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그는 어쩐지 몽롱한 정신으로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면, 자신이 숲속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빽빽하게 자란 나무 그늘 아래를 정처 없이 걸으면서도 마음속에는 한 결의 불안도 스며들지 않았다. 문득 그 이유가 궁금해져서 고개를 들면 나무 곳곳에 새하얀 꽃봉오리가 맺혀있다. 마치, 길을 인도하는 등불처럼. 상황조차 잊고 낭만적인 감상을 떠올리며 제 자리에 멈춰선 그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봄……같이……."
아득한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맑은 음성. 그 소리로는 성별도, 나이도 구분할 수 없이 그저 존재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지만, 어딘가 따뜻하고 또 슬퍼서 그는 정처 없이 떠돌며 그 소리가 들려온 곳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숲은 고요하기만 하고 곧 피어날 듯 탐스럽던 꽃봉오리도 갑자기 그대로 시들어 그의 발치에 떨어져 쌓였다. 그 감정의 이유조차 알지 못하면서, 참담한 심정이 되어 가까이 있던 나무에 기대선다. 그런 그의 시야 먼 곳에 연한 갈색빛의 무언가가 흔들리는 것이 들어왔다.
그 머리칼을 향해 저도 모르게 손을 뻗는 순간에…….
*
이변은 한 순간에 일어났다.
"매니저, 매니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섞인 다급함을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그 날의 매니저는 들떠있었다. 공들여 고른 옷차림을 이리저리 거울에 비쳐보다 목덜미서 반짝이는 은빛을 발견하고 배시시 짓는 미소가 세상의 모든 기쁨을 다 끌어와 품은 것처럼 한없이 선명했다.
"유세프가 이상하다!"
그 순간 들려온 밑도 끝도 없는 외침에 놀라 몸을 돌리는 순간, 갑작스런 몸짓 탓에 목에 걸려있던 단단한 체인이 툭 끊어졌다. 당황하며 뻗은 손끝을 스치고 떨어진 반지가 바닥에 부딪치며 챙, 하는 비명을 질렀다.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려 시선을 뺏긴 것도 잠시, 매니저는 굳은 표정으로 설명없이 자신을 재촉하기만 하는 키르를 따라 방을 나섰다. 떨어진 반지는 체인을 다시 걸지도 못하고 그저 주머니에 쑤셔넣은 채였다.
황급히 지부 복도를 뛰어가는 매니저의 머릿속에는 여러 불안한 걱정이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가득 차올랐다. 어딘가 다치신걸까, 아프신건가, 내 도움이 급하게 필요한 일이 있으신걸까. 상상의 나래는 끝없이 퍼져나갔지만 그 어느 것도 진실에 도달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얼마 걸리지가 않았다.
마침내 새벽조 숙소에 도착한 매니저는 거친 숨을 고르며 아래서부터 시선을 들어올리며 황급히 유세프를 살폈다. 그 눈길이 어찌나 다급했는지 평소와 달리 어떤 짓궂은 장난도 걸어오지 않는 퀸시의 미묘한 표정마저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이내 매니저는 적어도 그의 외견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이는 것에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금은 안도한, 그러나 여전히 걱정이 다 가시지는 않은 얼굴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유세프씨, 무슨 일……."
그러나 그 문장은 채 끝이 맺어지지 못한 채 부서지고 말았다.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익숙하지만 낯선 그 눈동자에, 매니저는 반사적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혼란? 두려움?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감정이 온몸을 잠식해, 손끝이 떨렸다. 단 몇초간이었지만, 영원과도 같이 느껴지는 무거운 정적이 흐른 후에 유세프가 입을 열었다.
"이 분이 새로 온단……?"
막연한 불안이 삐걱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매니저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뭐야? 무슨 말이야?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주위에 둘러선 다른 사신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해명을 요하는 눈동자에 답해오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몇몇은 매니저 자신 이상으로 경악하고 있는 듯 했다. 그제서야 매니저는 이 상황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평정을 가장하려 입술을 애써 앙다물었다. 그런 매니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세프는 언제나와 같은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매니저."
