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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로디를 중시한 선곡입니다. BGM 감상은 자유롭게 선택해주세요. - 글쓴이
첫눈과 나타난 / 오앵
“안녕.”
살가운 인사에 얼결에 같이 꾸벅 인사했다. 이 마을에서 본 적 없는 단정한 인상의 남자였다.
낙엽으로 알록달록하던 세상이 점차 시들어가다 하얀 눈에 뒤덮인 날이었다.
부쩍 추워진 날씨 탓에 나가지 못했던 어린 동생들이 난리가 났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를 겨우 달래 가며 가벼운 숄 하나만 걸치고 집 앞 언덕에 발을 디뎠다. 온통 하얗게 뒤덮인 땅에 발자취를 남기는 건 나한테도 반복되는 일상 속 한 줄기 즐거움이었다. 조심하면서 놀라고 이미 눈 위에서 뒹구느라 정신없는 망아지들에게 닿지 않을 주의를 주고 동글동글한 눈덩이를 뭉치던 차였다.
그는 웃는 얼굴로 내 옆에 서있었다. 너무 다정해서 경계심조차 들지 않는 미소에 그저 요리조리 눈만 굴렸다. 거리감조차도 없는 눈빛으로 보는 걸 보면 분명 언젠가 마주쳤다는 건데, 일말의 기억조차 없다.
“저,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저런 외모를 가진 사람이라면 잊혀 질 리가 없을 텐데, 기쁨과 설렘이 가득한 얼굴에 오히려 내가 실수하는 느낌이라 더 당황했다. 그러자 그가 작게 입을 벌리더니 웃었다. 영문 모를 웃음에 의문을 가득 담아 바라보자, 그가 다정하게 사과했다.
“갑자기 말 걸어서 미안해. 반가운 사람이랑 닮았거든.”
“괜찮아요. 누구나 실수할 수 있죠!”
“하하, 상냥하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차분하지만 아리게 울렸다.
“그런데 다 녹았다, 눈사람.”
미묘한 기분에 멍하니 있다가,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리니 열심히 뭉치던 눈덩이는 이미 녹아 없어진 뒤였다. 별로 뭉친 것도 없었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에 한숨을 푹 쉬며 눈을 콕콕 찔렀다. 그때 머리 위에 그림자가 지더니, 한겨울처럼 상쾌한 내음과 함께 길쭉한 다리가 쪼그려 앉았다.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걸. 도와 줄게.”
뭐라 말할 새도 안 주고 장갑도 끼지 않은 큰 손이 눈을 끌어 모으더니 꾹꾹 뭉쳤다. 이건 무슨 상황일까. 이번엔 머리를 굴렸으나 명쾌한 해답이 떨어지진 않았다. 자연스럽게 옆에서 진지한 얼굴로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같이 도왔다.
손 안 시려요? 응. 추위에 강한 편이거든. 오히려 네 손이 더 추워 보여. 급하게 나오느라 장갑을 깜빡했어요.
가벼운 대화가 오가고, 듣기 좋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눈을 모아서 얹고 뭉치는 두 쌍의 손이 얽혔다 풀어지길 반복했다. 그렇게 단순 작업을 하고 있으니 밖으로 나온 이유가 이 남자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어느새 의문도 풀린 채 흠뻑 빠져들었다. 힐끔, 중간에 살핀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엿보았던 미어지는 듯한 감정의 편린은 간데없이 멀끔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어쩐지 다행이었다.
두 명이 함께 만들고 있으니 아까 만들었던 작은 눈덩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가 빠르게 만들어졌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어디에 이 친구 놓을까?"
"음...."
주변을 둘러보니 담장 옆에 자라는 나무가 자그마한 그늘막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내 시선을 따라간 그가 그 곳으로 눈덩이를 옮겨 놓았다. 놓고 보니, 어린 동생들과 비슷한 크기에 저절로 신이 났다.
"탁월한 위치 선정이네."
"그렇죠? 저쪽이면 덜 녹지 않을까 해서요."
"그럼. 안 녹을 거야."
"다행이네요! 장식할 만한 게 어디 있을까."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만큼 조금 더 예쁜 돌 단추로 장식해주고 싶어 길을 살피는데 어깨를 톡톡 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눈 앞에 검은 남성용 장갑이 내밀어졌다. 손이 많이 빨개졌어. 내 손을 살짝 잡아 돌리더니 그 위에 장갑을 얹어주었다.
"눈은 그만 만지고 이거 끼고 찾아."
"네? 아직 머리 부분이 남았는데..."
"내가 만들어 줄게."
숨 쉬는 일만큼 어렵지 않다는 투로 말한 그는 꼭 껴, 신신당부하고 다시 언덕으로 갔다. 평상시 내가 동생들을 챙겨주던 것처럼. 그 반대의 입장이 오래간만이라 장갑을 건네 줄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장갑을 꼈다. 낯설지만 싫지 않았다.
온통 검은빛 일색으로 차려 입어서 장갑을 끼지 않은 그의 맨손이 멀리서도 두드러졌다. 발갰던 제 손과 비교될 만큼 하얬다. 크기마저 나와는 너무 차이가 나서 장갑 속에서 손을 꼼질거려도 넉넉했다. 짝, 두 뺨을 가볍게 쳐서 신경을 돌렸다. 찬기가 녹고 있는지 괜스레 손이 홧홧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길바닥을 훑으면서 돌아다니고 있으니 저만치에 반들반들한 검은 돌이 눈에 들어왔다. 집어서 흙을 털어내고 보니 모양새만큼 색도 예뻤다. 까맣지만 하얀 부분이 콕콕 박힌 게 꼭 어디선가....
"저 분 눈동자 같다."
"뭐가 내 눈동자랑 닮았어?"
"꺄악!!"
불쑥 들어온 목소리에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벌렁벌렁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무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뒤로는 예쁘게 완성된 눈사람이 보였다. 도대체 언제 눈은 뭉쳤고, 언제 뒤로 다가온 건지 물어볼 정신도 없다. 반사적으로 두 손을 가슴으로 끌어 모으고 서있으니 그가 꽉 쥔 손을 가져가 하나하나 폈다. 보물찾기처럼 드러난 검은 돌에 그의 입가에 진한 웃음이 걸렸다.
"이쁘네. 닮았다고 해서 고마워."
