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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4 지부의 복도는 한적했다. 그저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과 미처 다 청소하지 못한 먼지만이 복도를 맴돌았다. 그렇게 적막만이 복도를 감돌려는 찰나 터벅터벅하는 발소리 두 개가 복도를 울렸다.
"하하, 매니저는 오늘도 일이 많네."
후, 그러게. 매니저는 한숨을 쉬며 노아의 말에 대답했다. 아까 쌓여있던 서류를 다 처리했나 싶었는데 냥 선배의 호출에 불려가서 보니 책상에 서류가 산더미만큼 쌓여 있었다. 이것이 무어냐고 물어보니 저번 지부 행사 보고서란다. 그러니까 이걸 보고 다음 지부 행사를 계획하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혼자서는 들고 가기 버거운 양이었던지라 마침 타이밍 맞게 냥 선배의 호출로 불려온 노아의 도움을 받아 매니저룸으로 간신히 들고 갈 수 있었다. 하아. 매니저의 한숨이 바닥까지 깊게 내려앉았다. 노아는 그저 하하 웃으며 그저 매니저의 옆에서 묵묵히 그녀를 따를 뿐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서류를 들고 걸어서 매니저 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어?"
툭툭 소리가 들려 소리의 근원을 찾아 뒤를 돌아보니 창밖에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해가 떠 있었던 것 같은데 금세 바뀐 날씨에 매니저는 흠칫 놀랐다. 오늘은 꼼짝없이 안에서 서류나 처리하라는 신의 계시인가. 매니저는 더 우울해지는 기분을 어떻게든 감추고자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는 자기가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14 지부가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매니저는 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것을 노아도 본 모양인지 노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괜찮냐고 물었다.
그에 매니저는 하하 웃으며 오늘은 정말로 일만 하라는 하늘의 뜻인가 봐 하고 하하 웃었다. 매니저의 능청스러운 대답에도 노아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지만, 매니저는 이를 어떻게든 넘기려 계속 하하 웃었다. 결국 노아는 그런 매니저의 뜻을 따라주려는지 매니저가 괜찮다면 괜찮겠지, 하지만 너무 무리하진 말라며 놓이지 않는 걱정을 표했다. 매니저는 알겠다며 얼른 안으로 들어가자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노아는 그런 그녀의 밝은 모습에도 선뜻 안심할 수 없었다.
"…매니저."
진지한 표정의 노아가 책상에 서류를 내려놓는 매니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니저는 그런 노아에게 예의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노아는 그런 매니저의 표정을 보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걸 자기가 말해도 되려나 싶은 모습에 매니저는 웃어 보이며 노아가 편히 대답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그런 매니저의 노력이 닿았는지 노아는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매니저. 오늘 하루만, 같이 있을래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와줄 테니까…."
이 말을 하고는 본인도 부끄러웠는지 바로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채 얼굴을 붉혀버렸지만. 매니저는 그런 노아가 평소답지 않게 귀엽다고 생각해 픽하고 웃어버렸다. 매니저는 저를 걱정하는 노아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여러 일이 있었고 그렇기에 노아가 걱정하는 것도 어찌 보면 이해가 가기에, 그녀는 오늘 하루만 노아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노아를 제외한 다른 사신들은 각자의 임무가 있기에 다 나가서 없다. 그들의 소리가 없기에 빗소리는 더 귓가를 울렸고, 그로 하여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을 강제로 머릿속에 불러온다. 종일 일해야 한다면 우울함에 젖은 채로 일하기보단 다른 사람과 함께 기분을 풀어가며 일하는 것이 나으리라 판단한 그녀는 노아의 질문에 고맙다며 웃으며 화답하였다.
*
"노아. 혹시 두 번째 책꽂이에서 14 지부 연례행사 서류랑 사신 지부 행사 이력 좀 찾아서 줄 수 있을까?"
"얼마든지."
