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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사무실에서 타닥타닥 타자 소리만 울렸다.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시계를 확인하자 바늘이 8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퇴근 시간은 벌써 훌쩍 넘었지만, 도저히 일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실수임에도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냥 정각에 퇴근해버린 팀장을 생각하면 정말로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그나마 동료들과 친해서 다행이었지. 같이 팀장을 까주던 동료들이 없었더라면 매니저는 벌써 짐을 싸서 나갔을 게 분명했다.
때려치울까. 매니저는 한숨을 쉬며 책상 위로 엎어졌다. 어차피 오늘 내로 끝낼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도와준다면 일찍 끝낼 수 있겠지만 지금 시간에 회사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다들 각자의 일 때문에 남아있을 게 분명했다. 야근이 나을까 주말 출근이 나을까 고민했지만 둘 다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어차피 야근을 해봤자 끝내지 못할 게 분명하니 내일 일찍 나와서 끝내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었다. 차라리 내일 고생하자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뭐 했어요?"
"깜짝이야!"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싱글거리고 있는 유세프의 모습에 매니저는 간담이 내려앉았다.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원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매니저가 알고 있는 것은 다른 기업의 높은 직위에 있다가 왔다는 것과 회장님의 손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 정도. 다른 기업에서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회장님의 손자라는 소문은 터무니없을 정도였다. 누군가가 '그럴 것 같다'라고 했던 것이 어느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그 사람이 회장님 손자다'하고 퍼져있었다. 당사자가 아니라고 부인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유세프에게 그런 것을 물어볼 정도로 간이 큰 사람은 없었다.
"오늘 야근이에요?"
"아, 네."
"이거 분명 팀장님께 부탁드렸던 것 같은데."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하셔서요."
거의 끝냈으니 이제 퇴근할 거라 답하려 했지만 유세프가 한 걸음 더 빨랐다. 어느샌가 매니저의 옆으로 와 작업하던 것을 하나씩 확인했다. 알 수 없는 거리감. 아무리 비좁은 곳이라 할지라도 너무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매니저는 입을 꾹 다물고 몸을 최대한 움츠렸다. 얼마간 그러고 있었을까 유세프가 움츠러든 매니저를 발견하고는 허리를 세웠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불편했겠네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음, 이거 도와줄까요?"
"네?"
"이거 원래 저희 부서 일이었는데 팀장님께서 자신이 하실 수 있다고 가지고 가신 거였어요."
"그런 거라면 저는 이만 퇴근해야겠네요. 팀장님이 직접 하신다고 하셨던 일인데 제가 손을 댈 수는 없죠."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내리며 빠르게 자리를 정리한 매니저는 퇴사라는 단어를 마음속에 새겼다. 조심히 가라는 유세프에게 꾸벅 인사를 하곤 직접 만든 퇴사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가는 발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2주 후, 갑자기 팀장이 전근 발령이 났다며 부서가 한바탕 뒤집어졌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냐며 팀장에게 묻는 이들이 있었지만 팀장은 이상한 얼굴을 하며 묵묵히 짐을 쌌다. 팀장의 바로 앞자리였던 매니저는 팀장이 어디로 발령 났는지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이직이나 퇴사하는 게 나을 정도로, 좋은 곳은 아니었다.
"매니저님."
"아, 유세프님.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음, 매니저님이 어떤지 보러왔어요. 팀장님 전근 발령 나셨다면서요."
"네… 갑자기 발령 나신 건데 생각보다 별 말이 없으시네요."
"그런가요. 이제 매니저님이 퇴사하지 않으셔도 되겠네요."
자신은 이만 가야겠다며 손을 흔드는 모습에 매니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자신의 퇴사를 바라지 않았기에 팀장을 내쫓은 것이라는 듯한 말인 것 같았다. 아냐, 아니겠지. 괜한 기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드는 싸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
새 팀장이 오고 오랜만의 회식날. 매니저는 쌈을 입에 밀어 넣으며 옆자리에 앉은 유세프의 눈치를 살폈다. 새로 온 팀장은 매니저가 평생 밑에서 일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다. 기본적인 예의와 배려는 당연했고 칼퇴근을 지향하는 사람이었기에 정말로 급한 일만 아니었다면 야근은 없었다. 나이가 많건 적건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했으며 일방적인 비난이 아니라 비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많은 장점 중 단 하나의 단점은 다른 부서와 회식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었고 하필 다른 부서가 '그 사람'이 있는 부서라는 것이었다.
