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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merry bad ending
3월 5일, 네가 죽었다. 꽃 피는 봄이었다.
그런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 앤서니의 소중한 사람이 삶을 비관해 자살한다. 납득하지 못한 앤서니는 그의 죽음을 파헤쳐 진실을 찾아내고, 그 순간 시간이 마법처럼 돌아간다. 뭐 당연히 앤서니는 구하고 싶은 소중한 사람을 구하고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이야기였다. 메데타시 앤서니앤서니. 사랑 같은 이야기였다. 어쩌면 그저 그런 B급 이야기였고.
지금에 와서는 부디 그 주인공에게 물어보고 싶다. 도대체 어떻게 구했어? 죽음으로부터, 그 애를? 내가 알아챘으면 달라졌을까. 그때, 눈물을 닦아줬다면 이게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을 악몽을 꿨다며 너에게 문자 한 통 보낼 수 있는 해프닝에 불과했을까. 나와의 스캔들에 한 번 휘말려 고생하게 만든 이후로 철저히 숨길 수밖에 없었다. 머지않아 그 애는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고, 한심하게도 사회는 내가 봤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도 봄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행복하게 웃는 너의 모습을 떠올리다 눈을 감았다. 막상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결혼하기 전에는 가까이 살았는데 신혼집은……. 다 소용없는 일이잖아.
나는 촬영 중이던 드라마마저 펑크내고 칩거 생활에 돌입했다. 어두운 방 안 소파에 끈 떨어진 인형 마냥 누워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페트병으로 물을 마시고 눈으로 그대로 흘리고 또다시 상실하고. 나는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자꾸만 상실하는 일을 반복했다. 처음부터 그랬다. 가진 적 없는 부모를 상실하고 이제는 너를 상실했다. 가끔 암실 속에서 빛처럼 산란하는 네가 내 옆에 앉아서 “리히트, 밥 먹었어?” 물을 때마다 아니. 하고 대답했다가 나를 혼낼 너를 알았기에 느릿하게 식탁에 올라가 주워먹는 음식과 물이 일상의 전부였다. 그마저도 그 행위는 네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장난 조명처럼 네가 순간마다 깜빡이다가 내 정신도 깜빡이다가…….
오랜만에 방 안에 햇살이 드리웠다. 잠결에 커튼이라도 걷었던가. 몽유병이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 인생은 역시 예측할 수 없다. 예를 들자면 네 마지막처럼……. 가슴은 너덜너덜한데 눈물은 그친지 오래였다. 울지 않는 내가 징그러웠다. 원래 나는 대단히 징그럽고 음침한 놈인데 끝까지 네가 몰라서 참 다행이야. 그리고 이 생각마저 역겨워서 구역질이 났다.
“리히트, 일어났어?”
늦게 잤어? 으이구, 해가 중천이다. 짐짓 엄하듯 나를 혼내는 네 모습에 또 환영인 걸 알았다. 나는 십초 간 눈만 깜빡이다가 미간이 찌그러질 때까지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가항력으로 슬며시 다시 뜰 수 밖에 없었지만. 행복과 슬픔이 너무 가까이에 붙어있는 거 아닌가, 오늘따라 네가 너무 생생해서 입술을 물었다.
“어어, 오늘 되게 이상하네. 일어나, 리히트! 오늘 도서관 가기로 했잖아.”
그 애는 이불을 걷으려다 멍하니 누워있는 내가 이상한지 가까이 다가와 팔을 조심스럽게 잡고 흔들었다. 대개는 네가 나타나도 가만히 슬픈 얼굴로, 그때 그 우는 얼굴로 서있었고 가끔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는 온기까지 느껴지는구나……. 36.5도의 온기가 얼마만이더라……. 나는 벌떡 일어섰다.
“자기??!”
“깜짝이야! 무슨 일 있었어?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거야?”
