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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드라마 w. 언
"지금입니다!"
준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곤 텔레비전에서 읊어지는 대사를 타이밍 맞춰 말했다. 몇 번을 본 건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목소리 톤까지 똑같이 맞춰 말한 것이 꼭 하나의 연기 같았다. 대사가 지나가면 그제야 만족한 얼굴로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주먹을 쥐어 보인다. 그저 대사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가슴께가 흥분으로 간질거리다니! 준은 감정을 표현하듯 주먹을 쥔 손을 잘게 떨었다. 준이 요즘 빠져있는 드라마는 철 지난 로맨스였다. 예상외로 인기가 좋았던 작품이라 그런지 봄의 소식을 담은 따듯한 햇빛과 함께 재방송이라는 이름으로 온종일 방영되고 있었다.
"이 좋은 대사를 저만 아는 건 낭비입니다!"
그렇게 준의 로맨스 드라마 따라하기가 시작됐다. 준은 만나는 사람마다 드라마의 대사를 읊어주었다. 마치 자신이 남자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몸짓도 따라 하려고 상대의 손등을 끌어왔는데, 로맨스 드라마의 대사다 보니 아무래도 이성이라고는 매니저밖에 없는 14 지부에서는 그의 드라마 사랑이 달갑지 않게 다가왔다. 특히 같은 조인 에단은 미간을 뒤집힌 팔자로 잔뜩 찌푸린 채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온 거지? 듣기 불쾌하군."
"이상합니다! 두근대지 않으십니까?"
"쓸데없는 소릴."
에단이 붙잡힌 손을 빼내고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혀를차면 준은 에단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이상합니다! 이 멋진 대사에 감동하지 않다니! 에단 형님은 감정이 메말라버린 게 틀림없습니다! 준의 혼잣말에 에단이 다시금 따끔한 눈총을 쏘면 그는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겨내었다.
"이곳이라면 저와 함께 흥분을 나누어줄 형님이 계실 겁니다!"
준이 우렁차게 문을 열며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유세프는 1인용 소파에 앉아있었고, 한 손에는 책을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제 막 안경테를 추켜올리고 있었다. 준은 여태 그랬던 것처럼 유세프에게도 다가가 자신이 애정해 마지않는 드라마의 대사를 읊어주었다. 유세프는 준이 말한 대사를 두어 번 곱씹어보다가 읽던 책의 페이지를 확인한 뒤 가볍게 덮어내었다. 뜬금없는 행동에 익숙한 얼굴로 준의 눈을 다정히 마주한다. 준이 또 멋진 대사에 꽂혔구나. 유세프는 전후 사정을 듣지 않아도 그의 행동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아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깔렸다.
"그런데 준. 그 대사, 여태 아무한테나 다 말하고 다녔어?"
"그렇습니다! 저는 모두를 좋아하니까 꼭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대사는 가장 특별한 사람한테 해줘야만 의미가 있어. 그래야만 로맨스가 시작될 테니까."
"로맨스? 그런…. 겁니까? 유세프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왠지 설득력 있습니다!"
"하하, 설득하는 게 아니라 이게 사실이야. 고백이라는 건 특별하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하고 다니면 본질적인 의미를 잃을 수밖에 없거든."
특별한 사람? 준은 두 주먹을 쥐고 무릎 위에 얹은 채 생각에 빠졌다. 특별하다고 느낀 사람은 없었다. 좋다, 애정한다의 의미는 모두에게 가지고 있는 것이었고 모두를 차별 없이 똑같이 대하는 것이야말로 사나이의 덕목이라 생각했다. 누군가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순간부터 차별이 생기고, 결국 마음이 가는 방향은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다른 누군가에게는 실망을 안겨줄 것이 싫었다. 하지만 종종 미묘한 감각이 몸을 사로잡을 때가 있었다. 예를 들면…….
"준! 어디 봐, 또 다쳤어?! 속상하게 정말!"
"하하, 나를 지키려고 이렇게 뛰어온 거야? 준은 듬직하네~"
"다음에는 꼭 다치지 않고 돌아오기다?"
"어서 가자, 애들 기다리겠다."
준은 제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매니저의 손과 닿았을 때, 심장이 간질거렸던 감각이 다시금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 귀 끝이 달아오른다. 따로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어물쩍 감정을 덮어내길 반복했었다. 이상하게도 간질이는 감각이 피어오를 때면 무언가 부끄럽고 괜스레 숨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준은 여태, 계속해서 피어오르는 감정을 피해 도망치듯 움직였다. 유독 간질거림이 심한 날이면 하루에 여러 번 매니저와 마주하거나, 어쩌다 살짝이라도 손끝이 닿을 때 사고회로가 고장 난 듯 삐걱거렸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머릿속도 어지러워져서 준은 종종 매니저 곁에 있기를 조금 두려워했다. 직진밖에 없던 삶에 브레이크를 선사한 사람은 매니저가 처음이었다.
"준?"
"아……!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했습니다! 부르셨습니까?!"
"뭘 그렇게 생각하나 해서, 혹시 특별한 사람?"
