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누구시죠? 아, 며칠 전에 편지를 받았던 그 분이군요.
제가 요새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이 시간이랬는지도 까먹고 있었지 뭡니까. 우선 추우실 테니 안으로 들어와서 이야기하실까요. 벽난로에서 몸을 녹이시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잠깐 마실 거라도 가져오겠습니다. 코코아? 커피? 네, 그럼 잠시만- 제기랄! 이놈의 고양이가… 제시! 죄송합니다. 금방 다녀오죠.
여기 코코아 한 잔입니다... 예? 제시요? 아, 저 고양이 말인가요. 얼마 전 추위에 떨고 있는 걸 불쌍해서 들여놨더니, 온 사방을 휘젓고 다니지 뭡니까. 아무튼 이 저택을 매입하러 오셨다고요. …저, 혹시 허물기라도 하실 생각이신지… 다행이군요. 사실은 허물면 어쩌나 하고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이 저택은 저와 함께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사실 이곳을 지을 때까지만 해도 저는 열댓 살 먹은 소년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이렇게 오십이 훌쩍 넘었지요. 제가 지금껏 모셨던 주인님은 모두 세 분이셨는데, 한 분은 일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겨 가셨고, 한 분은 참 재미있는 분이셨는데, 그 분은… 이런. 딴소리가 길어졌군요, 죄송합니다. 위층으로 먼저 올라가 보시겠습니까? …예? 아... 그럼 조금만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저택은 세월만큼 녹아든 이야기도 많으니까요.
두 번째 주인님이 이 집을 넘겨받으신 것은 30년 전입니다. 주인님과 마님, 그리고 열 살 남짓한 아가씨와 두 도련님이 계셨죠. 특히 아가씨는 저와도 많이 친했답니다. 밝은 갈색 머리가 아주 잘 어울리는 아가씨였죠.
아가씨는 어려서부터 옆집에 친구가 한 분 계셨었는데, 이름이…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보랏빛 머리에 카인드 성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아무튼 그 친구분과는 절친한 사이셨죠. 제가 그 집으로 심부름을 어찌나 자주 다녔는지 그 집 나무문에 난 흠집도 기억하고 있을 지경이었으니까요. 그 분은 아마 아가씨를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가씨는 모르셨겠지만, 한눈에 봐도 티가 나던걸요. 뭐 저야 하인 나부랭이였으니 가타부타 말을 해드리진 않았지요. 그래도 그렇지, 별 상관없는 저도 아는 걸 아가씨는 어떻게 십 년이 넘도록 모르실 수가 있는지, 참...
친구분은 주인님 일가와 모두 사이가 좋았습니다. 성격도 좋으시고 저희 같은 하인들에게도 친절하신 분이었지만, 딱 한 가지 단점이 있었습니다. 용기가 없으셨단 것이었죠. 정말이지, 그 분이 저택에 오시기 전에 친구분께서 먼저 아가씨께 청혼을 하셨다면 아가씨는 받아들이셨을지도- 아 참, 그 분이 누구인지 설명해야겠군요.
아가씨가 스무 살이 넘었을 때 이 작은 산골 마을에 젊은이 하나가 찾아왔더랩니다. 까만 머리에 회색 눈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제법 머리가 좋고 총명해서 주인님이 공부를 시켜줄 양으로 도시에서 데려왔답니다. 돈에 매여 있던 처지라 일 년 동안 먹고살 걱정 없이 공부만 하면 된다는 제안에 이 저택으로 오신 거지요.
아가씨는 그 분이 오시자마자 제게 달려와 누구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제가 대답해드리자 아가씨는 그럼 당신의 옆 방을 쓰게 되는 거냐고 되물으셨죠. 제가 또 그렇다고 대답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수줍은 듯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셨습니다. 또 아가씨는 그분이 이 저택에 들어오신 뒤로 시간이 날 때마다 그분의 방문을 두드리며 함께 놀자 보채곤 하셨죠. 그럴 때마다 그분은 못 이긴다는 듯이 잠깐 시간을 내어 들로 나가거나 책을 읽어주셨답니다. 옆집에 사시던 친구분은 별로 탐탁치 않아하는 기미였지만, 아가씨께서 원하셨으니 달리 뭐라 할 처지는 못 되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아가씨는 그 젊은 분과 꽤나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제가 그분을 좋아하시냐고 여쭈었을 적에는 확신이 안 선다는 대답만 들을 뿐이었단 겁니다. 그래서 저는 호기심에 그분 방에 요깃거리를 가져다 드리면서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저택은 마음에 드시냐, 공부는 잘 되시냐 하는 시시콜콜한 것을 묻다가 드디어 아가씨가 귀찮지 않으시냐 하는 물음에 이르렀을 때, 저는 그분이 아가씨의 친구분과 똑같은 표정을 지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 아가씨께서 그분을 쫓아다니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의외였지요. 그제서야 생각해 보니 그즈음에는 오히려 그분이 아가씨를 찾아다니곤 하셨던 겁니다. 지나가다 보면 아가씨의 방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모습이 보인다거나, 절 찾아오셔선 어색하게 아가씨가 어디 계시느냐고 태연한 척 물으시거나 하셨더랬죠.
