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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이름은-'
비옥해진 토양이 물씬 풍기는 향을 맡으며 산책을 즐기고 있을 때 네가 말했다. 너에겐 없는 기억도 있다고. 알고 있었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전해 듣는 사실은 새삼 놀라웠다. 그래? 애써 담담한 말투를 유지했다. 티가 나면 안 되니까.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네 기억을 더 헤집고 싶지 않아 아직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나를 마주한 모든 날을 '없는 기억'으로 묻은 네게, 내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소 따분한 고등학교 생활이었다. 하루의 일과라곤 공부, 밥, 취침이 다였고 꿍얼대면서도 아침 7시 알람이 울리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학교를 11년째 다니다 보니 그 안에서 마주하는 것들에 흥미가 떨어진 지 오래였다. 그나마 재밌는 건 다른 애들을 구경하는 것 정도? 대각선 앞에 앉은 아이는 말이 없었다. 아주 조용했다. 학급 임원이 수행평가나 설문 조사 등의 이유로 말을 걸 때도 대화는 30초를 넘기지 않았다. 적응을 못 하는 게 아닌 안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단정한 은발은 흐트러짐 없이 왼쪽으로 묶여있었고, 그 모습은 마지막까지 유지되었다. 성적집계를 내기 위해 수행평가 확인명단이 건너오면 난 대각선 아이의 이름을 몰래 찾아보곤 했다. 나인. 서명란에 적힌 두 음절은 주인을 잘 담아냈다. 반듯하게 적힌 한글은 멋들어지게 영어로 쓰인 다음번 사인과 대조됐다.
나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어느 날 발견한 악보 한 장 때문이었다. 서랍에서 삐죽 튀어나온 종이를 보고 혹시나 바람에 날아갈까 넣어주려던 순간, 하얀 오선지 위로 쏟아진 음표를 발견했다. 평소 아주 작은 허밍도 하지 않던 나인이기에 다른 책상과 헷갈렸나 했으나 밑에 적힌 메모는 내가 아는 나인의 글씨가 맞았다. 아주 느리게, 조금 빠르게, 점점 빠르게. 음악과 나인. 생각해본 적 없는 조합이었다. 서명란에 자리하던 글씨를 오선지에서 보니 꼭 파티쉐가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깊이 생각할 틈 없이 들려온 뒷문이 열리는 소리에, 도둑질이라도 하다 걸린 아이처럼 종이를 쑤셔 넣고 자리에 돌아왔다.
원래 음악을 했었나? 가벼운 호기심은 무게를 더해갔다. 시간이 갈수록 농익은 궁금증은 무럭무럭 자라 결국 물음을 피워냈다. 어쩌다 떨어진 나인의 음악 교과서를 본 뒤 이때가 타이밍이다 싶어 나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조심스러운 몸짓은 처마 끝에 매달린 물방울 같기도 했다. 나인이 돌아보고 대답을 건네는 순간이 얼마나 억겁처럼 느껴졌던지. 푸른 눈동자가 내게 고정되고 어떤 말을 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분명한 건 무작정 부르고 봤다는 것. 그게 다였다.
저기, 라는 부름으로 시작해, 한 학기가 지나서야 건넨 인사말과 함께 반응해주던 나인의 웃음. 그날의 풍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빛이 스민 창가에 흘러온 벚꽃잎은 갈빛을 띠며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했고, 나무를 타고 내려앉은 푸른 잎이 그 주위를 감쌌다. 17살의 나인은 다정하고 공허했다.
역시나 30초를 넘기지 않는 대화가 끝나고,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이 저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인은 내게 추억으로 남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눈길이 자주 머무는, 조용한 애였다.
