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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뭘까. 티비 속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매니저가 물었다. 부스럭거리며 봉지 속 팝콘을 집어 먹던 리히트는 대답했다. 그 사람을 볼 때 가슴이 두근거리면 그게 사랑이 아닐까. 매니저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리히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특별히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건 아닌데. 속삭이듯 혼잣말을 내뱉은 매니저는 다시 티비 속 두 사람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그 혼잣말에 버릇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하던 리히트는 더는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대사가 귓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걸까. 언제, 누구를?
그게 나는 아닌건가.
― 리히트.
매니저는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는 리히트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첫화부터 꾸준히 서로를 향해 애정 공세를 하던 둘이 이어지지 못한 오늘 결말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던가, 몇 번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더니 결국 그 머리카락을 장난스레 흩트리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딘가 얼이 빠진 표정을 하는 게 바보같아서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었더니 왜 그렇게 웃냐고 집요하게 물어왔다. 매니저는 간지럼을 피워서까지 답을 들어야겠다는 의지를 가득 담아 뻗은 리히트의 두 손을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나 이제 간다.
밀어낸 두 손을 제대로 갈무리 하지도 못한 채 매니저가 일어나는 것만 지켜보던 리히트가 바닥을 짚고 일어나며 말했다.
― 데려다줄게.
소파 위를 두리번거리던 리히트가 검은색 단조로운 백팩을 찾아내고 한 쪽 어깨에 매는 것까지 지켜보던 매니저가 짧게 웃었다. 바로 옆 집인데 데려다주긴 뭘. 됐다는 말을 사전에 차단하듯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감싸왔다. 집 앞까지는 데려다줘야지. 리히트는 그게 마냥 행복한 듯 환히 웃는 낯이었다. 두 사람은 현관 앞까지 가는 걸음을 질질 끌었다.
― 리히트.
― 응.
― 좋아하는 사람 있어?
― ...
― 장난이야.
― ...
― 나 갈게.
― 아, 응. 조심히 가.
― 내일 봐.
리히트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못 박힌 듯 서있었다.
똑같은 물음이 오늘로 두 번째였다.
네 손을
리히트 X 매니저
남녀 사이에는 친구가 없다.
리히트는 누군가 매니저와 자신을 두고 그리 말하면 또 시작이냐는 짜증이 미처 숨겨지지 않은 눈으로 대답하고는 했다. 애들아. 내가 생각해봤는데. 남녀 사이에는 친구가 없는 게 맞아. 그래, 당연히 매니저랑 나도 친구가 아니지. 기다리던 소시지 반찬임에도 야무지게 하던 젓가락질까지 멈추고 새로운 소식을 물어갈 생각에 눈을 반짝이고 있는 친구들을 돌아보며 대단한 비밀을 얘기하는 것마냥 속삭였다. 우리는 말야...
― 가족이지.
누구보다 빠른 반응 속도로 급식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들에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은 리히트는 자신을 향해 있는 시선들에 미소를 지어줬다. 너넨 질리지도 않냐. 짜증이 섞이지 않은 편안한 말투였지만 그 표정 뒤로는 9시 마감인데 8시 50분에 온 손님을 보는 듯한 알바생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비추고 있었다. 리히트는 식판에 쇠로 된 숟가락이 몇 번 부딪히는 소리를 시작으로 금새 다른 이야기로 빠져나간 친구들의 대화 주제에 속으로 한숨을 삼켜냈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이학년 현재까지 질리도록 같이 다닌 두 사람에게 방금과 같은 질문은 신발끈이 풀리면 신발끈을 다시 묶는 것처럼 일상적이고 잦게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리히트에겐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
어제의 일이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지만 같은 반은 아니었고, 남녀 따로 분리된 수업에서 둘은 만날 수 없어 함께 집으로 가는 길에는 언제나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나누곤 했다. 평소였다면 정문에서 만나 시덥지 않은 잡담을 나누며 길을 걸었을 텐데, 그 날은 아침부터 비몽사몽하던 매니저가 생각나 데리러 갔을 뿐이었다. 리히트는 여학생 교실이 모여있는 3층에 올라서자 자신에게 모이는 눈빛들을 능청스럽게 지나쳤다. 복도 끝에서 바라본 3반은 아직 종례가 끝나지 않았는지 뒷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조금 열린 창문 너머로 부는 바람이 차가워 문을 닫고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 꼬맹이들이 저녁에 집에서 빨간펜 하는 날이니까. 우리 집에 와서 밥이나 먹고 가라고 할까. 리히트는 챙겨 입은 외투를 좀 더 여미며 저녁 메뉴를 생각했다. 항상 좋아하는 음식만 해주고 싶다가도.. 일주일 내내 같은 음식은 역시 아닌 것 같지. 리히트는 눈을 내리깐 채 고민하다 금새 회복하곤 싱글벙글 웃어댔다. 어차피 메뉴는 매니저가 정하니까.
