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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주목. 전학생이 왔다. 아직 모르는 게 많을 테니까 잘 도와 주고, 괜히 따돌리거나 하지 않기를 바란다. 전학생, 너도 인사하렴. 네 자리는 저쪽에…"
제각각의 시선이 호기심 반, 무관심 반으로 저에게 날아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내리는 듯한 눈길을 느끼며, 소녀는 맞잡은 손을 더욱 꼭 쥐었다. 이 한 번의 인상으로 자신이 어떤 아이인지 결정될 것이다. 양아치인지 범생이인지, 공부는 얼마나 잘 할 것 같은지, 떠들썩한지 얌전한지. 소녀는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고 싶지 않았다. 다가가기 쉬우면서도 나쁜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은 아이로 보였으면 좋겠다. 딱 그만큼이 소녀가 감당할 수 있는 위치였다. 원래 학교란 책임질 힘이 없다면 어떤 식으로든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곳이니. 너무 당당하게 보여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주눅이 들어 있어서도 안 되었다. 적당히 그리고 평범히.
소녀는 선생님이 가리키는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온기 없는 시선과 저마다의 수군거림이 숨을 압박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목소리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아 몸이 움츠러들었다. 안 돼. 기 죽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으면서. 소리를 죽인 발걸음이 제 자리를 찾아 멈추었다. 제 짝인 아이가 저를 흘긋거리면서 주섬주섬 몸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앉자마자 바로 엎드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랬다간 바로 눈에 띄어 버릴 게 분명하니까. 그런 취급이 싫어서 전학을 온 만큼 실수하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반장은 쉬는 시간에 전학생한테 학교 길 좀 알려 줘라. 조례는 여기까지."
네에― 건성으로 대답하는 목소리가 길게 늘어진다. 반장처럼 보이는 아이를 찾아 교실을 조심스럽게 살폈지만, 특별히 자신에게 다가온다거나 하는 아이는 없었다. 그야 아무리 반장이라도 그런 번거로운 일을 나서서 떠맡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뾰족한 것이 가슴을 쿡쿡 찌르는 바람에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선생님이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려온다. 순식간에 왁자한 웅성거림이 교실을 가득 메웠다. 스타트는 무사히 끊었다. 안심이 되자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완전히 힘이 풀린 소녀는, 그대로 양 팔에 고개를 묻었다.
점심시간까지 큰 문제 없이 버텼다. 종이 울리자마자 혼자 식당으로 달려가서 식사를 마치고 도망치듯이 빠져나와야 했던 것만 제외하면. 아직 반장을 포함한 그 누구도 전학생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귀찮은 거겠지. 고 2나 되어서 전학을 온 애한테 유치원생 가르치듯 설명을 해야 하니. 소녀는 교실로 가려던 발을 돌려세웠다. 어차피 눈치만 보면서 불편하게 앉아 있을 거, 직접 구조 정도는 익혀 두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일찌감치 밥을 먹은 덕에 점심 시간은 여유로웠다. 가장 먼저 찾아 둘 곳은… 역시 보건실이겠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답게 건물은 그리 넓지 않았다. 이번 여름 방학 때 신축 공사를 한다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기껏해야 화장실 누수 방지 정도겠지. 덕분에 길을 익히기도 쉬웠다. 보건실은 2학년 복도 끝에 있다는, 편리한 정보도 습득했다. 여차하면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빠져나오기 좋은 곳이었다. 물론 정말로 못 견딜 때만. 숨이 막히는 공기에도 적응을 해야 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한 학교 생활을 위해서는 아무렇지 않아질 필요가 있었다. 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누나가 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생각하자 힘이 났다.
소녀는 학교 건물 바깥의 구석에 자리잡은 매점을 확인한 후, 짧은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이참에 뒷문이 어디로 통하는지 볼까. 운이 좋다면 집에서 이어지는 지름길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호기롭게 뗀 발걸음이었지만 몇 발자국 못 가 땅에 붙어 버렸다. 학교 뒤편으로 연결되는 샛길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뒤에는 담벼락밖에 없을 텐데. 길이 나 있다는 건 설마 개구멍을 뚫은 표시인가? 이어진 호기심이 등을 부드럽게 떠밀었다.
