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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 잤습니다! 지각할 것 같으니 먼저 가십시오!]
문자를 확인했으면서도 쉽게 발을 뗄 수 없었다. 조금 더 기다려볼까, 금방 나올 수도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십 분을 기다렸다. 하지만 더 기다렸다간 아침 연습에 지각할 것 같아 아쉬움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정말 아쉬웠기에 걸으면서도 뒤를 몇 번씩 돌아보았다. 혹시나 준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준의 집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삑-하고 시끄러운 호루라기 소리와 기합을 가득 넣은 남학생들의 목소리가 섞여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학교 운동장은 소란스러웠다. 한 바퀴만 더 뛰어! 작게 말하면 들리지 않아 목청 높여 소리 질렀더니 목이 아팠다. 후우, 야구부 매니저 일 언제 관두지. 운동장을 달리는 남학생들을 바라보다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딱히 야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야구 규칙도 매니저 일을 시작하면서 알았으니까. 생기부 목적도 아니었다. 다른 학교는 모르겠지만, 우리 학교 야구부 매니저 일이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고, 애초에 진로랑 관련이 없어 있으나 마나 한 내용일 것이다. 야구부에 들어간 것은 오로지 준 때문이었는데, 준은 더 이상 야구부가 아니니 일 할 의지도 점점 바닥났다.
“매니저, 또 멍 때리고 있어?”
“아침 연습에 늦으셨네요?”
“봐줘라, 그리운 얼굴 데리고 왔으니까. 아, 매니저한테는 그리운 얼굴이 아닌가?”
얼굴에 물음표를 그리며 남자의 뒤를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준? 분명 아침에 지각할 것 같으니 먼저 가라고 그러지 않았나?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모조리 다 버렸다. 깊게 생각할 필요 없으니까. 진실이 뭐든, 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신경 쓸 거 없었다. 그런 거 알아내 봤자 좋은 꼴 못 봤으니까.
준이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내 옆에 털썩 앉았다. 혹시나 기다리지 않을까 싶어 급히 나오다 마주쳐서 여기까지 끌려와 버렸습니다! 준의 말을 듣고 남자를 노려봤다. 왜 나한테만 그래! 억울한 듯 남자가 큰소리로 외쳤지만, 남자가 아침 연습에 들어갈 때까지 아주 뒤통수가 뚫릴 정도로 노려보았다. 나아쁜 사람. 준이 야구부원으로 활동했을 당시에도 준을 시샘해 몇 번 괴롭힌 전적이 있는 사람이다. 무슨 생각으로 준을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안 봐도 뻔하지.
무리 속에 섞여 남자가 보이지 않게 되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준, 너도 싫으면 싫다 그래야지. 속상한 마음을 살짝 담아 준을 타박했다. 내 말에 준은 그저 웃었다. 준은 착하다. 하지만 너무 착하면 그것도 문제가 되지. 바보같이 착한 준은 싫어도 싫다 말하지 않는다. 굳이 싫다 말해서 상대방의 기분을 좋지 않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러지 않아도 돼, 라고 늘 말하지만 그때마다 ‘고치겠습니다!’라고 말만 한다.
“준, 밥은 먹었어?”
“매니저님은 드셨습니까?”
“안 먹었구나…… 밥 잘 챙겨 먹으라니까. 잠도 많이 자고! 어렸을 때랑 변한 게 하나도 없네.”
“매니저님도 변한 것 없이 늘 올곧습니다! 정말 멋집니다, 그런 매니저님.”
두 눈을 깜빡이며 준과 시선을 마주하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어디 아프십니까? 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정확한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에 급급했으니까. 손으로 부채질하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오늘 날씨 참 좋다! 준은 시선을 위로 돌렸다. 오늘 비 온다고 하던데. 아, 짧은 탄식을 내보내며 고개를 숙였다.
준과 있으면 머리가 굳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필히 짝사랑 때문이겠지. 준을 좋아한 지 꽤 되었지만, 준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 얼어붙는 것은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곧 준의 친구가 다가와 준을 데리고 가버렸다. 아무래도 연상인 나보다 친구와 함께 있는 편이 더 좋은지 준은 아까보다 더 밝은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더불어 가만히 앉아 야구를 보기도 힘들 테고.
