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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없는 꿈 / 라일락
"돌아갈래"
대가는...
향기로운 꽃향기에 다시 눈을 떴다. 꼭 쥐고 있던 것을 잃어버린 채 들판에 던저진 그런 허망함만 느껴진다. 정작 잃은 것도 얻을 것도 없으면서. 눈처럼 새하얀 꽃밭. 그 속에서 유난히 연한 갈색 머리가 눈에 띈다….
"일어났어요? 유세프씨? 이번에 유세프씨를 죽음의 숲 중앙까지 안내할 가이드입니다."
"매니저?"
수긍한다는 듯이 빙긋 웃고 다시 내려간다. 15년 전에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 오랜만이어서 그럴까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두근댄다. 매니저는 어렸을 때 조금 놀았던 친구다. 정확히 따지면 내 친구는 아니고 동생 친구. 가끔 같이 놀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크면 다시 돌아와서 그쪽에서 일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어릴 때 소꿉놀이 대신 직원고용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웃던 어른들도 생각난다. 그렇게 다시는 안 돌아올 듯하다가 이번엔 가이드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기대어 있던 나무에서 땅을 짚고 일어나려는 손에 잡힌 건 사진이었다. 피로 얼룩지고 찢긴 사진…. 사진의 주인공은 두 명. 심하게 훼손돼 한 명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건. 나였다. 하지만 어렸을 때의 내가 아니라 거의 지금 나이에 찍은 사진. 품 깊숙이 사진을 넣은 뒤 다시 쫓아가기 시작했다. 난 이 사진을 찍은 기억이 없는데……. 그리고 찍힐 리도 없고…….
마을에서 준비하며 나름대로 정보를 모았다. 죽음의 숲에 대해서. 그리고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알아냈다. 오늘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100일 동안 못 들어간다는 것을……. 숲의 입구에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나? 아직 오늘까지 11시간이나 남았으니 충분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니 생각보다 시간이 흘러 벌써 11시였다. 숲에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준비는 사진 찍기라 했다. 갑자기 왠 사진인가…? 싶었는데 못 돌아올 수도 있으니 후손에게 기억하라고 남기는 의미라고 한다. 그렇게 말해도 현실은 영정 사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남기는 영정 사진. 돌아오면 기념사진. 내 사진은 기념이 될 수 있을까?
"저기……."
아까부터 나를 교묘히 피하던 매니저가 웬일로 먼저 말을 건다….
"원래 한 사람당 사진 한 개인데……. 같이 찍어도 돼요? 인화 재료가 부족해서 한 장 밖에 못 뽑는데요……."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할까…? 쿡쿡 웃음이 나온다..
"그래."
사진을 찍은 곳. 내가 처음 쓰러져 있던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핀 곳. 달빛도 은은하게 비춰와 어떤 것을 봐도 예뻐 보였을 시간. 그래서다. 네가 지금 네가 예뻐 보이는 게. 눈을 떼지 못하게 아름다운 이유가.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숲에 들어온 지 1시간 같은 10분이 흘렀다.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인사말 외에 소재가 없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뭘 했냐 안부 인사라도 묻고 싶은데 아까부터 그 말을 꺼내려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피해 말하지 못했다. 최대한 머리를 굴릴 때 의도치 않게 먼저 질문을 받게 되었다.
"여기는 왜 오신 거예요? 여기 들어온 사람들 죽은 이야기 못 들었어요?"
"응. 안전한 곳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찾을 물건이 있거든. 그러면 너는?"
그냥 웃는다.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어? 왜 여기로 온 거야?"
"글쎄요?"
"흠…. 그럼 나도 여기 온 이유 말 안 해준다."
한껏 골이 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연다….
"지키러요."
"누굴?"
"몰라요. 유세프씨나 빨리 말해주세요. 왜 왔어요?"
"곧 시간이 끝날 소중한 사람을 위해?"
똑같이 두루뭉술한 대답. 살짝 유치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매니저는 집요했다.
"누군데요?"
못 들은 척하고 가만 앉아서 웅크려 있는 나무 위 작은 은신처. 원래 진짜 사람이 살던 곳이라 그런지. 제법 상태가 좋았다. 그 속에서 속삭이듯 다시 질문한다.
"뭐 원래 여기 오면 안 되는 상황인 건 아니죠?"
걱정하는 듯한 눈동자. 울망울망한 게 귀엽다……. 그래서였을까? 지금껏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에 내가 지금 입을 벌리고 있는 게.....
"여동생. 병에 걸렸어. 좀 있으면 죽을 수도 있데……."
역시 몰랐나? 알았을 리가 없지. 엄청 숨겼는데……. 그래도 꽤 친했으니 걱정되는 것 같네…. 눈이 엄청 커다래진 걸 보니…….
"이 숲 중앙 동굴 끝에 아무거나 한가지 소원을 빌 수 있데……. 거짓일 확률이 더 높겠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으로 온 거야. 그냥 오지 말 걸 그랬나? 그냥 옆에서 계속 지켜주는 것이 더 나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계속 들고……. 울지 마…. 그러면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잖아. "
새근새근……. 매니저는 어느새 잠이 들고 두근두근두근……. 누구의 것인 지모를 심장 소리만 이 적막에 남았다.