…개구멍은 없었지만, 화단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런데도 화단의 상태는 놀라울 만큼 훌륭했다. 이미 봉오리를 틔운 꽃이 몇 개씩, 아주 가지런하게 자라 있었다. 구석에서는 꽃삽과 목장갑도 발견했다. 원예에는 조예가 없는 자신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꾸준히 관리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정말로 애정을 가지고 꽃을 돌보는구나. 막 꽃을 피워낸 작은 꽃들이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 꽃잎에 코를 살며시 갖다 대고 나서야, 봄의 물큰한 향기가 실감이 난다. 누가 이런 정성을 들여서 아무도 오지 않는 꽃밭을 가꾸는 걸까. 아마 경비 아저씨겠지.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가 생긴다면, 가장 먼저 이곳에서 꽃을 구경하고 싶었다. 굳이 저 앞에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를 제치고 이런 조그만 세상을 만끽할 줄 아는 사람과 함께 즐기고 싶었다. 꽃이 지기 전에 친구라 부를 사이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뒷문까지 둘러보려면 슬슬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 아쉬운 대로 걸음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제 꽃들이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후후후!"
등 뒤에서 화살처럼 꽂힌 목소리에, 그만 딸꾹질을 내뱉고 말았다.
"누, 누구…?"
"그건 저도 묻고 싶은 말입니다만."
돌아본 곳에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웃고 있었다. 같은 교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학생이었고 넥타이 색을 보면 3학년이었다. 기척도 전혀 느끼지 못했고 분명 막다른 벽밖에 없을 텐데 어떻게. 소녀의 궁금증에 대해서는 아랑곳 않은 그 사람이 한 발짝 다가왔다. 탐색하는 것처럼 이쪽을 빤히 보는 눈동자가 꼭, 짙은 루비 같았다. 어떡하지. 귀신인가. 이 대낮에? 도망가야 하나? 신고는 담임 선생님에게 하면 될까. 선생님 지금 어디 계시더라…. 두서없이 끊어지는 생각만 머리에 넘실거렸다.
"무서워하고 있군요. 후후후…"
그 반응 자체를 즐긴다는 듯 웃음을 흘리는 얼굴이 다시 한 발을 내딛었다. 동시에 소녀도 뒷걸음질쳤다. 이대로 뒤로 돌아서 달리면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대한 빠르게 도망칠 궁리를 하던 다리가 문득 꼿꼿하게 펴진 것은 방금 전 들었던 말을 곱씹었을 때였다.
"이 화단, 선배가 돌본 거에요?"
"…어?"
멈칫. 루비처럼 붉은 눈빛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갑자기 멈춘 반동으로 긴 머리칼이 휙 하고 팔랑였다. 짧게 돌아온 되물음은 조금 전과는 다르게, 솔직한 느낌이 났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가장 놀란 모양이었다. 소녀는 덜덜 떨리는 발밑을 힘주어 디뎠다. 일단 말은 통하는 것 같으니 무작정 도망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귀신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하니 겁이 났지만 어떻게든 부딪혀 보기로 했다.
"죄송해요. 나쁜 뜻은 없었어요. 그냥 우연히 지나가다 봤는데 예뻐서…"
최선을 다한 변명에도 그는 말이 없었다. 역시 심기를 불편하게 한 걸까. 따지자면 내가 귀신이어도 나한테 배짱도 좋게 말을 거는 사람을 곱게 볼 리가 없지. 다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마주 보는 얼굴이 화가 난 것 같지 않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그건 정말 단순히 놀란 것 같았다. 처음 접하는 반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 낮고 깊은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온 것은 잠시 후였다.
"…당신."
"네, 네?"
"이 학교 학생이 아니죠?"
"어…"
이번에 멍청한 반응을 보인 쪽은 자신이었다. 뜬금없이 그런 질문은 왜…. 도저히 의도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일단은 묻는 대로 대답하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애매한 웃음을 띠고서 고개를 저었다. "저도 여기 학생이에요. 전학 온 거라 오늘이 처음이지만." 그는 그 말을 듣고 어느 정도 납득하는 표정을 띄웠다. 여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아 보였지만, 다른 질문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신기한 분이로군요."
