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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시작은 겨울의 종말>
늑대 사역마 키르 X 겨울 마녀 매니저
꽃샘추위는 늑대 때문이야.
W. 키즈(@KIZ99AFTERLIFE)
“주인, 봄 냄새가 난다.”
“봄 냄새?”
키르가 문득 코를 찡긋거리더니 말했다. 그는 후각이 뛰어나다.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려는 듯 대부분의 것들을 냄새로 구분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종종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향기로 표현하곤 했다.
“계절에도 향기가 있어?”
“주인은 봄 냄새를 모르는가?”
키르에게는 향으로 구분하는 게 자연스러운 만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제 주인의 말에 되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봄 냄새라는 표현에 어리둥절한 것은 주인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동그랗게 뜬 키르의 눈이 순수하게 빛나며 답을 기다리고 있어 그는 대답하는 쪽을 택했다.
“응. 나는 봄에 깨어있지 않으니까.”
내게 허락된 시간은 겨울뿐인 걸. 작게 덧붙인 말을 키르가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키르가 제 주인과 함께한 지 어느덧 한 계절이 지났다. 겨울의 끝이 다가올수록 키르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제 주인에게 주어진 것이 겨울 밖에 없다는 것을.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마력은 다정한 성정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차가웠으니까. 어쩐지 멋쩍게 웃는 주인의 미소가 씁쓸해 보였다.
“그럼 내가 보여준다. 봄.”
충동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키르는 제 주인이 좀 더 환하게 웃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예전에는 이름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이제 와서 그 이름으로 불리는 일은 없다. 기억조차 흐릿한 이름 대신 불리는 그의 이명異名은 ‘겨울의 마녀’. 겨울의 마녀는 가을의 끝과 함께 깨어나 봄의 시작과 함께 잠든다.
항상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한때는 푸르고 또 알록달록한 잎을 가졌을 앙상한 나무의 가지들과 단단하게 얼어있는 흙바닥, 공기 중에 하얗게 퍼지는 입김. 잠들고 깨어나길 반복한지 벌써 몇 백 년이 흘렀다. 변화 없는 생활은 익숙하다 못해 그의 일부가 되었다.
이번 겨울의 시작도 마찬가지였으니 끝도 똑같으리라 생각했다.
늦은 첫눈이었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둔 눈을 한 번에 내리려고 작정했는지 폭설이기도 했다. 사람도 짐승도 모두 눈을 피해 몸을 사릴 때 마녀는 유유히 눈 속을 걷고 있었다. 모든 것이 새하얗게 변하는 그 풍경을 마녀는 싫어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이 앙상한 나무 보다는 눈으로 덮여 새하얀 나무가, 매서운 칼바람 보다는 흩날리는 눈송이가 아름다웠으니까.
순식간에 눈에 덮여 사라질 발자국을 찍으며 아무도 없는 숲을 거닐었다. 그 숲에서 추위와 공복에 죽어가는 늑대 한 마리를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누군가의 봉분이려니 하고 지나치려던 마녀를 아주 작은 숨소리가 붙잡았다. 마녀는 지금까지 인적이 드문 곳만을 전전하며 지내왔고 그런 곳에 사는 짐승들은 마녀의 계절에 대부분 동면을 취했으므로 생명의 흔적은 그에게 낯선 것이었다. 그것이 죽어가는 것이라면 더더욱.
왜 그 늑대를 살리고 싶었는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동사凍死와 기아饑餓는 겨울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였기에 그에 대한 속죄였을지도.
마녀는 그 순간까지도 숨이 옅어져가는 늑대에게 자신의 마력을 흘려보냈다. 꺼져가는 불씨에 산소를 불어넣은 것처럼 희미하게 새어나오던 숨이 하얀 김이 되어 공기 중에 녹아들었다. 털 위로 눈이 소복이 쌓인 늑대는 마력을 받아들이고는 어느새 성인 남성의 모습이 되어있었다. 굳게 감긴 눈가에 힘이 풀리고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안녕.”
눈꺼풀 뒤로 숨어있던 눈동자가 드러나며 마녀를 쳐다보았다. 아름답게 빛나는 금안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에게 바쳐졌다는 신화 속의 황금 열매 같다고 순간 생각했다. 안부인사 뒤로 그가 조심스럽게 이름이 뭐야? 하고 묻자 성인 남성의 모습이 된 늑대는 힘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키르, 라고 말했다.
“그래, 키르. 괜찮다면 나랑 갈래?”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랄 만도 하건만 키르는 아무 말 없이 마녀를 따르기로 했다. 마력의 주인을 따르는 사역마의 본능인지, 아니면 생명의 은인을 알아본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홀로 깨어나 홀로 잠들 생각이었던 마녀에게 예상치 못한 동행이 생겼다.