후광이 비치는 듯한 미소도 멋있지만 예상치 못한 격한 반응이 나를 더 벙벙하게 만들었다. 누가 이런 소소한 물건에 진심 어린 반응을 보여줄까. 생각을 바꾸고 돌을 그에게 내밀었다.
"드릴 게요. 선물이라고 하기도 너무 민망하지만... 같이 만들어 주셔서 제가 더 고마워요."
"바라고 그런 건 아닌데. 고맙게 받을 게."
하얗고 길쭉한 손가락이 돌을 가져가 주머니에 넣었다. 정말 간단한 행동인데, 그게 뭐라고 시선이 안 떼어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시선은 그가 다른 돌로 장식해야겠다며 말을 걸었을 때 간신히 떼어졌다.
둘이서 좀 더 살펴봤지만 아까와 같은 검은 돌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주고도 민망했는데, 희소성이라도 있으니 내심 다행으로 여기며 제각각 다른 크기의 돌 단추를 달고 멋들어진 나뭇가지 손까지 끼워 주었다. 얼굴까지 그려주자 담장 아래로 빙긋 우리에게 웃고있는 새하얀 친구가 탄생했다. 동생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 보고 처음이라 가만히 감상하고 있자, 불러도 올 생각 없던 동생들도 달려와 감탄사를 내뱉었다. 누구세요? 둘이 같이 만든 거예요? 어떻게 만든 거예요?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질문 폭풍이 당황스러울 법도 한데, 그는 여유롭게 시선을 맞추며 하나하나 대답해주었다.
첫눈에 들떠 잔뜩 상기된 아이들과 웃고 있는 눈사람. 겨울을 떠올렸을 때 가장 이상적인 순간을 담아 놓은 그림 속에 서있는 것 같았다. 감상에 잠겨 있다 돌아본 시선 끝에 그가 있었다. 검은 눈동자에 비친 나는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고마워요. 눈인사로 전한 마음이지만 그는 알아듣고 신사처럼 고개를 까딱 숙였다. 천만에.
"차라도 한 잔 드세요. 몸 좀 녹이셔야 할 텐데."
"아니야. 난 이만 가볼 게. 들어가서 쉬어."
"앗, 그럼..."
엉겁결에 코트 소매를 부여잡았다. 바로 놨지만 그도 나도 멈칫하면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할 말이 뒤섞여 정리되지 않았지만 그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었다. 용기를 짜내서, 그에게 장갑을 돌려주며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아까처럼 호기롭게 물은 질문에 동그래졌던 그의 눈이 서서히 기쁘게 웃었다.
"유세프."
아침에 일어나서 동생들의 식사를 챙기고 집안일을 끝낸 뒤 제 시간을 잠깐 가지다 다시 동생들을 챙기고. 이전까지의 하루는 꽤나 단조로웠다. 두 녀석을 챙기느라 정신 없지만 혼자 남아있다 보면 때때로 무료해지는 그런 일상. 거기에 단 하나의 존재감이 섞였을 뿐인데 내 일상은 조금 더 특별해졌다.
똑같이 아침을 먹고 청소를 한 뒤 마당에서 동생들과 놀고 있으면 한낮에 유세프 씨가 나타났다. 그가 몰고 오는 것이 햇빛인지 활기인지, 하루 중 가장 따뜻한 시간대에 조용하던 집이 시끌벅적 해졌다. 그 중에서도 유달리 하늘이 갠 날에는 마당에 의자를 꺼내 놓고 바깥의 청취를 즐겼다. 따뜻한 음료와 담요를 준비해두고 이야기하다 보면 어쩔 땐 살짝 덥기까지 했다.
주제는 다양했다. 유세프 씨가 없었던 사이에 일어난 일, 저녁에 읽었던 책에 대한 감상, 소소한 취향 등 날마다 다른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면 그는 가만히 들어주거나 소소한 장난을 걸었다. 진담 반 농담 반을 섞어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냐고 물었을 만큼 다양한 분야의 지식도 설명해주기도 했고. 매번 들으면서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면, 그는 별거 아니라면서도 가끔은 쑥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 모습을 보고 간질거리는 가슴 한 켠을 감추려 장난을 걸었고.
오늘도 날이 따스했다. 담장 위를 종종거리던 작은 새가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유세프 씨가 놀래켰나봐, 하고 웃자 나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저만치 날라가는 새의 날갯짓이 내 눈엔 신나고 들썩들썩하게 보였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요즘의 내 기분 덕분에 그렇게 보였을 수도. 최근에는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붕 떠있었으나 내 옆에 앉아있는 그만 차분했다.
"일주일 뒤에 겨울 축제가 열리는데, 유세프 씨는 가봤어요?"
그가 카라멜라떼를 내려놓고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꽤 예전부터 열린 축제라는 것만 알아."
"그럴 줄 알았어요. 가만 보면 참 시내에 안 간다니까요."
"딱히 갈 일이 없는 걸?"
"그래도요. 집에만 있으면 지루하지 않아요?"
"요즘엔 안 그래. 매니저랑 같이 놀고 있잖아."
그의 너스레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갑작스레 훅 들어오는 다정함은 아직까지도 적응되지 않았다. 들고 있던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며 축제를 떠올렸다.
"이렇게 말한 거 치곤 저도 오래간만이에요."
"도시에서 다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렇죠. 어렸을 때는 자주 갔었는데. 아, 기대된다."
관광객이 몰릴 정도의 규모는 아니지만 마을 사람끼리는 연례행사나 다름없는 축제였다. 마지막 날을 광장에서 큰 모닥불을 피우면서 마무리하는데, 그 앞에서 소소하게 소원들을 빌곤 했었다. 다가올 새해와 신에 대한 기원, 가족의 행복 등등. 회상하면서 커피를 홀짝이자 옆에서 유세프 씨가 애플파이를 내밀었다.
"어제 매니저가 궁금해했던 책 여기 가지고 왔어."
"와, 고마워요!"
파이를 오물거리면서 책을 받았다. 이 작가는 말이지. 설명하는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귓가에서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조곤조곤하고 힘 있다. 바깥 출입을 잘 안 한다는 그에게 그 이유에 대해 물었을 때 쌓인 책을 읽느라 밖으로 나올 틈이 없다고 말했었다. 그렇게나? 싶으면서도 이야기하는 동안 반짝이는 그의 눈을 보다 보면 저절로 납득이 갔다. 새로운 일면을 발견하는 것도 즐거웠으니까. 물론 그 이후로 마당에 나오는 빈도가 잦아지고, 집 주변을 산책하는 일도 늘었다.