아니다, 언제나와 같단 말은 틀렸다. 같은 건 오직 겉모양뿐이었다. 분명 따뜻하고 정중하지만 그저 미온에 불과한 그 목소리는 가장 뜨거웠을 때를 알고 있는 그녀에게는 더없이 시리게만 느껴졌다.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게, 매니저가 떨리는 목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무언가 울컥 올라올 것만 같아서 더 이상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미소를 지으려 살짝 입꼬리를 들어올렸지만 그 끝이 부들거리며 떨리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가 있어서, 매니저는 재빨리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의아한 빛을 품은 채로 닿아오는 눈빛에 그 이상의 사감도 담기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깨끗함에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고개를 살짝 틀어 시선이 빗겨나가게 했다.
장난치시는 거죠?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연기 너무 잘하시는 거 아니에요? 진짜 깜짝 놀랬잖아요.
그렇게 투정부리려 했는데.
다른 사람들도 다 연습 한거야? 다들 왜 이렇게 실감나게 해?
그렇게 너스레를 떨려고 했는데.
"이번에 14지부의 매니저로……."
왜 이런 자기소개나 하고 있을까.
질끈 눈을 감는 매니저의 발목에 질척이는 악몽이 감겨들었다.
*
새벽조의 방을 나선 매니저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어떤 반응을 하고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야, 매니저 너……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시안은 한박자 느리게 자신을 바라보는 매니저의 시선에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일단 돌아가서 이야기해요, 매니저님."
매니저보다 더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엘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재채기를 참으며 겨우 말을 꺼냈다. 평소라면 엘의 재채기는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참으면 안돼, 그렇게 말할 매니저는 별다른 덧말 없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뗐다.
뒤따라온 모리가 세이와 함께 찾아와 굳어진 얼굴로 풀어놓는 이야기는, 매니저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억, 상실……."
새벽조가 함께 떠났던 어제의 임무와 관련되어, 마물의 저주를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원혼을 정화하는 도중에, 미리 조사했던 것과는 다른 마물도 섞여있었다고. 평소라면 잠시 물러나 시간을 더 들여 그 마물의 생태를 파악한 후 움직일 유세프가 어쩐지 어제는 과감하게 돌파하는 쪽을 선택했다고.
"생각해보면 그것부터가 좀 이상했어……."
혼잣말인듯 아닌듯 베린이 중얼거렸고 퀸시도 드물게 긍정하며 무언가 말을 덧붙였지만 매니저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다만 유세프가 왜 그랬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때부터 마물에 당한 상태였던 것이 아니었다. 오늘 자신과 외출할 약속이 있어서, 급하게라도 일을 마무리 하려 했던 것이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다른 사신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면 지금도 무척이나 신경 써주고 있는 사람들이 더 걱정할 것을 알기에 매니저는 꽉 주먹을 쥐어 참아냈다.
그러나 유세프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 매니저와 관련된 부분 뿐이라는 부분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을 막는 것까진 무리였다.
"유세프씨의 기억이 돌아올 수 있을까요?"
애써 침착한 얼굴을 한 매니저를 보며 세이 또한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물의 본체가 남아있는 상태라면 그 마물을 찾아 소멸시키는 것으로 저주는 바로 풀릴 겁니다. 만일 그 한이 깊어 육신을 잃고도 저주만은 남긴 부류라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테고요."
그 말에 듣고 있던 사신들이 서로 자기가 그 마물의 잔재를 찾으러 가겠다며 웅성거렸다. 별 것도 아닌 마물에게 당한거냐며 실망이라고 유세프에게 욕 아닌 욕을 하는 사신들도 있었다. 그 과장된 말들은 자신을 위로해주려는 행동인 게 뻔해서 듣고 있던 매니저가 픽,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모두가 말로는 떠들면서도 실은 집중하고 있었던지라 순식간에 방 안은 약속한 듯한 고요가 흘렀다.
"다들 고마워."
그렇게 말하는 매니저의 표정은 확실히 조금 전보다는 개어있었다. 매니저의 감사인사에 조금 괜찮아졌어요? 다정히 살피는 목소리부터 기억에 관한 마물이라니 저의 흥미를 자극하는군요, 후후…… 하는 목소리까지, 사신들 모두가 자신을 소중한 동료로 아껴준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 매니저가 좀 더 밝게 웃었다.
"멈춰있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을 해야겠지."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다들 도와줄 수 있을까, 매니저는 그렇게 말하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감탄도, 안쓰러움도 자아내는 그 의연함을 보며 사신들은 동정을 표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참여하는 쪽을 선택했다.