아마도 처음으로 내 모습과 상태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정신없이 걔의 팔을 붙들고 매달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죽 살폈다. 그리고 그대로 끌어안았다. 조금 앳되고 왠지 미심쩍은 얼굴을 했지만 내가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릴 때 이후로 한 번도 찾지 않았던 비정한 신을 찾고 싶었다. 드디어, 드디어. 나는 내가 미쳤다고 확신했다. 전례 없는 악몽의 시작이었다.
악몽은 내가 기억하던 삶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구석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다르게 행동하면 그 부분이 바뀌는 것 같았다. 정말 사소하게 쓸데없이 디테일한 구석이 있다. 얼떨결에 네가 있으니까 끌려다니며 꿈에서 깨지 않으려 노력했다. 걔는 처음엔 평소와 남다르게 굴며 유난히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나를 시험기간이라 그런가보다, 하며 긍휼히 여기더니 나중에는 적응한 듯 가끔씩 귀찮아 하는 건 여전하면서도 개의치 않아 했다. 너 진짜 살 때는 그래도 반 애들이 이만큼 물어보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이제는 심심하면 와서 묻곤 했다. 너네 드디어 사귀어? 아니. 그럼 결혼했구나? 무슨 소리야 우리 친구인 거 알면서 또 그러네! 물론 걔만 열심히 부정하고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당연하지, 자기랑 나는 운명이야~ 다음 생에서도 또 만날 거라니까? 만약이라는 단어와 함께 꼭 품고 있는 진심을 말했지만 오히려 내가 입을 열 때마다 신의가 추락하는지 애들은 아~ 하곤 도리어 그 애의 말을 받아들였다.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말을 하면 애들이 믿질 않아……. 조금 반성하기도 했다.
그래, 다음 생. 불교에는 전생과 다음 생이 있다고 한다. 하느님 믿는 그 동네는 죽으면 천국 간댔으니까 여기가 천국은 아닐 거 아닌가. 천국인가? 네가 있으면 어쨌든 천국이긴 하잖아. 스스로의 논리에 설득당한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긴가민가 혼란스러워 했다. 이때는 이런 얼굴을 했구나, 여전히 감정 숨기는 건 서툴다 생각했는데 고등학생 때는 더 그랬네. 시간의 흐름에 잠시 놓치고 있었던 너를 기억해내고 기뻐하는 것도 잠시 어차피 이것도 정신 나간 내가 상상하는 꿈에 불과할 거라는 굴레에 빠졌다가 또 행복하게 내 앞에서 간식을 먹으며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너를 보며 행복해졌다가……. 진짜 질 나쁜 악몽인가, 천국 비슷한 다음 생인가. 이렇게 웃고 있는 네가 꿈이라면 어떡하지? 이렇게 좋은 냄새 나는 사람이 너 이외에 누가 또 있어. 이렇게 진짜 같은데……. 해사하게 미소 짓는 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네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복잡한 속내는 항상 뒤집어쓰는 껍데기 뒤로 숨겼다. 아무도 없을 때 내쉬는 한숨이 늘었다.
항상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그 애는 이 세상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그 결과가 이거다. 턱을 괴고 하늘색 마커펜으로 죄 없는 문제집을 죽죽 그어 내렸다. 내 나이가 몇인데 고등학교 문제집을 풀고 있나 같은 비관이 찾아오다가도 옆에서 펜을 쥔 채 머리를 싸매고 낑낑거리는 너를 보면 또 입꼬리가 비죽 치솟았다. 손바닥으로 자연스럽게 얼굴을 가리고 빈 종이에 크게 <행복해지는 법>을 적고 번호를 매겼다. 고민해봐도 내가 할 일은 이것뿐이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게 꿈이고, 정신이 돌아버린 내가 하는 상상이라 가정해도 결론은 같았다. 미련이 남아서 이런 꿈을 꾸는 거 아니야, 이 미련한 자식아.