그가 책장을 넘기자 호리호리한 손으로 시선이 내려갔다. 내 손보다 훨씬 큰데 두께는 비슷한 것 같다. 원체 마른 체형이라 안 그래도 큰 키가 더 크게 보이기도 하고. 열심히 움직이던 입이 점점 느려졌다. 같이 앉아서 놀고 활동도 내가 더 많이 하는데 어째서.
"유세프 씨."
"응?"
나를 바라보는 말간 얼굴에 심술 아닌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이렇게 집에 있는 것도 너무 재밌지만, 가끔은 환경을 바꿔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너무 앉아만 있으면 건강에도 안 좋고."
"응?"
"같이 축제가서 열심히! 돌아다니실래요?"
"아하하..."
유독 한 맥락에만 힘이 들어간 건 착각이 아니다. 전혀 내 허리둘레가 신경 쓰여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의도가 다분히 반짝이는 시선에 그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신선한 회피 반응이 심보에 불을 지폈다.
"어때요??"
그를 밖으로 끌어내고 싶은 장난스러운 생각도 있지만, 축제 일정을 들었던 순간부터 그와 같이 가면 더 재밌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과 사심도 넘실거렸다. 반대편에서 놀고 있는 동생들을 보던 그가 끈질긴 눈길을 못 이기고 다시 돌아봤다.
"가고 싶어?"
"네. 이전에는 가족들끼리만 갔는데, 유세프 씨랑 가면 색다른 경험이 될 거 같아요."
"그래, 그렇게 말한다면 가자."
생각보다 금방 떨어진 승낙에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소리를 간신히 막았다. 소리만 막았지 기쁜 마음은 웃음으로 배실배실 흘러나왔다. 그런 반응에 그의 큰 손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네. 언제 가고 싶어?"
"음, 이틀이니까, 마지막 날 어때요? 아무래도 하루는 동생들을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아서요."
"힘들지 않겠어?"
"괜찮아요! 매번 챙겨왔으니까요."
그리고 방금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 떠올랐다. 물꼬를 트자 착착 진행되는 머릿속 계획을 짜고있으니 가만히 보던 그가 알겠다는 듯이 웃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다정한 걱정을 덧붙이면서.
"근데 왜 처음에 머뭇거렸던 거예요?"
혹시나 해서 물은 질문에 그는 간단하게 답했다. 부담스러워서.
"사람들이 많이 쳐다보는 편이거든."
"........와."
절로 입이 벌어지는 답변이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잘생긴 얼굴에 걸려있는 다정한 미소를 본다면 누구든 한번 보는 걸로는 그치지 않을 테니까. 다만 조금이나마 심각한 이유일까봐 걱정한 게 무색해진 걸 넘어서서, 얄밉다. 지그시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장난이었다며 달래듯이 덧붙인 말은 가볍게 한 귀로 흘려 넘겼다.
'잠깐만.'
이게 정말로 장난으로 넘기기만 할 부분일까. 처음 만났던 순간 이후로 동생들은 항상 그를 찾을 때 잘생긴 형이라 불렀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려 애썼지만, 따뜻한 검은색 니트를 입은 채 햇빛을 후광처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 새삼 비현실적이다. 이런 유세프 씨와 함께 축제를 가게 된다면..
진짜로 심각하게 걱정하는 내 앞으로 유세프 씨의 얼굴이 가까이 들이밀어졌다.
"매니저?"
"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간식 좀 더 가지고 올게요!"
들고 있던 음료를 홀랑 다 마셔버리고 의아한 시선을 뒤로 한 채 집안으로 도망치듯 들어와버렸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뜨겁다. 아직 따뜻하던 차를 한번에 마셔버린 탓인가. 후, 한숨을 한번 쉬고 슬쩍 입고 있는 옷을 살펴보았다.
"좀 신경 써서 입어야 하나."
일주일은 금방 지나갔다. 유세프 씨와 보내는 시간은 변하지 않았지만, 여러 잡생각들이 뇌리에 들이차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때문에 여러 번 유세프 씨의 말을 못 듣기도 해서 어젠 그가 이마를 짚기까지 했다.
옷은 뭘 입지. 어느 골목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을까? 밥은 뭘 먹지?
그와 약속한 날은 내일인데 벌써부터 혼자 난리였다. 방 안에서 이런 저런 옷을 대보며 고민하고 있으니 밖에서 동생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어린 망아지들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잠깐만 놀고 있으라며 그들을 달래고 다시 부리나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와 같이 가는 날은 오늘이 아니니 옷고민은 접고 금방 입었지만, 또 다른 걱정거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일주일 전부터 고민했는데도 마땅한 걸 결정 내리지 못했다. 결국 방안에서 20분을 더 까먹은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담장 옆 눈사람 앞에 있던 동생들이 이것 보라며 뿌듯하게 외쳤다. 가까이에서 본 눈사람은 훨씬 화려했다. 그려 넣기만 했던 얼굴에 단추 눈과 당근 코가 달리고 반달모양 입이 생겼다. 자세히 보니 반달 입은 옷걸이의 걸이 부분을 잘라서 붙여 놓았다.
"이 녀석들이 살림살이를 막 갖다 붙여버렸네?"
장난스럽게 노려보며 잡을 것처럼 손을 꿈틀거리니 동생들이 꺄르륵 뿔뿔히 흩어졌다. 잡히면 혼난다! 과장되게 으름장을 놓았지만 눈사람의 모양새가 훨씬 좋았다. 방긋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자연스레 같이 만든 사람이 떠올랐다. 오늘 하루 보이지 않는데도 허전해서 눈앞의 눈사람을 대신 쓰다듬어 주었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아서.
"금방 다녀올게. 곧 보자."
동생들을 데리고 내려가는 뒤로 눈사람의 나뭇가지 팔이 배웅인사를 하듯 흔들거렸다.
오래간만에 다시 온 축제는 활기찼다. 광장을 중심으로 알록달록한 천막과 가판대들이 깔려있고 곳곳에서 군침 도는 간식 향기가 맴돌았다. 분위기에 젖은 사람들이 들뜬 얼굴로 장식품들을 구경하고 좁은 골목 사이사이를 색색의 가랜더가 밝혀주었다. 여러 번 봐왔던 우리도 새로운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다녔다.
