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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ut d'Amour
(사랑의 인사)
* 메인스토리 2장 《적막의 국제예술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 엘의 취미를 보고 상상해 본, 원작과는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 이번 편은 BGM이 정말 중요합니다. 꼭 함께 즐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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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고등학교가 이렇게 크대?"
내가 다니던 대학교도 이렇게 넓진 않았던 것 같은데. 쉴 틈 없는 조사에 지친 매니저가 복도 중앙에 쭈그려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국제예술학교. 학교는 그 이름에 걸맞게 웅장한 교정은 물론, 각 과마다 연습실로 사용하는 건물을 따로 갖고 있었다. 그 덕분에 저는 문제의 장소를 찾느라 쉴 새 없이 걸어 다니는 중이고. 거기다 토라진 테오를 달래느라 한 교시를 통째로 날렸으니, 그만큼 더 부지런히 발을 놀려야만 했다.
"...그래도 조금 전 무용과 리허설은 대단했지."
시간에 쫓겨 하이라이트 장면을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는지, 갈빛 눈이 왔던 길을 슬쩍 되돌아봤다. 이제 남은 곳은 하나. 음악과 학생들이 연습실로 쓰는 건물이랬지? 야외 조사는 잘 되고 있으려나. 문득 떠오른 생각을 갈무리한 여인이 작게 기합을 넣으며 접었던 다리를 폈다. 막내도 열심히 찾고 있는데 매니저가 쉬고 있으면 안 되지. 오랜 걸음에 욱신거리는 발을 지면에서 떼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 여긴가?”
하얀 손이 제 앞의 문을 밀었다. 동시에 푹신한 장애물에 가로막혔던 음의 파도가 귓가로 쏟아졌다. 각기 다른 색깔의 멜로디가 모여 새로운 하모니를 만들고 있었다. 서로 다른 일곱 빛깔이 모여든 무지개처럼. 중후한 음색으로 느릿느릿 가장 깊고 낮은 음역대를 지탱하는 보랏빛의 첼로. 그보다 조금 높은 하늘색 비올라가 그 위에 부드러움을 더하고, 경쾌한 바이올린은 바지런히 움직이며 통통 튀는 빨간빛으로 소리를 물들인다. 현악기들은 그렇게 각자의 호흡으로 색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지부에서 듣던 맑은 피아노 연주와는 사뭇 다른, 따뜻하고 부드러운 멜로디.
음 - 음 -
여린 입술 틈으로 참지 못한 허밍이 샜다. 가벼워진 발을 한 걸음 한 걸음 사뿐히 옮겨 다니며 빈 연습실 앞으로 향한다. 이쪽은 딱히 이상한 곳이 없는 것 같네, 여기도 아니고. 분명 미미하게 기운이 느껴지는데.. 위층으로 올라가 봐야 하나? 그렇게 복도를 걸으며 고민하던 중이었다.
“어..?”
뭐지? 소란함 속 어디선가 들어본, 낯설지 않은 선율이 매니저의 발을 붙잡았다. 멍하니 소리를 따라가 멈춘 연습실 창 너머에는 한 여자아이가 홀로 앉아 연주를 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소리라 일컬어지는, 하프의 선율이었다. 아이의 손이 저보다 몇 배는 큰 그랜드 하프의 현들을 가볍게 튕길 때마다 음의 물결이 몰아친다. 어, 이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맑고.. 더 고왔던 것 같은데. 원래 유명한 곡이라서 그런가? 아니야. 뭔가 그보다도 더 친숙한… 아, 머리 아파. 밤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좁혀졌다. 먼지가 쌓인 오랜 기억은 물안개가 낀 희미한 잔상이 되어 머리를 어지럽힌다. 묘한 기시감에 털어보려 애써도, 먼지는 더 자욱이 쌓여 시야를 가릴 뿐이었다.
“매니저님, 여기 계셨네요!”
“엘? 왜 왔어, 조금 쉬고 있지. 무릎 안 아파?”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뭘 보고 계신 거예요?”
열린 문틈으로 밝은 머리칼의 소년이 나타났다. 무의식은 이리저리 던져지는 낡은 인형을 받아내려 애쓰던 소년을 그려낸다. 질 낮은 장난에 밭은 숨을 내쉬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던 연유하지만, 그럼에도 강인한 아이. 아까 일로 지쳤을 만도 한데. 밴드가 붙은 무릎을 보던 여인이 조용히 떠오른 생각을 삼켰다. 어느 지부의 기수장인지 참 기특하네. 연습실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저가 이상해 보였는지, 소년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 엘은 처음 보는 거지? 하프라고 하는 인간계의 악기야.”
