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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베린이 요즘 그래?"
"하. 말도 마! 이젠 대답도 안 해준다니까?"
진정해 진정해. 매니저는 길길이 날뛰는 퀸시를 살살 달랬다. 베린이 바깥출입을 그만두는 것은 사실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늘은 푸르고 우체통은 빨갛다면 베린은 아팠다. 그렇다고 그가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무언가의 활동을 하는 부류는 아니었고, 봄에는 꽃가루와 황사로, 여름에는 찜통더위를 피해, 가을에는 환절기인 탓에, 겨울에는 혹한까지. 핑계는 언제나 많았으니까. 어쩌다 얼마 안 되는 나이스 컨디션이 찾아와도 그냥 흘려보내곤 하는 타입의 사람이 바로 베린이었던 것이다. 다만 저도 요즘 베린을 보지 못한 걸 알면서 지나친 것이, 베린이 아픈 일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저도 모르게 가벼이 넘겨버린 건 아닌지. 매니저는 무심했던 자신을 속으로 살짝 질책했다.
요컨대 봄이었다. 싹이 움트고, 꽃이 피어나고, 밖으로 나가기만 해도 생명력이 느껴지는 그런 계절. 복도를 지나가는 도중 만난 엘은 발끝이 땅에 닿질 않았고, 데이 역시 신발에 흙이 묻어날까 싶을 정도로 펄쩍펄쩍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다못해 그냥 선배조차 따뜻한 봄 햇살에 녹진녹진 녹아 있었다. 잠시 잠 깨러 산책 좀 다녀올게요~. 그래라 냥…. 봄기운이 퐁퐁 솟아나는 이 14 지부에 아마 딱 한 명, 이 봄을 즐기지 못하고 있을 이를 향해. 매니저는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 2시. 따사로운 햇살과 기온 탓에 슬슬 춘곤증이 몰려오고 있었다. 1층에 있는 새벽조의 기숙사라면 다녀온 후 딱 졸음이 달아날 것이다.
베린이 마지막 임무 후 방에 틀어박힌 지 장장 5일째. 그는 매니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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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린? 유세프씨가 안에 있을 거라고 했는데."
똑똑.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새벽조의 방문에 가벼운 파동이 퍼졌다. 아. 들어오세요…. 입을 열었지만, 오랜만인 탓에 대답이라기엔 너무 미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나가는 도중이었다면 바람 소리였으리라 착각했으리라. 들렸을까? 다행히 들어갈게-. 라는 말과 함께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났다. 문 뒤로 창문서 햇빛이 쏟아질 것을 생각할 것을 각오하고 미리 미간을 좁히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더 밝은 햇빛에 손을 들어 가렸다. 베린-? 다시 저를 부르는 소리에 베린은 잠시 꾸물거리곤 기침으로 답했다.
"콜록…. 죄송해요. 문까지 걸어갈 힘이 없어서..."
"봄인데 기운이 없어 보이네. 약은 먹은 거 맞지? 퀸시가 너 많이 힘들어한다고 한번 와달라고 했어."
모두 많이 걱정하고 있어. 조곤조곤, 다정한 목소리가 흘렀다. 퀸시가 저런 고운 말을 사용했을 리는 없지만, 여튼간에 제 이야기를 하긴 한 모양이었다. 하기사 근 5일간 퀸시를 좀 괴롭히기는 했다. 나가지 않으려고 별 아픈 척 다해가며 부려 먹었으니 말이다. 나름 룸메이트라고 신경 써주긴 했는데. 미안함이 문득 밀려와 발끝을 꿈질거렸다. 나도 그렇고. 얼굴 좀 보여줄래? 조심스레 건네지는 말에 베린은 덮고 있던 담요를 걷어내고 소파서 몸을 일으켰다. 콜록콜록! 연신 내뱉는 기침이 말라 있었다.
매니저는 잠시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지다 일단 전기 포트에 물을 담고 가동한 후 새벽조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던 커튼을 단번에 열어젖혔다. 아까보다 훨씬 밝은 빛이 환히 밀려 들어왔다. 멍하니 있다가 피하지도 못하고 눈을 찡그리자 네가 어둠의 자식이야? 하는 장난스러운 매니저님의 목소리가 흘렀다. 창문을 열어야 환기가 될 테지만, 고개를 젓자 매니저님은 창에서 손을 떼었다. 필요한 거 없어? 아뇨. 그 대답에 매니저님은 돌아다니길 그만두고 제 앞으로 다가왔다. 테이블에 다 끓은 전기 포트를 내려놓고, 그 옆에 살짝 걸터앉을 때까지 베린은 매니저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매니저는 베린의 얼굴에 손을 대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얼굴에 피곤함이 좀 묻어나긴 했지만, 며칠만이라고 해도 베린의 얼굴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아 하면 전혀 아니지만, 베린의 평균치로 보아 나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나가지 않았을 뿐 식사도 적당히는 챙겼고, 영양제도 안 챙기진 않았다. 그러니 베린은 제 야윈 뺨이 도드라지도록 고개를 돌렸다. 헉. 예상한 헛숨에 베린은 끌어올려 지는 입꼬리에 힘을 주고 표정을 유지했다. 눈을 조금 굴렸지만, 그 정도로는 눈치채지 못하리라.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고 꾹꾹 눌렀다. 물론 연기였다.
"베린, 약 먹었어?"
"콜록, 아니요."
"왜? 먹으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르잖아. 영양제도?"
"질렸어요. 콜록. 어차피 더 나빠지지는 않잖아요."