"누나, 누나! 저기 사탕이 있어!"
"저기 봐! 기차 모형 진짜 멋있다!"
양쪽으로 한 명씩 붙든 두 손이 쉴 새 없는 방방거림에 같이 팔락거렸다. 들뜬 만큼 인파에 잃어버리지 않게 자그마한 손들을 힘주어 잡았다.
"좀 이따가 밥 먹을 거니까 간식은 한 개씩만 먹기다?"
투정을 예상하고 꺼낸 얘기였는데 웬일로 동그란 정수리들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더니 씩 웃지 뭔가. 미심쩍었지만 드디어 조금 철드는가 보다, 하고 넘겼다.
"좋아. 그럼 뭐 먹을까?"
"파스타! 파스타!"
"아니야!! 고기 먹자 고기!"
아니구나. 순식간에 왁왁거리는 둘을 달래며 주변 노점상으로 향했다. 먹을 걸 하나씩 물려 놓아야 둘러볼 여유가 생기겠다. 그렇게 빈 손에 꼬치와 막대사탕을 들고 조용해진 동생들을 데리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눈꽃모양의 유리 공예, 눈 내리는 스노우 볼, 집에 들여놓으면 신의 비호를 받는다는 유니콘 장식. 하나같이 섬세하고 이뻐서 눈길을 사로잡는 물건들이 깔려 있지만 딱 꽂히는 느낌이 없었다. 과하지 않고 부담 없을 그런 선물. 항상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그가 자주 쓸 만한 실용적인 물건이었으면 했다. 그렇게 거창한 의미를 담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하루하루를 즐겁게 해준 보답.
"누나 얼굴 빨개졌다!"
히죽히죽 놀리는 말에 아니라고 재빨리 대답하면서도 가판대 거울로 얼굴을 확인했다. 얼굴은 그저 바람이 차서 그런 거야. 되뇌면서 동생들을 보니 얘들은 정말 추위때문에 코 끝이 빨개지려고 한다. 화들짝 놀라서 쪼그려 앉아 동생들의 옷을 단단히 여몄다. 오늘은 평소보다 바람이 차길래 모자, 목도리에 장갑까지 중무장으로 단단히 챙겨 입혔는데도 이런다. 너무 돌아다녔나 싶어 서둘러 식당을 찾았다.
"뭐 먹을지 생각했어?"
"고기- "
신나서 같은 메뉴를 외치려는 막둥이의 옆구리를 둘째, 레비가 조막만한 손으로 빠르게 찔렀다. 아주 잠깐 둘 사이로 또다시 모종의 시선이 오갔고, 레비가 어쩐지 의젓해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누나 먹고 싶은 거 먹을래!"
"뭐? 아까는 먹고 싶은 거 말했잖아?"
"아냐! 생각이 바뀌었어! 누나가 먹고 싶은 게 좋을 거 같아! 그렇지?"
동의를 구하듯 레비가 돌아보자 시노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둘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밝지만 어설프다. 슬금슬금 밀려드는 합리적 수상함에 둘을 살피는 눈이 가늘어지자, 눈치는 또 빨라서 춥다며 나를 잡아 이끌었다. 결국 의심은 잠시 접어두고 딱 떠오른 곳으로 셋이서 종종걸음 쳤다.
도착한 식당은 축제 거리에서 조금 외곽이지만, 동생들이 말했던 메뉴를 같이 파는 곳이었다. 맛있는 향기가 맴도는 실내로 들어오자 몸이 녹으면서 덩달아 허기짐이 밀려들었다. 얼른 자리에 앉아 음식과 따뜻한 음료를 주문했다. 점심시간을 조금 넘겨서 한적한 실내에는 우리와 남자 손님 밖에 없었다. 물티슈로 손을 닦아주려는데, 아까부터 두 녀석은 머리를 맞댄 채 속닥거리고 있다.
"-말대로 했으니까 다음번에 구연동화 해달라고 하자."
"아냐 아냐, 그거 말고 야구- "
"뭘 그렇게 재미있게 얘기하고 있어?"
신나게 움직이던 입술이 다물렸다. 탈출계획을 짜다 딱 걸린 햄스터마냥 티나게 동그래진 눈으로 내 눈치를 살피는 둘을 보니, 이때가 기회였다. 안 그래도 잠깐 미뤄뒀던 주제에 대해 말을 꺼내려고 할 때 귀신같이 직원이 코코아와 커피를 가져왔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잽싼 손놀림으로 시노는 잔을 호호 불면서 직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레비는 옆에 있는 창문 밖을 가리켰다.
"어! 저기에도 이쁜 걸 판다!"
"레비. 말 돌리지 말고....."
주의를 주면서도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자 정말로 보이는 가판대에 목소리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후다닥 들어오느라 제대로 보지못한 맞은편에 작은 공방이 있었던 모양이다. 작고 아기자기해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 가운데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펜처럼 생긴 길쭉한 물건. 유세프 씨의 취미 중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소설이든 시든 누군가의 독백이든 그는 글을 쓰고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다.
저거다. 펜이건 아니건 확인해봐야겠다. 생각도 전에 먼저 몸이 반응하려는데 이번에도 직원이 음식을 가지고 왔다. 정말 귀신인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도 잠시 식사가 먼저였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음식들을 동생들의 앞접시에 덜어주었다.
"천천히 맛있게 먹어."
그렇게 말하는 내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물건이 발 달려서 달아나는 것도 아닌데,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괜스레 빨리 살펴보고 싶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평소보다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놀란 눈으로 멀뚱히 보고 있는 레비에게 신신당부했다.
"여기서 천천히 먹고 있어. 누나 저기 보이는 가판대에 금방 갔다올게.”
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고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손님에 놀란 시선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고 물건들을 살폈다. 하나하나가 공들인 작품 같았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가 홀린 듯 시선을 잡아챘다. 얇고 길게 빠진 군청색 만년필이었다. 금박으로 장식된 끄트머리엔 몸체보다 밝은 푸른빛의 깃털이 장식되어 있었다. 고요한 새벽을 연상시키는 그에게 너무 잘 어울려서 조심스럽게 집어 들자 웃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할머니가 포장해 줄게요, 하며 가져갔다.