너랑 나는 2학년 말고는 같은 반이 된 적이 없다. 걔는 진짜 힘들 때는 입 밖으로 사건의 주체 얘길 내지도 않았으니까 아마 교복을 입은 내가 손쓸 수 있는 시기는 지금이 유일할 것이다. “15번 쪽지 뽑은 사람~?” “어, 나.” “나랑 바꿀래, 자기? 무려 맨 뒷자리~!” “뭐냐. 나야 좋지.” 흔쾌히 바꿔준 급우 덕에 쪽지를 바꿔 들고 책상을 그 애 책상 옆으로 옮겼다.
“리히트, 너 뭐해?”
걔는 황당한 얼굴로 입을 딱 벌리고 나를 쳐다봤고 반 애들은 웅성댔다. 쟤네 진짜 사귀는 거 아니라고? 아니래. 그렇대.
“선생님께 걸리면 혼나잖아~ 그리고 새삼스레 무슨 짝꿍이야.”
어차피 매일 보잖아. 주변을 흘깃거리다 조용히 속삭인 그 한 마디에 차이를 실감하며 꾸욱 웃었다. 아직 가져오지 못해 저만치에 있는 그 애의 의자를 들고 오며 말했다. “나는 매일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거든, 자기♡” “휴, 수업 시간엔 장난치면 안 돼. 선생님들 보시면 안 좋게 보실걸.” “전혀 감동받지 않은 거야?! 나 슬퍼.”
부산스럽게 정렬된 책상 행렬의 가장 끝을 돌아보았다. 맨 뒷자리를 거저먹은 것이 좋은지 시시덕거리는 얼굴이 보였다. 성정이 거칠고 시끄러운 애였다.
안 맞는 친구랑 짝이 돼서 힘들어했잖아.
너 살 적 학교에선 너를 생각한답시고 일부러 가까이 지내는 걸 피했다. 어차피 이 고리타분한 학교에선 어떤 식으로든 소문날 게 뻔하다는 걸 몰랐다는 거지. 옆자리에선 생각보다 많은 걸 할 수 있다. 이래서야 사심이 없냐 물으면 없다 할 수 없겠어……. 너는 자습시간에 이따금 연필을 쥔 채 꾸벅꾸벅 졸았다. 네 볼에 손등을 슬쩍 갖다대서 깨우고 눈을 찡긋거리면 그 애는 잠이 덜 깬 얼굴로 눈꺼풀을 꿈뻑거리다가 내 얼굴을 피해 책상에 엎드렸다. 얘는 이때가 제일 솔직했다. “아, 눈부셔…….” 정말로, 몹시 귀여웠다.
수학여행은 어디로 갔더라. 제주도였던가, 부산이었던가, 경주였던가. 기억이 희미했다. 20대 후반쯤 되고 학창 시절 의미 있는 단 한 사람이 너무 거대했는데 그 애가 없는 추억이라면 대개 잊기 마련이다. 누런 갱지에 프린트된 지명은 부산이었다. 미간을 좁혔다. 부산이었나? 남쪽이긴 했지? 그치만 주 자가 들어갔던 것 같은데……. 아님 말고. 안내문이 힘없이 날아가 책상에 안착했다. 수학여행 당일은 이른 새벽부터 덜덜덜 캐리어가 아스파탈 바닥 위를 구르는 소리가 진동했다. 버스에 올라타고 냉큼 옆자리에 앉자 그 애가 금세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헉, 리히트. 여기 미나 자리야. 그녀가 입가에 양손을 모으고 소곤대자 고미나가 저기 앞앞줄에서 말했다. 괜찮아 나 여기 앉았어! 입술을 말아올리며 씩 웃었다. 그렇대, 자기. 할 말을 잃었는지 입술을 비죽거리던 걔는 버스가 출발하자 이어폰을 꽂고 금세 잠들었다. 꾸벅이다 창문에 부딪히려는 머리를 어깨에 당기자 옆자리에서 야유가 흘러나왔다.
“어딜 신성한 학교 버스에서!! 선생님~ 범인은 여긴 거 같은데요.”
