 리히트는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방영을 앞두고 가졌던 기자회견의 인터뷰가 그중 하나였는데, 화알바를 촬영하며 입었던 옷은 모두 본인 소장이라는 것이었다. 팬미팅으로만 국내 대형 운동장을 채우고도 남을 그가 인터넷 최저가 3만 9천 원 짜리 니트를 입고 나왔다. 바지는 대학가에서 산 2만 7천 원. 신발은 조금 비싼 나이키 11만 9천 원. 전체 16부작 중 반이 넘는 12회차 동안 같은 신발만 신고 나왔다. 이게 푹신푹신해서 좋거든요. 드라마 속 리히트의 대사다. 그 후로 전국 나이키 매장이 들썩들썩했다.
화알바에서 유일하게 현실성 없는 건 리히트 얼굴뿐이다. 라는 댓글이 캡처 돼 이곳저곳 퍼져 당사자 앞까지 보이게 된 건 아무 일도 아니라는 거다. 헤어와 메이크업 담당인 제인이 페이스북 페이지를 들이밀었다. 여기서 더 대박 날 수가 있나 싶었는데, 너도 참 연예인 할 팔자인가 보다. 파운데이션을 펴 바르는 제인의 손이 바쁘다.
대기실 공기가 싸늘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예쁘게 좀 해달라느니 머리는 어떤 게 더 괜찮냐느니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였던 게, 오늘은 조용하다.
"야....... 애들 적응 못 해."
어제 친구랑 싸웠어? 제인이 작게 속닥였다. 아무 대답 없는 리히트를 보며 싸웠네 싸웠어, 하고 혀를 찬다. 저 문 좀 열어주세요. 막내 코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문 옆에 있던 다른 스탭 한 명이 문을 열어줬다. 여기 마끼아또요. 이건 초코 프라푸치노. 그리고 이건 언니가 주문한 거요. 막내는 제인의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리히트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가왔다. 고마워. 앞에 놓으면 돼. 제인은 막내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미소가 경악으로 뒤바뀐 건 곧이었다. 막내의 손을 떠난 아메리카노가 리히트의 허벅지 위로 쏟아졌다. 엄마악! 제인의 놀란 비명이 대기실을 가득 채웠다.
"야 괜찮아? 뜨거운 거야?"
"죄,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아 어떡해. 어떡하지."
거울에 꽂혀있던 멍한 시선이 느릿느릿 움직이자 주위가 긴장했다. 하얀 바지가 갈색으로 물들고 롤업으로 마무리된 발목 사이로 커피가 뚝뚝 흘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쏟은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넌 정신을 어디에다가 두고 다녀? 빨랑 다른 바지 가져와. 위에랑 어울리는 걸로! 아오 다 맞춰놨는데 이게 뭐냐!"
"죄송, 죄송합니다. 다녀올게요!"
메인 코디인 진이 성질이란 성질은 다 부리는 사이 막내는 후다닥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저거 또 한참 울겠고만. 제인은 메이크업을 멈춘 뒤 리히트를 살폈다. 리히트는 가만히 앉은 채 축축한 바지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 화가 난 것 같진 않고, 꼭 금방이라도 울기 직전인 것 같은 표정. 아끼는 건가? 제인이 리히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뜨거운 거 아니라 한숨 놨다. 일어나. 일단 옷 갈아입고 마저 하자."
"......."
"무슨 일 있었니?"
"아니에요. 그런 거."
옷 갈아입으면 말해요. 제인은 대기실을 나섰다. 저 멀리 막내 코디가 여벌 바지가 담긴 가방을 들고 뛰어왔다. 누구처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신경 쓰여 죽겠네. 막내가 문 앞의 제인을 보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문을 열기 두려웠는지 잠깐 망설인다. 제인은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쟤 이런 걸로 화 안 내. 대신 진은 좀 갈구겠다. 들어가서 제대로 사과하고. 다음부턴 실수하지 마."
막내가 들어간 대기실이 잠시 시끌시끌하다 이내 사그라들었다. 옛날 생각나네. 그땐 나도 욕 오지게 먹고 다녔는데. 제인은 잠시 떠오른 기억에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우린 불안 속을 걸었다
아니 얘네 술도 못하는데 누가 자꾸 먹인 거야? 돌겠네. 둘이 쌍으로 꽐라 되고 지랄이야, 지랄이! 아오! 짜증 나! 내가 니들이랑 일을 그만해야 오래 살지! 이눔시끼 넌 뭘 잘했다고 웃어? 매니저가 취하면 어떡하냐고오오옥!