"그래도…. 그럼 차라도 한 잔 마시자. "
제가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하면 매니저님은 신경을 쓴다. 무능력하고 쓸모없는 제 모습이 달라 보이길 기대한 적도 있었지만, 이런저런 방법으로도 베린 저에겐 역시 무리였다. 자신은 생전부터 갈고닦은 무술 따위 없어 좋은 실적을 많이 쌓을 수도 없었고, 얼굴만으로 SNS 스타가 될 수 있을 정도도 아니었으며, 하다못해 악마조차 인정하는 친절하고 상냥한 행동거지마저도 불가했다. 좋게 말해 은색이라 칭하기는 하나 기껏해야 어디 구석에 먼지에나 빗댈 수 있을 회빛 머리카락이 푸석거리며 목 뒤쪽서 애매하게 간질거렸다. 하다못해 태어나며 얻은 색채마저도 칙칙하기 짝이 없다.
물론 매니저님은 이런 저라도 세심히 챙기고 보살폈다. 그게 단순히 일이어서. 라는 이유가 아닌 것이 어쩜 제가 본 생전의 누군가와도 닮아있었다. 그녀는 14 지부에서 단 셋인 주요관리직 중 한 명이었으며, 사신들과 제일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매니저의 직위에 있었다. 부족한 일손에 언제나 쌓여있는 서류에 임무 동행, 출장, 세미나 등등까지 하자면 몸이 셋이라도 부족할듯한데. 저가, 그리고 14 지부 모두가 매니저에게 호의를, 또 누구는 그 이상의 것을 가지게 된 것은 다분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라고 베린은 생각했다.
얼마 못 있겠지만 그래도 널 챙겨야겠다며 매니저는 손을 놀렸다. 끓은 물에 티백을 담가 간단히 내밀어 진 카모마일 차는 나인의 선물, 초콜릿 칩 쿠키는 테오와 함께 만든 것. 매니저님이 하나하나 챙겨주는 것에도 다른 사신들이 묻어나왔다. 좀 싫은데. 그 정도의 생각을 하며 머금은 찻물이 묵직하게 넘어갔다. 카모마일 차가 원래 이렇게 무거웠던가. 꿀을 타지 않았음에도 어쩐지 목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 베린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콜록! 콜록콜록! 하고 기침을 짜냈다. 전기 포트에서 나온 김이 방안에 퍼져 그나마 목을 적시고 있었는데, 기침을 억지로 뱉어내니 따끔따끔함이 목 안쪽에 가득 퍼졌다. 이렇게밖에 다가갈 수 없는데. 아니, 다가가는 것도 못하는데. 이유를 만들고 핑계를 대 이렇게 작게나마 시간을 버는 것밖에 못 하는 저였다. 그 목적으로, 아까부터 자꾸 화면이 밝아지는 매니저 단말기를 베린은 태연한 척하며 무시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붙잡고 싶은데, 서류 도중 나온 모양이니 이만큼이 한계였다. 진동도 소리도 꺼져있어 매니저는 제 뒤의 단말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벌써 다섯 번째 울리는 알람에 여기서 더 늦췄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될 것 같아 베린은 하는 수 없이 힘없이 손을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덜컥. 제 뒤의 상황은 생각도 못 하고 있던 매니저가 흠칫한 탓에 테이블이 흔들렸다.
[매니저!!! 캬악!!! 왜 이리 전화를 안 받는 거냥!!!]
"헉, 죄송해요. 냥선배님! 금방 가요!! "
이크. 베린, 미안해. 너무 오래 있었나 봐. 제가 붙잡고 있었는 줄도 모르고, 매니저님은 사과했다. 가져왔던 티백을 소중히 챙겨 들고, 다른 손에는 단말을 들고 냥 선배에게 해명하며 급하게 문을 열 때까지 베린은 가만 지켜보기만 했다. 다시 멀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가진 유일한 패. 자신의 특권. 바로 오늘처럼, 병약함은 매니저를 제 곁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허나 고작 15분 즈음 되었나. 5일을 기다렸는데, 고작. 제가 이럴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미련하고 유치하게 억울함이 밀려왔다. 밀려드는 생각들에 잠시 머리가 핑 돌고 세상이 아득히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해 휘청였다. 베린! 짤막이 외치는 목소리가 웅웅 울리는 것마저 꼭 저와 유리 벽을 두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이성따위 던져버린 생각이 들었을 즈음, 무슨 정신이었는지 저는 일어나 매니저를 붙잡고 있었다. 아직 어질 거리는 머리를 짚고, 무어라 말을 꺼냈다. 떨리는 목소리 끝에 진득한 호흡이 매달려 잠시 말을 버벅거려야만 했다.
"괜찮아요. 다,다음에...!"
"다음에?"
"콜록... 찾아갈게요."
"...응?"
"...아니 콜록! 제가 말실수를…! 콜록! 콜록!!"
"그래. 문 열어두고 있을게."
"힉?"
제가 무슨 헛소리를 한 건가. 어차피 유치한 짓밖에 할 수 없는 저라면, 이리 투정이라도.가 분별없이 뒤섞였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마냥 기침만이 터져 나왔다. 매니저님이 저를 보고 웃고 있었음은 아마 바보같은 삑사리 때문이었을 것이고, 허락의 말도 단지 매니저님은 언제나 모두에게 상냥한 탓일 터였다. 다만 지금은 그 정도라도 괜찮다고 생각해버렸다.
바람이 불어와 창밖에는 눈…. 아니, 벛꽃잎이 날리고 있었다. 봄이었지, 참. 그럼 매니저님의 얼굴에 약간 붉은 기가 돌았던 것 같았던 일은, 아마 봄이라고 따뜻해진 날씨가 그만 저와 꼭 닮은 온기를 가진 그녀에게 이끌려 내려앉아 버린 것이거나, 단순한 저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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