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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댕댕이가 달라졌어요. '
현수막을 못 거는 것이 한이다. 이른 정화에 따라나선 데이가 무리 지어 어수선한 원혼들을 홀로 붙잡아냈다. 맺고 끊는 냉정함이 옅긴 해도, 결정적일 때 본분을 다잡을줄 안 덕택이다. 일이 바쁘지만 않았다면 모두가 버선발로 나와 있었을 터. 너른 꽃가마와 시중만 없을 뿐이지, 금의환향이었다.
매니저님, 매니저님. 나인의 등 뒤에 붙어 종종이다가 마중 나온 이를 발견하자 모래가 튀도록 내달리는 발은 잔뜩 신나있다. 잘했어, 잘 했어. 허리를 주욱 굽혀 기대가 담긴 눈을 마주해오면, 갈빛 뺨엔 화답하듯 손바닥이 문질러진다. 엄지 손가락에 닿은 입꼬리가 씰룩였다. 더 해줘. 더 칭찬해줘. 더 더 만져줘.
기실, 매니저는 꾸밈이 없는 것에 약하다. 속내가 휘지도 않고 직구로 날아올 때면 원치 않아도 저마저 마음이 들썩 거렸다. 뭐라도 해줘야 할 것 같다는 고양감. 밑바닥을 파고 보면 애매한 희열 역시 얄팍할 것이다. 감정이 달달 끓어 주체가 안 될 때면, 매니저는 열에 달은 온도만치 입술을 벌렸다. 달뜨듯 가벼운.
좋아, 기분이다. 데이, 오늘 엄청 잘했으니까 데이 원하는 거 다 들어줄게. 대신, 딱 한 가지만이야.
한 가지, 를 위해 한 개만 치켜든 손가락이 술렁술렁 흔들리면, 데이는 그 개수를 헤아리듯 눈을 굴린다. 한 가지의 소원. 한 가지의 소원.
매니저님, 그러면…
-
샴푸를 짠 손바닥 위가 차다. 남은 게 얼마 없어 헛도는 샴푸통을 쯕쯕 눌러가며 간신히 끌어 모은 양이라 넉넉지는 않았다. 이거면 되려나. 고민한다고 새 샴푸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거늘, 매니저는 괜히 밋밋하게 뜸을 들인다.
"그럼…… 한다?"
"응응!"
기껏해야 후라이드 치킨이나 우유맛 사탕을 한 봉지 달라고 하는 정도일거라 생각했는데, 머리를 감겨 달라니. 명도 낮은 긴장이 팔뚝을 쥐었다. 매니저가 예상하던 범주가 아니다. 애초에, 머리를 푼 데이 자체를 본 적이 없었다. 중간 단계를 너무 건너뛰었는걸. 혼잣말을 삼키고 품 안으로 늘어진 머리칼을 한 번 흝자 실감이 자자했다. 남자, 타인의 머리는 낯설다. 내가 아닌 남에게 예속 된 일부였다. 나, 손재주 괜찮았던가. 머리를 감겨주는 것이 진정 그 영역의 일인지는 몰라도 확인하듯 쥐락펴락 한다.
마지막으로 오므린 손은 딱, 사과 한 알이 들어맞을 크기였다. 아프거나 따가우면 꼭 말해줘. 찌푸린 얼굴이 심경을 대변하듯 굳어옴에도, 굽혀진 손가락은 바지런히 문지르고 문질러 내어 속을 골고루 헤집는다. 유난스레 구불거려 뭉친 곳은 군데군데 느른하게 풀어냈다. 물을 먹은 잔거품이 자글거렸다. 데이는 머리끈 자국도 안 보이네. 묶었던 결대로, 시간대로 구부정구부정 티가 나는 제 머리랑은 딴판이다.
"데이, 불편한 데는?"
"……어? 하나도 없어. 완전 좋아. 매니저님."
답이 느리다. 듣는 이까지 노곤하도록. 일순, 매니저는 제 몸이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여겼다. 톤이 낮은 목소리는 냄새도, 울림도 낯설다. 영 어색한 종류다. 어딘가 높고, 밝고, 색이 많은, 자고로 데이의 문장이라 하면 마침표보다는 느낌표가 어울리는데, 그것도 두 개에서 세 개정도.