그렇게 말하는 제인도 눈이 풀린 건 마찬가지다. 종방 기념 회식으로 3차까지 달린 뒤, 친한 스탭끼리 모여 다시 4차. 주인공인 배우는 물론이요 그를 데려다줄 매니저를 포함해 전원 취해버렸으니 순식간에 혼돈이었다. 너 내가 따악 맥주 한 잔만 마시라고 했어 안 했어. 제인이 매니저의 멱살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기분 좋은데 어떻게 그래요 누나. 매니저는 술집 바닥에 거의 눕다시피 앉아있다. 그나마 정신이 남아있는 건 제인 혼자다. 이 상황을 돌파해야 한다. 첫 번째, 아까부터 사이다랑 콜라도 구분 못 하고 있는 매니저 놈이랑 쥐 죽은 듯이 테이블에 엎드려있는 유명 미남 배우를 묶어 태워 대리를 부른다. 이건 너무 위험하다. 만약 그 대리가 미친놈이라면? 애들 지갑이랑 옷까지 싹 털어간다면? 두 번째, 막내를 이용한다. 아니, 막내는 이미 저쪽 처리 중이구나. 패스. 세 번째, 회사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건 더 안 돼. 얘 대표님한테 무슨 말 들을 줄 알고. 분명 다음날 노발대발할 게 뻔하다. 고리타분 울 대표님. 아우씨.
제인은 리히트를 일으켜 휴대폰을 꺼내게 했다. 잠금 풀어봐. 리히트는 순순히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두 번 틀렸지만. 최근 통화 목록으로 들어가니 온통 똑같은 이름이다. 리히트의 자기지만 자기가 아닌 자기. 식겁해서 물었던 적이 있다. 너 만나는 사람 있니? 그 말에 리히트가 빵 웃으며 친구라고, 예전부터 그렇게 불렀다고 해명했다. 그래요 자기 씨. 해외에서 며칠 전 잠깐 들어온 자기 씨. 리히트랑 싸운 자기 씨. 제발 전화 좀 받아보세요.
"리히트?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안녕하세요. 저 제인이라고 해요. 그, 예전에 뵌 적 있죠?"
"아, 예. 안녕하세요."
"얘가 좀 취해서요. 오늘 종방 회식했거든요. 마지막에 스탭들끼리 더 마시다가 매니저까지 취한 바람에. 대리는 못 부르겠고 회사는 더 못 부르겠고.... 그래서.... 싸웠다고는 해도 어떻게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저랑 싸웠다고 했어요?"
"네?"
"아니요. 어딘지 알려주시면 금방 갈게요."
짧게 한숨이 들린다. 끊어진 휴대폰을 리히트의 손에 쥐여줬다. 누구 불렀어? 지끈지끈한 머리를 붙잡고 그제야 얼굴을 좀 드는 리히트다. 여전히 혀가 꼬부랑이긴 하다. 어, 네 친구. 친구? 친구 누구? 잠시 넋이 나간 리히트가 갑자기 테이블을 탁 치고 일어섰다.
"아 깜짝이야."
"혹시 자기 불렀어?"
그렇다고 대답하자 시시각각 표정이 변했다. 아니, 아니, 아니. 지금 여기서 자기가 왜 나와? 시간이 몇 시인데! 리히트는 주섬주섬 머리를 정리하며 흐트러진 옷도 바로 잡았다. 우리 자기는 술 냄새 나는 남자 완전 싫어한단 말이야. 내가 못 살아. 누나 맨날 들고 다니는 탈취제 있지. 빨리 줘. 빨리. 방금까진 제 매니저도 못 알아보더니 난리다. 제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가방 속 탈취제를 꺼냈다. 칙칙. 칙칙칙. 나 밖에 나가 있을 거야. 아니다! 다들 해산하자! 자기들 내일 일 해야 하잖아. 아직도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계산 내가 하고 갈 테니까! 리히트가 앞장서 술에 떡이 된 무리를 끌고 나갔다. 택시를 잡아 스탭들 주소를 술술 이야기했다. 얼굴을 가릴 만한 건 다 썼어도 역시 알아보는 사람은 있었다. 아이고 드라마에서 나오는 양반이네. 한 택시 기사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차에서 내려 악수를 네 번이나 요청했다. 기사님 목소리 쪼끔만 작게, 작게. 아시죠? 저 들키면 아침까지 여기서 팬미팅만 해야 해요. 아, 예. 오늘 드라마 촬영 끝났어요. 저두 서운하죠. 어떻게 끝나냐고요? 아이, 그건 기사님이 직접 보셔야 재밌죠. 네, 네. 제 매니저 형인데 잘 부탁드려요. 기사님 안전 운전! 꼭!
지치지도 않나 봐. 뭐 저게 다 쟤 미담으로 남는 거지. 제인은 마지막으로 막내쪽을 둘러봤다. 언니가 아까 너 싫어해서 화낸 거 아니야.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지. 막내를 팔걸이쯤으로 쓰고 있는 주제에 청산유수다. 여전히 택시를 잡으려 안간힘인 리히트에게 막내가 다가갔다.
"저희가 콜 부를게요."