어쩌다보니 시작된 회의는, 누군가가 이거 평소보다 할 일이 느는 거 아니냐… 란 생각을 하기 직전에 끝이 났다. 가볼 곳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매니저 때문이었다. 진짜 고마워, 그렇게 말하면서 문을 나서던 매니저가 불현듯 몸을 돌렸다.
"왜 그런데요. 무슨 일 있어유?"
"아니,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의아해하는 방 안의 사람들에게 알려준다기보단 스스로 다짐하는 듯한 어조로, 매니저가 말을 이었다.
"만일 유세프씨가 기억을 찾지 못한대도, 괜찮지 않을까?"
"뭐어? 너 무슨……!"
귓가의 머리칼을 넘기며 매니저가 씩 웃었다.
"다시 날 좋아하시게 만들면 되는걸. 한번 했는데 두번은 못할게 뭐야, 그치?"
답은 듣지 않은채로 가볍게 손인사만을 하고 떠나는 매니저의 뒷모습을 보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겨우 잊고 있었는데 다시 욕심날 뻔 했잖아, 자기."
*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연한 갈색 머리칼이 커튼처럼 흔들렸다.
그녀의 연인이 네가 좋아하는 모카라떼 같다고 웃었던 그 빛깔이었다.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을 따라 둥근 물방울의 자취가 남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햇살이 따사롭지만, 눈은 다 녹지 않았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오늘도 그 꿈인가.’
유세프는 한 달째 진한 에스프레소로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다. 은은한 꽃향의 잔상은 싫지 않았지만 그 꿈을 꾸고나면 몽롱한 기분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기에 생겨난 일과였다.
여전히 그 존재와 마주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분간하기조차 어려웠던 상대의 말이 이제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다.
"봄이 오면 같이 그 꽃을 보러가요……였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꿈에 나오는 꽃봉오리를 말하는 게 아닐까. 제이미라면 모를까, 자신은 꽃봉오리만으로 품종을 구별할 정도의 지식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게 조금은 아쉬웠다.
그러고보면, 그 '매니저'와 만난 것도 한 달째였다.
한달전의 아침, 무슨 이유에서인지 새벽조 숙소로 뛰어온 그녀는 어딘가 불안해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미리 언질을 들은 바는 있었다. 그러나 첫만남이 그렇게나 갑작스러울 지는 몰랐기에 당황했던 마음이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본 매니저의 모습은 생각보다도 작게 보여서, 이야기하면서도 더 조심스러워지기도 했다.
냥선배와 세이사감님이 물론 도와주시겠지만 ‘매니저’라는 것이 사신지부를 통틀어 처음 생긴 직책인데다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기까지 해야할테니 힘이 들겠지. 사실 그 때 이후로는 전혀 약한 기색 없이 단단한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첫인상이 그래서일까, 자꾸 마음이 쓰였다.
사실, '마음이 쓰인다'는 너무 온건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꽤 깊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심지어 그런 자신을 깨달은 것은 선을 긋는 듯한 그녀의 행동과 마주하고 나서였다.
[감사해요, 유세프씨.]
[아니야, 매니저. 나야말로 도울 수 있어서 기쁜걸.]
[그런데…… 절 보시면 여동생이 생각나서 잘해주시는 건가요?]
실은 매니저가 말을 하기 전까지 그런 쪽으론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왜 매니저를 이렇게나 신경쓰는가, 돕고 싶어지는가, 자꾸 눈길이 가는가. 애시당초 거기에 의문조차 들지 않았다. 마치 그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깨닫고 나자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문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건지 매니저는 하하, 소리내서 웃었다. 그전까지 한걸음 떨어져 시종일관 그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사람 같지 않게 경계가 풀린 웃음이었다.
[도움은 감사해요. 좋은 의도인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절 동생처럼 대하지는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어째서?]
[미숙하고, 서투르게만 보이실 수 있겠지만 저는 매니저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무언가를 추억하듯 먼 곳을 보다 방긋 웃어버리는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에 깨달은 거다. 애당초 동생처럼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걸.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눈길이 가고 그 행동을 쫓고있었다는 것을. 부드럽지만 자신감을 갖고 단언하는 그 말은 물론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스스로의 행동이 시작된 건 그보다 이전이라는 것을 알아버린거다. 대체 언제?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유세프는 펼쳐 놓기만 하고 제대로 읽지 못한 책을 덮으며 푹신한 등받이 의자에 기대며 한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서랍이 있는 곳 바로 위쯤이었다. 그 안에 들은 것에 대해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물어봐야겠지.’