눈처럼 하얀 상자에 오묘한 보라 빛이 도는 파란색 리본이 감겼다. 신이 장난이라도 부린 것처럼 포장마저 선물에, 그에게 잘 어울려 기분이 절로 들떴다. 싱글벙글한 내 앞으로 할머니가 포장된 펜과 작은 무언가를 같이 내밀었다. 마치 짝처럼 펜과 비슷하게 세공한 클립 같은 책갈피였다.
"이건 아가씨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앗, 괜찮은데요...!"
"받아요. 아가씨가 내가 만든 물건을 너무 좋아해주니 내가 더 고마워서 그래요."
너무 들떴나 봐. 살짝 민망한 마음으로 물건을 받으며 인사하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에게 소중한 사람이 잘 쓰길 바랄 게요."
"아...감사합니다."
어쩐지 부정하기 싫은 말이어서 그저 웃었다. 다시 식당으로 들어가는 사이 그녀가 한 말이 콕 가슴에 박혀 맴돌았다. 어느 순간 내 생활에 스며든 사람.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고 의지 되는 사람. 소중한 사람. 달콤한 말의 파편이 잔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켰다. 곱씹을수록 이제까지와 다른 울림이 가슴에 퍼져서, 포장된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이 선물을 받으면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생각만으로도 들뜨고 붕붕 떠다니는 것 같아 잠시 멈춰 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껏 자각하지 못했던 심장박동이 발맞춰 같이 쿵쿵거렸다. 오늘 하루 여러 번 열이 올랐지만 지금이 가장 잘 익었겠네. 빤했지만 이 기분을 좀 더 즐기고 싶어 그대로 식당으로 들어갔다. 또 홍당무가 됐다며 놀릴 동생들의 목소리가 선했다.
"누나!"
예상과 달리, 목소리는 조급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앞에 경계 어린 눈으로 동생의 앞을 막고있는 레비와 그 옆에 낯선 남자가 서있는 광경이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동생과 그 남자 사이를 가로막고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니, 나는 애들끼리만 있길래 심심해 보여서 말을 건 건데."
날 선 추궁에도 유들유들하게 웃은 남자가 힐끗 동생들을 쳐다보고 다시 나를 보았다.
"그런데 누나에요? 어쩐지 예쁘시더라."
"그건 그 쪽과 상관 없는 일이죠. 비켜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하면서 몸을 옮겨 동생들을 가렸다. 등 뒤로 엉겨오는 레비의 옷깃을 살짝 잡자, 말하지 않아도 시노의 옷을 여미고 나갈 준비를 했다. 계속 노려보면서 의자에 걸어 둔 겉옷을 챙기자 남자가 과장스럽게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뒤로 물러났다.
"먼저 나가있을래? 금방 계산하고 나갈게."
동생들을 먼저 내보내고 계산대로 향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가 따라붙었다. 오늘 뭐해요. 축제인데 같이 구경하지 않을래요. 남친 있어요? 계속 무시했지만 끈질긴 추파는 계산을 끝마칠 때까지 이어졌다. 무시하고 나가도 계속 따라올 기세라 영수증에 몇 마디 적어서 남자 몰래 직원에게 내밀었다. 상황을 살피던 직원이 주방으로 사라지자,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이제야 자기를 봐주는 거냐며 눈치 없는 입이 나불거리는 꼴을 보고 있으니 없던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다.
"적당히 하세요. 지금 이러는 거 굉장히 불쾌하니까."
"에이, 그만 튕기고 나랑 나가서-"
"제 말이 장난 같아요?"
팔을 잡으려는 손을 쳐내자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위압감에 움츠러들려는 몸을 다잡고 똑같이 노려보고 있을 때 턱, 타이밍 좋게 주방문이 열리고 우람한 풍채의 주방장과 직원이 나타났다. 도중에 나왔던지 주방장의 손에 들린 식칼이 예사롭지않게 빛났다.
"그만 하시죠, 손님."
더이상의 깽판은 가만히 넘기지 않겠단 흉흉한 모습에 남자가 움찔했다. 그 사이 재빨리 직원에게 인사하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여러 목소리가 뒤따라 들렸지만 밖에서 눈치보고 있던 동생들을 껴안다시피 데리고 사람들이 많을 거리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가 뒤따라오지는 않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금 돌아서 광장에 도착했다. 활기 넘치는 사람들의 분위기에 섞이고 나서야 바짝 긴장한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어디 봐 봐.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우리는 괜찮다. 계속 지켜봤는지 누나가 나가니까 바로 왔다. 막둥이가 와르르 말을 쏟아내는 동안 옆에서 레비는 가만히 있었다. 앙 다문 입술이 애써 의연하게 있으려 하는게 눈에 보여서, 자그마한 등을 토닥였다. 누나 없는 사이에 잘했어. 그제야 무서웠다고 웅얼거리는 동생이 대견하고 미안했다. 바로 앞이더라도 자리를 비우는 게 아니었는데. 한숨 돌리고 나서야 손목이 허전한 걸 알아챘다. 그에게 줄 선물이 보이지 않았다.
동생들은 괜찮아졌으나 이제 내가 울고 싶어졌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선물이 어디에 있을지 알았지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 남자가 근처에 있으면 어떡해. 그렇다고 사람 많은 광장에 동생들을 두고 갈 수도 없었다. 멍하니 있으니 동생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유롭게 유영하던 환상 속에서 속절없이 내쳐진 허무함을 맛보다, 재차 불린 이름에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저녁거리 사 들고 가자. 가게보다 더 맛있게 해 줄게."
내일 다시 식당을 가보거나, 같이 돌아다니면서 몰래 사면 되지. 누구를 다독이는지도 모를 위로는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볼품없이 흩어졌다. 이 상황에 대한 분노보다도,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더 컸다. 한창의 설렘이 무색할 정도로 쳐진 기분에 장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서서히 나타난 하얀 친구는 변함없이 방긋 웃고 있었다. 내 속도 모르고.
동생들을 먼저 집으로 들여보내고 눈사람 옆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촉감이 복잡하게 휘몰아치던 감정들을 조금씩 식혀주었다. 어떻게 그걸 빼먹지. 내내 허탈하던 마음이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묻어두었던 분노로 변모해 타올랐다. 한참을 씩씩거리다 다시 동생도 선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내 잘못이지 중얼거리며 축 쳐졌다. 천천히 식사 다 마치고 구경해도 될 걸 왜 혼자 조바심을 부려서는. 톡, 푹 숙인 머리 위로 얇은 감촉이 닿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뭇가지 손이 얹혀 있었다.