"다, 행이네. 아, 데이, 고개 조금만……. 응, 그렇게."
거품이 일었다. 바슥거리는 틈새에 숨은 침이 몰래 미끄러진다. 들어 올린 목덜미가 너무 곧아, 매니저는 한 번 더 울대를 울렁였다. 마구잡이로 뛰어놀고 험하게 구르면서도 본래의 몸이 지닌 선이 흐트러진 곳은 전무하다. 말랑한 살에 깊지 않은 눌림이 남았다. 매니저는 헐거운 샤워기 헤드를 돌려 눌렀다. 으음, 어떻게 하는 거지. 이렇게, 맞나. 공중으로 뻗댄 목이 편하도록 더듬더듬 손바닥을 받쳐본다.
"데이, 어때…?"
시원치 않은 수압의 물을 오목하게 모아 부딪혀내고 물으면, 휜 입술이 대답을 대신한다. 어설픔에도 너그러웠다. 마른 껍질이나 축일 정도의 기쁨을 한 가득 물어 삼킬 줄 알았다. 미묘하게 치민 감정도 잊고, 매니저는 쭈그러든 미간을 풀었다. 사실, 안도란 별 것 없다.
"이제 제대로 헹궈낼 거야."
"응응."
매니저가 고개를 기울였다. 물 온도가 손에 애매하다. 찬 듯, 따뜻한 듯. 중간에 걸쳐있다. 그래도 감아내는 움직임을 이었다. 데이에게는 좋은 감도로 미지근했을 거라고 유추한 덕이다. 엄지손가락으로 귀 뒤를 굴려 잔거품을 닦아내고, 묻어나는 것이 없도록 물을 끼얹었다. 귓바퀴를 문지르며 뭉툭하게 다듬은 손톱 끝도 흘끔 넘겨본다. 미리 깎아두길 잘 했네. 머리숱을 이리저리 빗고 헤쳐 내다보면 필히 어딘가 긁혔을 것이다.
"매니저님, 안 힘들어?"
"응?"
"나, 머리 무거울 거 같아."
편히 기대고 있던 목이 돌연 뻣뻣해진다. 익지 않은 작업이라 동작이 지지부진 한 것을 데이는 쉽게 제 탓으로 치부 했다. 해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조금만 아닌 것 같아도 후회가 빠르다. 감은 눈마저 울상으로 휘었다. 사신들이 보았다면 다시 한 번 입을 모아 강아지라고 칭했겠지. 봉긋한 이마에 손이 얹어진다. 매니저는 얕은 웃음소리를 냈다. 남은 손으로는 샤워기를 더 세게 잡는다.
"데이 머리가 왜? 벌써 다 했는걸?"
물줄기가 막바지다. 마지막으로 가닥가닥 천천히 흝고, 매니저는 수도꼭지를 잠궜다. 비틀어 꾹 짜낸 머리카락 위로 수건까지 감싸고 나서야 간신히 눈꼬리가 누그러진다. 무겁게 늘어진 결은 이전처럼 구불거리지 않았다. 쇄골 아래로 떨어진 머리끝을 그러모아 툭툭 털고, 다시 윗부분을 덮어 문지르니 손길이 딱 제 맘에 들어 맞는 지 금방 표정이 희게 핀다. 좋았나 보네.
"어때? 소원 빈 건 마음에 들었어?"
눈에 훤할지라도 슬쩍 질문을 던져보면,
"응응! 매니저님 최고야!"
완전 완전 시원했어, 라며 생각한 만큼 맑게 웃는다. 매니저는 다시금, 타고 나니를 그리 타고 난 데이를 인식한다. 알지만, 투명하다. 새삼스럽게. 돌려 말하지도 못 하고, 좋은 것은 좋은 만큼 표현하는. 쾌활한 성격의 사신들은 많지만, 근본적인 부분부터 솔직한 어린 아이 같다.
"좋아. 그러면 대로 앉아 있어, 데이. 이제 머리 말릴 거야."
"알았어!"
