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노아 퍼스널 스토리 R1 터닝포인트 스포일러주의]
어느 낭만적인 장면을 보여줄 때마다 으레 그렇듯 하늘에 벚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노아 카인드는 그 황홀하고도 아득한 풍경 속에 가만히 손을 뻗었다. 허공에 가볍게 뻗은 손 위에 벚꽃잎 한 장이 내려앉았다. 노아 카인드는 가볍게 손가락을 모아 꽃잎이 빠져나가지 않게 하고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꽃잎을 쓰다듬었다. 노아 카인드는 손안에서 굴러다니는 벚꽃잎을 닮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손에 들어차던 말랑하고 부드러운 뺨, 귀에 사뿐히 내려앉는 속살거리던 목소리, 상처와 흉터 투성이의 손임에도 아무렇지 않게 맞잡아주던 보드라운 손, 너무 갑작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칠 만큼 느리지도 않게 다가오는 그녀. 그에게 봄의 의미를 알려준 사람이었다.
* * *
노아 카인드에게 있어 봄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의 단순한 계절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얼었던 땅이 녹고, 그의 눈동자를 닮은 새싹이 몸을 일으키며 흐드러지게 피는 꽃이 겨울에 내렸던 눈의 위치를 대신하는 계절. 딱 그 정도의 계절이었다.
흐드러지게 피는 꽃, 꽃을 보며 함께 웃고 떠드는 사람들. 행복을 한 아름 껴안은 사랑스러운 표정들. 노아 카인드는 그 모든 것은 자신과 먼 세상의 일이라고,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사는 곳은 흐드러지게 피는 꽃조차 닿지 않는 뒷골목이었다. 회백색의 먼지만 굴러다니며 사람들이 버린 것들만 가득한 곳 언저리에서 노아 카인드는 살았다. 그가 하는 일은 주로 도박판의 말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 죽자고 덤벼드는 상대를 이겨야 했다. 처음엔 잘못도 없는 사람을 때려야 한다는 죄악감에 아무것도 못 하고 병원에 실려 간 적도 빈번하게 있었다. 몇 번의 경험 후에야 그는 이곳에선 죄책감도, 안타까움도 없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숨 쉬고 있던 곳의 상황이 그랬다. 살기 위해선 어떻게든 발버둥 쳐야 했다. 낡고 이리저리 흉이 진 링은 그에게 있어 생존 터이자 전쟁터가 되었다.
그것이 울타리를 잃어버린 노아 카인드가 사는 방식이었다.
울타리가 부서졌을 때, 노아 카인드는 한때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갈망한 적이 있었다. 원래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받는 안락한 울타리 안에 있었으니 어쩌면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을 바란 일이었다. 하지만 당연했던 것이 바라는 것이 되어서일까. 노아 카인드의 소망은 조각조차 남지 않고 산산이 부서졌다. 노아 카인드는 그도 몰랐던 그 아버지의 죄를 덮어쓰고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난을 받으며 살았다. 이미 편견과 선입견으로 눈을 가린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자신은 그 모든 것을 몰랐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다고 진실을 말해도 이미 눈과 귀를 가린 사람들에게 닿지 않았다.
노아 카인드는 그 모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사람들의 날카로운 말에 무뎌지는 법. 병색 짙은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더 단단해지는 법. 아무리 상대가 악의적인 말과 행동을 해도 의연하게 버티는 법. 그의 상냥함을 이용하는 사람을 응징하는 법. 더 다치지 않게 감정을 메말라가게 만드는 법.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 법. 그가 현재의 형편에 맞게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 그것이 너무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던 사람의 말로였다.
가끔은 그도 감당하기 힘든 날도 있었다. 당연히 사람이기에 지치는 날이 존재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런 지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어둠에 숨어 그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럴 버틸 수 없는 상황이 올 때마다 노아 카인드는 모두가 잠든 늦은 새벽에 일어나 인적없는 공원을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뛰고, 목에선 피의 비린 맛이 비치더라도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렇게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이 녹초가 되어야만 겨우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노아 카인드는 평소와 같이 투기장에서 한바탕 크게 싸웠다. 다만 평소와 다른 것이 있었다면 그가 일부러 지는 날이었다는 것. 이번에 바뀐 투기장에서는 무패의 전설을 쌓던 그였다. 노아 카인드의 승리가 당연한 것처럼 되었으니 상대에 돈을 거는 사람이 없어 도박의 손해가 크다는 이유였다. 평소라면 절대 거절했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는 당장에 목돈이 필요했었고, 이번 기회는 그 목돈을 충족할 수 있었다.