수정의 수정을 거듭한 작업이 끝나고 OK 사인을 받았을 때 회식을 한다는 말에 저도 갈래요! 하고 외친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어차피 온 거 즐기다 가라는 동료의 말이 생각났지만 즐길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분명 처음에는 동료들과 같이 앉아있었는데 어느샌가 유세프의 옆자리에 앉아있었으니, 매니저는 오늘 오랜만에 배불리 먹자며 소화제를 건네준 동료를 속으로 칭찬했다. 덕분에 오늘은 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전에 있던 팀장이 전근하러 가게 된 이후 매니저는 이상하게도 유세프와 자주 엮이게 되었다. 가끔 혼자 점심을 먹으러 갈 때 도착한 식당에 이미 유세프가 있다거나, 자주 가는 단골 카페에서 마주친다거나. 처음엔 단순한 인사만 하다 점점 회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어느 샌가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게 되는 친구도 아니고 회사 동료도 아닌 어중간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차라리 그런 어중간한 사이였으면 좋으련만 유세프는 알 수 없는 행동들로 매니저가 롤러코스터를 타게 했다. 얼마 전에도 유세프가 해외로 출장을 갔다 오며 사 왔던 팀원들의 선물에는 다른 팀에 속해있는 매니저의 선물도 포함되어있었다. 가끔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군것질거리를 팀원들을 위해 사 온다는 말을 들었기에 매니저도 아무렇지 않게 선물을 받았었지만 사람들에게 들었던 것과 달리 선물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향이 좋다고 말했던 향수와 입맛에 맞는다며 자주 먹었던 고급 초콜릿. 집에 와서 상자를 풀어본 매니저는 바로 유세프에게 선물을 잘 못 준거 같다고 연락을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매니저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건 매니저님을 위해 사 온거에요.]
그 뒤로도 다른 사람들 몰래 매니저에게만 간식을 준다거나 어쩌다 야근할 때 같이 남아서 일을 도와준다거나 하는 알 수 없는 유세프의 행동에 매니저의 마음만 싱숭생숭해질 뿐이었다. 야근에 찌든 디자인회사 친구는 널 좋아하지 않는다면 절대 야근은 같이 하지 않을 거고 당장 잡으라고 외치곤 했지만, 매니저는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연애를 한 지 하도 오래되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매니저는 유세프에게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가끔 기분이 이상해지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기는 했지만 그건 유세프를 보고 떨려서가 아니었다. 상사랑 단둘이 남았는데 갑자기 상사가 친절한 척 하며 해주면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은 대부분의 회사원이 겪어봤으니까. 보통 상사가 자기에게 시킬 것이 있거나 아니면 뭔가 켕기는 것이 있어서 친절하게 해주는 게 당연했는데 하물며 회장님의 손자라 소문난 사람이 자신에게 잘해준다면? 답은 하나였기에 유세프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연애의 감정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한잔 두잔 들어가는 알코올 덕분에 매니저의 기분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친한 동료들 사이에 껴 부어라 마셔라 하다 보니 어느새 주량을 넘겨 옆에 유세프가 있건 말건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2차로 맥줏집에 갈 때 자신을 부축해준 사람도, 3차로 왔던 노래방에서 주저앉았을 때 자신을 업어준 사람이 유세프라는 것을 몰랐다. 매니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벽을 짚고 모든 것을 게워내고 있을 때였다.
"속은 괜찮아요?"
"네… 죄송해요. 폐를 끼쳤네요."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바래다 드린다고 했잖아요."
언제 그런 말을 들었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유세프는 괜찮냐고 물으며 매니저의 손에 물병을 쥐여주었다. 그 찰나의 순간, 유세프와 눈이 마주친 매니저는 다시 얼굴을 숙였다.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 걱정스러운 눈빛과 말투, 그리고 자신 때문에 더러워진 명품으로 보이는 구두. 차라리 이대로 필름이 끊기면 좋으련만 이미 모든 것을 다 게워낸 후였기에 정신만 번쩍 들 뿐이었다. 매니저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자 정말로 괜찮냐며 유세프가 다가왔지만, 매니저는 괜찮다고 소리를 높여 대답하고는 벤치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갑자기 손을 잡은 유세프만 아니었다면 벌써 지금쯤 저 멀리 도망쳤을 게 분명했다.
사실 손을 잡았다기보다는 살짝 아주 살짝 손을 걸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별거 아닌 사소한 행동에 매니저의 마음이 마치 고장이 난 것처럼 덜그럭거렸다. 너 좋아하는 거니까! 하고 외치던 친한 동료들과 친구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마치 제야의 종소리를 처음 들었던 그 날처럼. 눈을 돌려 흘깃 유세프를 보니 그도 얼굴에 취기가 올라와 있었다. 잠깐의 정적. 어색한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유세프였다.
"아까 물어봤었죠? 왜 이렇게 잘해주냐고."
"전에 있던 팀장도 내쫓아주고, 야근 할 때마다 같이 야근하는 척하면서 야식시켜주고 그리고 또 뭐가 있었죠?"
유세프의 물음에 매니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달빛이 은은하게 유세프를 비추고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매니저는 유세프의 얼굴을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눈치를 채셨을지 모르겠네요. 제가 좋아한다는 거."
"네?"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짝사랑은 내 적성에 맞지 않아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거든요. 그러니까 각오해주세요."
"각오요…?"
"어쨌건 당신도 날 사랑하게 될 거니까요."
어처구니없는 말에 매니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유세프와 눈을 마주쳤다. 도대체 그게 무슨 자신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부끄러운 지 귀 끝이 붉게 물들어있었지만 당연하다는 얼굴과 사랑스럽다는 듯이 자신을 보는 눈빛에 매니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유세프는 밝은 미소를 지었고 그 순간 매니저는 알 수 있었다. 그 미소. 정말 별거 아닌 그 사소한 행동에. 자신이 유세프를 사랑하게 될 거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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