이 숲에 들어온 지도 벌써 일주일째. 오늘이 이 여행의 종점을 찍을 날이다. 이 앞에 있는 동굴. 여기만 끝까지 들어가서……. 그 전설이 맞기만 한다면……. 살릴 수 있다. 다시 뛰어다니고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입구를 찾던 도중 작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뛰어가 봤을 때 매니저는 별다른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툭툭 털고 정리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화살과 팔뚝에 작은 생채기를 봤을 땐 화살에 스친 것 같았다. 그리고 앞에는 그토록 찾던 동굴 입구가 있었다.
"좀 보자. 살짝 스친 것 같은데. 더 다친 곳은 없고? 혹시 모르니까 약은 바르자."
구급상자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남에게 이렇게 온 신경을 쏟은 것이 얼마 만인가. 동생이 병실에서 시간을 보낸 이후로 내가 했던 일은 경계였다. 생선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최대한 몸을 부풀린 고양이처럼. 최대한 경계했다. 유산. 그걸 노리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정을 주지 않고 정을 받지도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나에게는 선이 생겼고. 아무도 그쪽은 넘어오지 않았다. 넘어오는 걸 허락하지도 않았다. 넘어와도 내쫓았다. 더는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 사람조차 사라졌을 때. 난 사람을 더 이상 밀어내지 않았다. 당기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제 주변에 남아있는 건 없었으니까. 네가 내 선을 넘어온 게 우연일 뿐인지 아직 나로서는 알 방도가 없지만 그래도 믿고 싶다.
네가 나에게 온 건 우연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운명이길 바란다면 이기적일까? 나는 너한테 뭘까? 나는 너에게 뭐였으면 할까?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닌데 나는 왜 여태껏 생각도 안 해본 인간관계에 대해서 지금 이러고 있을까? 이렇게 질문이 쏟아지는 건 다 너 때문인데. 이 정황은 모두 한 가지를 가르치고 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 한눈에 반했다는 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내가 그럴 리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냥 오랜만에 만난 게 반가워서 일주일째 반가워하는 중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누가 모를까….
동굴 안에 타박타박 들리는 발소리 사이로 미약한 숨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들리고 5초나 지났을까? 털썩 소리와 함께 내 옆으로 사람이 쓰러진다. 땅에 누워서 괴로운 듯 몸을 비틀이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내 생각을 없애간다. 피를 토했을 때 내 머릿속은 이미 백지상태였다. 왜? 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 왜 쓰러진 거지?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친다……. 화살, 독화살이다. 상처를 둘러맸던 붕대를 풀자 역시나 이미 피부는 까맣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살려야 한다. 살려야 하는데……. 더 숨을 몰아쉬지 않는다. 발작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냥 처음부터이랬다는 듯 조용히 누워있다. 숨소리도, 심장 소리도 없다.
뚜벅뚜벅
동굴 안쪽 어두운 곳에서 대략 15살? 정도 돼 보이는 소녀가 튀어나왔다.
안녕? 오…. 또 왔네?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알 수 없는 표정을 짓자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왜 왔어? 소원이 뭐야?
멍한 나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본다….
빌 수 있는 소원은 1개뿐. 죽은 지 하루 지나면 죽은 건 살릴 방법 없어요. 헤헤헤
남의 속은 모르는지 연신 싱글벙글거리며 주위를 맴돌다 다시 입을 연다….
참고로 네 동생 여기 오기 전에 3일 전 죽었어. 못 살리니까 그 소원은 안 돼
매니저를 힐끗 쳐다보더니 누가 봐도 비웃으며 말한다….
이것도 죽은 것 같지만……. 아직 살릴 방법은 있어….
어둠밖에 없는 곳에서 빛을 본 기분.
살려줄까? 정확하게는 살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되돌리는 거야! 대가가 필요하지만.
"대가는 아무거나 상관없어……."
좋아. 거래 성립. 가지고 돌아가고 싶은 물건 있어? 하나 정도는 같이 과거로 보내줄게.
달빛이 좋은 하얀 꽃이 두드러지게 핀 꽃밭에서 같이 찍었던 사진. 얼룩진 피로 보이는 건 내 얼굴뿐인 사진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자 꼬마가 재촉한다. 결국, 사진을 집어 들며 생각한다.
'돌아가면 말할 것이다. 사랑한다고. 내가 지금까지 느꼈던 건 그 감정이었다고. 널 사랑했다고. 다시 돌아가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뜻한 온기가 있는 너에게.'
까만 푸른빛이 시야를 덮는다. 그리고 뒤늦게 들리는 목소리.
대가는 기억이야.
향기로운 꽃향기에 다시 눈을 떴다. 꼭 쥐고 있던 것을 잃어버린 채 들판에 던지진 그런 허망함만 느껴진다. 정작 잃은 것도 얻을 것도 없으면서. 눈처럼 새하얀 꽃밭 위 다가오는 건 갈색 머리의 사람.
"안녕하세요? 유세프씨 맞으시죠? 설마 지금 우세요?"
"나도 모르겠네. 기분 나쁜 꿈이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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