매니저의 책상은 금세 냥 선배에게서 받아온 서류와 그동안 정리했던 서류들이 모여 엄청난 서류의 바다를 이루었다. 노아는 매니저가 부탁한 서류를 들고 매니저의 옆으로 다가왔다. 자, 여기 있어요. 매니저는 노아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받은 서류를 들고 보고자 하는 항목을 찾으려고 손가락으로 훑는데 갑자기 귓가에 빗소리가 들어왔다. 창밖을 보니 날은 작정한 건지 분명 낮 시간대였음에도 날이 어두컴컴했다. 그 어두운 풍경 사이로 하얀 빗줄기들이 먹구름을 가로지르며 땅으로 내리꽂는 광경에 매니저는 살짝 안색이 파래졌다. 그렇게 바깥의 풍경에 정신이 얼마나 팔렸었는지 매니저는 노아가 자신을 부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매니저!"
노아의 부름에 매니저는 왁, 하는 소리를 내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노아는 매니저를 부르기 위해 손을 뻗은 그 자세로 잠시 굳어버렸고, 매니저는 당황에 빠져 자신에게 손을 뻗은 노아를 바라보았다. 아…. 매니저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부끄러워졌는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노아는 매니저를 보고 뻗으려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비 내리는 것을 보고 마치 홀린 듯 밖을 보는 것이 못내 걱정스러워서 불렀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계속 불렀다고 한다. 매니저는 그럼 자신이 얼마나 정신이 팔려있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노아는 분명 자신을 여러 번 불렀다고 했는데. 자신이 들은 것은 아까의 그 한 번이 전부였다. 역시 아직도 비 내리는 그날의 기억을 극복하지 못한 것일까. 이런 것에 정신을 팔다니. 매니저는 자조했다.
매니저. 일은 조금 있다가 하고 같이 주방 갈래요? 내가 아주 맛있는 새우 볶음밥 해줄게요. 매니저는 지금은 식사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뱃속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꼬르륵 소리가 두 사람이 들을 만큼 크게 났다. 풋, 하는 소리가 났고 매니저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매니저는 노아에게 웃지 말라고 했다. 노아는 매니저의 말에 웃음을 거두었다.
"미안해요. 안 웃을게. 사실 나도 마침 배가 고픈 참이었고 매니저가 끄르륵 소리를 안 냈어도 내가 냈을 거예요. 그러니까 가서 같이 밥 먹을까요?"
노아의 녹빛 눈이 곱게 휘었다. 초록빛 초승달이 존재한다면 이런 것일까. 어린아이를 떠올리게 하는 노아만의 순수한 웃음은 보는 사람이 정화되는 느낌을 주곤 한다. 그리고 눈을 돌리지도 못하게 하는 힘이 있는지 노아의 웃음은 매니저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응, 왜요? 매니저의 시선을 느낀 노아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이러다 노아의 페이스에 휘말리겠다 싶은 매니저는 알겠다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비가 많이 오네."
"...그러게."
짧은 대화를 마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빗소리만이 가득한 복도에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렸다. 고요하고, 썰렁하며, 적막하다. 매니저는 이런 침묵을 불편해했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하면서 가고 싶은데 대화할 주제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매니저."
아무래도 매니저만의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노아도 같은 생각이었겠지. 이렇게 타이밍 맞게 말을 튼 것을 보면 말이다. 응, 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노아를 바라보니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왠지 불안해진 매니저가 으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왜 날 그렇게 쳐다봤어요?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또다. 노아 특유의 눈웃음. 사실 이쯤 되면 자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그냥 눈웃음을 흘리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녹안이 저를 바라보는 감각은 뭔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짙은 녹색으로 시작해 점점 노란빛을 띠는 아름다운 그러데이션의 녹안. 그 안에 제가 비치는 모습은…. 하지만 이것을 입 밖으로 내면 노아는 분명히 자기를 놀릴 것이 뻔하다고 생각한 매니저는 절대로 입 밖으로 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응, 아까 뭐가 묻어서 빤히 보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아니더라고-. 따위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목소리에 떨림이 묻었을까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저 눈웃음을 보다 보면 노아에게 홀려버린 듯 보게 된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럼 그냥 착각이었던 거지? 착각이라 해도 매니저가 나 봐주니까 좋다. 또 착각해주면 안 돼요?"
"뭐, 뭐…?!"