바람 때문이라기엔 반대편 손은 꼿꼿하게 박혀 있다. 의아했지만 투박한 위로를 받은 것 같아 한결 나았다. 나뭇가지를 제대로 끼워주고 눈사람의 시야를 같이 구경했다. 매일 보던 언덕을 이 시점에서 보니 또 새로웠다.
'아주 멀쩡한 날이 없네, 없어. 쟤들은 너무 기운 넘친다니까요.'
'아하하. 고생이 많네.'
집 앞 언덕에 썰매를 탄답시고 달려나가더니 자기 몸을 썰매로 내던지고 돌아온 동생들의 목욕물을 받아주고 나온 뒤였다. 흙범벅이 된 옷을 저만치 던져두고 엉망이 된 바닥을 보면서 투덜거리자 유세프 씨가 빗자루를 들고 나오면서 나를 달랬다.
'귀여운 동생들이지만 매니저 손이 많이 가는 걸. 다 씻고 나오면 누나 힘들게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줄까?'
'에이, 안 들을껄요? 그래도 그렇게 편들어줘서 좋네요.'
'믿어봐. 나 말 잘하는 거 알잖아.'
의기양양한 미소에 같이 웃으며 빗자루를 낚아채려 했지만 이미 예상한 몸놀림이 홱 뒤로 감추었다. 그렇게 서로 청소를 하겠다며 안달 난 사람들의 공방이 이어졌었지.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항상 나를 배려해 눈높이를 맞춰주던 유세프 씨가 있었다면 꿀꿀할 틈도 없을 텐데.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간신히 뜬 시야로 먼발치에 서있는 남자가 보였다. 큰 키에 하얀 양복을 입고 무표정한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남자. 외로워 보이는 등을 보면서 몸을 일으키자 그가 돌아보았다. 여전히 얼음처럼 미동 없는 얼굴이지만 약간의 웃음이 배어든 것도 같다.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지만 아직 불편한 다리 때문에 그가 있는 곳까지 갈 수가 없었다. 거기에 있어. 차분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이 들렸다. 다친 곳은 어느정도 치료했으니 돌아가. 냉담하게 등을 돌렸지만,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그가 곁을 지켜주었다는 걸 알았다.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저기요, 입을 열었다. 목이 잠겼지만 그는 들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번 얼굴을 보고 싶어 기다렸지만 그는 더이상 돌아보지 않았다. 포기하고 인사를 남겼다. 다음에 봬요. 잊지 않고 찾아갈께요. 돌아본 그의 눈이 놀랐던 것도, 웃었던 것도 같다.
따뜻한 햇볕이 눈꺼풀을 두드렸다. 포근함에 취해 한참을 뒤척이다가 몸만 일으켜 앉았다. 깊은 단잠 속에 신기하기도 신비롭기도 했던 꿈을 꾼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하려 해도 흐릿하기만 하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자 잔상마저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또 한세월을 멀뚱히 침대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이 깨지 않는 잠을 떨치려 이리저리 기지개를 피면서 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다.
'잠깐만.'
하늘, 언덕, 담벼락, 순서대로 훑고 거두려던 시선이 다시 되돌아갔다. 담벼락 위로 봉긋 솟아오른 머리를 본 것 같아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보고 싶다고 생각이야 했지만 눈 뜨자마자 나타날 줄 몰랐는데. 좀 더 맑은 시야로 봐도 담에 기대어 있는 사람은 그가 맞았다. 어느새 몸은 1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급하게 세수만 마치고 조용히 문을 열자 상쾌한 겨울 공기가 따스한 내부에 밀려들었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나지막한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통화 중인가 싶어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가, 대화 소리가 끊기자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놀란 얼굴마저도 반가웠다.
"유세프 씨!"
"깜짝이야. 잘 잤어, 매니저?"
"네. 그런데...."
얼핏 본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를 쭉 빼고 살피자 그가 양 어깨를 잡고 실내로 밀었다.
"춥겠다. 너무 얇은 옷 입고 바깥에 나오지 마. 감기 걸려."
"어제보단 따뜻한 걸요. 근데 오늘 일찍 왔네요."
나랑 축제 가는 게 많이 기대되셨나 봐, 장난을 치려다 그가 우뚝 멈춰선 바람에 덩달아 멈췄다. 올려다본 그의 얼굴이 시무룩했다.
"아직 아침인데 내가 너무 일찍 왔지? 미안해."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말?"
어쩐지 그의 뒤로 귀를 힘없이 늘어뜨린 대형견이 보인다. 내려간 눈매로 눈치를 보는게 귀여워 그를 다시 이끄는데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 못 봐서 오늘은 좀 일찍 보고 싶었어."
그런 말은 반칙이지. 혼자만 하던 생각을 읽힌 듯한 생경하고 부끄러운 느낌에 불에 덴 듯 그에게서 떨어졌다. 빠, 빨리 들어가자. 춥다아. 삐걱삐걱한 몸놀림으로 문을 여는 뒤로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다행히도 동생들이 요란하게 뛰쳐나온 통에 어색할 틈없이 순식간에 시끌벅적 해졌다.
"어제 누나 말 잘 들었어?"
"네!! 저희 완전 잘 들었어요!!"
합창하는 두 녀석의 머리를 그가 쓰다듬었다. 대화도 그렇고, 평상시에도 그를 반겼던 동생들이지만 반짝거리는 눈이 심상치 않다.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설마?
눈을 가늘게 뜨자 유세프 씨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티가 나네. 덧붙인 말에 그제야 지난 동생들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이 녀석들이 대가를 바라고 그런 행동을.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유세프 씨 뒤에 옹기종기 숨은 둘을 쳐다보다가 까치집 같은 머리만 헤집었다. 처음부터 혼낼 생각까진 없었고 어제 일도 있고. 빨리 가서 씻어. 다시 웃으며 달려가는 뒷모습들을 보다 고개를 돌리니 그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급하게 세수했지만 뗄 건 다 뗐을 텐데? 열심히 얼굴을 더듬거리고 있으니 별안간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많이 심각해요..?"
"아니, 아냐.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기분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저야 일어나자마자 유세프 씨 보니까 좋......"