그리고 2년이 지나 고등학교 3학년. 나인을 다시 만났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번엔 내가 그 애의 대각선 앞자리였다. 나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나 역시 대입을 앞둔 터라 더 이상 그 애에게 할애할 시간은 없었다.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음에도 시선이 주재한 적은 있다. 벚꽃이 매화의 공백을 대신할 무렵. 강하게 부는 바람에 일렁인 꽃비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아름답고 신비한 광경이었다. 작은 소용돌이에 휘말린 꽃잎이 구석에서 빙글빙글 돌다 소멸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귀한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교실로 올라가는 계단은 한 가지 주제로 떠들썩했다. 이건 봤냐, 저건 봤냐 제각각 제가 본 풍경이 가장 아름다웠다 자랑하지만, 그 안에 나인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나 보다. 꽃잎이 나인을 감싸며 떨어진 광경을. 아주 작정한 듯이 그 애 주위로 몰려들었는데, 나만 봤나 보다. 내리는 꽃비에 슬며시 미소짓던 나인은 장담컨대 그 시간에 존재한 어떠한 것보다 아름다웠다. 다신 없을 봄이었다.
단풍잎보다 진한 노을이 산 중턱에 걸린 저녁 어스름, 벤치에 앉아있는 나인을 보았다. 흙먼지가 낀 벤치에 앉아 버석한 잎이 뒹구는 화단 위에 발을 올리고 광활한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나인. 내 기억에 나인은 더러워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웬일인가 싶었다. 나는 집에 가야 하는 것도 잊고 한참을 서 있었다. 아주 한참이나. 이따금 한숨을 내쉬는 그 애가 너무 신경 쓰여서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인.”
나인이 뒤돌았다.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는다. 형식적인 웃음이었다. 나인의 옆에 앉아 바닥에 방치된 돌멩이를 툭툭 건드렸다. 집에 안 가고 뭐 해? 고민에 고민을 더해서 나온 말치곤 싱거웠다. 나인은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그냥, 이라고 했다. 그냥. 그냥 가고 싶지 않았던 거다.
고개를 끄덕이곤 노을이 예쁘다는 말을 꺼냈다. 그제야 나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나와 이런 시답잖은 얘기를 하냐는 얼굴이었다. 따로 답하진 않았다. 표정으로 말했을 뿐, 직접 물은 건 아니니까. 혹여나 묻는다면 이렇게 답해줄 생각이었다. 그냥.
노을이 바다 아래로 잠기고서야 나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 치맛자락을 스쳤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게 되는 서늘함이었다. 나인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제 마이를 주섬거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팔을 위로 뻗고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아, 역시 안 움직이니까 좀 쌀쌀하다. 나인도 그렇지?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덧붙여가며. 미련 없이 돌아설 줄 알았던 나인은 나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아마 내가 벤치에 앉아있던 게 자기 때문임을 안 것 같다. 그 뒤로 나인이 벤치나 운동장에 남아있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
제자리를 돌던 시계는 어느새 가을을 가리켰다. 마른장마가 지속되던 여름을 벗어나자 때늦은 장대비가 찾아왔다.
가을에 웬 비람. 담당 청소 구역인 음악실을 꼼꼼히 정리한 후 본관을 빠져나왔다. 다리에 치덕치덕 붙어대는 빗방울은 안 그래도 좋지 않은 기분을 쿡쿡 쑤셔댔다. 내가 아까 나오면서 창문을 닫았던가- 하고 뒤를 돈 순간, 거무튀튀한 배경 속 환하게 빛나는 3층 음악실이 보였다.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니는 거야. 창문은 고사하고 불이 뭐야, 불이. 이마를 탁, 치고 잰걸음을 재촉했다.
비 오는 날의 학교는 정적이 깊다. 바닥에 끌리는 신발이 눅진 거리며 불쾌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계단을 올라갈수록 희미한 피아노 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선생님이 오셨나? 가까워지는 만큼 선명해지는 음률에 고개를 쭉 빼고 음악실을 살폈다. … 나인? 소리의 근원을 확인하고 나자 행동이 앞섰다.
‘드르륵-’
“.. 나인, 여기서 뭐 해?”
내 등장에 몸을 흠칫 떤 나인은 잠깐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아니긴. 방금 피아노 치고 있었으면서. 나는 눈썹을 실룩였다. 학교에서 나인의 연주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인은 수업 시간에 연주하는 일이 없었다. 실기 평가가 있는 날엔 늘 일이 생겨 다음에 따로 보겠다며 빠졌으니까. 아무리 우연의 일치라도 매번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기란 쉽지 않다. 나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악보를 보았을 때 묘한 괴리감을 느낀 것도 이 같은 이유였는데, 정말로 음악을 하는 게 맞았구나.