겉면을 끝으로만 쓸어내리던 유세프의 긴 손가락이 서랍 손잡이에 하나씩 감기고 힘이 들어갔다. 마음과는 달리 서랍은 아무런 거슬림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 혼란스러운 아침, 어쩐지 방에 가득 모여있던 아이들이 모두 나간 뒤에 발견했던 반지였다. 노란 보석 하나가 박혀있었고 그 외에는 겉표면에 꽃의 줄기와도 같은 섬세한 선이 그려져있는 디자인이었다.
성인 남성이 끼기에는 작아보이는 반지와 허둥대던 그 날의 매니저를 생각하면 이 반지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분명해보였다. 혹시나하는 마음에 새벽조 일원들에게 말을 꺼냈더니, 베린은 눈치만 보다 고개를 저었고 퀸시는 인상을 구기더니 난 모르겠다! 외치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모리는 평소보다 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저 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의 반지도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라는 말만을 남겼다.
그 이후로도 반지를 찾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몇몇 동생들에게 더 물어봤지만, 반응은 다들 비슷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매니저의 것이 맞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전해주지 못한 채로 시간만 흘러갔다. 그냥 반지를 내밀며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혹시 떨어트린 것이냐고. 그러지 못했던 것은…….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유세프의 얼굴에서 표정이 빠져나갔다. 늘상 따뜻했던 인상은 감정이 빠지자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한번 반지를 손바닥 위에 올리고 꽉 쥐었다가, 이내 준비해두었던 벨벳 주머니 속에 흘려넣었다. 무표정한 얼굴과는 달리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그러고나서 바로 자리에서 일어선 그였지만, 방문을 연 것은 한참이나 넥타이를 다듬고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난 후의 일이었다.
*
그리하여 반지는 마침내 주인의 손 안에 들어왔다. 그러나 매니저는 제 손에 떨어지는 반지보다도 그 반지를 전해주는 유세프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니저? 내 얼굴에 뭐가 묻은 거야?"
"아, 아니요……."
동요한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푹 숙이고 손바닥 위의 반지만을 바라보는 매니저지만 머릿속은 마구 뒤엉켜있었다. 안다, 그는 여전히 아무런 기억을 되찾지 못했고 그 날 자신만만하게 외친 것과는 달리 유세프에게 그다지 다가가지도 못했다. 가까워질수록 혼자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이 떠올라 맘이 죄어왔기 때문이었다. 괴로웠다, 마음이 변하지 않기에 더욱 그랬다. 복잡한 일들이 있어도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려하던 자신답지 않게 새까만 비참함이 마음을 삼켜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때에 그가 다시 한 번 같은 반지를 자신에게 건넨단 사실은, 상황이 어떻든 간에 기뻤다.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아냐, 이제야줘서 미안하지. 그런데 소중한… 건가봐."
울듯한 눈으로 활짝 미소 짓는 매니저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유세프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득하게 기쁘고, 방금 칼에 베인 듯 생생하게 아프기도 했다.
"네, 진짜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준 거라서요. 정말 감사해요, 유세프씨."
"주인을 찾아가서 다행이네."
직업 특성상 표정을 숨기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도 했다. 그럼에도 다정한 어조 끝에는 씁쓸한 잔재가 남아서 유세프는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다른 주제를 꺼냈다.
"커피 마시러 가지 않을래, 매니저?"
유세프가 티타임을 갖자 제안한 곳은 사신지부 내의 휴게실이 아니었다. 지부에서 먼 곳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유세프가 기억을 잃은 후로 처음으로 함께 나가는 거라 데이트 신청처럼 느껴져서, 매니저는 배시시 웃었다.
보폭을 맞춰 걷는 동안 두 사람의 대화 속으로 많은 주제가 지나갔다. 지난 한 달 동안의 생활이나, 매니저 생활의 어려움, 혹은 사신 생활의 특별함, 인상적인 기억 같은 것. 유세프에게는 새로웠고 매니저에게는 익숙한 것이었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는 것엔 이견이 없었다.