준이 앉았던 자리에 손을 올렸다. 중학생 때부터 야구부였던 준은 특출난 재능으로 꽤 유명했다. 언론에도 몇 번 노출된 적이 있을 정도로. 고등학교 들어와서도 실력은 녹슬지 않았고 당당히 에이스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준은 자신에게 그저 과분한 자리라며 부담스러워했지만, 늘 옆에서 지켜보던 나로선 뿌듯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준을 옆에서, 더 가까이에서 응원하고 싶어 매니저 일을 맡게 되었다. 사심 가득한 선택이었지만, 그만큼 일도 열심히 했기에 나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야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준을 응원하는 것은 즐겁기도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준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발전했으니까.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응원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그것은 짧은 행복. 갑작스러운 사고.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고로 인해 더는 야구를 할 수 없게 된 준은 그 이후로 묘하게 나를 피하기 시작하더니 야구와 관련된 모든 것들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준을 가장 가까이에서 응원하고 싶다던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준이 나를 피하는 것을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것밖에.
“매니저, 또 일 안 하고 놀고 있나요?”
“아, 세이 선생님!”
“매일 그만둘 거라고 노래를 부르더니, 오늘이 그날인가 봐요.”
“그건 아닌데…”
“고민이 있다면 말해봐요. 답은 줄 수 없어도 도움이 될 수는 있을 테니까.”
야구부 담당 선생님의 말씀에 잠시 고민했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말하지 않을 테지만, 세이 선생님은 다르니까. 준이 야구부에 있을 때도 가장 잘 챙겨주신 선생님이시고, 준이 야구를 더 이상 하지 못하는 지금에도 준의 재활 치료와 상담을 도와주고 계신 분이니 믿을 수 있는 선생님이셨다. 매일 같이 그만두고 싶다는 내 투정도 잘 들어주시고.
준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시작해 준이 나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전부 다 털어놓았다. 이런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것은 처음인지라 속이 꽤 후련했다. 세이 선생님께서 좋은 답안을 내주지 못하셔도 이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선생님께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꽤나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셨다. 아침 연습 하는 야구부를 쳐다보며 선생님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준이랑은 제대로 얘기해봤나요?”
“네?”
“준을 좋아하는 것도, 준을 응원하고 싶다는 것도, 준이 피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도. 그 어떠한 것도 준은 모르고 있잖아요. 물론 지금처럼 준을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할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엔 그러다 얼마 가지 않아 싸움이 나거나 편하게 말조차 나눌 수 없는 사이가 될 것 같은데요?”
모든 결정은 매니저의 몫이지만, 한번 고민해봐요. 매니저의 장점이잖아요, 후진 없이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셨다. 운동장으로 나가 학생들을 관리하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아침 연습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 일과를 반복했다. 지겨운 수업, 짧은 점심시간 그리고 다시 반복되는 수업들. 청소를 마친 뒤에 하는 종례에서 선생님은 늘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셨다. 교실에 있는 모든 학생이 지겹다는 얼굴을 하며 딴짓 하기 바빴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열심히 듣는 척 선생님과 시선을 마주하지만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해야 준과 같이 하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테오라고 했나, 준의 친구 이름이. 준이 날 피하는 것을 그 친구 또한 알고 있는지 내가 준을 찾으러 가기도 전에 항상 먼저 준을 데리고 학교를 나가는 바람에 준과 같이 하교를 못 한 지 벌써 몇 달이 지나고 있었다. 이러다 한 학년 위로 올라가면 공부 열심히 하라며 나를 피할 것이 눈에 선한데, 그러기 전에 얼른 준과 이야기하고 싶었다.
“준!”
“준은 오늘 저랑 같이 가기로 했는데요.”