“자기, 왜 서운한 소리를 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우리 자기의 국보 베개가 부러워서 그래? 원한다면 자기도?”
옆에서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났다. 줄줄이 늘어선 좌석에서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그 와중에도 얘는 깨지 않고 곤히 잤다. 분명 늦게까지 캐리어와 일정을 체크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따뜻하고 동그란 정수리가 숨소리에 맞춰 오르락내리락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꿈속의 세상인데 또다시 어딘가의 꿈속의 세상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참을 가만히 지켜보다 오늘 옷을 좀 두껍게 입고 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고 따라서 눈을 감았다.
도착한 부산은 좀 더 건물이 낮고 똑같이 복잡했다. “자유 행동해. 8시까지는 여기 앞으로 와야 된다.” 선생의 한 마디에 아이들은 잘 훈련된 개처럼 우르르 몰려나갔다. 나는 그 무리에 합류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애 옆에 서서 손을 잡고 물었다. “어디로 갈까?” “여기 근처에 흰여리 마을이라고 있다는데…….” 잡은 손은 일말의 신경조차 쓰지 않고 핸드폰 메모장을 내리는 데에만 주력하던 그 애는 문득 말을 멈추고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주변의 시선이 호감이건 그 반대건 파괴적으로 쏘아지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리히트 네가 왜 여기 있어?? 2조잖아.”
“……자기, 나 좀 서운한데?”
“그래, 얘들아. 즐거운 데이트하고. 우리는 일단 시가지로 간다.”
“좋아. 자기들, 이따 봐~”
한쪽 눈을 찡긋 감자, 몇 개의 머리가 손을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 애는 옆에서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어리둥절 “어어?? 얘들아?” 외마디를 흘렸다. 나는 도로 위에 서서 그 애를 알아둔 길로 이끌었다.
“가고 싶은 데 있었지? 자기.”
“……어떻게 알았어?”
“그야~ 자기는 물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 애는 어릴 때 계곡물에 빠졌다 살아난 뒤로 유독 큰 물을 무서워했다. 대부분이 바닷바람 맞으러 바다로 향한 것과 달리 마지막까지 우리는 둘이서 바쁘게 시장이나 거리를 돌았다. 이건 22살인가의 고백이었다. 자기는 어떤 가게의 애플파이가 꼭 먹고 싶었는데 함께 자유시간을 보낸 친구들은 호수인가 바다를 가고 싶어 해서 결국은 먹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그 얘길 듣고 그 자리에서 커다란 파이 한 판을 안겨주었다. 행복한 눈동자가 눈에 아직도 선했다. 그러니까 행복은 나누면 두 배랬다. 이런 말이 아니었던가. 다음 날은 어느 학교를 가도 수학여행은 꼭 유적지나 역사 속의 공간을 좋아해서 그곳을 거닐다가, “……꿈 같네.” 무심결에 중얼거린 말을 들은 그 애가 몽글몽글 웃으며 “현실이야, 리히트.” 하고 나를 다잡았다. 너는 이게 꿈인지도 모르면서.
그리고 돌아오는 날에 세드릭과 맞닥뜨린다.
잠깐 편의점에 물을 사러 자리를 비운 찰나의 일이었다. 세드릭은 그림자가 겹치는 거리에 서서 그 애의 번호를 물어보고 있었다. 똑같다. 그때랑 똑같았다. 누군가 찬물을 내 머리 위에 끼얹은 게 틀림없었다. 잠깐 자리를 비우고 누군가가 있고 불쾌해도 조금 참고 그걸 후회하고. 뚜껑이 단단하게 닫힌 물병이 아스파탈 위를 통그르르 굴렀다. 이때가 아닌데. 세드릭은 대학에서 만나 그 애랑 결혼하는 남자였다. 너무 일렀다. 걔는 이번에는 번호를 건네줬다. 아마도 경험이 부족하고 당황해서였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남자친구라며 나서지 않았다. 처음에 그랬던 일 때문에 혼례를 올린 뒤에도 세드릭은 어둡고 번드르르한 눈으로 끊임없이 그 애와 나의 사이를 의심했다. 상상은 쌍방이고 현실은 일방이었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걔는 그것 때문에 자주 힘들어하고 아주 가끔 울었다. 화가 나도 서로 다른 관계 사이에 그어진 선이 명백했다. 나는 화를 낼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순간 그 눈물이 생각나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 주워섬겼다.