그리고 돌고 돌던 대화는 다시 반지로 돌아왔다.
"반지에 새겨진 무늬도 예쁘던데."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내 반지에 신경쓰고 있었단 것이, 그 한마디로 너무나도 선명해져서 유세프는 속으로 스스로를 타박했다. 아니, 반지를 꺼내기 위해 체인을 당기는 매니저의 손을 따라 무심코 그 목선에 시선을 두었던 것을 반성하려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 예쁘죠! 매화꽃을 표현한거래요. 이 작은 토파즈가 꽃술이고."
"매화는 악세사리에 자주 쓰이는 디자인은 아닌데, 특이하네."
매니저도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주문제작한 거라고 들었어요. 실은..."
실은? 유세프가 그렇게 끝말을 따라하며 고개를 기울여 바라보자 매니저가 귀끝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제가 그 사람...에게 매화를 닮았다고 말한 적이 있거든요. 이른 봄 아직 차가운 눈 사이에서 피어나는 꽃이란 게."
"멋진 분인가보네."
"...네, 무척요. 시련이 닥쳐도 곧은 신념을 잃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게 매화의 꽃말에는 '고결'이란 게 있어서 딱 어울린다, 그랬었죠."
수줍게 웃는 매니저의 얼굴에 시선이 박힌 유세프는, 매니저의 발치에서 기묘하게 울렁이는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했다. 유세프 본인은 모르겠지만 당사자 앞에서 이렇게 칭찬을 한다는 게 민망했던 매니저도 눈동자를 조금 굴린 후에 말을 이었다.
"그러고 끝인 줄 알았는데, 얼마뒤에 이 반지를 건네주면서 그러시더라구요. 매화의 꽃말엔 충실, 맑은 마음이란 것도 있더라. 물론 네가 말해준 고결이란 뜻도 포함해서, 그 모든 게 너...같더라고. "
"그러네, 매니저랑 어울려."
수줍어하는 매니저의 얼굴을 보는 것은 즐거우면서도 고통스러워서, 유세프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보이지 않는 쪽의 손을 꽉 쥐었다. 그는 이내 그 고통이 질투에서 왔음을 깨달았다. 질투, 질투라…….
그래, 어느 순간 좋아하게 된 거였나보다. 일반적인 생명보다 더 긴 일생을 보냈지만 늘상 숨 가쁘게 살아가느라 바빴기에, 능숙하다 말할 정도로의 연애 경험을 갖고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기억하는 한은 스스로가 먼저 타인의 경계를 넘어서고 싶었던 적은 없었기에, 정말 생경한 기분이었다.
"고백하기도 전에 차여버렸네."
"네?"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소리는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라서 매니저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아니……!"
한결 개인 얼굴로 씩 웃던 유세프의 표정이 굳어지자 매니저가 당황해서 덩달아 제자리에 섰다. 매니저의 등 너머를 부릅뜬 눈으로 바라보단 유세프가 불안해하는 매니저의 얼굴을 보고 아차, 한 듯 안심시키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한데 실례해도 될까?"
"네? 네."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유세프를 믿기에 매니저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흘러나왔다.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유세프의 팔이 매니저의 어깨를 잡아 억세지 않게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유, 유세프씨?"
"잠시만."
평소보다 낮아진 톤에 매니저가 긴장하며 유세프의 옷깃을 꽉 쥐었다. 유세프의 왼팔이 매니저의 뒷머리를 감싸 더 깊이 끌어당겼다.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면서도 오랜만의 접촉에 미칠 듯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한참을 심호흡하던 매니저가 그제서야 유세프의 자세가 단순한 포옹이 아니라 자신의 시야와 소리를 차단하는 거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덩달아 진지해진 눈매로 매니저가 살짝 고개를 드는 순간, 삐익- 하는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이내 팔의 힘이 풀린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리니, 발치에 끈적이는 검은 웅덩이 같은 것이 보여서 놀라 한걸음 물러났다.
"마물… 의 사체?"
온통 새카만 그것은 액체같이 고정되지 않은 모양새였다. 일단 유세프가 다친 곳이 없는지부터 확인한 매니저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마물의 몸체에 박혀있는 유세프의 무기가 뒤늦게 보였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세히 살피려 상체를 숙이자, 유세프가 가볍게 매니저의 어깨를 건드렸다.