“.. 음악실엔 어쩐 일이야?”
“아까 청소하고 갔는데 밖에서 보니까 불이 켜져 있길래… 안 끄고 간 줄 알고 다시 왔어.”
“아… 나 때문에 다시 돌아왔다니 미안해.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 나를 지나쳐가는 나인의 어깨에 다급히 외쳤다. 말의 빠르기는 프레스토.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되게 좋았어. 나인의 피아노 소리.”
“그래, 고마워.”
“다시 들려주면 안 돼?”
“그건 좀… 곤란해. 미안하지만 사양할게.”
피아노 의자에 앉아 아름다운 선율을 그려낸 건반을 눌러보았다. 딩- 공허히 울리는 소리는 한없이 단조로웠다. 내가 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젓가락 행진곡인데 그마저도 고등학교에 올라와선 쳐본 적이 없다. 다른 건 몰라도 피아노는 젬병인 터라 끌리지 않아서였다. 이걸 잡고 끙끙거릴 바에 다른 걸 공부하는 게 더 효율적이니까. 오랜만에 보니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아 앉긴 했는데 영 아니다. 그래도 이왕 앉았으니 짧게라도 쳐볼까.
기억을 더듬어 어설프게 젓가락 행진곡을 연주하자 나인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섰다. 나인이 듣고 있단 생각에 괜히 민망해져 음이 자꾸 엇나갔다. 아니, 아는데 왜 이러지. 혼잣말하는 척하며 읊조렸다. 입구에 서서 가만히 듣던 나인은 웃음을 참는 듯하다 조그맣게 킥킥거렸다.
“긴장하고 있지? 너무 세게 눌러서 다음 건반을 누를 때 실수가 많은 거야.”
어느덧 곁으로 다가온 나인은 손가락에 힘을 빼보라며 손마디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생각지 못한 접촉에 몸을 움찔하자 나인도 멈칫하더니 감싸 쥔 손을 풀었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옛날 아니, 내가 처음 배우던 때가 생각나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나인을 올려보려다, 별안간 시작되는 연주에 고개를 아래로 박았다. 나는 나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다만 목소리에 묻어난 떨림에 그 애가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을 거라 짐작했다.
10분여의 시간이 지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인은 피아노 의자에 다시 앉으며 대뜸 비밀이라 고했다.
“.. 뭐가?”
내 물음에 나인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까 연주하던 곡의 뒷부분이었다. 그 애의 붉은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음은 처음보다 선연했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부드럽게 스미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유려히 흐르는 음은 구간마다 다른 것을 표했다. 은빛 달이 어린 머리칼, 맑은 청빛 눈동자, 눈 아래 드리운 별자리. 귀에 퍼지는 소리를 맞춰나가자 이내 나인이 그려졌다. 나인의 연주는 나인 그 자체였다.
곡을 마무리 지은 나인은 나를 바라보며 오늘 연주와 더불어 제가 음악실에 있었다는 사실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급격히 드러난 불안함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초조함이었다. 나인의 부탁대로 나는 음악실에서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물은 이도 없었다- 우리 사이는 그저 그런 동창으로 막을 내렸다. 친밀감을 쌓기엔 촉박한 시간이었다. 나는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수선스러운 졸업식에 나인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은 건지 아예 참석하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난 그 애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다. 잘 지내라는 흔한 말을 주고받으며 언젠가 있을지 모를 훗날을 기약하고 싶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차 뒷좌석에 앉아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묘하게 씁쓸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꽃 한 송이 쯤은 주고 싶었는데. .. 받고도 싶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그 아이는 종종 예고 없이 기억을 두드렸다. 궁금했다. 나인이 잘 지내는지. 나인은 잘 지내는 지. 내가 전하지 못한 인사를 잘 이행하고 있는지. 그렇다면 텔레파시가 통했다고 생각할 텐데, 하며.
“안녕하세요. 말재주가 없어서 이런 일은 꽤 당황스럽네요. 전 나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소식을 접할 줄이야. 아니, 만날 줄이야.