"다 취소 뜰걸요? 그냥 여기서 잡고 가는 게 나아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제인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확실히 알아본 몇몇이 있었다. 밖에선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며 으름장을 놓던 대표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리 네가 행실 똑바로 하고 다녀도 세상엔 또라이가 더 많다고, 사진 한 장 덜렁 찍어 올려서 이랬대 저랬대 손가락만 움직이면 그게 다 네 일화라고 그랬다. 진짜건 가짜건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술까지 마셨으니 얼마나 탐나겠는가. 상황 파악이 끝난 제인은 리히트를 골목으로 빠르게 욱여넣었다. 주황빛 가로등 아래 쭈그려 앉아있는 꼴이 참 처량한 것 같다가도 그 처량함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 같았다. 너 양아치도 잘 어울리겠다. 사이즈가 딱 나오네. 제인이 덩달아 몸을 구겨 앉았다. 가려지진 않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거 드세요."
제인이 불쑥 튀어나온 막내 코디의 손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까 그 사람들인 줄 알았네. 언제 또 편의점까지 다녀온 건지 숙취해소제 두 병을 들고 있다. 뚜껑을 따서 리히트에게 주자 벌컥벌컥 마신다. 나 왜 이렇게 술이 안 깨지. 큰일 났네. 리히트가 혼자 중얼거렸다.
"저도 이만 가볼게요. 아, 그리고 죄송했습니다. 제대로 사과를 못 드린 것 같아서...."
막내가 고개를 숙였다. 리히트는 그게 뭐 대수냐며 손사래를 친다.
"아냐. 저 화 안 났어요. 아깐 뭐 생각하느라 그랬고. 괜찮아요."
"그래. 얘는 마음이 태평양보다 넓어서 그런 건 일도 아니야."
막내도 취했는지 괜찮다는 사람을 두고 거듭 사과했다. 진이 막내 어디 갔냐며 소리를 지르는 통에 좁은 골목엔 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 리히트는 그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누나 그러고 보니까 바지 어떻게 했어요?"
"버렸지. 하얀색이라 물 안 빠져."
"아...."
"왜, 아끼는 거였어?"
선물 받았어요. 자기한테. 영국 가기 전에 사준 건데. 몇 년 동안 아낀다고 몇 번 입지도 못했더니 홀랑 날아가 버렸네. 딱 그만한 핏이 없다니까요. 자기가 보는 눈이 있어요.
"너 자기 좋아하지?"
컥, 컥컥. 아 제발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요. 그런 말 들으면 심장이 주체를 못 한단 말이야. 리히트가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운 척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천이 닳도록 입었어야 했어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물기가 있다.
"쪼잔하게 뭐 그런 걸 가지고 우냐. 새로 하나 사달라고 해. 이번에 들어왔다며. 겸사겸사 화해도 하고."
"안 울어요. 그냥 속상한 거지. 근데 무슨 화해?"
"싸웠잖아."
"자기랑요? 내가? 언제? 안 싸웠는데?"
"종일 나 죽겠어요 하고 있더만. 안 싸운 거면 뭐야. 너 혼자 꽁한 거니?"
"......."
맞네. 좋아하는 사람한테 혼자 꽁했답니다. 아학학. 개웃겨.
"뭐가 웃겨요. 하나도 안 웃기거든요."
"전에는 친구라면서. 언제부터 좋아한 거야?"
"그때도 좋아하고 있었어요."
"오올. 순정남."
아 잠깐만. 자기한테 전화 왔어요. 어떡해? 나 못 받아요. 그러니까 왜 불러서 진짜. 누나가 받아요. 나 취했어.
취해서 얼굴이 빨간 거야 부끄러워서 빨간 거야. 후다닥 무릎에 고개를 묻고 귀를 막는다. 이런 거 보면 또 귀여운 것 같고. 음, 아, 아, 여보세요? 예, 오셨어요? 저희 지금 취한 애들 다 보내고 골목에 숨어있거든요. 가게 옆쪽으로 조금만 오시면 되게 으슥한 곳 하나 있어요. 죄송해요.... 사람들이 알아본 것 같아서.... 네, 네.
"뭐래요? 자기 화 안 났어요? 말투 어때요?"
"몰라. 평범한데."
제인이 고개만 쭉 내밀어 거리를 둘러봤다. 아까보단 한산해졌다. 연한 분홍색 가디건을 입은 갈색 머리의 여자가 골목 쪽으로 오고 있었다. 곧 제인과 눈이 마주친다. 이쪽이라는 손짓에 여자가 주위를 둘러보다 달려왔다. 야 온다 준비해. 제인은 리히트의 팔을 툭 쳤다.
"안녕하세요. 밤늦게 죄송해요."
"아뇨. 좀 괜찮으세요? 혹시 몰라서 숙취해소제도 사 왔어요. 연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차 끌고 왔으니까 같이 태워다 드릴게요."
"네? 저는 택시 타고 가면 되는데."
"늦어서 위험해요. 괜찮으니까 타고 가세요. 리히트, 나야. 알아보겠어?"
여자가 준 숙취해소제를 손에 든 제인은 리히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 없이 고개만 파묻고 있다. 이쪽으로 차 가져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리히트가 단단히 취했다고 여긴 여자는 주차한 차를 가지러 골목을 빠져나갔다.