"혹시 모르니 너무 가까이는 가지않는 게 좋겠어."
걱정하는 듯 여전히 낮은 목소리에 아차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인 매니저가 경계를 늦추지 않은채로 마물을 마저 들여다 보았지만 역시 오리무중이었다.
"나는 이걸 처리하고 갈테니 매니저는 먼저 냥선배에게 알려줄래?"
"네, 그럴게요. 혹시 모르니 다른 사신들 몇몇도 여기로 보낼테니 조심하세요."
"응. 그리고나서 다시 티타임하러 가자."
"네? 아, 네. 그렇게 해요."
얼떨한 표정을 했다가 이내 단호한 표정을 한 매니저가 복도를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유세프가 드물게도 얼굴에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푹 자리에 주저 앉았다.
*
수습은 금방 끝났다.
하지만 매니저가 의외라고 생각했던 것은 평소라면 마지막 절차에까지 적극적으로 나섰을 유세프가, 세이가 도착하자마자 짧게 대화를 나누더니 빠지려는 스탠스를 취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매니저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당황하는 그녀를 본 세이 또한,
"거의 다 마무리 됐으니, 매니저님은 가보셔도 괜찮아요."
라는 말로 그녀를 배웅했다.
여전히 어리둥절한채로 유세프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것은 사신지부 근처의 숲이었다. 유세프는 이미 몇 번이고 와본 곳인듯, 거침없이 깊은 곳으로 매니저를 이끌었다. 물론 그녀에게 속도를 맞춰 걷는 것은 여전했다.
"와!"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곳에는 새하얀 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큰 나무들이 가득했지만 햇살이 그 사이로 충분히 새어들어오는 덕에 어둡지는 않아 으스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녹빛때문에 신비로운 분위기였다.
절로 감탄을 내뱉으며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간 매니저가, 고개를 들어 나무들 곳곳에 피어난 꽃을 살폈다. 이미 온 모든 꽃망울은 활짝 열려있었다. 그런 것에 비해서 향기는 진하지 않고 은은해서, 숲 특유의 상쾌함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매화...네요?"
매니저는 심장이 덜컹이는 감각을 느꼈다가, 이내 방금전에 이미 반지의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한숨을 삼키며 고개 숙인 매니저의 등 뒤로 누군가의 팔이 감겨왔다.
"유. 유세프씨?"
"……."
"무슨 일이에요?"
뿌리치고 싶은 맘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 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려 유세프를 살피려던 매니저였지만, 머리 위를 가볍게 눌러오는 턱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같이 꽃 보러오자고 했었잖아."
"네, 그랬…… 네?"
지난 한 달간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가장 최근에 그런 이야기를 한 건 반지를 받았을 때…… 순간 숨쉬는 것도 잊었던 매니저가 이번에야말로 팔을 뿌리치고 벗어났다. 이번에는 유세프 또한 막지 않았다. 순식간에 큰 눈 가득 눈물로 차오른 매니저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유세프를 빤히 바라보자, 유세프가 팔을 뻗었다.
"기억, 난거에요?"
목소리에도 이미 물기가 가득했다. 유세프의 큰 손이 매니저의 한쪽 뺨을 감싸고 엄지 손가락이 아직은 젖지 않은 뺨을 천천히 쓸었다.
"응."
"하, 하하, 저, 저는… 제가 얼마나……"
"응."
무언가 내뱉으려던 원망의 말은 다 알고있다는 듯한 다정한 대답과 목소리에 다 뭉개져버려서, 매니저는 그저 유세프의 품으로 다시 뛰어들어 작은 주먹으로 가슴을 마구 때렸다. 젖어드는 옷깃을 느끼면서 유세프는 몇 번이고 사과의 말을 되뇌였다.
*
"그 마물이 노린 건 내가 아니라 매니저였던거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재회'가 끝난 후에, 유세프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그랬다. 치명상을 입은 마물은 네 놈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란 삼류악역같은 울부짖음과 함께 사라졌고 꽤 오랜시간을 추적했으나 흔적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안일했던거야. 다음날의 약속때문에 들떠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그 탓에 널 휘말리게 했어. 정말 미안해."