간단한 감상만 남긴 채 그는 몸을 돌렸다. 익숙하게 꽃삽을 집는 손길에는 더 이상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소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가도 된다는 허락일까? 조심스럽게 한 발을 뒤로 뺐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쭈그리고 앉아 흙을 두드리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길을 돌아 나가는 동안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예비령이 울리는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그 사람, 귀신이니까 수업도 들을 필요가 없는 거겠지? 그런데 애초에 귀신이 꽃밭을 가꿀 수 있나?
결국 저지르고 말았다.
"무거워…"
그러게 쓸데없이 심부름을 덥석 하겠다고 해서. 팔에 가득 올려진 교과서며 유인물이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 옮기면 보건실에 가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어차피 문학 선생님이 출장을 가셔서 자습을 한다고 했으니 수업을 듣지 않아도 상관 없었다. 오히려 떠들썩한 아이들 사이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게 더 숨 막힌다. 도와줄 사람을 찾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눈에 띄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만은 냉큼 제가 하겠다며 나선 이유였다. 한 발짝 무거운 걸음을 밀었다. 교무실이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팔이 저렸지만 참아야 했다.
문제가 있다면 이미 양 손이 종이 더미에 깔린 탓에 굳게 닫힌 교문을 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팔꿈치로 밀어 보고, 어깨로 두드려도 보았으나 수업 시간이라 그런지 안에서 나오는 기척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업이 없는 선생님이 한 분도 안 계신가…. 아니면 듣고도 모른 척 하시는 건가…. 조금 억울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슬슬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어떻게. 좀 도와드릴까요?"
"아, 네! 감사합… 우와악?!"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얼굴만 그리로 돌렸다가 나사 빠진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어제 화단에서 봤던 그 귀신. 뭐가 그리 재미난지 묘한 미소를 띤 남자가 거기 있었다. 제 풀에 놀란 발이 뒤로 휘청였다. 어어. 균형을 잡으려 힘을 준 것이 되려 저들끼리 꼬이는 모양을 만들어냈다. 몸이 옆으로 크게 기울었다. 팔에 안겨 있던 종이 더미가 와르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아니, 그보다 지금 넘어지고 있는데?
"어이쿠. 조심하셔야겠습니다?"
비명도 못 지르고 부딪히나 싶던 순간 강한 힘이 팔을 잡아챘다. 반동이 자신을 앞으로 떠밀었고, 다리는 조금 전과는 정 반대로 젖혀진 몸을 미처 지탱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눈 앞의 사람에게 안긴 것 같은 모양새가 된 후였다. 으앗. 또다시 맥아리 없는 단말마가 튀어나왔다. 소녀는 급히 물러나며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에 양 손을 가져다 대었다. 바보짓도 이런 바보짓이 없지. 눈을 질끈 감았다.
"죄, 죄송해요!"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뜻밖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살그머니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곧 발밑에서 부스럭대는 소리. 따라서 시선을 돌리니 어지럽게 널브러진 책이며 유인물을 주워담는 그가 보였다. 허둥지둥 옆에 쪼그리고 앉아 이미 구김이 진 종이 뭉치를 그러모으자 벌써 귀에 익어 버린 웃음소리가 후후, 하고 들려왔다.
"도망가지 않으시는군요."
"네?"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보다 어디에 두면 되죠? 절반이 넘는 몫을 한 손에 받쳐 든 그가 남은 한 손으로 가벼이 교무실 문을 열었다. 아… 도와주려는 거구나. 소녀는 남은 종이를 대충 끌어안고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얌전히 뒤를 따르는 모습에서, 특별히 무서운 점은 찾을 수 없었다. 마냥 겁을 낸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귀가 화끈해지는 감각에 소녀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칸막이로 둘러진 책상 사이에서 찾는 선생님의 이름표를 발견하고 심부름을 무사히 마쳤다. 예정대로면 이대로 보건실로 가면 된다. 하지만 일단은 계획에 없던 사람, 아니 귀신인가, 을 만나 버렸으니 일정을 조금 수정해야겠지. 소녀는 자켓 끝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인사하면 좋을까?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내가 고마워한다는 걸 무례하지 않게 전할 수 있을까?