"야."
"......."
"너 왜 취한 척이냐. 술 거의 깼잖어."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낸다.
기분 진짜 이상하다. 만나면 미안하다고 평소처럼 대하고 싶었거든요. 몇 년 만에 본 건데, 나 혼자 괜히 찌질하게 군 거 미안해가지구. 근데 목소리 들으니까 왜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지. 술에 약이라도 탔어요? 누나는 안 그래요? 나 죽겠네. 정말, 정말로, 이러다가 내가 다 녹아서 없어지면 어떡하지.......
짧고 빠르게 경적이 울렸다. 제인이 리히트의 머리를 최대한 밑으로 누른 채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나 어떡해. 어떡해. 여자가 차를 끌고 오기 전까지 리히트는 그렇게 말했다. 아마 바지에 커피를 쏟았을 때부터 울고 싶었겠지. 이거 우리 자기가 준 거란 말이야. 엉엉. 혼자 꽁하느라 울지도 못하고 그저, 속으로만. 엉엉엉.
꽃샘추위에 벌벌 떨었던 게 어제 같은데 벌써 한낮 온도가 30도를 넘어섰다. 습도는 또 어찌나 높은지 찐득찐득 불쾌 지수가 천장을 뚫었다. 화알바는 시청률 36.7%를 찍고 막을 내렸다. 우리의 유명 배우는 그 후로도 무지막지하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막바지로 들어선 잡지 촬영장은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휴대용 선풍기에 얼굴을 들이민 리히트가 얼음을 와그작 씹어먹었다. 커피는 이미 동이 났다. 제인은 조명 열기로 인해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주며 메이크업을 고쳤다. 막내 코디도 이젠 제법 빠릿빠릿해진 움직임이다.
"너 오늘 기분이 왜 이렇게 좋아? 사람 무섭게."
"뭐가요? 난 원래 이랬는데."
자기랑 약속 있구나?
다른 스탭들이 듣지 못하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리히트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얘 봐라?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촬영이 시작됐다.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는 외모이긴 했으나 오늘은 정도가 과하다. 사진작가는 눈앞의 완벽한 피사체에 마음이 벅찬 것 같다. 아우 너무 좋아 진짜! 너무 잘 생겼어! 그 적당한 오버스러움에 실소가 터졌다. 까똑! 까똑! 리히트의 휴대폰이 두 번 울렸다. 보려고 한 건 아닌데, 보였다.
「혹시 촬영 다 끝났어? 미안해서 어떡하지. 오늘 약속 힘들 것 같아. 동생 병원에서 연락 왔어.」
「미안해. 시간 비우는 거 힘들 텐데.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미리보기를 끄지 않은 리히트를 원망했다. 포즈를 잡고 있던 리히트가 제인 쪽으로 윙크했다. 우웩. 제인이 토하는 시늉을 하자 여기저기서 웃는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뭐든 열심히 하는 애다. 일도, 아마 사랑도.
그래서 끝날 때까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빌었던 것 같다. 어쩌면 리히트의 자기가 괜찮을 거 같다고, 알고 보니 별일 아니었다고. 재차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난 또 왜 이러냐. 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옷을 갈아입는 리히트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주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휴대폰 어디 있어요?"
"어, 여기."
머리 다시 해줄게. 제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떨었다. 리히트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현장이 어수선하다.
고생하셨어요. 작가님 끝나고 뭐 하세요. 형 갈 거지?
아 불편하다. 제인은 초조하게 손톱을 뜯었다. 이것들아 그런 이야기는 저쪽 가서 하라고. 타닥타닥. 리히트는 액정을 몇 번 두드리더니 의자에 풀썩 앉았다. 당황한 제인이 왜? 하고 묻자 리히트도 왜요? 하며 묻는다.
"머리 다시 해준다면서요."
"아, 어. 어떻게 해줄까."
예쁘게요.
괜히 입안이 썼다.
밤공기가 아직 쌀쌀하다고 느꼈던 6월의 일이다. 아직도 그때 일만 떠올리면 숨이 턱 막혔다. 리히트는 제인이 업계에 발을 들이고 처음 담당한 연예인이었다.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던 배우라 나름 긴장하기도 했다. 이상한 소문은 없었고 주위 평판도 나쁘지 않았지만 혼자 지레짐작했던 게 있다. 뜨기 시작한 연예인 놈들은 하나같이 건방질 거라는 그런 거. 알고 지내던 선배가 딱 그 케이스에 걸렸다. 줄 좀 타더니 아주 내가 지 시다바리인 줄 알아. 선배와 좋아하지도 않는 곱창에 소주를 마시며 들었던 소리다. 아주 배가 불렀어. 이젠 지 맘에 안 들면 입으려고도 안 해. 협찬 들어올 때 넙죽 받아야지 이건 이래서 싫어 저건 저래서 싫어. 나 탈모 올 것 같다니까? 제인아 너도 조심해라. 리히트, 아 뭐 그래. 나 여기 일하면서 그 사람 대놓고 안 좋게 말하는 거 본 적은 없는데,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괜히 그런 기사가 나겠냐? 아니 땐 굴뚝에 왜 연기가 나겠냐고. 가볍잖아 좀. 사람이.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과 다르게 성실했다. 가벼워 보이긴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간혹 그런 리히트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관계자나 동료 배우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리히트는 더 살갑게 굴었다. 약아빠졌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냥 그러는 게 편해 보였다.
