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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네.’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의 표정에 슬며시 걱정이 차올랐다.
이젠 꽤 적응해서 더 이상 길을 잃을 걱정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풀어질 때쯤이면 꼭 이렇게 한 번씩 실수 아닌 실수를 한다니까.
당장 급한 일이 없는 게 불행 중 다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같은 자리만 계속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게 딱히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눈에 익은 길 말고, 이번엔 완전히 낯선 길로 꺾어보는 거야.’
잠시 멈춰 섰던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당장 길을 찾아 지부 건물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했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그 앞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길을 잃는 건 사실 그녀만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녀 외에도 많은 사신과 관리자들이 지부 내에서 곧잘 길을 잃곤 했으니까. 사람들의 기억력과 주의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곳의 구조와 넓이에도 문제가 있는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돌아가면 제대로 한 번 각 잡고 지도를 만들어 봐야겠어.’
- 그러기 위해선 뭐가 필요할까.
하늘 위에서 전체를 내려다보며 조감도를 그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당연히 그럴 수는 없을 터였고, 직접 발품 팔아 구석구석을 기록해서 만들자니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이곳을 구석구석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까?
- 거기까지 생각하니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지내온 시간이 장소에 대한 이해도와 무조건 정비례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아마도 그라면 이곳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기이.”
“부르셨습니까, 마스터?”
“으악!”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이름에 답이 돌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 한 그녀가 전에 없이 큰 반응과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호오, 그렇게까지 놀라시는 건, 오랜만이군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생글거리고 있는 모습.
놀라긴 했지만, 안도감을 주는 얼굴이었다.
“...기이.”
언제나처럼 비스듬한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발견한 그녀가, 후 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이름을 다시 한번 불렀다.
“네?”
“너, 계속 날 따라온 거야? 봤으면 한 번쯤 불러주지 그랬어.”
조금은, 진심으로 책망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슬슬 다리가 아플 지경이었으니까.
“흠, 아뇨. 마스터를 발견한 건 조금 전의 일입니다. 보자마자 곧장 쫓아온 건데, 마침 제 이름을 부르시더군요?”
“뭐? 그럼....아,”
기이의 말에 주변을 둘러본 그녀가 그제야 주변 풍경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제법 낯선 모습으로 바뀐 걸 알아차리곤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아마도, 아까 낯선 방향으로 가보자고 마음먹은 후 수상해 보이는 으슥한 방향으로 길을 꺾은 것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드디어 빙글빙글 돌던 똑같은 길로부터는 해방된 것까진 좋았다만, 이걸 ‘길’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의문이었다. 잘 닦여진 길이라기보다는, 숲으로 들어섰다고 하는 편이 어울릴 법한 흙바닥. 딴생각을 하며 걸은 탓에 지금까진 전혀 눈치채질 못한 것이었다.
“어...기이, 그러니까 여기가...지금 지부 건물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인 거야?”
“후후, 마스터.”
“응?”
“길을 잃으셨군요?”
“아...”
기이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매니저 일을 시작한 지도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 아직도 지부 내에서 길을 잃다니. 기이에게 책망의 의도가 없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스스로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저희가 주로 있는 건물을 기준으로 하자면 일단 제법 떨어진 곳입니다. 용케도 여기까지 오셨군요, 마스터? 후후..”
길을 잃은 게 아니라고 대충 둘러댈까 고민하는 사이, 기이가 선뜻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아마도 곤란해하는 걸 눈치챈 거겠지.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렇구나, 제법 떨어진...하하. 기이는 그럼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온 거야?”
멋쩍은 웃음과 함께 그녀가 다시 한번 기이를 향해 물었다.
“저는, 보시다시피 조금 할 일이 있어서요.”
그렇게 말하며 기이가 손에 든 물건을 들어 올려 보였다.
- 작은 물뿌리개.
제법 눈에 띄는 물건인데, 경황이 없어 그런 걸 들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게 웬 거야?
“글쎄요. 후후... 한 번 따라와서, 직접 보시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기이가 어깨를 으쓱하곤 숲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물론, 감당하실 자신이 있다면의 얘기입니다.”
“좋아, 따라 가보지 뭐.”
그의 말에 그녀가 선뜻 답했다.
사실 그녀로선 딱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서 길을 잃은 채 혼자 더 헤매거나, 기이를 따라 언제가 됐든 지부 건물로 돌아가거나. 전자 쪽을 택할 이유 따위 없었다.
“뭐가 있기에 그래? 물뿌리개를 든 걸 보니...꽃에 물이라도 주러 가는 거야?”
“후후, 그건 직접 보여드리도록 하죠.”
물을 주러 간다고 하기엔, 이런 숲속에 작은 물뿌리개라니.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녀를 향해 기이가 언뜻 의미심장한 듯한 말을 흘리며 앞장서 걸었다.
그대로 말없이, 둘이서 천천히 숲길을 걸었다.
대화가 없어도 딱히 어색하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간단히 산책이라도 할 겸 지부 주변을 돈 것이 이 여정의 시작이었지. 그게 어쩌다 길을 헤매게 돼서는,
-아무튼, 기이를 만나게 된 건 그녀에게 있어 행운인 셈이었다.
덕분에 완전히 마음이 놓여 이제는 제법 가벼운 기분으로 숲길을 밟을 수 있었다.