노아의 웃음소리가 호탕했다. 아까부터 계속 부끄러워하네. 아하하, 귀여워. 매니저는 이에 질세라 '아까 너도 부끄러워 했잖아'라고 말했다. 이에 노아는 당당히 응수했다. 응, 아까는 나도 부끄러웠지. 하지만 지금은 매니저가 너무 귀여운걸~? 이라는 노아의 대답에 매니저는 아, 또 말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웃은 노아는 또다시 미안하다며 안 놀리겠다는 답을 하고 주방의 문을 열었다. 그래봤자 또 놀릴 거면서.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노아를 놀리겠다는 작은 다짐을 한 매니저는 노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새우 볶음밥을 만드는 내내 맛있는 냄새가 주방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음식의 냄새를 맡고 있자니 매니저는 아까보다 더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뭐라도 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자기가 매니저에게 아주 맛있는 새우 볶음밥을 해주고 싶다며 노아에게 저지당했다. 그렇게 얌전히 앉아 있던 것이 얼마나 지났을까. 노아의 손에 새우 볶음밥 두 접시가 들려 나왔다. 나온 새우 볶음밥은 비교적 평범한 모습이었지만 냄새가 정말 훌륭했다. 잘 먹겠다는 말을 한 뒤 매니저는 숟가락을 들어 볶음밥을 입으로 가져갔다.
"정말 맛있어!"
매니저의 말에 노아는 싱긋 웃었다. 온갖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듯한 노아의 시선에도 매니저는 배가 많이 고팠는지 열심히 밥을 먹었다. 그렇게 매니저는 열심히 밥을 먹다가 체하겠다는 노아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목마르지 않냐며 물을 건네주는 노아에게 물이 든 컵을 받은 매니저는 천천히 물 한 모금을 넘겼다. 그릇을 내려다보니 이미 매니저의 접시는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그에 비해 노아는 조금씩 먹은 것인지 양의 차이가 그렇게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노아 너는 안 먹어? 매니저의 질문에 노아는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것이 뭔지 알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 노아에게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으므로 매니저는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하기엔 노아의 배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결국 노아도 숟가락을 들었다. 이번엔 매니저가 생글생글 웃으며 밥을 먹는 노아를 지켜봤다. 매니저는 아까의 놀림을 되돌려줬다는 느낌이 들어 굉장히 뿌듯해졌다.
"매니저."
"응?"
노아가 먹는 것을 멈추고 매니저를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매니저는 노아를 보았다.
"지금 이것도 아까 그 착각이야?"
"풉!"
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주방에 울렸다. 그에 매니저는 악, 소리를 내곤 밥부터 먹고 말하라고 쏘아 붙였다. 그래, 미안해. 놀리지 않을게라는 이제는 그 누구도 믿지 않을 말을 한 노아는 정말로 밥 먹기에 집중했는지 열심히 숟가락을 놀렸다. 이제는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밖에 나지 않는 주방에서 매니저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잘 정돈된 식기들이 차곡차곡 제 자리에 들어가 있었다. 역시 테오의 청소실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매니저는 노아를 보았다. 때마침 노아도 다 먹은 것인지 매니저를 보고 있었다.
"배도 채웠겠다. 이제 설거지하고 다시 일하러 갈까요?"
"그래!"
설거지할 때도 역시 노아가 자기가 다 하겠다며 매니저가 먹은 그릇을 달라고 했다. 어차피 자기가 사용한 식기를 자기가 다 설거지할 건데 그 김에 매니저의 것도 같이하겠다는 것이다. 오늘따라 노아가 친절하다고 생각하며 그릇을 넘긴 매니저는 식기들이 닦여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식기들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렇게 식기들이 거품을 열심히 묻히고 나니 이제는 물소리가 나고 식기들이 다시 잘그락거린다. 그러기를 몇 번, 끝났다는 소리와 함께 노아가 매니저룸으로 가자고 했다.
"이제는 배도 채웠겠다! 더 힘내서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매니저룸에 들어온 매니저가 기분 좋게 한 말이었다. 실제로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배를 채우고 나니 아까보다는 훨씬 기분도 좋아지고 기운이 솟았다. '역시 아까는 배가 고파서 그랬나'라며 매니저는 다시 파이팅 포즈를 취하곤 서류를 들었다.