"저…."
"또 볼일이 있으십니까?"
잘 가라는 인사치레도 없이 떠나려던 걸음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괜히 붙잡은 건가. 잠깐의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쪽을 응시하는 얼굴이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러십니까?"
"그, 뭔가 답례라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자연스러운 문장이었다. 답례, 라니. 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인 데다가, 겨우 문 한 번 열어 준 것이 빚을 졌다고 여길 만큼 큰 것도 아니지 않나. 다만 말을 맺어야 한다는 생각에 되는 대로 뱉은 쪽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상대도 그저 별 것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는 반응 정도를 기대했다. 설마 잘 걸렸다는 듯이 진심으로 눈을 빛낼 줄은.
"후후후…. 그렇다면 딱 맞는 보답이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 보건실을 가기는 그른 것 같다, 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화분 옮겨 심는 걸 도와달라고요?"
"싫으십니까?"
아뇨. 싫은 건 아닌데…. 스스로 무덤을 파 버린 죄가 있으니 마음껏 따져 묻지도 못하고 목소리가 작아졌다. 대체 어떤 무시무시한 일을 시키려나 걱정하던 생각이 무색했다. 화단에 심어 놓고 키우는 꽃 말고도, 어디에서 났는지 화분 하나를 들고 온 그는 대뜸 답례를 요구했다. 그래 봤자 새 화분도 그가 이미 준비해 둔 상태고, 소녀에게 주어진 일은 그저 그 새 화분에 흙을 꼼꼼히 채워 넣는 것뿐이었다. 꽃을 옮기는 일은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니 직접 하겠다고 했다.
어떤 품종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그맣고 노란 꽃이 예쁜 식물이었다. 그의 설명을 토대로 짐작해 보면 '코넬리아' 라는 다소 사람다운 이름도 붙여 준 것 같았다. 조금 독특했지만 귀여운 작명 센스였다. 그게 이 사람 나름대로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겠지. 꾹꾹 눌러 담은 흙에 삽을 꽂아 뿌리가 들어갈 공간을 파 내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감사합니다. 후후후… 이제부터 신성한 의식을 거행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성한 의식이요?"
"네. 코넬리아를 새 화분에 옮겨 심는 의식이라고나 할까요."
"…구경하고 싶어요."
돌연 미소가 사라진 얼굴이 자신을 응시했다. 처음 만났을 때 보여 준 것처럼 당황한 표정이었다. 깜빡. 깜빡. 짙은 붉은색을 담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졌다가 나타나기를 두어 번. 소녀는 시선을 데구르르 굴리며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역시 친하지도 않은데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이상한가. 하지만 보건실에 누워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느니, 이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특이하긴 하지만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다는 이유 모를 확신이 스며든 탓이기도 했다. 어색한 침묵이 한 박자 지나고 나서야 그의 입꼬리가 다시 말려 올라갔다.
"좋을 대로 하시죠."
"감사합니다."
얼굴에 힘이 풀리면서 웃음이 나왔다. 아마 이 학교에 오고 나서는 처음일 것이다.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뺨에 흙이 묻었지만, 조금 나중에 닦아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저…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코넬리아가 무사히 새 둥지를 찾고 나서 조심히 입을 뗐다. 뒷정리를 하던 그가 휙 고개를 돌렸다. 길게 드리운 머리카락 끝에 붙었던 돌 부스러기가 회전의 반동으로 떨어져 나갔다.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는 눈빛이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소녀는 머리카락 끝을 잡고 배배 꼬았다. 윽. 말하기도 전에 창피함이 몰려왔지만 꼭 확인하고픈 것이 있었다.
"그…. 그러니까, 귀신…이에요?"
"…네?"
"아, 아니, 그게!"