노아 카인드는 고민하지 않고 거래를 했다. 비록 상대에게 실컷 맞아야 했지만, 이미 노아 카인드는 대결 중에 맞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다. 그거 거쳐온 투기장이 다섯 손가락을 접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대와도 이미 말을 맞춘 상태였다. 척 보기에 아플 것처럼 보이는 상처만 만들기로 했었다. 하지만 무슨 변덕인지 중간부터 상대가 진심으로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세게 맞았더니 그는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상태의 노아 카인드는 그렇게 크고 작은 상처가 늘어났다. 그가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링 위에 누워있으니 경기가 끝났다는 종소리가 울렸다. 힐끗 바라본 상대방은 짙게 웃고 있었다.
노아 카인드는 싸움이 끝나고 투기장과 조금 떨어진 선수들을 위한 단칸방으로 들어갔다. 온몸이 너덜거렸다. 뺨은 부었고, 입술은 찢어져 피가 새어 나왔다. 옆구리를 잘못 맞은 것인지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허리도 제대로 곧게 펼 수 없었다. 온몸이 멍투성이였다. 머리 역시 아직 어지러움의 여파가 남아있었다. 노아 카인드는 단칸방에 들어오자마자 안주머니에 있던 돈을 책상에 던져두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에겐 평소보다 더 지치는 날이었다. 그래도 병원비는 제때 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자 위로였다. 노아 카인드는 손을 뻗어 바닥에 굴러다니는 탁상 달력을 확인했다. 다음 달 병원비는 언제까지인지 보기 위해서였다. 이번 달은 병원비를 냈기에 이미 15일은 붉은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문제는 다음 달 바로 초에 있을 수술 날짜였다. 그는 5월에 펼쳐져 있던 페이지가 천천히 넘겨 6월을 펼쳤다. 멍하니 페이지를 넘기던 노아 카인드는 문득 한 계절이 끝났음을 알았다.
“벌써 봄이 끝났네.”
감상 없는 상투적인 말투였다. 그는 볼펜을 들어 6월 2일 칸에 작게 ‘수술 날’을 적었다.
* * *
분명 나는 아침에 피크닉을 왔는데, 왜 벌써 점심일까.
곰곰이 생각하며 앞에서 뛰놀고 있는 사신들을 바라봤다. 다들 흩날리는 벚꽃잎을 잡는데 정신없어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각자 개별행동을 하며 사고를 치던 탓에 하나하나 모으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뭐, 다 같이 즐거워하고 재밌어하는 모습을 보며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마음으로 체념한 지 오래였다. 점심 먹자는 소리에 겨우 모여든 사신들을 펼친 돗자리 근처에 모으고 피크닉 가방을 열었다.
“얘들아, 점심 먹어!”
그제야 사신들이 돗자리로 모였다. 나는 한 명씩 샌드위치를 손에 쥐여 주며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열여덟, 열아홉….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샌드위치도 하나가 남았다. 잘못 셌나 싶어 다시 세어 봤지만 여전히 사람은 열아홉이었다. 노을을 담은 것 같은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노아는 어디 갔어?”
“몰라. 아까 저 어딘가로 가던데?”
“그래? 그럼 점심 먼저 먹고 있어. 노아 데려올게.”
늘 근처에 있던 노아였는데, 무슨 큰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혹여 다른 명계인과 싸움이라도 난 건 아닐까. 하나하나 걱정을 채워가며 다른 사신이 알려준 방향으로 향했다.
조금 걸으니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는 노아가 보였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노아!”
반가운고 안심되는 마음에 노아의 이름을 외쳤지만 그는 들리지 않기라도 한 듯이 움직이는 기색이 없었다. 혹시 쓰러진 건 아닐까, 나는 다급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나는 걸음이 느려졌다. 분홍색과 흰색의 벚꽃잎이 하늘거리며 떨어지고, 노아는 그 안에서 인상을 조금 찡그린 채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걸음을 멈춰 멍하니 바라볼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 분위기가 금방이라도 아스라이 사라질 것 같은 아련함이 있었기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노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야근하다 해가 뜰 때 밖을 보면 늘새벽 조깅을 하던 잠 없는 노아가 이렇게 곤히 자는 건 또 처음이었다.