유명 배우 L 씨도 소문이 끊이질 않죠. 모 대기업 간부 사모의 애인이라는 건 이쪽 종사자면 다 알고요. 소문에 의하면 사실 여자 남자 가리지 않는다고도 하더라고요. 네, 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종편의 한 기자 토크 예능이었다. 충격. 과연 유명 배우 L 씨는 누구? 커다란 자막이 웃기지도 않는 효과음과 함께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뜬 영상이었다. 관종들 관심받고 싶어서 난리네. 유명 배우 L 씨면 누구 딱 떠오르지 않냐ㅋㅋ. 저거 다 기레기 헛소리임. 눈이라도 찌르고 싶은 심정의 댓글들이었다. 쟤가 대기업 간부 사모 애인이면 졸라 난 그 회장 손녀다. 제인은 최근 재생목록을 삭제하며 손을 털었다.
리히트는 옷걸이가 좋았다. 안 어울리는 메이크업이나 옷을 찾는 게 더 힘들 만큼 직업 만족도 200%의 연예인이라 문득 선배가 불쌍해지기도 했다. 넌 뭘 걸쳐놔도 어울린다. 하다못해 이런 시퍼런 섀도까지 찰떡일 줄이야. 난해한 컨셉의 화보 촬영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컨셉을 받고 나니 말문이 막혔었다.
'제가 이게 끝내주잖아요.'
턱 밑에 손바닥을 대고 웃어 보이는 리히트였다. 아 예. 제인의 무성의한 대답에 리히트가 우는 소리를 냈다. 제인은 리히트를 좋아했다. 이성적인 연애 감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말이다. 사람이 착했다. 이 판에 있으면 그렇게 착한 애들도 결국 살아남기 위해 어느 정도 영악한 모습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연예인은 무관심보다 악플 하나가 더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빛나지 않으면 끝이니까.
반년 동안 리히트와 지내면서 알게 된 건 의외로 돈 쓸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 곧 세일해요. 포인트 적립 안 했죠 또. 열두 잔 마시면 한 잔 무료라니까. 이런 말들을 달고 살았다. 처음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아 맞다. 매니저가 카페 도장 찍는 걸 안 가져갔다면서 기어코 차 문을 열려던 걸 막아 세웠던 적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끔찍하게 아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 주의 스케줄은 전부 취소되거나 미뤄졌다. 매니저의 전화를 받고 달려간 곳에서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그 애는 제 생각만큼 완벽한 놈이 아니라는 것. 그렇게 내심 믿어왔을 뿐이었지. 결국 똑같았다.
엉엉, 엉엉엉. 할머니, 할머니. 나 왜 안 보고 가. 왔는데 왜 안 보고 가아아.
검은 상복을 입고 목이 찢어지라고 울음을 토해냈다. 너무 이상했다. 빌어먹게 잘생긴 얼굴이 엉망이 돼 눈물 콧물 할 거 없이 흐르는 와중에도. 그 와중에도, 병신 같게도, 그 모습이 쓸데없이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 같아 보여서 마음이 이상했다. 설명하지 못할 것들이 자꾸만 울컥울컥 입 밖으로 터질 것 같았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무릎을 꿇고 무너진 리히트의 곁을 오래도록 지켰다. 꾸역꾸역 눈물을 참으면서 그 애를 위로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세상이 조금 더 잘 돌아갔다면, 어쩌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 같다.
6월치고는 너무 쌀쌀한 밤이었다. 찬 바람에 몸이 떨렸다. 선배, 선배가 다 틀렸어요. 선배 말 듣고 혹시나 했던 과거의 나를 패고 싶어요. 하늘도 참 너무하시지. 한 놈만 조지기 있어요? 어? 왜 애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구요.
'아가씨, 혹시 여기 리히트 못 봤어요? 그 왜 배우 있잖아.'
카메라 들고 설치고 있는 걸 보니 기자인 것 같아서.
'아니 왜 코빼기도 안 보여?'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래? 미쳤어? 뭐야? 관계자야?
제인은 기자의 벗겨진 머리를 후려갈겼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여기가 어디라고. 니들 같이 개소리 나부랭이나 쓰는 새끼들은 존나 맞아야 돼. 엉엉엉. 쟤가 무슨 싸모 애인이야. 쟤는 커피도 열두 잔 채워서 한 잔 더 마시는 애라고요. 알지도 못하면서 나쁜 놈들아. 으엉엉엉. 가만 좀 놔두라구요. 엉엉. 막 뒤에서 제인을 발견하고 부르려던 매니저가 식겁한 채 제인을 말렸던 그 6월.