종례가 끝나자마자 1학년 교실로 향했다. 혹시나 준이 먼저 갈까 서둘러 준의 반을 찾았다. 하지만 반에는 준이 아닌 준의 친구 테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같이 하교한다는 말에 힘이 빠졌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었다. 이때까지는 준이 나를 피하는 걸 모르는 체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계속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이 짓도 평생 할 수 없잖아. 한 학년 올라가 더 바빠지기 전에 준과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준은 어디 있어? 할 말이 있는데.”
“교무실에 있어요. 저한테 말씀해주시면 전달해 드릴게요.”
“아, 아니야. 고마운데 괜찮아.”
“사양하지 마세요. 아시잖아요, 매니저님. 준이 매니저님 피하는걸.”
“알지. 그러니까 난 지금 준을 봐야 해.”
테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테오한테 도움을 바라는 것은 무리라 생각해 몸을 돌리는데, 테오가 나를 붙잡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멈추자 테오가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비밀인데요, 준은 저쪽에 있어요. 원래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투덜거리듯 중얼거리는 테오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선 고마워, 말을 전했다.
테오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기니 얼마 가지 않아 준을 찾을 수 있었다. 나무 밑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는 준에게 일부러 발걸음 소리를 크게 내며 다가갔다. 쿵쾅쿵쾅, 입으로도 소리를 냈더니 준과 눈이 마주쳤다. 매니저님? 누워 있던 준이 몸을 일으켰다. 아, 난 역시 준이 좋아. 준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고, 그 옆에서 행복한 준을 더 지켜보고 싶어. 다시 한 번 아침에 나눈 세이 선생님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준에게 다가갔다.
“좋아해, 준.”
선생님이 뭐라 하셨나. 후진 없이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이 내 장점이라고 하시지 않았나! 나는 후진 없이 준에게 고백했다. 준은 멀뚱히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잘못 들었다고 판단했는지 내게 재차 물었고, 아까와 같은 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좋아해!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었다.
준은 곧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적. 살짝 민망했지만 준을 재촉하거나 자리에서 도망가지 않았다. 준이 도망가는 한이 있어도 내가 도망가는 일이 없다. 그리고 도망가는 준을 그냥 두지도 않을 것이고.
“매니저님이 저를 말입니까…? 이젠 야구도 못하고,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무슨 소리야, 준. 여기서 야구가 왜 나와!”
“매니저님은 야구할 때의 저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운동을 더 이상 하지 못하는 제게 실망하신 줄 알고…”
이번엔 내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해도 이런 터무니없는 오해가.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생각을 정리하다 준의 어깨를 잡았다. 준은 여전히 놀란 얼굴을 하며 시선을 마주했다.
“잘 들어, 준. 나는 준이 좋아. 운동 못 하든 잘하든 그냥 준이 좋고, 공부 못해서 매일 혼나는 준도 좋아! 그냥 준이라는 사람 전부를 좋아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준에게 말했다. 준은 시선을 떨구더니 툭툭, 울기 시작했다. 울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해 당황스러운 얼굴로 준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준을 안았다. 어깨를 토닥이며 연신 ‘괜찮아.’를 건넸다. 한참을 울던 준은 꽤 진정했는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좋아하는 야구도, 운동도 못 하고, 매니저님까지 제게 실망하신 줄 알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처럼…. 그래서 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피하기만 했는데, 정말 이런 저라도 괜찮습니까?”
이런 겁쟁이라도 정말 괜찮냐고 묻는 준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힘이 센 편이라 꽤 아팠는지 준은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리고선 준의 얼굴을 잡아 억지로 시선을 마주쳤다. 준은 여전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얼굴을 보니 참을 수가 없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난 정말 준이 좋아...”
웃음을 멈추고 다시 한 번 고백했다. 준은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귀여워, 진짜 귀여워! 귀여운 준을 다시 꼬옥 안아주었다. 준이 웅얼거리며 말을 건넸고, 나는 행복한 웃음을 참지 못해 흘렸다. 진작 말할걸, 시간 끌지 말고 내가 먼저 다가가면 되는 일이었는데.
어제까지의 자신을 욕하며 있는 힘껏 준을 끌어안았다. 이젠 준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준을 볼 수 있다. 그 사실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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