실로 간만이었다. 나인은 눈에 띄게 놀라는 내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매니저님? 나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어색했다. 왜 날 매니저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너 나 알잖아. 내 이름, 알잖아.
“나인?”
“네.”
낯선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바라만 보던 나인을 처음 부른 날. 네가 나에게 지금처럼 웃어줬던 날. 말없이 나인만 쳐다보고 있자 냥선배는 설명할 것이 산더미니 아직 정신을 놓아선 안 된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아니면 혹시 나인에게 반한 거냥?!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에 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눈가에 닿아오는 시선에 나는 아니란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돌렸다.
‘저에겐 없는 기억도 있어요.’
그래서였구나. 네가 날 모르는 이유가. 덤덤히 말하는 모습에 슬픔이 덧대어졌다. 어째서 모두가 떠난 학교에 남아 추위를 받아냈는지, 빗소리에 묻힐 피아노를 연주했는지. 네 과거를 듣고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너무 늦은 이해였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옛날 아니, 내가 처음 배우던 때가 생각나서.'
아마도 그건 밝히고 싶지 않았을 이야기.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에 너도 모르게 들떠서 흘러나온 옛 기억.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서툰 피아노 소리에 어린 네가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덩달아 곁에 있어 주었던 사람까지도. 너와 같은 상냥한 미소를 지녔을 그 사람은 네가 그랬듯, 네 손을 잡고 건반 하나하나를 눌러주었겠지.
명계에선 잃거나 소거한 기억을 통틀어 ‘죽은 시간’이라 부른다. 다시 돋아날 가능성이 희미한, 저 아래로 가라앉아버린 것들. 그 명칭을 반가워하는 사람은 없다. 죽어버린 시간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니, 꼭 자신조차 죽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지닌 죽은 시간은 기껏해야 며칠이나 몇 달. 그러나 나인의 죽은 시간은 십여 년이 넘었다.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면서 나름 친하다고 생각한 내가 어이없었다. 내겐 여전히 생생한 날들이 너에겐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비밀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는데도 닫힌 입은 열릴 생각을 않았다. 이곳에서 지내는 나인을 보고 있으면 그냥 이대로도,
“어! 피아노네? 나인도 피아노 칠 줄 알… 아, 아니야.”
“오랜만에 쳐볼까요?”
“…괜찮아?”
“네?”
“아니, 그… 나야 좋은데 갑작스러울 거 같아서. 하하.”
“괜찮아요. 손이 좀 굳어서 걱정이지만..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도 하고, 지금은 매니저님만 있잖아요.”
"나인은 다른 사람 앞에서 연주 잘 안 한다고 하지 않았어?"
"네, 다른 사람 앞에선 그렇죠."
"……."
"제 옆에 앉으세요. 다리 아프잖아요."
괜찮을 것 같아서.
***
꿈을 꾸었다. 잊을까 두려워했던 것이 아닌 잊고 있던 꿈. 그 안에서 난 나와 같은 교복을 입은 여자와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애는 친절하게도 자신을 소개하려 입을 열었다.
‘안녕? 내 이름은-’
아, 잘 들리지 않는다. 사과를 건넨 후 다시 한번 말해달라 청하자 작게 벌어진 입이 호선을 그린다. 여자의 옷은 어느새 정장으로 바뀌었다. 단정한 블라우스와 검은 재킷에 잘 올려 묶은 머리.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옅게 드러난 입술 위 형체는 흐릿하다. 내 입이 멋대로 움직인다.
‘나인입니다.’
내 소개가 끝나자 여자도 입을 연다. 다음 말이 들리면 꿈에서 깰 거란 걸 알았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이 꿈은 잘 짜여진 극본처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된다. 옅은 미성이 들리면 난 언제나처럼 눈을 뜰 텐데, 사라질 텐데. 낯익은 미소가 누군가를 상기시키려다 이내 흩어진다. 조금만 더 다가가면 보일 것 같은데, 아주 조금만… 세 발짝만 더….
‘안녕, 나인. 내 이름은-’
“아.”
꿈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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