그의 표정을 보고서야 무슨 말을 지껄이는건지 깨닫고 입을 오므렸으나 이미 늦었다. 어색한 침묵을 넘겨줄 구원자도 없었다. 귓가에 시계 초점소리가 쉴 새 없이 째깍이고 그보다 더 쩌렁쩌렁하게 고동소리가 울린다. 터지기 일보직전인 얼굴과 입꼬리가 떨리는 얼굴 중에서 먼저 얘기를 꺼낸 건 후자였다. 큼큼, 헛기침으로도 가득 찬 웃음기는 억눌리지 않았다.
"...내가 동생들 챙길게."
"그, 그럼 저는 올라가서 준비, 준비하고 그럴 게요."
제발 방으로 가자. 생각과 동시에 후닥닥 계단으로 달려갔다. 얼핏 빨개진 귀를 본 것 같지만, 그의 시야에서 나를 숨기는데 급급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안 그래도 준비할 게 많아 복잡한 머리에 폭탄을 던져버린 야속한 입을 탓하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반가워서 더 다정하게 대해주는 건데 나 혼자 말려들어 일일이 반응하는 게 미친듯이 민망하다. 이제까지 어떻게 잘도 붙어서 얘기했던 거지? 그런데 오늘 둘이서 축제 구경하는데?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술렁이는 파문이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 않아 옷이 마음에 안 든다, 머리가 잘 안 말린다 등 갖가지 핑계거리를 대다가 다시 나온 건 한참 뒤였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가 문 앞에 서 있을까봐 문틈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이미 식사까지 마친 뒤인지 고소한 음식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자 이쪽을 등지고 쇼파에 앉은 유세프 씨가 보였다.
"사람에 무관심했던 용은 마음을 바꾸고 공주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답니다. 공주는 자신을 도와준 용을 신룡으로 받들었고,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축제를 열었습니다."
동생들은 낭독하는 그의 옆에서 얌전히 경청 중이었다. 완전히 빠져든 얼굴들에 조용히 웃었다. 저 마음 잘 알지. 작은 웃음소리였는데도 눈치채고 그가 뒤돌아보았다. 어서 와. 그가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잘 어울려."
".....고마워요."
나도 같이 속삭이며 그의 뒤로 다가갔다. 여러 의미로 방에서 나오질 못하느라 생각보다 지체된 시간은 언급도 하지 않고, 그는 마저 책을 읽었다. 향초처럼 나른하게 퍼지는 목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가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축제의 광대를 흉내내자 누구랄 것 없이 다같이 웃었다. 어색했던 순간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그가 마지막 줄을 읽고 책을 덮자 동생들이 신나게 박수를 쳤다.
"유세프 형 진짜 잘 읽는다!!"
"이제 너희끼리도 잘 놀 수 있지?"
"그럼요. 나도 다 컸으니까 동생 잘 놀아줄 수 있어요!"
"너 또 유세프 씨한테 놀아달라 하려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작은 어깨를 쭉 펴고 위풍당당하게 선 레비의 모습이 귀여워 말랑한 볼을 콕 찌르며 약 올리자 이번엔 아니야! 억울한 목소리가 왕왕거렸다. 물론 가볍게 듣고 넘겼다. 영혼 없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리오라고 손짓하니 빵빵하게 부풀린 뺨을 하고서도 막둥이의 손을 잡고 다가왔다. 냉장고 이쪽에 과일 씻어 놨고, 라자냐는 만들어 뒀으니까 데펴서 먹기만 하면 돼. 동생들만 놓고 나가는 게 오래간만이라 부산스럽게 알려주느라 또 시간이 흘렀다.
"누나 오기전까지 사고치면 안 된다."
"매니저. 동생들 귀에서 피 나려고 해."
마지막으로 단단히 이르고 끄떡거림까지 받아내고 나서야 집을 나섰다. 아침보다 해가 훨씬 넘어간 시간까지 한참을 말하고 나니 허기가 밀려들었다. 그런 내 속을 꿰뚫어본 듯 유세프 씨가 웃었다.
"일단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그가 말하는 메뉴를 먹으러 갈 생각이었지만 모든 게 다 좋다며 그는 기어코 내 의견을 들으려 했다. 그 집요함에 못 이겨 내가 고른 음식을 먹으러 갔고. 식사하며 그와 대화하는 모든 순간이 들떴다. 바깥에서 보는 유세프 씨는 시끌벅적한 풍경에 너무 잘 어울려서 그를 처음 보고 힐끔거리는 행인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항상 집에서 봐서 그렇지, 그는 이렇게나 시선을 끄는 존재였다. 제대로 꾸미고 나와서 다행이다. 머리를 찌르는 핀을 슬쩍 매만지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너무 편한 모습만 보여줬으니 잠깐의 거슬림 쯤이야.
식사를 끝마친 뒤엔 근처의 눈여겨뒀던 카페로 향했다. 이전에 분위기에 이끌려 들어갔는데 곳곳에 비치된 책에 도서관처럼 아늑하고 공간이어서 꼭 그를 데리고 와야겠다 했던 곳이었다. 식당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유세프 씨와 함께 중간중간 시선을 빼앗는 볼거리를 구경하면서 발걸음이 늘여졌다. 거리는 어제보다 한층 더 많은 가판대와 구경거리로 가득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도 있어?"
여러차례 그가 물어봤지만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나 많은 물건 중에서도 마음에 들어온 건 따로 있었기에.
어제 보지 못한 물건들 중에 더 나은 선물이 있을까 싶어 열심히 살폈지만 보면 볼수록 어제의 선물이 눈에 계속 밟혀왔다. 우연찮게 지금 서있는 거리가 어제의 식당 근처라 더더욱. 얼른 식당만 가서 물어볼까. 그런데 거기 없거나 곤란한 상황이라도 생긴다면. 섣불리 나섰다가 그와의 즐거운 시간을 망칠 수는 없었다. 그때 유세프 씨가 어느 가판대 앞에서 멈췄다.
"잠깐만."
그가 살피는 건 깃털로 만든 다트였다. 빳빳한 검은 깃털에 금박으로 장식된 몸통이 중세시대 귀족들이 쓸 법하니 고풍스러웠다.
"다트 하게요?"
"응. 연습해볼까 하고. 동생들이 재미있다고 했거든."
"진짜로 애들이 부탁한 거 아니죠??"