"ㅇ, 아, 아, 아닙니다! 그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세프 형님!"
준은 또 도망쳤다. 유세프의 물음에 단번에 떠오른 매니저의 얼굴은 도망치기엔 이유로 충분했다. 얼굴뿐만 아니라 제게 손을 건네고, 잡아주었던 온기와 미소까지 떠올라버렸으니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간 그 자리에서 얼굴이 터져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유세프는 도망치는 준의 귓가가 붉어진 것을 보면서 안경을 벗어 내려두었다. 만약 매니저가 특별한 사람이면 곤란한데, 괜한 소리를 한 것 같네. 유세프의 뒤늦은 한숨이 덮어둔 책 위로 내려앉았다.
도서관을 나선 준은 양손을 활짝 펼치고 자신의 뺨으로 갖다 댔다. 찰싹! 듣기에도 따끔한 소리가 울린다. 발갛게 새겨진 큰 손가락 자국 뒤로 달아오른 볼이 숨겨졌다. 머릿속이 매니저로 가득 차서 곤란했다. 입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드라마 사랑도 어째서인지 매니저 생각에 덮여 무슨 대사였는지 흐릿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아직 매니저님께는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응? 나?"
"으악!"
쿵, 심장이 물건이었다면 바닥으로 추락해서 꽤 둔탁한 소리를 냈을 거다. 마치 지금 자신의 귀에만 들리는 이 소리처럼. 준은 뒤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매니저에 심장을 부여잡듯 제복의 가슴께를 쥔 채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에 매니저가 덩달아 놀라선 당황한 얼굴로 허리를 숙여 손을 내밀었다. 갈색빛 머리칼이 쏠려 햇빛과 함께 내려오면, 준은 엉덩이에 아릿하게 올라오는 고통보다 눈앞에 있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미안해…!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 아닙니다! 제가 매니저님 얘기를 꺼냈잖습니까!"
대답하신 건 당연한 일입니다! 준은 뒤늦게 씩씩하게 답하면서도 매니저의 손을 덥석 잡지 못하고 머뭇대다 엉거주춤 잡고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답지 않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닿았다.
"그나저나 무슨 말이었어? 나한테 할 말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준은 매니저의 물음에 바로 답할 수 없었다. 분명 매니저를 만나면 자신이 애정해 마지않는 멋진 대사를 읊어주고 싶었는데, 그 찰나의 순간에 까먹을 수 있다니. 그의 두 손이 주홍빛 머리칼을 마구 헝클었다. 정말 멋진 대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흐릿한 잔상만 남았다. 준은 당황한 얼굴을 숨기려 호탕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머릿속이 새하얘졌습니다! 그러니까…. 저랑… 조금만 같이 있어 주시겠습니까!"
생각나질 않아서라기엔 조금 억지스러운 말이었지만, 만약 생각났을 때 옆에 매니저가 없다면 또 까먹고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매니저룸으로 달려갈 자신을 알았지만 조금 억지스럽더라도, 지금은 그저 옆에 있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이런 걸 욕심이라고 부르는 걸까. 준은 대답이 없는 매니저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따듯하게 달아오른 손으로 덮어내듯 그녀의 손을 소중하게 움켜쥐었다.
"혹시… 안됩니까?"
"어? 아니…. 어차피 할 일도 다 끝냈고.."
준이 손을 움켜쥐고서 눈을 맞춰 묻는 말에 매니저는 잠깐 시선을 바닥으로 두었다. 마냥 동생 같기만 하던 표정이 진중함으로 가라앉고 온전히 마주해오면 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이 동해서 얘도 남자구나, 싶은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매니저라는 직책의 본분을 알기에 웬만해서는 이러한 생각과 감정을 죽이려 애쓰는데도 가끔은 너무 어렵다. 매니저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바닥에 두었던 시선을 올리며 웃었다. 준은 동생이다, 동생이다. 스스로 주문을 걸며.
"그럼 산책하기 좋은 곳으로 갈까? 벌써 봄인 건지 지부 앞쪽에 벚꽃이 만개했거든!"
"좋습니다! 매니저님과 함께 보는 벚꽃이라니! 너무 설렙니다!"
그냥 꽃인걸. 매니저는 최대한 덤덤하게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지만 준과 마주 잡은 손이 여전히 따듯한 온기를 품고 있어서, 시선을 돌린대도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하는 마음은 발걸음과 엇박자로 뛰었다. 14 지부의 입구를 나와 조금 더 걸으면 길이 나 있는 양쪽으로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손 놓을 타이밍을 놓쳐서 매니저는 여전히 준과 손을 맞잡고서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길의 끝에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벚나무가 있다. 매니저는 속으로 그 나무에 다다르면 손을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불면 꽃잎이 휘날려서 예쁠 텐데."
매니저가 남은 손을 들어 손바닥이 하늘로 향하게 펼쳐서는 흩날리지 않는 벚꽃을 보고 말했다. 준은 그런 매니저를 보다가 주먹을 쥐어 보였다.
"저희가 뛰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벚꽃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 겁니다!"