*
"흐아아~"
매니저가 기지개를 켰다. 노아가 필요한 서류를 빠르게 바로바로 찾아줘서 일이 수월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산더미 같았던 서류가 벌써 손가락 한 마디 반 정도로 줄어든 것이 눈에 보였다.
"매니저, 혹시 또 내가 찾아줘야 할 서류가 있을까?"
노아가 즉시 매니저의 옆으로 다가왔다. 매니저는 아니라며 웃었다. 아. 아쉽다. 그럼 또 필요할 때 불러주세요, 매니저님. 노아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럼 필요하면 불러드리죠. 매니저도 장난스레 응수했다. 그러고 난 뒤 매니저는 다시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매니저가 다시 일에 열중하기 시작하자 매니저룸은 정적의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어색해하지 않았다. 매니저는 열심히 서류를 확인하고, 노아는 그런 그녀의 부름을 기다리며 상시 대기하는 것에서 그 누구도 불편하다고 하지 않았다. 매니저가 그렇게 끝나가는 서류를 보며 힘을 낼 때 노아가 다가왔다.
"어, 노아? 나 안 불렀는데?"
노아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노아의 손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초콜릿 좋아해요? 일할 때 먹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 찾아보니까 이게 있더라고요."
노아의 말에 매니저는 금세 화색이 돌았다. 너무나도 밝아진 표정이라 노아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마침 단 게 먹고 싶었는데! 고마워, 노아! 나 더 힘내서 일할게!"
"하하. 그렇다고 너무 무리는 하지 말아요. 매니저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힘내고 있으니까."
포장지를 까고 초콜릿 조각을 입에 문 매니저는 잘근잘근 초콜릿을 씹으며 서류를 훑었다. 확실히 당이 들어오니까 뇌가 활성화가 되는 건지 조금 더 서류가 잘 읽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매니저는 마저 보던 서류를 쭉 읽어나갔다. 노아는 좀 더 생기가 도는 매니저를 보며 다시 의자에 돌아가 읽던 책을 들었다. 그러나 귀만은 매니저를 향해 쫑긋 세운 채였다. 아까의 경험을 통해 그녀가 원하는 서류를 바로바로 찾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노아의 준비는 무색하게도 매니저는 서류가 끝날 때까지 그를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아마도 필요한 것들은 이미 다 갖다 놓아서 그런 것일 테다.
"드디어 끝!"
"와, 축하해요! 매니저!"
이제 이 서류는 내일 아침에 냥 선배에게 드리기만 하면 끝이다. 이제 할 일은…. 이 어질러진 책상을 도로 정리하는 일이다. 매니저는 자신이 찾아본 서류들을 정리하였다. 다행히도 정리는 빨리 끝나 다 제자리에 꽂아주기만 하면 끝이었다. 매니저가 서류들을 들고 책꽂이로 가자 노아가 금세 다가왔다. 그것들 전부 자기에게 넘겨달라는 노아는 책상에 있던 것들의 반을 더 챙겨 들고는 매니저에게 다가갔다.
"내가 이렇게 들고 있을 테니까 매니저는 자리에 꽂기만 해요. 알았지?"
노아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한 매니저는 노아가 들고 있는 서류들을 보면서 제 자리를 찾아 정확히 넣었다. 이따금 여러 서류 뭉치가 한꺼번에 제 자리에 돌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힘을 합치니 정리는 금방 끝나가기 시작했다. 노아가 들고 있던 서류들은 금방 제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이제는 책상에 남은 것들만 돌려놓으면 끝이었다. 노아는 책상에 있던 것들을 한데 모아 제 팔에 들고는 책장으로 갔다. 매니저는 그런 노아를 따라 책장에 서류들을 정리하였고 그렇게 두 사람의 일은 끝이 났다.
"수고했어, 그리고 진짜 고마워, 노아. 노아 아니었으면 오늘 일은 끝내지도 못했을 거야…."
"하하. 나는 한 것이 없어요. 다 매니저가 고생한 거지. 수고했어요."
훈훈하게 일을 마치고 아까의 비는 계속 오고 있나 싶어 창밖을 보니 언제 날이 개었는지 보름달이 자랑스러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거기에 3월이라 날도 슬슬 풀려서 그런지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매니저."