데이가 철푸덕 주저앉는다. 따라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는 매니저와 앉은 키를 맞추기 위해 고개도 힘껏 숙인 채. 민트색 숱이 보송보송하다. 매니저는 묵묵히 수건을 쥐고, 물기를 털었다. 시작을 끊었으니 끝까지 마무리하겠다는 듯이. 타올 아래로 물자국이 방울방울진다.
"헉! 맞다!"
"응?"
"아까 나인나인이 쿠키 만들어주고 갔어!"
매니저님이랑 같이 먹으래. 몸이 들썩이자, 물기와 수건이 한데 추락했다. 나인 쿠키는 따뜻해야 더 더 맛있어. 슬쩍 나온 혀끝이 입술을 쓸어낸다. 식어 미지근한 것보다는 갓 구워낸 것이 바삭하다. 치아가 물기 좋게 씹히는 초코칩, 그리고 적당히 따끈한 우유까지. 벌떡 일어나려는 다리를 매니저의 손이 복복, 친다. 여기 있어. 내가 가져올게. 수건을 폭 뒤집어씌워놓고 몇 걸음을 옮기면 테이블 위, 바닥이 넓은 접시에 쿠키가 수북했다.
"나인, 너무 많이 구운 거 아닌가…?"
남을 것 같은데. 중얼거리며 데이와 저 사이에 쿠키더미를 내려놓으면, 매니저는 제 의문이 쓸데없는 기우였음을 금세 확인한다. 부스러기를 보는 눈마저 번쩍번쩍했다. 조용하게 한 번 웃고,
"자, 데이."
아, 해. 받음만치 벌어진 입술 새로 큼지막한 쿠키 하나를 넣어준다. 받아먹는 모양새가 영 청초하다. 평소에도 몇 번 먹여준 적은 있었다만, 다르게 묘했다. 머리를 묶었는지, 안 묶었는지가 원래 이렇게 크게 차이나는 건가. 데이와 청초라. 실없는 생각이다. 매니저는 다시금 수건을 꾹 잡았다.
"매니저님은 쿠키 안 먹어?"
"응? 나는 조금 이따가."
머리칼을 말려내고 있자니 딱, 접시 넓이만큼의 사이를 두고 데이가 말한다. 데이 머리 다 말리면 먹을게. 적당히 받아넘기는 답. 내, 머리, 다, 말리면. 둥근 눈이 무언가를 탐색하듯 도르르 굴렀다. 말소리 반, 바삭거리는 소리 반. 남은 조각을 조금 급히 씹어 꿀꺽 삼켜고 나면,
"매니저님도."
아, 해. 데이는 반쪽이 된 쿠키를 들이민다. 매니저님이랑 지금 같이 먹고 싶어. 일부러 부러트려, 입안으로 깔끔하게 떨어질 만한 크기. 초코의 단 내가 코앞에서 흔들린다. 쭉 내민 손만 그대로였다. 해준 만큼 똑같이 돌려주는 건가. 그에 매니저는 더듬더듬 입을 연다.
"고, 고마워."
조금 어정쩡한 기분으로. 입술 사이로 쿠키가 물렸다. 어쩐지, 이상해. 같은 문장인데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것 같은. 별 도리가 없어, 매니저는 얌전히 치아를 맞닫는다. 한 입 깨문 것은 맡아지던 대로 달콤하다. 밤조의 사신들이 유독 나인이 구운 쿠키에 약한 이유가 있네. 타올을 문지르는 것도 잊고 조용히 맛을 감상하고 있으면 마주한 데이가 웃는다. 여느 때처럼, 싱글싱글. 웃음도 달다. 눈과 입이 모두 달다. 어딘가 간질거려, 매니저는 슬쩍 입가를 긁어본다. 달라지는 것이 없음에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오독오독. 입 안에 든 것을 꼭꼭 씹으며 쳐다본 얼굴, 그리고 혀끝에 남은 진한 초코맛. 둘 중 더 단 것은 아마도. 음, 아마도.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물에 젖은 털을 털 듯, 고개를 파다닥 흔든다. 매니저는 재차 근엄한 척, 수건에 감싸인 머리칼을 꿋꿋히 비볐다. 쿠키와 데이 만치 다디단 온도의 열로 귓바퀴를 물들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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