엘이 갖고있는 천계의 리라를 본떠 만들었대. 어때, 소리가 비슷한 것… 바지런히 재잘대던 입이 별안간 움직임을 멈췄다. 소년은 멍하니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봄날 개나리를 쏙 빼닮은 샛노란 눈동자가 아득한 그리움에 잠겨있었다. 추억이 생각났나 보네, 천계에서는 항상 들었을 선율일 테니. 밤색 눈동자도 다시 정면으로 방향을 틀었다.
“노래가 참 사랑스럽지?”
“네에...”
“이맘때 즈음이면 많이 들리는 노래야. 인간계도 비슷하려나, 명계 결혼식에서는 빠질 수 없는 곡이거든. 이 곡을 만든 작곡가처럼 한 사람만을 평생 사랑하겠다 약속하는 거래.”
“우와, 정말 낭만적이네요!”
“사실 명계에는 하프가 없거든. 그런데 이상하게 낯이 익은 게, 꼭 들어본 것만 같아서.. 계속 여기 서서 훔쳐보고 있었지 뭐야. 하하”
“네?”
“이상하네...”
방긋 솟아오른 분홍빛 광대가 별안간 톡 떨어졌다. 샛노란 눈동자가 아롱아롱 흔들린다. 매니저님..? 아차, 너무 심각했나. 이 상냥한 천사는 또 저를 걱정할 게 뻔했다. 덩달아 굳어진 소년의 표정에 정신을 차린 매니저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까 냥선배가 준 테이프를 반복해서 돌려봤더니 연주가 겹쳐서 무심결에 헷갈렸나 봐. 음악실 쪽을 많이 돌려봤었거든. 자자, 어서 조사하러 가자! 뽀얀 손이 저보다 조금 높은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여기는 기운이 안 느껴지니까 위층으로 가볼까? 무심한 여인의 손은 어깨를 떠나 니트를 덮은 손을 마주 잡아 방향을 끌기 시작한다. 아, 네에..! 그렇게 말하며 여인의 뒤를 따라가는 소년의 말간 얼굴에 진홍색 진달래가 예쁘게 피어났다.
“매니저님. 매니저님도 아까 그 곡.. 좋아하세요? 어, 그게! 그, 노래가 너무 좋아서요!”
“으응..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지 그리운 느낌이 나네. 하프 선율도 너무 아름다웠어. 그치?”
이번 층은 연습실이 다 비었네. 적막이 내려앉은 복도에는 정오의 햇빛을 받은 먼지들만이 유유히 공기 중을 유랑하고 있었다. 그럼 오른쪽 연습실은 내가 맡고, 왼쪽은 엘이 맡으면 되겠다. 그렇게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오늘따라 꼭 다물려있던 입이 우물쭈물 이야기를 꺼냈다. 노래? 아, 아까 그거. 엘은 리라를 갖고 있으니까 그 곡도 연주할 수 있겠네. 관심이 생겼구나? 나중에 나도 들려줘야 해, 알았지? 여인의 말에 소년은 예쁜 미소로 화답했다. 네, 꼭 그럴게요! 어느덧 녹녹해진 오후의 햇살이 소년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반짝이는 호박색 눈동자에 봄날의 온기가 스몄다.
“헤헤...”
“왜 웃어?”
“갑자기 예전 기억이 떠올라서요.”
“응? 무슨 기억?”
“있어요. 예전 기억.”
시시하기는. 푸스스 웃어 내린 매니저가 빈 연습실의 문을 열고 사라졌다. 그걸 본 소년도 복도를 거닐며 조사를 시작했다. 굳이 더 보태지 않았다.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선율이라고. 아까 그 곡은, 지금까지도 리라에 서툰 저가 실수 없이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곡이라고.
사실은 기억나신 줄 알았어요. 매니저님께 리라를 연주해드렸던 어느 봄날을 말이에요. 하지만 기억을 못 하셔도 괜찮아요. 그것까지 오롯이 제 안에 담을 테니. 열린 창문으로 날아든 벚꽃잎이 소년의 손에 앉았다. 그래도, 저에게도.. 작은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못내 버리지 못한 작은 욕심에 코가 살랑살랑 간질거려 왔다.
천사장님께서 큐피드의 화살은 독이라 하였는데. 제 안에 퍼진 독은 아직까지 다하지 않고 있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사실은 화살 때문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설령 큐피드의 화살을 맞지 않았어도, 나는 언젠가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을까. 언젠가는 실망할 수도, 언젠가는 상실할 수도 있는 마음이지만.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모든 게 어설픈 하급 천사가 가장 자신 있는 것이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마음을 담은 시선이 캐러멜색 머리칼을 좇았다.
언젠가 그녀가 다른 누군가와 어여쁜 사랑을 하게 되어도,
저는 기꺼이 그 사랑을 축복하는 수호천사가 될 수 있기를.
* * *
그리고, 이제는 주인을 잃은 기억 한 자락.