+++
“키르, 어디까지 가는 거야?”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힘내라.”
한참을 키르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던 마녀가 물었다. ‘봄을 보여주겠다’며 마녀를 잡아끈 키르는 뜬금없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중간중간 멈춰서 숨을 고르며 간신히 따라가는 마녀와 달리 그는 쉼 없이 발을 놀렸다. 그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키르가 가끔 홀로 나갔다 돌아오곤 했는데 이렇게 멀리까지 왔었던 건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뱉으며 마녀는 생각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지금은 시원하게 느껴졌다.
마녀 보다 앞서 걷던 키르가 우뚝 멈춰섰다. 마녀는 그 틈에 힘을 쥐어짜 그를 따라잡았다.
“다 왔다. 여기다.”
마녀는 키르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산을 올랐더니 바로 앞에서 빛나는 태양 탓에 눈이 부셨다. 순간 쏟아지는 빛에 질끈 눈을 감았다.
빛에 적응했을 때쯤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흐드러지게 핀 연분홍색의 꽃잎들과 햇빛을 받아 녹은 땅에 새겨진 발자국들, 가지 사이로 비추는 따스한 햇살. 앙상하지도 새하얗지도 않은 나무를 보자 마녀의 입이 슬며시 벌어지며 감탄을 뱉었다.
“여기는 다른 곳 보다 해가 잘 들고 따뜻해서 꽃이 일찍 핀다.”
말 그대로 아직 봄꽃이 피기에는 이른 시기였다. 그렇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거짓말처럼 봄이었다. 마녀는 봄을 알지 못했지만 이게 봄이 아니라면 달리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겨울의 마녀인 그에게 주어진 계절은 오직 겨울뿐이었다. 주어지지 않은 것을 탐하는 건 어리석은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다른 계절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키르, 나는 한 번도 봄이 궁금했던 적이 없어. 그런데…….”
마녀는 말을 흐렸다. 그러나 이어질 말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내용이었다.
마녀는 봄이 궁금해졌다. 반사되지 않고도 그 자체로 눈부신 햇살, 따스한 온기, 주변에 만발하는 꽃들의 향기와 부드러운 바람들이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 봄일까. 키르의 뒤로 이르게 꽃을 피운 나무가 따스한 햇살과는 다르게 아직 차가운 바람에 놀라 꽃잎들을 나풀나풀 떨어뜨렸다. 마녀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흰색과 잿빛 세상 속의 너도 아름답지만…….
“꽃비 속에 서있는 너를 더 보고 싶어.”
“나는 이미 주인 것이다. 마음껏 봐도 된다.”
불쑥 커다란 손이 제 반만 한 하얀 손을 살포시 쥐었다. 그리고는 자신 쪽으로 살짝 잡아당겼다. 성급히 다가가면 도망가는 고양이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러나 한편으로는 앞서 가는 어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소년처럼.
“나 차가울 텐데.”
여상한 목소리에 키르의 금안이 제 주인을 쳐다보았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을 향해야 했던 시선인 것처럼 퍽 다정한 눈길에 가슴께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따뜻한 편이니 괜찮다.”
키르가 마녀의 양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는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마녀는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밀어내지 않았다. 이내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입술에 내려앉은 따뜻한 온도에 마녀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으니 마치 아침 햇살에 녹아내린 서리처럼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키르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마녀의 눈가를 쓸었다. 상냥한 손길에 긴장이 풀린 마녀에게서 참았던 숨이 새어나왔다. 키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닿아있는 마녀의 피부는 차가웠으나 섞이는 둘의 숨결은 뜨거웠다.
툭, 마녀의 몸이 뒤로 밀리더니 등 뒤로 단단한 나무기둥이 닿았다. 그제야 키르는 슬그머니 그에게서 떨어졌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에 가려진 키르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귀 끝이 보이는 것처럼 뜨거웠다. 풋, 마녀는 볼을 붉히며 웃음을 터트렸다.
“응. 그러네. 따뜻하다.”
마녀는 키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간지러운 향기가 코를 스쳤다. 포근한 햇살에 흙이 녹아 나는 향과 꽃이 뿜는 달큰한 향. 겨울의 마녀가 가지에 달린 꽃망울을 바라보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봄을 허락 받지 못한 추위가 꽃을 샘내는 것 같았다. 아니면 늑대와 조금 더 함께하고자 하는 겨울의 발악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녀는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의 봄은 여기에 있어.
“키르, 봄 냄새가 나.”
“그래.”
겨울의 끝에서 마녀는 잠들고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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