뱉어 놓고도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그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머리가 너무 복잡해질 것 같았다. 기척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지 않나, 어제는 막다른 길이었고. 종이 울려도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제 할 일을 하는 여유로움까지. 일반 학생이라면 엄두도 못 낼 행동이었다. 실은 이번에도. 자신이야 심부름으로 나왔다지만 엄연히 수업 중이었기 때문에 그는 교실에 있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출석에 신경을 쓰기는 커녕 느긋하게 화단에서 꽃을 옮겨 심고 있는다는 건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녀는 꼬아 낸 머리카락을 꾹 잡아당겼다. 그는 잠시 말을 잃더니 곧,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후! 후후후후… 후후후!"
"왜, 왜 웃어요!"
"살면서 정말 많은 오해를 받았지만 귀신이냐는 말은 또 처음이군요. 후후후후!"
"그치만…! 어제는 벽 뒤에서 튀어나왔잖아요!"
"구석에 개구멍이 있었습니다만?"
아… 그, 그랬나? 생각하니 갑작스런 출현에 놀라 작은 모퉁이까지는 제대로 살피지 않았었다. 손가락에 감긴 머리카락이 맥없이 떨어졌다. 창피함이 얼굴을 뒤덮었다. 볼에 열이 잔뜩 몰렸다.
"발소리도 못 들었는데…."
"제가 원래 소리 없이 걷습니다."
"…종 쳤는데도 안 들어갔잖아요…."
"수업을 듣기 싫어서 종종 빠집니다."
완벽하게 지고 말았다. 점점 작아지던 목소리가 이내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잦아들었다.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멀쩡한 사람더러 귀신이냐고 물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힐까? 그냥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어제와 같은 생각을 했지만 이번에도 실현은 되지 않았다. 그가 이쪽을 향해서 한 걸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정 궁금하시다면 만져보시죠, 전학생 씨."
"아뇨!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새된 목소리가 튀어올라 삑사리를 내고 말았다. 다급히 손을 내젓고 나서야 또다시 장난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쪽팔려. 차마 화도 내지 못하고 손을 등 뒤로 돌려 맞잡았지만 열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오해해서 죄송하다며 사과를 건네자 머리 위로 가벼운 손길이 닿는다.
"괜찮습니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니까."
"…."
저도 평범한 사람이랍니다. 당신과 똑같은."
시선을 위로 올리니 쨍한 햇살을 등진 그의 미소에 눈이 부셨다. 흐르는 바람처럼 제 머리카락을 스쳐간 손에는 작은 나뭇잎이 들려 있었다. 그러니 너무 겁내지 마세요. 낮게 들려오는 속삭임이, 아주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그 음성에 홀린 것처럼 말이 나간 것은 어느 순간 눈치를 채지도 못한 후였다.
"내일,"
"네?"
"내일 또… 와도 될까요?"
"기이 제더카이안, 입니다."
응? 갑자기 엇나간 대답을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데, 들고 있던 나뭇잎을 훅 불어낸 그가 손끝을 가볍게 털었다.
"편하게 기이라고 불러 주시면 되겠죠."
"어…."
"다시 만나려면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후후!"
그건… 그렇네. 그렇구나, 여지껏 이름도 묻지 않았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아마 그 나름대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식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특이한 사람이었지만,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보통의 아이들보다 편한 느낌이 들었다. 겨우 두 번 만났다고 이렇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처음일 것이다. 귀신이라고 오해한 건 정말 미안하지만… 어쨌든. 소녀는 활짝 웃었다. 억지로는 꾸미지 못할 미소를 있는 그대로 내어 보였다.
"제 이름은요…."
화단이 보이기 전부터 달큰하게 꽃 향기가 퍼지는 것 같았다. 요즘 들어 하루에 한 번은 꼭 밟는 길이었지만, 새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마음이 들뜨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제일 초라한 이 길을 이토록 신 나게 걷는 것은 자신뿐이리라. 실은 한 명 더 있겠지만 그 사람은 개구멍으로만 드나든다고 하니 예외. 소녀는 점점 속도가 오르는 발을 재게 놀렸다.
"선배!"
"오셨군요."