'너무 심심하다. 그렇죠.'
영국으로 떠난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때가 겨울 때쯤이었나. 갑자기 일이 미뤄진 만큼 일정은 배로 바빴다. 겨우 한 주 쉬고 다시 하하호호 웃어야 한다니. 집이 떠내려가라 울어도 시원찮을 판인데. 넌 어떻게 웃니. 난 정말 너 같이는 못 살 거야. 제인은 묵묵히 머리를 만져주며 거울 속 리히트를 바라봤다.
'좀 더 있다가 가라고 해보지.'
'제가요?'
제가 뭐라고 그래요. 안 그래도 신경 쓸 거 많은데. 나라도 도와줘야죠.
리히트의 눈을 애써 피했다. 제인에게 그걸 마주할 용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라며. 잡으면 될 거 아니야. 그 말에 되려 제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됐다. 네가 알아서 하겠지. 꼭 이렇게 모진 말을 뱉게 했다. 너 머리 빡빡 밀 생각 없니. 무슨 놈의 머리숱이 이렇게 많아? 아휴. 제인은 툴툴거리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가 찾아왔다. 계속 찔끔찔끔 흐르는 콧물을 닦느라 바빴다. 약 센 거 없어요? 아까 먹은 건 효과가 없네. 코맹맹이 소리가 심하다. 리히트는 매니저가 근처 약국에서 털어온 종합감기약을 뒤적였다. 시간도 남았으니 차라리 병원 가서 주사 한 대 맞고 오는 게 어떻겠느냐는 물음에 병원은 싫다며 때아닌 투정을 부렸다.
"코찔찔이는 화장 못 한다."
감기약 몇 알을 더 때려 넣고 나서야 리히트의 콧물은 잠잠해졌다. 졸려 죽을 것 같아요. 흐느적흐느적 몸을 움직이며 준비한 의상을 입는다. 안 그래도 예능은 촬영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이만저만 걱정이었다.
리히트는 프로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오늘만큼 와닿는 날도 또 없다. 출연자들의 장단을 맞추며 떠드는 얼굴이 식은땀 범벅이었다. 발갛게 상기 된 볼이 보기 힘들었다.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잠깐의 순간에도 리히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열나는 거 아닌가? 매니저가 제인에게 물었다. 단순한 감기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더 심한 것 같았다. 앞으로 여섯 시간은 족히 넘게 남았을 촬영에 제인은 골머리를 앓았다. 병원 다녀오라니까. 말 드럽게 안 듣지.
"여름엔 꼭 안 좋은 일이 생긴다니까."
촬영 후 돌아가는 차 안에서 결국 정신을 잃었다. 리히트는 급하게 마련한 1인 병실에 누워 잘 깎인 사과를 베어 물었다. 실없이 한 소리라는 걸 알지만 제인과 매니저는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삭아삭. 조용한 병실에 유독 커다랗게 울렸다. 사과가 좀 푸석푸석하네. 리히트가 뱉은 혼잣말에 매니저가 벌떡 일어나 과일 바구니를 끌고 왔다. 사과 말고 다른 거 줄까? 여기서 골라봐. 제인은 매니저의 옆구리를 퍽 치며 다시 앉혔다. 오버 떨지 마. 나름 속삭인다고 속삭인 건데 또 그걸 들었는지 리히트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대표님이 쉬는 김에 제대로 쉬라더라."
"뭘 그렇게까지 해요. 한 이틀이면 낫는걸."
"너 요즘 빡세긴 했어."
"그렇다고 일주일 동안 입원시키는 게 어딨어요."
똑똑. 리히트가 두 사람을 향해 눈썹을 들썩였다. 또 올 사람 있어요? 하여튼 나 인기 많은 건 알아줘야 해. 리히트는 먹던 사과를 접시에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용."
병실 문이 열리고 여자가 들어왔다. 제인은 혼자 뻣뻣해지며 리히트의 눈치를 살폈다. 커다래진 눈이 곧 부드럽게 접혔다. 자기 왔어? 내가 몰래 텔레파시 보냈는데 그거 받았나 보다. 능청스러운 말에 여자가 볼을 긁는다. 인사를 주고받으며 여자가 침상 옆에 앉았다. 리히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제야 제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괜찮아? 쓰러졌다고 해서 놀랐어."
"별거 아니야. 그냥 심한 몸살이래."
"제인 씨가 알려주셔서 온 거야."
그래? 리히트가 제인을 슬쩍 쳐다본다. 뭐 임마. 네 성격에 연락 안 할 거 뻔해서 내가 대신했다. 제인이 투덜거리자 어깨를 으쓱하는 리히트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렇지, 자기? 여자는 그래, 그래, 하며 리히트에게 맞춘다.
"뭐 마실래요? 커피라도 사 올게요. 야, 따라와."
"어? 아니, 난."