그 뒤로 세드릭은 종종 연락하는 듯했다. 생활을 하다가 핸드폰에 알림이 울리면 찡그리는 듯 웃는 표정으로 연락을 받았다. “흐음, 누구야?” 묻는 말에 “으음, 그때 그 사람…….” 그 대답의 횟수가 누적될수록 점점 더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연락을 받으면서도 그다지 기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내 경계심은 커져만 갔다. 주제도 모르고.
자기. 나도 남자니까 남자로서 하는 말인데~ 그 남자는 별로야.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저 레퍼토리의 말이 131가지쯤 됐는데, 험담한다고 싫어할까 봐 항상 속으로만 생각했다. 으레 나는 네 앞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빛나는 조각들을 잃곤 했다. 둘은 몇 개월 연락을 지속하더니 무더운 여름에 약속을 몇 번 잡았다. 입은 옷이 몸에 눅눅하게 달라붙는 계절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얼굴은 이 여름과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거울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놀랍게도, 아무 일도 없었다. 카페 구석에 앉아 한물간 여름을 추억하며 오늘 저녁은 뭐 먹을 거니 따위의 말과 별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기, 그럼 그때 그 남자랑 사귀는 거야?”
“응? 아니. 거절했어.”
발간 살덩이 사이에 여상히 물려있던 빨대가 톡 빠졌다. 쪼르륵, 걔가 음료 바닥을 힘차게 빠는 소리만 선명했다. 나만 입맛이 순식간에 사라졌나 보다.
“그, 왜, 왜?”
“리히트는 내가 걔랑 사귀었으면 좋겠어?”
그 애의 눈길이 빤했다. 마른 침이 쏜살같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얼음만 잔뜩 남은 음료 바닥을 노려보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얼굴을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다. 말해. 말하라고. 평소에는 자기니 사랑이니 잘도 말하던 입이 얼음과 함께 딱 얼어버렸다. 항상 뒤집어쓰고 있던 무언가가 도망가고 있었다. 그리고 네가 보고 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시기가 어긋났기 때문인가. 머리가 핑핑 너무 세게 돌아서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마저 귀에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세드릭과 사귀지 않는다. 결혼하지 않는다. 행복하지 않다. 불행하지 않다.
모든 인간의 삶엔 행복과 불행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내 사랑이 그런 것처럼 그 애의 결혼도 그랬을 것이다. 나쁜 얘기를 시시콜콜 얘기하는 성격이 아니라 대부분 긍정적인 행복과 관련된 설탕 같은 얘기를 전해 들었다. 네가 행복하면 나도 그래. 하지만 아무도 모를 씁쓰레한 속도 분명히 있었다. 너도 그랬을 거야. 말하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집을 옮기고 운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음침한 놈이라 그 근처를 맴돌기만 하다 돌아서곤 했다. 조금 있으면 화가 난 얼굴의 세드릭이 나올 것도 알았고, 돼먹지 않은 말투로 이게 달래는 건지 괴롭히는 건지 모를 말로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것도 알았다.
그러니까, 이상하잖아. 순식간에 도망간 껍데기를 잡아와 뒤집어썼다.
“당연한 얘기지~ 자기, 나를 두고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와?”
“그러게 말이야~ 그래서 그랬지.”
“…….”
“그리고 걔 좀……, 음. 아무것도 아니야. 동생들이 리히트 형아 보고 싶다고 오늘 집에 오래. 저녁 같이 먹자.”