볼을 간질이는 따스한 바람이 부는 계절, 수업을 마쳤는지 건물 밖으로 쏟아지는 학생들 틈에서 한 손에 파일철을 야무지게 든 여인이 걸어 나온다. 길 여기저기에 흩어진 벚꽃잎을 부지런히 밟으며 교정 뒤편으로 향하면, 이제는 잘 찾지 않는 소담한 화원이 펼쳐진다. 여인의 발길이 향하는 곳은 알록달록 예쁘게 핀 봄의 꽃들로 둘러싸인 분수대 옆, 웅장한 아름드리나무. 나무 옆 삐쭉 튀어나와 제 존재를 한없이 뽐내는 하얀 날개를 보며 다시금 생각한다. 몇 번을 봐도 비현실적인, 마치 어릴 적 읽었던 어느 동화 속의 한 장면 같다고.
“엘은 언제쯤 나무 뒤에서 나올 거야?”
“아.. 그게, 부끄러워서...”
가까워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말간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하늘에서 툭 떨어진 천사를 만난 날은 꽃봉오리가 예쁘게 몽울졌을 때였는데. 꽃들이 만개한 지금까지도 이 작은 천사는 제 앞에서 부끄럼을 탔다. 여인이 푸릇푸릇 돋아난 잔디를 아무렇게나 정리하고 그 위에 풀썩 앉아 하소연을 시작했다. 오늘 레포트 발표날이었는데, 교수님이 지각을 하신 거 있지? 그거 때문에 수업이 밀려서 방금 끝났다니까. 내 피 같은 점심시간인데! 그래서 이 샌드위치만 먹고 빨리 다음 수업 가야 해. 아! 다음 수업 교수님도.. 이어지는 투정에도 천사는 뭐가 그리 좋은지 샐샐 웃으며 이야기를 듣는다.
“아, 그리고 이거..!”
“우와! 이게 그 리라야? 천사의 악기라니, 너무 아름다워!”
그러고 보니 천사의 손에는 평소처럼 긴 천사 봉 대신 악기가 쥐여 있었다. 정원 옆에 자리한 음대 건물도 따뜻한 봄 날씨에 창문을 열어두었는지,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저마다의 악기 소리로 무질서한 화음을 이루곤 했다. 항상 그 음악 소리를 배경음 삼아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 날 문득 작은 호기심이 피어나 물어본 적이 있었다. 천계에도 악기가 있어? 천사의 악기는 어떤 소리가 나? 천사는 그 질문에 두 손을 요리조리 흔들며 열심히 설명해줬다. 이렇게 둥글게 생긴 악기인데, 여러 개의 현을 튕겨서 소리를 내요! 정말 아름다운 소리가 나요. 저는 서툴러서 잘 못 하지만.. 엣취! 그렇게 나무 그늘 아래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었다. 저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 착한 천사는 저가 지나가듯 흘린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아직 서툴러서 어려운 연주는 잘 못 하지만.. 듣고 싶으신 게 있나요?”
“음.. 아! 지금 이 곡은? 봄이랑 잘 어울리잖아. 엘의 악기로 들어보고 싶어.”
오늘도 학생들은 쉬지 않는지, 열린 창문 너머 작게 새어 나오는 선율을 캐치한 여인이 말했다. 많이 들었었지? 요즘 이 곡만 연습하던데, 역시 봄이 오긴 왔나 보다. 여인의 제안에 천사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저 아직 많이 서툴러서… 에취! 연이어 터져 나온 재채기를 막던 천사의 보드라운 손이 살며시 악기를 잡았다. 우와, 예쁘다. 천사의 머리칼 같은 반짝이는 금빛의 리라가 봄 햇살을 받아 맑게 빛났다. 순백색의 날개를 곱게 모은 천사가 리라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여인은 다시금 그 동화 같은 순간을 갈빛 눈동자에 담았다.
하얀 손이 리라의 현들을 부드럽게 쓸 때마다 빛의 파도가 은은하게 몰아친다. 부드러운 사랑의 노래네. 맑고 고운 소리가 나, 너무 좋다… 녹녹한 정오의 온도와 포근한 멜로디, 머리칼을 간질이는 바람은 여린 눈꺼풀에 무게를 실었다. 눈을 반짝이며 감탄하던 여인이 오래된 아름드리나무에 기대어 스르르 눈을 감았다. 3분 남짓한 곡이 끝나갈 때 즈음, 따스한 햇살에 살풋 잠이든 여인의 고개가 천사의 어깨에 툭 떨어졌다.
벚꽃이 흩날리는 계절, 천사를 닮은 서투르지만 따뜻한 선율이 살랑이는 봄바람을 타고 퍼진다. 그 어느 계절보다 봄을 닮은 노래. 평생을 사랑한 단 하나뿐인 자신의 반려를 위해 곡을 써, 영원토록 남을 사랑을 약속한 남자. 에드워드 엘가의 Salut d'Amour 사랑의 인사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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