눈치 챙겨. 두 번째로 제인에게 맞은 옆구리가 얼얼했다. 발걸음이 가볍다. 매니저 놈은 계속 아까 커피 마셨잖아요, 같은 말이나 해댔지만 홀가분했다.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고작 둘을 만나게 한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또한 너도, 훨훨 날았으면 한다고. 제인은 바랐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리히트를 알아차린 여자가 미소를 짓는다. 혹시 나 여기 온 거 불편해? 리히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고마워서 그렇지. 여자는 턱을 괴고 리히트를 가만 쳐다보았다.
"제대로 보는 건 오랜만인 것 같네."
"그러게."
"그땐 미안해. 갑자기 동생이 아프다고 해서."
"괜찮대?"
"응. 또 증세가 있나 봐. 곧 출국인데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바빠도 시간 내서 가볼 걸 그랬다. 자기 동생 얼굴 다 까먹겠어."
"안 그래도 리히트 보고 싶다더라. ...고마워. 나 없을 때 대신 동생 신경 써줘서."
리히트가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했다, 늘 잘하고 있다, 그리고.... 보고 싶었다. 온갖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손길이다. 언제나 좋은 사람 행세를 하고 있지만 지쳐버린 서로를 알고 있다. 한 번 터지면 감출 수 없는 것들이 더 많기에 끝까지 버텼다.
그들은 서로를 아주 많이 좋아하니까.
"출국 전에 시간 낼 수 있어?"
"응. 급한 건 다 끝났어."
"나 가고 싶은 곳 있는데 같이 가줄래?"
"이번에는 약속 꼭 지킬게."
누가 나 알아보면 어떡하지? 응? 자기야, 내 말 듣고 있어?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하고 있으면서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지 자꾸 물었다. 전매특허인 갈색 머리도 이날 단 하루만을 위해 검은색으로 덮어버렸다. 겨우 요 앞에 돌아다니는 건데 머리까지 바꿀 필요가 있어? 리히트는 여자의 말에 어색한 검은 머리를 더듬거렸다.
"이상해?"
"아니, 이상한 건 아니지만. 물 빼기 힘드니까 그렇지."
"이왕 한 거 그냥 활동 하지 뭐. 색다르고 좋잖아."
"가만 보면 너도 참 엉뚱해."
만약 걸리기라도 해 봐. 난 익숙해서 괜찮지만 자기는 아니잖아. 아, 저기야. 저기. 이 날씨에 마스크 쓰고 있는 거 너무 힘들다. 얼른 들어가자. 리히트가 매장을 가리켰다. 여자는 쉽게 걸음을 떼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리히트를 가만히 바라봤다. 자기 뭐해? 얼른 와. 뒤를 돌아 리히트가 손을 뻗는다. 얼굴은 죄다 가려져 있어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눈에 선했다.
"있잖아. 여기."
"기억나? 영국 가기 전에 같이 쇼핑한 거."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자기랑 함께한 건 다 기억하거든."
난 계속 잊고 살았는데.
"응? 뭐라고?"
"아니, 옛날 생각나서. 가고 싶다는 곳이 여기야? 옷 사게?"
"전에 사준 거 몇 번 입지도 못했는데 막내가 커피를 쏟아가지고. 자기가 하나 골라줘. 나도 자기 골라줄게."
해괴한 패턴의 셔츠부터 시작해서 최신 유행이라는 바지까지 안 어울리는 게 없다. 몸에 대기만 하면 옷이 리히트 빨을 받았다. 넌 어떻게 못난 게 하나도 없을 수가 있어? 나 자괴감 들어. 살짝 현타 온다는 듯한 여자의 말투에 리히트는 볼을 긁었다.
"나랑 똑같네."
"뭐가?"
"민망하면 볼 긁는 거."
"사랑하면 닮는다잖아?"
"말을 말자."
우앵. 자기 너무하다. 외국물 먹더니 더 차가워졌어.
"리히트."
"응?"
"이거 어때?"
여자의 손에는 개구리 눈 모양의 수면 안대가 들려있다. 설마 이것도 어울리진 않겠지? 싶어 고른 것이다.
"자기 이런 취향이 있었어?"
"이것도 잘 어울리면 내가 졌다."
"나한테 안 어울리는 건 찾기 힘들 텐데."
근데 이거 쓰려면 선글라스 벗어야 하잖아. 그럼 일단 살 테니까 쓰고 인증샷 보내. 진짜 사려구? 응, 살 거야. 정작 사러 왔던 옷은 안 사고 있는 두 사람이다.
"참, 맞다. 곧 생일이잖아.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자기의 사랑?"
"아 진짜. 그런 거 말고. 없어? 나 출국하기 전에 빨리 말해야 뭐라도 얻어먹는다?"
"생각 좀 해볼게. 그나저나 내 생일 안 까먹고 잘 기억하고 있네?"
"우리가 몇 년을 봐온 사이니?"