살짝 축축한 흙길이 적당히 폭신하여 걷기 좋았고, 종종 들려오는 새소리도 여유로운 분위기와 들어맞았다. 나무 사이로 듬성듬성 들어오는 햇빛 역시 걷기 좋게 따사로워-
‘그래, 이제야 좀 산책하는 기분이 드네.’
그런 생각과 함께 두리번거리며 둘러본 주변엔 곳곳으로 연녹빛의 싹이 돋아나 있어, 새삼 어느새 이런 계절이 되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곳입니다.”
멍하니 돌아온 봄에 감탄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기이가 말을 건넸다.
“후후...이곳을 마주하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그리고 그 뒤로는, 주변의 옅은 초록빛과 완전히 차단되기라도 한 듯 차가운 빛깔의, 마른 나무가 한 그루.
“...고목...인 거야?”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꽃과 열매를 맺지 않을 뿐이죠.”
그렇게 말한 기이가 가지고 온 작은 물뿌리개로,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나무 그루터기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밑동이 제법 굵은 것이 살아온 세월이 한두 해는 아닌 것 같은데. 밑동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니 앙상하게 마른 검은 나뭇가지가 엉킨 거미줄처럼 푸른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숲에는 봄이 찾아오는데 이곳만 줄곧 겨울로 남을 것만 같은, 기묘한 풍경.
“꽃이 피면, 제법 예쁠 것 같지 않습니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기이가 대뜸 말을 건넸다.
“꽃...이거, 혹시 벚나무야?”
“글쎄요, 후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요.”
“본 적이 없어?”
그녀의 물음과 함께 그루터기로 흘러내리던 가는 물줄기가 힘없는 곡선을 그리며 멎었다. 물뿌리개를 살짝 털어 야무지게 마무리를 한 기이가, 그녀를 돌아보며 이어 말했다.
“네. 제가 명계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그러니까,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이런 상태였거든요.”
“그럼, 기이는 어떤 꽃이 필지 궁금해서 이 나무를 살리려는 거야?”
“흠-”
그 말에 잠시 답을 보류한 기이가 나무로부터 살짝 떨어진 돌 위로 걸터앉았다. 그대로 잠시 나무를 바라만 보다, 곧이어 말을 이었다.
“아뇨. 딱히...그냥, 있으니까 보러온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
“올봄에는 과연 꽃을 피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후후...”
어째선지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
그러고 보니 기이가 발견했을 때부터 쭉 이런 상태였다는 건, 역시 연식이 꽤 된 나무라는 뜻일까. 가만히 나무를 바라보는 기이의 시선을 따라 그녀 역시 잠시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뜻 쓸쓸해 보일 정도로 차가운 회색의 줄기. 그 위로 봄을 기다리듯 뻗은 마른 가지 끝끝마다 봄볕이 내려앉아 드문드문 피어나, 바람과 함께 잔잔히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꽃잎과도 같았다. 그와 나른하게 퍼지는 봄볕의 냄새.
어느새 주변이 묘하게도 운치 있는 봄의 풍경을 하고 있었다.
“어떠십니까, 마스터?”
마른 봄을 마주하고선 한참 만에, 기이가 다시금 말을 건넸다.
“응?”
“이곳이, 마음에 드셨습니까?”
다시금 장난기를 머금은 밝은 목소리.
“응. 딱히 기대하진 않았는데...꼭 숨겨진 명소 같아서 좋은걸?”
“그럼,”
덩달아 밝은 목소리로 답해오는 그녀를 향해 기이가 말을 이었다.
“언젠가, 이 나무에 꽃이 핀다면... 함께 또, 와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돌려 기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반쯤은 장난, 또 반쯤은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는 얼굴.
“흠~그거, 둘이서 꽃놀이를 오자는 말이야?”
“후후, 그렇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꼭 꽃이 피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녀의 물음에 이번에는 기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갸우뚱한 얼굴을 해보였다.
“지금 모습으로도 충분히 예쁘잖아. 이 정도로 큰 나무에 꽃이 핀다면 누구나 다 금방 알고 다 몰려들 텐데. 물론 그때도 보러올 테지만, 지금 쪽도 나만...아니, 나랑 기이만 아는 숨겨진 보물 같아서 나는 좋은걸?”
“지금으로도, 충분히..,”
“그러니까 이번 봄에 바로, 다시 한번 오자.”
기이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밝은 얼굴로 이어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그러고는 앵무새처럼 되묻는 기이를 향해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다는 듯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꼭 기이가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거든. 아마도 이 일을 마무리할 때쯤이면 봄이 한창이고도 남을걸.”
“그거 흥미롭군요. 후후...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인지는, 들어봐야 알겠는데요.”
“지도를 만들 거거든. 기이라면 분명 도와줄 수 있을 거야.”
“지도?”
“자세한 얘기는 돌아가면서! 자, 그럼 이제 슬슬 돌아갈까?.”
다시 한번 앵무새처럼 되묻는 기이를 향해 그녀가 말을 잇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기이가 이윽고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꼭, 마스터가 길을 안내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시는군요?”
“하하, 물론 그건 아니지...자, 그럼 앞장 서주실까요?”
그렇게 그녀가 기이의 뒤로 가 등을 떠밀며 소리 내어 웃었다.
돌아가는 숲길에선 어째선지 조금, 봄 내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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