저는 이 사실을 아가씨께 알려드릴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남의 연애사이기도 하고, 어찌 됐든 전 일개 하인이잖습니까. 대신 몇 가지 우연을 만들었답니다. 일부러 두 분만 오붓하게 있으시도록 알게 모르게 자리를 마련하는 일 같은 것 말이죠. 덕분에 두 분은 더 가까워지셨고, 한동안 그 일은 제 소소한 낙이 되었답니다.
아, 저 망할 고양이가 또... 죄송하지만 제시를 좀 붙잡고 있어야 할 것 같군요. 금방 데려올 테니 그동안 1층을 구경하고 계시겠습니까? 제시! 제시! 얼른 이리 오지 못해! ...
…휴우. 이래 보여도 나름 똑똑해서 제 얼굴은 기가 막히게 알아챈- 제시! 카펫을 잡아뜯으면 못써!... 그러고 보니 이 카펫도 그 아가씨댁이 쓰셨던 물건이군요. 어디서 받으셨던 것 같은데…. 아, 아가씨의 생일 때였던 것 같군요. 그날은 확실히 이른 아침부터 온 저택이 분주했었으니까요. 저도 일손을 도우러 짐을 몇 개나 옮겼는지, 아직도 그 날만 생각하면 허리가 자꾸만 아프답니다.
그 날 아가씨는 제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제일로 아름다우셨습니다. 마님께서 그 때 도시에서 제일로 유행했던 옷을 아가씨께 선물해주셨는데, 하늘하늘한 느낌이 아가씨의 분위기와 정말 잘 어울려서 저택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었죠. 아가씨의 친구분과 그 젊은 분도 초대를 받으셨는데, 아가씨를 보시던 두 분의 눈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답니다. 마치 넋이 나가 버린 듯한 표정이었지요.
그런데 아가씨는 목걸이가 없다며 꽤나 아쉬워하시는 눈치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요. 사실 생일날 며칠쯤 전부터 저는 젊은 분께 넌지시 '아가씨는 목걸이를 좋아하시는데 여태껏 아무도 목걸이 선물을 해주지 않았지요' 하고 지나가듯이 말해드렸거든요. 계획적인 푸념이었죠. 역시나 바로 전날에 제 두 눈으로 젊은 분이 도시에 나갔다 목걸이 상자를 사오시는 것을 직접 본 저는 그분의 목걸이가 최고의 선물이 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어쨌든, 오찬 시간이 되어 주인님 일가와 친구분 그리고 젊은 분은 함께 식사 자리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분과 젊은 분 사이에 묘한 기류가 느껴졌습니다. 뭐라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제가 케이크 접시를 가져왔을 때, 기에 눌린달까요. 끼어들 수 없는 어떤 큰 벽이 있는 것만 같아서, 저는 차마 차는 어떤 것으로 하시겠느냐고 물어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답니다. 아가씨께서는 두 분께 모두 음식을 권하셨지만 글쎄요. 만약 저였다면 음식은 고사하고 물 한 방울도 제대로 삼킬 수 없었을 겁니다. 아마도 아가씨는 눈치채지 못 하신 것 같지만요.
분위기 자체는 평화롭고 조용했습니다. 하지만 교묘하게 한쪽이 몰아가는 느낌이 있었지요. 예를 들어 친구분이 어렸을 때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시면 젊은 분만 대화에 끼질 못한다거나, 그러면 젊은 분은 보란 듯이 아가씨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신다거나 하는 것들 말입니다. 그 사이에서 아가씨는 와인을 세 잔이나 비우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계셨는데, 저는 식사 시간 내내 혹시라도 분위기가 고조되면 어쩌나 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답니다.
식사가 끝나고 아가씨는 홀에서 춤을 추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저택의 하인들 모두가 멈칫하며 신경을 곤두세웠죠. 춤을 추게 되면 분명 첫 춤은 누구와 출 것이냐 하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될 텐데, 아가씨는 선택에 별 생각 없으셨더라도 그 두 분은 굉장히 많은 의미를 부여하실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감히 이것을 알려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슬프게도 음악은 시작되었습니다.