우리 진짜 오래됐다. 그때 기억나?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우리 처음 같은 반 됐을 때, 자기한테 말 걸고 싶어서 대뜸 매점 같이 가자고 했잖아. 자기가 완전 나 미친놈 보듯 쳐다봤는데, 흑흑. 내가 언제 그렇게 봤어? 너무 비약이 심한 거 아니야? 근데 또 따라오긴 했잖아. 같이 가자는 걸 어떡해? 우리 뭐 먹 사 먹었지? 바나나 우유. 아 맞다, 계단 같이 내려가는데 나 심장 터지는 줄 알았어. 좋아서. 넌 내가 왜 그렇게 좋아? 몰라. 그냥 좋아. 자기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게 다 좋아. 으엑. 거짓말 아니야. 진짜야. 그럼 자기는 내가 왜 좋아? 나도 몰라. 거 봐, 자기도 말 못 하면서.
보호자 분 진정하시고요. 보호자 분, 괜찮으세요?
"제 동생, 어떻게, 왜 또, 괜찮, 나요?"
"자기야."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헉, 밥도 잘 먹었, 어요."
"괜찮다잖아. 숨 좀 쉬어."
"볼 수, 있나요? 보게 해주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숨 가쁘게 달려온 탓에 숨이 모자라다. 막 잠들었어요. 조용히 얼굴만 보세요. 담당 의사는 하얗게 질린 여자의 낯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그러다 여자의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 리히트를 위아래로 훑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으면서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중무장을 하고 있다. 관계가 어떻게 되나요? 의사가 묻자 친구요, 하고 간단히 답한다. 사정이 있어서 얼굴을 좀 가려야 해요.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겨우 숨을 돌린 여자가 덧붙여 말했다.
"다녀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여자는 황급히 동생을 찾아 떠났다. 홀로 남은 리히트는 병원 로비에 앉아 지나치는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결국 옷은 사지도 못하고 이상한 잡동사니들만 잔뜩 사버렸다. 같이 맛있는 거 먹고 싶었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어난다. 서운함보다는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제가 아니라 동생인 게 맞다. 그게 맞는 일이니까. 우린, 우리는.
주먹을 쥐었다. 너를 붙잡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버티고 싶었던 걸까?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한 약속이 무색하게 리히트는 병실 근처를 서성였다. 동생의 얼굴을 본 건 석 달 전이었다. 그동안은 드라마다 화보다 바빠서 도통 시간이 나질 않았다. 살짝 열린 문틈 새로 여자의 옆 모습이 흐리게 보였다. 커튼을 쳐 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침대 앞에 곧게 선 채 눈을 감고 있는 동생을 내려다보고 있다. 시시각각 감정이 변했다. 잠깐은 아주 슬펐다가, 또 잠깐은 아주 괴로웠다가, 고통스러웠다가를 반복했다. 차마 바닥에 주저앉지는 못하겠는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한숨을 쉰다. 입가가 떨리기 시작하고 눈을 질끈 감는다. 동생의 이름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른다.
"누나는 너밖에 없어."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을 벗어냈다. 천천히. 가면을 벗듯, 선글라스를 빼고. 마스크를 벗고.
"널 위해 살 거야. 네가 포기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아득바득 살래."
맨 얼굴의 리히트는 문 틈새의 세계를 바라보고만 있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어 미치겠는데."
넌 얼마나 더 살고 싶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뭘 그렇게 죽을상을 해. 어차피 일주일 후에 다시 들어온다며."
스프레이를 뿌리던 제인이 퉁명하게 얘기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요. 간다고 하면 섭섭하구, 뭐 그런 거죠. 아 저 잠깐 고개 한 번만 비틀어도 돼요? 어제 잠을 잘 못 잤더니 뻐근해요. 그러면서 고개를 움직이는데 뚝, 뚝, 뚜드득, 우렁차기도 하다.
"너 뼈 뿌러진 거 아니냐?"
"나도 이제 늙었어."
"헛소리한다 또."
그래서, 그, 동생은 좀 괜찮고?
네, 그때보단 많이 좋아졌어요.
"너흰 어때."
"똑같아요."
「중요한 것만 끝내고 다시 들어올 거야.」
「기다릴게.」
늘 그랬던 것처럼.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우리는.
「내가 너를 위해 살아주지 못해도 좋아?」
「.......」
살아가는 흉내를 내며.
「내가 너를 위해 살려면, 진짜 엄청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넌 내가 좋아?」
이 불안 속을 걷고 있을 뿐이라고.
'두 번째 계절 > 우리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아매니][자유주제] Sparkling / 유빤쮸 (0) | 2020.07.02 |
---|---|
[기이매니][칠석] 여름, 칠석의 밤 / 블루베리 (0) | 2020.07.02 |
[데이매니][별자리] 염원念願 / 김육회 (0) | 2020.07.02 |
[유셒매니][자유주제] 기억없는 꿈 / 라일락 (0) | 2020.07.02 |
[시안매니][여름방학] 옥상에서 만나요 / 키즈 (0) | 2020.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