말은 저렇게해도 허술하게만 움직일 사람이 아닌데다, 자신과 외출하는 약속 때문에 들떠있었다고 고백하는 연인에게 매니저가 할 수 있는 건 볼을 붉히는 것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물론 마음이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 마물이 직접적으로 제게 어떤 영향을 미치진 않았는걸요."
"그거였어. 그 마물은 사람의 감정을 부정적인 쪽으로 극대화시키는 힘이 있던거야. 거기서 부산하는 절망을 에너지로 써서 움직이는 개체였던 거지."
혹시 지나치게 격렬하게 감정이 변화하지는 않았냐고, 유세프는 물었다. 그 말을 들은 매니저는 지난 한 달간 내내 기분이 크게 변하고 쉽게 우울해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유세프씨가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평소에는 그림자 속에 숨어있다가, 그런 식으로 마음 속의 어둠을 삼키며 힘을 키운 뒤 결국 숙주까지 그대로 잡아먹는 무서운 마물이었던거야."
대견하다는 듯이 매니저의 머리를 쓰다듬은 유세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매니저의 마음은 강했지. 그래서 한달이 되도 그 마물이 잠식한 건 극히 일부에 불과했어. 비유하자면, 발목정도까지일까."
큰 나무에 등을 기대고 두 다리를 껴안은 채로 앉은 매니저의 앞에 몸을 낮추고 한쪽 무릎을 꿇은 유세프가, 손을 뻗어 매니저의 발목 위쪽 허공을 쓰다듬었다. 조금의 접촉도 없었음에도 어쩐지 열이 오르는 느낌에 매니저가 무릎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기억은 언제 돌아온 거에요?"
"그 마물을 처치했을 때."
수긍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매니저에게, 유세프가 말을 이었다.
"그 직전까진 바보같이, 매니저에게 연인이 있다고 생각해서 고백하기도 전에 차였다고 시무룩해졌었지."
"...저 달래려고 하시는 말이죠, 그거?"
글쎄, 어떨까. 유세프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매니저의 손등에 살짝 입맞췄다. 간지러운 감촉에 떨며, 매니저는 마지막 남은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여기는 왜 오자고 하신거에요? 처음엔 반지 이야기를 듣고 오자고 하신 건 줄 알았지만... 커피를 마시자고 하실땐 아직 모르실 때잖아요."
유세프는 눈을 내리깔고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 위를 올려다봤다.
"내가 기억을 잃었던 그 날에 같이 오자고 했던 것도 여기야. 매니저에게 매화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그 꽃을 볼 수 있는 장소를 찾아다녔거든. 그래서일까, 기억을 잃었던 한달 동안에도 매일밤 이 장소가 꿈에 나왔지."
유세프가 내미는 손을 잡고 매니저가 자리에 일어났다.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다른 손으로 흔들리는 갈색 머리칼에 손끝을 가져다댄 유세프가 말을 이었다.
"그 꿈엔 늘 누군가가 나왔어. 그리고 늘 같은 말을 했지. 봄이 오면 같이 그 꽃을 보러가자고... 꿈을 거듭할 수록 그런 느낌이 들었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매니저와 함께오면 무언가 달라질 거 같다, 라고."
"유세프씨..."
"지금 생각하니 네가 꿈 속까지 데리러 온 거였네. 바보같이 기억을 잃어버린 날."
눈물이 많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매니저의 눈에 다시 물기가 스몄지만, 그녀는 우는 대신에 젖은 눈으로 활짝 미소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사과는 됐어요. 이제 사과는 충분하니까, 그러니까…….”
“사랑해.”
그 미소를 눈부시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유세프가 그녀를 끌어안고는 그 귓가에 속삭였다.
“진짜 유세프씨는 바보야.”
“응,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햇살은 따사롭고, 새하얀 매화가 만개했다.
마침내 봄이 왔다.
'첫 번째 계절 > 우리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키르매니] 봄의 시작은 겨울의 종말 / 키즈 (0) | 2020.03.10 |
---|---|
[노아매니] Moonlight Blossom / 파랭 (0) | 2020.03.10 |
[준매니] 로맨스 드라마 / 언 (0) | 2020.03.10 |
[노아매니] 봄의 의미 / 나린 (0) | 2020.03.10 |
[준매니] 그냥 네가 좋아 / 김민초 (0) | 2020.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