분명히 듣고 있는데 들리지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머리가 나빴나. 무슨 말을 듣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파악이 안 됐다. 요컨대, 좀, 그런 얼굴로 저런 말은 반칙인 구석이 있지 않나? 가슴 안 갈대밭에서 노란 경고 카드를 든 심판이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받아주지 마. 받아줘. 빌지도 마. 주제 파악을 해. 이 자식아. 속절없이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중심을 숨기고 싶어 빨대를 주워 물고 미소지었다. 금세 동생 얘기를 하며 빙긋 웃는 걸 보았음에도 한동안 머리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날 저녁은 아주 맛있었다. 밥을 먹고 동생들과 투닥투닥 설거지를 하며 태양처럼 웃는 그 애는 누구보다 죽음과는 멀어보였다.
이렇게 행복한 네가 왜 스스로를 죽여야만 했을까. 대답 없는 너에게 다시금 묻는다. 모두가 사인이 자살이라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나에게는 그 애의 죽음 자체가 타살이었다. 불행을 방임한 자가 범인이었다. 나는 너를 죽인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런 속죄하는 꿈조차 내 역겨운 내면의 거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악몽 속에서 자주 토하고 늘상 입 안은 걸레짝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누구보다 눈치가 빨랐는데, 너에게는 유난히 더욱 그랬다. 이건 분명히 대가가 있는 행복일 것이다. 손을 잡아도 가만히 있던 네가 슬쩍 빼는 횟수가 늘고, 네가 내 옆에 설 때 일정한 거리가 생겼다. 유난히 얼굴이 자주 발긋했다. 이 모든 건 신호였다. 이 빌어먹을 악몽이 진짜 내 꿈에 불과하다는 사인. 201X년 희망사항. 리히트 이 역겨운 놈이 부릅니다.
그래서 세드릭, 개자식의 등장에도 별로 놀라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꿈에서 깨는 법을 찾았다고만 생각했다. 나는 그냥 너를 구하고 싶은 미련에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거니까 이 방법이 정답일 것이다. 내 세계를 구하는 일이었다. 세드릭은 그 애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달이 초라한 지상을 비추며 세드릭의 손에 들린 것의 선단 끝에서 날카롭게 부서지고 있었다. “나를, 나를 가지고 놀았어. 이 더러운 년아……. 그럼 연락은 왜 받아줬는데? 이 씨팔……. 노력하면 달라질 거라 했잖아. 결국엔 그냥 갖고 논 거였네.” 어둠 속 그 애의 몸이 악의 가득한 말에 꿰여 딱 가만히 굳었다. “닥쳐.” 주체할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표정이 사라졌다.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세상의 모든 부드러운 것과 달고 좋은 것만 안겨주고 싶게 생긴 이 사람에게 이 남자는 악귀가 쓰인 미친 사람 마냥 악을 질러대다가, 달려들었다. 내가 보이지 않는 듯한 맹목적인 돌진이어서 동선 파악은 더 쉬웠다. 마지막에 들어왔던 드라마가 각각 액션스릴러와 오컬트판타지였는데, 전자 대신 후자를 받은 것은 이 순간만큼은 정말 후회했다. 나는 칼 든 사람의 상대법 같은 건 몰랐다. 날붙이가 부드럽게 살과 내장을 가르다가 뼈에 가로막힌다. 정답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몸을 꿰뚫은 금속과 세드릭이 꿈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애는 비명을 질렀다가 형체도 없이 사라진 살인자의 자리를 눈으로 황망히 더듬더니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운 무릎에 다 상처가 나게 엉금엉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걔는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재차 바삐 누르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손을 부여잡은 채 하염없이 이름 석 자를 부르는 일에 몰두했다. 모든 것이 기억난 것 같았다.
“리히트, 리히트……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하는 걸까. 다음에는 내가…….”
걱정 마. 현실이 아니더라도 사랑할게.₁ 악몽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完
₁ 백가희_당신이 빛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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