"응?"
"괜찮으면 같이 산책하러 갈래요? 달이 이렇게 밝은데 일 끝난 기념으로 같이 걸어요."
매니저는 흔쾌히 수락을 외쳤다. 그리고 매니저룸의 불이 꺼지고 이윽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비가 그친 밤임에도 아직 풀들은 빗물을 머금고 있던지라 두 사람의 바짓단이 젖어 들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두 사람의 산책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사박사박하고 걷는 소리,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만이 둘 사이를 가득 채우자 매니저는 다시 어색함을 느꼈다. 이대로 침묵하고 있으면 안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 감각을 다른 사신들과 함께할 때도 느꼈던가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답은 '아니다'였다. 유독, 노아와 있을 때만 이런 감각을 느꼈다. 이 감각은 대체 무엇인지 지금의 매니저로서는 도저히 정의할 수 없었다. 아직 완전 친해지진 않아서 그런 건가 하며 매니저는 옆의 노아를 의식하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매니저."
"우왓!"
그렇게 열심히 애를 쓰고 있노라면 노아는 그것을 방해하겠다는 듯 매니저를 불렀다. 오늘만 몇 번째로 놀라는 거냐며 노아는 하하 웃었고 매니저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홍당무 저리 가라 할 만큼 붉어졌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일상의 대화를 조금 주고받은 후 노아가 아까 하고자 했던 말을 꺼냈다.
"이 근처에 비밀장소가 있어요. 혼자서 산책하다 알아낸 곳인데 되게 예뻐요. 매니저도 좋아했으면 좋겠다."
"노아가 예쁘다고 한 곳이면 정말 예쁜 곳이려나? 기대되는걸."
"하하, 나를 따라와요. 이쪽이야."
그렇게 몇 분을 걷고 걸었는지 모른다. 노아는 자연스럽게 매니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이끌고 있었고, 매니저는 그런 노아의 안내를 받으며 따라가고 있었다. 이따금 매니저가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도 노아가 붙잡아줘서 크게 다치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작은 소동들을 겪으며 두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앞을 본 매니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아…!"
아까 비가 세차게 내렸음에도 나무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거기에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꽃잎이 두 사람 주변에 흩날리고 있었다. 벚꽃인가 싶어서 살펴보려는 찰나 매니저의 손에 꽃송이가 날아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벚꽃과는 약간 다르게 생긴 꽃이었다.
"이 꽃의 이름은 모르지만, 매니저가 보면 좋아할 것 같았어요. 마음에 들어요?"
노아는 사랑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말로 순수한 미소에 매니저도 더불어 순수해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정말로 마음에 들어! 고마워, 노아!"
"...다행이다."
매니저는 노아가 한 말을 못 들은 것인지 되물었다. 노아는 천연스레 아무 말도 안 했다며 넘겨버렸다. 그러고는 큼큼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매니저. 바람결에 흩날리는 꽃잎을 잡으면 작은 소원을 들어준다는 얘기가 있대요. 한 번 잡아봐요."
매니저는 관심이 생긴 듯했다. 그러다가 무엇을 망설이는가 싶더니 노아에게도 같이 잡자는 제안을 했다. 아마 혼자서 잡으면 민망해 보였던 것일까.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었다. 노아가 먼저 손을 뻗으니 매니저도 따라 뻗었고, 노아가 휙 하고 움직이니 매니저도 노아를 따라 움직였다. 노아는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을 따라 하는 매니저가 너무나도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이 모습을 더 보고 싶기에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노아가 애써 웃음을 참은 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잡았다!"
"와, 축하해요. 매니저! 이제 그 꽃잎에 소원을 빌면 돼요."
노아의 말에 매니저는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하듯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매니저는 정말 진심을 담은 것인지 간절한 모습이 엿보였다. 질끈 감은 두 눈, 기도하듯 모은 두 손…. 노아는 그런 매니저를 정말로 사랑스럽다는 듯 보았다. 몇 초가 지나고 매니저는 감은 눈을 떴다. 노아는 소원을 빌지 않냐는 매니저의 말에 노아는 살짝, 그러나 수줍게 웃었다.
"나는 이미 이룬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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