야야. 리히트네. 그 중 복도 끝에 서있는 리히트를 찾아 낸 학생들은 반가움이 좀 섞인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었다. 너도 3반 기다려? 응. 여럿이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 속 장난을 거는 쪽도 장난을 받아치는 쪽도 자연스러웠다. 오랜만에 나누는 안부 인사는 굳게 닫혔던 교실의 문이 열리고 사람이 우수수 빠져나올 때까지 이어졌다.
― 나 샴푸 바꿨는데.
그런 말을 하며 머리카락을 살랑이는 애의 곁에서 익숙한 향기가 났다. 뭐야. 리히트는 금새 사라진 향기를 쫓아 코를 킁킁거렸다. 한창 새로 바꾼 샴푸 향을 자랑하던 애가 가볍게 리히트의 팔을 쳤다. 리히트가 무슨 샴푸를 쓰는 건지 물어보는 것보다 빠르게였다. 가까이 오면 안 돼. 나 남자친구 생겼거든.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 말했다. 리히트는 어긋난 대화의 포인트를 찾지 못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아아. 피식하고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매니저와 같은 샴푸에 대한 호기심은 이미 다 사라진 지 오래였다.
쉴 새 없이 조잘대는 무리의 대화 내용을 뒤로 하고 리히트는 여전히 매니저가 나오지 않은 교실에 시선만 기웃거렸다. 리히트. 어떻게 생각해. 아. 어어... 그러게. 대충 하는 대답이 티가 났는 지 흥미가 식어버린 애들은 또 한 번 소란스럽게 자신들끼리 행선지를 정했다. 그리고는 굳이 손을 뻗어 리히트의 어깨를 두어번 툭툭 건들었다. 우리 먼저 갈게. 건성으로 미소를 지어준 리히트는 속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다음에 보자.
겉으로 내보이는 다정은 습관 같은 거였다.
반갑지도 않은 고객에게 하는 어서오세요라는 말처럼.
리히트는 손등으로 어깨를 털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이곳을 가득 채우던 소란스러움은 어느 새 사라졌고, 혼자 남은 복도에서는 아랫층에서 들리는 이름 모를 사람들이 말하는 웅얼거림이 적막함을 밀어냈다. 왜 안 나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본인의 팔을 베고 속편히 자고 있을 매니저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리히트는 매니저가 자는 모습을 줄곧 구경하곤 했다. 쉴새없이 조잘대도 받아줄 상대도 없고, 혼잣말로 시간을 때우는 건 딱히 선호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조용히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 겨우 그 이름을 부르면. 서서히 뜨이는 두 눈에 자신만이 오롯히 담기는 게 좋아서.
― 곧 수학여행이니까 부모님 싸인 받아오래
― 아... 고마워. 선생님이 나 안 깨우셨어?
― 깨웠지. 근데 잘 자더라.
― 내가 좀.
― 그니까 밤에 야한 거 적당히 보고 일찍 자라고요.
― 야 ㅋㅋ
리히트가 복도 끝에서 옮긴 걸음이 3반 교실에 가까워질수록 매니저와 얘기하는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몰래 들으려던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잠겨있는 매니저의 웃음소리가 편해보였다. 맞다. 바깥에서 리히트가 기다려. 친구가 여상스레 말했다. 언제부터? 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와 함께 매니저가 대답했다. 친구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매니저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한 번 보고, 30분을 가리키는 바늘에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오래 기다렸겠네. 그런 매니저를 마냥 바라보던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근데 너네는... 아니다. 응? 우리는 왜?
― 넌 리히트 어떻게 생각해?
무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 매니저는 이내 짧게 웃으며 생각했다. 친구지. 다른 생각하기에 우리는 너무 오래 알았어. 교실을 향하던 발걸음과 가방을 챙기던 손은 눈에 띄게 느려졌지만 누군가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자기 얘기만 하기 바빴다. 둘이 어릴 때부터 친구인 건 알고 있는데... 근데, 걔. 다른 친구 대할 때보다 너를 좀 더. 리히트가 꽉 쥔 주먹에는 손의 힘줄이 두드러졌다.
― 야.
― 응. 말해봐.
― 그런 거 아냐.
그니까 뭐가 아니야.
― 걔는 나 안 좋아해.
한숨이 섞여있는 그 말을 끝으로 둘의 대화는 끝이었다. 그래. 나 안 좋아해. 몇 번이고 물었는데... 매니저는 마음 속에 담아두던 혹시나라는 바람을 놓아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님 말고. 누군가는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였다는 듯 홀가분하게 일어서 나갔다.
들었으려나.
― 리히트.
어정쩡하게 교실을 등지고 서있는 모습을 가만보다 어깨에 맨 가방끈을 괜히 쥐었다 놓았다. 다. 들었네.
― 어, 어.
― 오래 기다렸어?
좋아하는 사람 있어.
남자애들 사이에 둘러쌓여 그렇게 말하던 리히트가 떠올랐다.
― ...
― 아냐. 별로 안 기다렸어.
리히트에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걸었다. 뒤따라 붙는 걸음이 느린 것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매니저는 입술을 깨물다 말고 생각했다. 사소한 것에 의미를 주지 말기로. 혼자 끝내야 할 사랑에 여지를 주지 말자고.
― 얼른 와.
이보다 더 바라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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