특별한 인사랄 것도 없으면서도 분명 인사의 뜻을 담고 있는 말이 오갔다. 쪼그리고 앉아 꽃을 바라보던 기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더니 옆으로 한 걸음 비켜 주었다. 딱 일주일의 시간이 걸렸다. 소녀가 작은 화분을 향해 코넬리아라는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게 되기까지의 시간. 그리고 기이를 도울 만한 잡다한 일에 익숙해는 데 다시 일주일이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앞으로 일주일쯤 더 지난다면, 기이가 기척 없이 불쑥 나타나는 것에도 익숙해질 수 있지 않을까. 기이는 화단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었지만 종종 학교 안에서도 마주치곤 했기 때문에. 사람이 얼마나 사뿐사뿐 걷는 건지 바로 뒤에 올 때까지 눈치를 챌 수가 없었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돌아보면, 기대한 반응이라 만족스럽다는 얼굴이 저를 반길 뿐이었다.
"오늘도 수업 안 들어갈 거에요?"
"후후… 이제 저를 너무 잘 아십니다?"
그리고 그는 학교를 싫어했다. 일단 꼬박꼬박 교복까지 갖춰 입고 등교하기는 하지만 수업을 듣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내키면 빠지고 심심하니 짼다더라. 선생님들도 포기한 덕에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매일같이 학교에 나오는 이유는 결국 화단이 있어서일까?
"유급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미 늦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같은 학년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면 잡으러 다닐 거에요."
"이런. 선도부보다 조심해야 할 것이 생기겠군요. 후후!"
걱정을 담은 핀잔이었지만 장난기 어린 대답만 돌아왔다. 소녀는 푹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고등학생인데 정말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걸까, 이 사람은. 아직도 같은 반 친구를 사귀지 못한 입장에서 남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쪼그려 앉은 채 기이가 흙에서 잔돌을 골라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언가를 더 말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희미한 발소리가 귀에 걸리는 바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기이도 손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이곳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여러 명의 왁자한 발걸음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에 부사어처럼 욕설이 섞여 있었다. 서늘한 기운이 팔을 훑어내렸다. 점심 시간에 이런 으슥한 곳을 찾는 아이들이 어떤 부류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괜히 눈에 띄었다가 잘못 걸리면 큰일인데.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경보를 울려댔다. 다급한 마음에 기이를 보자 그가 까딱, 손짓을 했다. 걸릴 것이 전혀 없다는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기이의 시선 끝에는… 구멍이 있었다.
안 쓰는 화분과 오래된 낙엽 같은 것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조그마한 틈이었다. 기이가 익숙하게 화분을 밀어내자, 사람 하나가 지나다닐 만큼의 공간이 드러났다.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모퉁이를 하나만 돌면 바로 보이는 곳이라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교칙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 겨를은 물론 존재하지 않았다.
"이쪽으로."
기이가 속삭이기도 전에 소녀는 발을 뗐다.
"아슬아슬했네요. 진짜로."
"스릴 넘치는 경험이었습니다."
한탄처럼 내뱉자 가벼운 맞장구가 되돌아왔다.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 하니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몸을 피하고 나서야 아직 일과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다행히 점심 시간이 끝나려면 조금 정도는 여유가 있지만 그렇다고 정문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다시 개구멍을 통과해야 하는데 담벽 너머로 전해지는 담배 냄새와 쏟아지는 욕지거리는 통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기다려 봐야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담배 연기를 들이마셔야 할 꽃들을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다. 그러게 왜 하필 여기로 오냐고…. 속으로 화를 삭이다 기왕 나온 거 바람이라도 쐬자는 기이의 제안으로 잠시 한적한 길을 걸었다.
거리는 고요했다. 학교 뒤편으로 산이 하나 있는데, 이 길은 그리로 통하는 곳이라 일반인은 찾지 않지만 등산로도 아니기 때문에 인적이 드물다고 했다. 덕분에 처지도 잊고 느긋한 산책을 즐기고 말았다. 조금씩 후텁지근한 공기를 머금기 시작한 바람이 목에서 살랑거렸다.
"좋네요."
"제가 수업을 빠지는 이유 중 하나랍니다. 후후…."
"선배는 이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죠?"
"글쎄요, 어떨 것 같습니까?"