첫 곡으로는 느리고 부드러운 곡이 연주되었고, 예상했던 대로 두 분은 모두 춤을 청하셨습니다. 그 순간 저택은 노랫소리 외에 모든 소리를 빼앗긴 것처럼 조용해졌지요. 상황을 지켜보는 저도 입이 바짝바짝 말랐습니다. 젊은 분과 아가씨의 사이가 많이 가까워지신 건 맞지만, 어디까지나 아가씨께 있어서는 단순한 친밀감일지도 모르니까요.
아가씨는 잠시 고민하시다가 친구분의 손을 잡고 일어나셨습니다. 저는 '좋아하시는 게 아니었나?' 하고 놀라기도 놀랐지만 얼음장처럼 싸늘한 분위기에 숨조차 쉬지 못하고 젊은 분의 시선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답니다. 두 분이 춤을 청하셨을 때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아가씨가 일어나셨을 때는 정말 그 자리를 뜨고 싶은 생각 뿐이었지요. 젊은 분은 그길로 위층에 올라가셨습니다. 목걸이는 결국 전해주시지 못하셨고요.
솔직히 말하자면, 의외지요? 저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때 아가씨는 다음 곡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하실 생각이셨답니다. 그 곡을 젊은 분과 추고 싶어서 친구분과 첫 곡을 추신 거라고 하셨지요. 그러나 알 길이 없으니 젊은 분은 그날 이후로 아가씨의 부름에도 답하지 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하셨습니다. 비단 그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겠지요. 공부를 해서 주인님께 보답해야 한다는 중압감이나 죄책감도 있으셨을 겁니다. 다만 그 날을 기점으로 간신히 버텨오던 이유를 상실하신 거겠죠. 그 일을 보고 난 저는 두 분 사이에 더 이상의 관계 변화가 없이 그대로 일 년이 지나갈 줄 알았습니다만,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라고 얼마 뒤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가씨와 젊은 분의 대화가 단절된 상태로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 젊은 분은 답지 않게 도시에 나가셔서 하루종일 술을 마시고 새벽 무렵에야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취기 때문이었는지 그분은 방을 착각하셔서 아가씨의 방에 대고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셨지요. 아가씨는 잠결에 문을 여셨다가 그분을 보시고는 깜짝 놀라셔서 무슨 일인지 물으셨지만 그분은 아가씨가 서 계신 걸 보시더니 대답 없이 그분의 방으로 발을 떼셨다고 합니다.
아가씨는 그분이 정말로 아가씨가 싫어져서 피하시는 줄로 알고, 낙담하시며 문을 다시 닫으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대화할 기회는 지금뿐이란 것을 깨닫고 복도로 나오셔서 방으로 들어가시는 그분을 붙잡으셨죠. 젊은 분은 아가씨의 손을 뿌리치려고 손목을 흔드셨지만 차마 정말로 뿌리치지는 못하고 덜덜 떨리는 반대쪽 손으로 아가씨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굉장히 괴로워 보이는 표정으로 잠깐을 가만히 계시다가, 그분은 방에서 공부하실 때 쓰시던 책을 가져오셔서 아가씨께 건네주셨지요. 아가씨는 책장을 넘겨보시더니 놀라셔서 숨을 들이키셨습니다.
뒷장으로 넘어갈수록 차분하던 필체는 엉망이 되어 있고, 잔뜩 줄이 쳐져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가끔 신경질적인 글씨로 ‘이러면 안 된다’ 라거나,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는 등의 말이 적혀 있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아가씨가 책의 마지막 장을 펼쳤을 때, 한 장 전체에 그려져 있는 아가씨의 초상화를 보게 된 순간, 아가씨는 일렁이는 눈동자로 그분을 올려다보셨고 그분은 아가씨의 어깨에 고개를 떨궈 한참이나 흐느끼면서 고백을 하셨더랍니다.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치도록 할까요. 저도 오랜만에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 분을 만나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삼십 년도 더 된 아주 옛날 이야기였으니 재미있으셨을지는 모르겠군요. 코코아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예. 그럼 이번에는 더 진하게 한 잔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밖은 아직 춥고, 이야기는 많으니까요.
'첫 번째 계절 > 우리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이매니] 두 사람의 이른, 꽃놀이 / 곰도리(삼챠) (0) | 2020.03.10 |
---|---|
[기이매니][봄] 청춘의 기록 / 익명 (0) | 2020.03.10 |
[유셒매니] 무제 / 소마 (0) | 2020.03.10 |
[데이매니] I wish / 김육회 (0) | 2020.03.10 |
[유셒매니][봄] 벚꽃 / 루카 (0) | 2020.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