가끔 야근을 도와줄 때도 제대로 잠드는 건 못 봤었는데. 분명 불면증이 있다고 했었지.
노아가 잠든 모습을 보니 피크닉을 잘 왔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 이렇게 노아가 편한 모습으로 잠든 것을 볼 수 있겠어. 깨우고 싶지 않아 나는 잠든 그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찡그린 미간이 훨씬 더 잘 보였다. 검지로 가볍게 밀 듯 미간을 톡톡 두드리니 노아의 인상이 순하게 풀렸다. 이젠 정말로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이 되었다. 꼭 감긴 눈썹은 가늘게 떨렸으며 노아는 고른 숨을 내쉬며 곤히 잠들었다. 봄날의 햇볕은 따사로웠고 바람은 부드럽게 살랑이며 바람을 탄 꽃잎은 노아와 내 주변을 맴돌다 내려앉았다. 평화롭다. 그 말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할까.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졸음이 몰려왔다. 날이 따뜻한 탓일까,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감화된 탓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눈꺼풀이 삽시간에 무거워지고 몸이 나른해졌다. 다들 지금 열심히 점심을 먹고 있을 테니까, 조금만 자도 괜찮겠지? 어차피 다들 노느라 정신없을 테니까. 잠깐만….
“노아, 미안. 조금만 기댈게.”
작게 속삭이고 노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따사로운 햇볕 때문일까, 전날까지 급하게 야근을 했기 때문일까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에 눈을 떠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이미 매니저는 곤히 잠들어버렸다. 하긴, 오늘 새벽 조깅을 나갈 때도 매니저의 방은 불이 켜져 있으니까. 거의 매일 켜져 있기야 했지만 오늘같이 피크닉 가는 날까지 켜져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매니저의 머리에 내려앉은 꽃잎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덜 무리하면 좋을 텐데.”
그것도 아니라면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좋을 텐데. 14지부 사신 중에 그녀의 도움을 무시하거나 들어주지 않을 사람은 없었으니까. 매니저가 잠꼬대하며 몸을 뒤척였다. 나는 그녀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게 몸을 움직여주며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으으… 냥선배님… 서류가… 몰려와요…”
그녀는 꿈속에서도 서류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끔 야근할 때마다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던 매니저가 떠올라 웃음이 났다. 투정을 부리더라도 꿋꿋이 결국 자신의 일을 해 나가던 사람이었으니까. 적어도 지금이나마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팔을 조금 움직여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가볍게 어깨를 토닥였다. 이내 그녀는 다시 고른 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잠꼬대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로움이었기에 불만은 없었다. 꽃잎은 허공에 작은 선을 그리며 내려앉고, 봄의 향을 담은 바람은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었다. 이곳만 세상에서 떨어져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고, 따뜻한 온기가 닿았으며 조금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솜사탕을 깨문 것처럼 달고도 포근한 기분에 문득 잠든 그녀를 두고 고해성사를 하듯 말한 건, 아마도 평소와 같지 않은 기분이기 때문에. 분명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귀 뒤로 넘겼다. 그녀의 눈을 덮던 햇볕이 내 팔 그림자에 가려졌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였다. 두근, 두근. 심장이 긴장으로 요동쳤다. 아마도 지금 당장 내가 그녀에게 입을 맞춰도 그녀는 분명 모르리라. 그런 생각이 드니 문득 그녀가 얄미웠다.
“조금쯤은 긴장해주면 좋을 텐데. 너무 무방비하잖아.”
나는 그녀의 이마에 떨리는 입술을 가볍게 내리눌렀다. 짙은 봄 향기가 났다. 이 향이 그녀에게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벚꽃 나무 아래에 있기에 나는 것인지 나는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향이 사람들이 그토록 입이 닳게 말하던 봄의 정경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랑스럽고도 사랑받는, 평생을 지키며 저물게 하지 않을 봄이었다.
'첫 번째 계절 > 우리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셒매니] 봄, 도래하다 / 벼리 (0) | 2020.03.10 |
---|---|
[준매니] 로맨스 드라마 / 언 (0) | 2020.03.10 |
[준매니] 그냥 네가 좋아 / 김민초 (0) | 2020.03.10 |
[리히매니][짝사랑] 그 손을 놓을 수 있던가 / 도이 (0) | 2020.03.10 |
[베린매니][봄] 봄과 닮은 것 / 메모장14p (0) | 2020.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