"어, 어? 그렇진 않을…. 준!"
준이 활짝 웃으며 매니저와 맞잡은 손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그에게 끌려가다시피 뜀박질을 하게 된 매니저는 손을 놓쳐 넘어질까 봐 깍지를 껴 단단히 손바닥을 마주했다. 강하게 껴오는 깍지에 준의 손가락이 펼쳐졌다가 이내 매니저의 손등을 다 덮어낼 정도로 꽉 마주해왔다. 준은 가슴께가 간질거려서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걸 애써 참아내고 있었다. 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술이 떨리는지,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뜀박질과 함께 심장이 크게 울렸다. 어느새 가장 큰 벚나무 아래에 도착했고, 준은 그제야 발을 멈췄다. 그에 맞춰 매니저의 몸도 멈췄으나 체력이 달린 나머지 준의 손을 잡은 채 그대로 어깨에 기대었다. 숨을 고르는 매니저 몸의 들썩거림이 어깨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준은 바싹 긴장해 몸을 굳혔다. 너무… 가깝습니다! 마음속에서만 울리는 외침은 입술을 벌려내고 나올 수 없었다. 이 상황을 만든 것도, 먼저 손을 잡은 것도 자신이었다. 그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았다. 그리고 못내 회피하던 마음을 마주 보게 되었다. 매니저님이, 특별한 사람이구나. 그저 닿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온몸이 긴장으로 뭉친다. 가장 큰 사실은, 심장이 간질거리는 감각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감정은 여태껏 매니저 이외에 그 어떤 사람에게도 느껴보지 못해서 준은 다른 손으로 왼쪽 가슴 위를 꾹 눌렀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주홍빛 머리칼 사이로 벚꽃잎이 스쳐 간다. 벚꽃……. 준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이내 입술이 벌어지고, 얼굴이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 찼다. 생각났습니다! 그는 자각하지 못하고서 어느새 어깨에 기대있는 매니저의 코앞까지 다가가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의 콧끝이 톡, 맞닿았다.
"만개한 벚꽃같이 당신이 제 마음속에 피었습니다!"
"…ㅇ, 응?"
이제야 숨을 고르다 고개를 든 매니저는 코앞까지 다가온 준의 얼굴에, 닿아버린 코끝이. 그리고 그의 말에 놀라 잠시 아무 말도 못 했다. 분명 준이 평소에 하는 말은 아니라 귀에 들려온 말이 타인에 의해 지어진 말인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매니저는 달아오르는 얼굴과 귓가를 막을 수 없었다. 맞잡은 손도, 기대어있는 어깨의 온기며 마주한 콧등의 작은 면적까지 따듯하다 못해 홧홧할 지경이었다. 그 위로 흩날려 내려오는 벚꽃잎이 둘 사이를 분홍빛으로 뒤덮었다. 뒤늦게 당황한 준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닿아있던 몸을 멀찍이 떼어내고는 손사래를 쳤다.
"이건 그러니까!"
드라마 대사일 뿐이었지만 이미 대사 음절 하나하나에 진심이 듬뿍 들어가 버려서 준은 다시 입술을 닫았다. 평소 같으면 이미 뱉고도 남았을 말이나 행동이 매니저 앞에만 서면 왜 이렇게 멈추는 일이 많은지. 하지만 준은 이러한 머뭇거림의 원인이 매니저이기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행복이라고 정의하기로 했다. 부끄러워도, 간지러워도, 그 모든 게 뒤돌아보면 결국 매니저를 생각하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으니,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얼까. 생각만으로도 당황스러움을 덮을 정도로 절로 지어지는 미소에 준은 매니저와 눈을 마주한 채 활짝 웃어 보였다.
"제게 가장 특별한…. 매니저님께 해드리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좋은 저녁 되십시오!"
"아직 저녁 아닌데..!"
준! 부끄러움이 최고조에 달한 준은 매니저의 부름에도 서둘러 지부로 뛰어가고 있었다. 주홍빛보다 조금 더 붉은빛이 그의 귓바퀴며 목을 잔잔하게 물들이고 있어서 매니저는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준과 같이 자신의 귀며 목, 얼굴이 흩날리는 벚꽃에 가려지지 않을 만큼 붉게 물들어있음을.
"준도…. 참.."
매니저는 얼굴의 열기가 사그라들 때까지 한참을 벚나무 아래 서 있었다. 그를 숨겨주듯 뒤늦게 불어온 바람은 꽃잎과 함께 매니저의 몸을 빙그르르 돌아 밀려온 설렘을 그치지 못하도록 곁을 맴돌았다.
지부로 돌아가던 준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높이 서 있는 담벼락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탓에 바닥에 쭈그려 앉아서는 두 손에 얼굴을 푹 묻어내었다. 주홍빛 머리칼 위로 흩날리던 벚꽃잎 하나가 가벼이 내려앉으면 준이 신음처럼 목소리를 짜내었다. 그의 가슴에 꽃이 싹을 틔웠다.
"정말로, 피어나는 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입니다……."
14지부의 봄, 이미 하나의 로맨스 드라마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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