당연히 좋을 것 같은데요. 쿡쿡거리며 답을 말하자 기이는 말없이 따라 웃었다. 소녀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후. 내쉬는 호흡을 따라 어깨가 툭 내려앉는다. 혹시 식사를 위해 나왔을 선생님에게 들켜도 위험하니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먼지가 쌓인 벤치를 대충 털고 앉으니 꼭 시간이 멈춘 것처럼 부드러운 적막이 공기를 감쌌다.
"전학 오기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나 보군요."
"이래 봬도 나름 모범생이었으니까요?"
소리를 내서 웃는 표정의 울림이 전해져 왔다. 나란히 앉은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워서 마음이 간질거린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한 번도 없었다. 수업 시간에 학교 밖을 나갈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었다. 여기에 와서도 속 썩이는 아이는 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네. 예전 같았으면 무서워서 벌벌 떨었을 텐데 지금은 이상하게 조금 우습기만 했다. 소녀는 살짝 씁쓰름한 미소를 입에 물었다.
"…아마 같이 나올 사람이 없어서 그랬을 거에요."
전학 오기 전에는 외톨이였거든요, 저. 일단은 따돌림 당했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분위기에 휩쓸린 탓인지 이곳에서는 절대로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빗장이 속절없이 풀렸다. 반에서 제일 인기가 많던 아이와 척을 진 후로 친구를 잃었던 이야기, 그 뒤로도 계속 괴롭힘을 받아서 늘 혼자여야 했던 이야기. 결국 견디지 못한 날 부모님 앞에서 눈물을 보였고 전학 수속을 밟게 된 것까지. 동생들에게는 누나라서, 부모님에게는 장녀라서 말하지 못한 속마음도 전부 흘러나왔다. 기이는 시종일관 제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듣는 사람에게는 무척 다루기 성가신 주제일 텐데도 말을 자르지 않았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랬군요."
담담하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따뜻해서.
"외로우셨겠습니다."
참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선배."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후후!"
"음, 이제 갈까요?"
후련해진 마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실은 조금, 쑥쓰러운 탓도 있었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지만 멋대로 거북한 이야기를 해서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어 버리기는 했으니까. 걸음을 옮기자 등 뒤를 따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 속내는 여전히 모르지만, 무슨 행동을 하고 있을지는 어느새 익숙하게 짐작이 되었다. 별다른 말이 없는 걸 보아서 아마 저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서 눈이 마주치면 또 후후 웃겠지. 그리고….
"이번엔 답례는 없는 건가요?"
"답례라니, 애초에…!"
…평소처럼. 시덥잖은 농담을 건네면서 저를 약 올릴 것이다. 소녀는 아랫입술을 꾹 물고 눈을 흘기는 시늉만 했다.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놀리냐며 받아칠수록 장난에 말려든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알고서도 넘어가는, 일종의 암묵적인 룰 같은 거겠지. 그 능청스러움이 있기 때문에 어색하게 걷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분명 자신을 생각해서.
"좋아요. 그러면 내일도 선배랑 같이 화단 돌봐 줄게요. 답례로 충분하죠?"
"후후후, 그 정도로는 조금 아쉽지 않습니까?"
"뭐가 더 필요한데요?"
"학교 앞에 떡볶이가 맛있는 집을 압니다만."
"…그래서요?"
"같이, 후후…."
말을 재대로 끝맺지도 않고 그저 웃는다. 어물쩍 넘어간 단어에서 묘한 기대감이 읽혔다. 지금 용기가 안 나는 거구나. 어쩐지 알 수 있었다. 기이는 언제나 이런 사람이었다.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따금 그 내면이 보이는 사람. 소녀는 피식 웃었다. 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숨겨진 귀는 지금 무슨 색일까. 한 걸음을 크게 내딛으면서, 짐짓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수업을 빼먹고 나오는 건 안 돼요."
방과 후라면 또, 모르겠지만. 소녀는 그렇게 답하고는 숨을 내뱉으면서 웃었다. 기이가 따라 미소를 지었다. 머리카락에 얽혀 드는 바람 사이로 봄 향기가 짙게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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