농담 조금 진심 가득으로 커다래진 눈을 보고 그가 웃었다. 진짜로 그런 거 아니야. 안심시킨 그가 작은 북을 치는 꼬마병정을 가리키자 앙증맞은 몸짓에 금세 빠져들었다. 동생들이 봤다면 입이 함박 벌어질 장난감들을 감상하다 알록달록한 장난감 기차모형 하나를 계산했다.
"저거 봐. 매니저한테 잘 어울리네."
옆으로 넘어가서 구경하던 그가 가리킨 건 나비 핀이었다. 영롱한 푸른빛으로 세공된 날개를 보고 있으니 애써 묻어둔 생각이 머리를 비집고 올라왔다. 용기를 낼까, 말까. 다시 싸움을 시작한 혼란한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장신구가 가득한 진열대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그 옆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불시에 눈이 마주쳤다. 너무 또렷해서 꿰뚫어보는 듯한 눈에 화들짝 놀라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아, 이쁘네요."
"다행이다. 그런데 매니저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야?"
"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나? 당황스러운 눈으로 보자 언제나 나를 안정시켜주는 목소리가 말했다.
"동생들끼리 잘 놀고 있을 거야.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조금은 내려놓고 즐겨."
"아하하..."
"정 안되겠으면 저쪽에 간식도 많이 팔더라고. 미리 사오는 것도 괜찮겠다."
나도 볼 일이 생긴 것 같아서. 다정하게 말하며 나를 신경 써주는 그는 알까,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게 동생들이 아니라 자기라는 걸. 꾹 차오른 말을 누르고 그저 웃었다. 차분하고 따뜻한 음성에, 혼자만의 결정을 내리고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식당에서 멀지 않은 방향이었다.
"금방 다녀올게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곧장 달려가니 머지않아 목적지가 나타났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어제의 직원이 단박에 알아보고 카운터로 달려왔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곧장 서랍을 뒤적여 익숙한 하얀 쇼핑백을 꺼냈다. 손님 것 같아서 계속 보관해두고 있었다며, 다시 품으로 돌아온 선물은 포장지까지 그대로였다. 왜 이렇게 고민했을까, 다행스러우면서도 허탈했다. 한발짝만 디디면 될 것을.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길은 갈때보다 더 가깝고 빨랐다. 저만치에 이정표처럼 똑같은 자리에 서있는 유세프 씨가 보였다. 그가 다녀왔어? 상냥한 물음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그 단단한 손을 기꺼이 마주잡았다.
"다녀왔어요. 유세프 씨는 마음에 드는 거 샀어요?"
"응. 매니저도?"
"네. 그럼 우리 가요."
맞잡은 손을 이끌었다. 그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소로. 더이상 한눈 팔지 않고.
점차 해가 지면서 어둠이 내려앉았다.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사람들이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군데군데 알전구가 하나둘씩 켜지며 거리를 은은하게 밝혔다. 그 중앙에 산처럼 쌓인 장작이 보였다. 주변을 동그랗게 둘러싼 사람들과 섞여 불을 붙이기를 기다렸다. 불씨를 들고 관계자가 다가오자 기대에 찬 인파가 술렁거렸다. 흥분에 가득 찬 사람들과 어깨가 부대끼며 밀리자 안되겠네, 중얼거린 유세프 씨가 나를 끌어 제 앞에 세웠다. 정수리에 그의 턱이 스치면서 겨울 숲 같은 시원한 향이 맴돌았다. 그의 품 안에 쏙 안긴 모양새를 신경 쓰기도 전에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한가득 끌어안고 산화하는 듯한 불꽃에, 환호하던 관중들은 어느새 조용히 감상하거나 각각의 소원을 빌고 있었다. 나도 눈을 감고 오래간만에 소원을 빌었다. 동생들이 항상 건강하기를. 그리고...
눈을 뜨고 고개를 들자 계속 바라보고 있었던지 그와 곧장 눈이 마주쳤다. 다 빌었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비교적 사람이 적은 공간으로 데리고 나왔다. 잠깐만 여기 있으라며 사라진 그를 기다리면서 멀리서도 잘 보이는 불꽃을 구경하고 있자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의자와 함께 나타났다.
"어쩔때보면 유세프 씨는 키다리 아저씨 같아요."
"하하, 영광이야."
세심한 배려로 편하게 장관을 구경했다. 가족, 연인, 친구끼리 모두가 안온한 얼굴로 모여 있었다.
"즐거워 보이네요, 다들."
"이렇게 큰 모닥불은 흔치 않잖아. 매니저 덕분에 좋은 구경 했네."
"모닥불이 크다고 하니까, 제가 신기한 사실 하나 알려줄까요?"
한껏 목소리를 낮추며 고개를 숙이자 그도 웃으며 귀를 기울여주었다. 달싹이는 숨결에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이 축제의 모닥불 앞에서 소원을 빌 때 빼놓지 않는 특별한 대상이 있다는 거 아세요?"
잠깐 그에게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닐까 고민했지만, 주인공을 밝혔다. 수호신이에요.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들은 듯 그의 눈이 커졌다. 나도 처음엔 비슷한 반응이었다. 어릴 때 갔던 축제에서 난생 처음 보는 크기의 불이 신기해 넋 놓고 구경했었는데, 주변 어른들은 간절한 표정으로 손을 모으고 있었다. 괜히 멋있게 보여 눈을 꼭 감고 따라하자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아저씨가 말해주었다. 원래 이 축제는 마을의 수호신을 기리는 연례행사였지만 점차 축소되면서 본질만은 잊지 말자는 의미로 불을 피우는 거라고. 그저 순진한 아이의 동심을 위한 장난일 수도 있겠지만 아릿한 추억 속에서 그 말만큼은 생생했다.
"많은 사람들이 잊어간다면서 너라도 알고 있으라고 말해 주셨거든요. 어쩐지 잊을 수가 없어서 그 이후로도 축제에 오면 항상 빌었어요.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식으로요. 마을의 수호신이라니 동화 같고 신기하지 않아요?"
"......그러네."
조용히 수긍한 그가 모닥불을 바라봤다. 너울거리는 불꼬리를 따라 움직이는 눈빛이 일렁거린 것도 같다. 너무 뜬구름 잡는 말이었나 싶어 수습하려던 입이 감상에 젖은 차분한 얼굴에 다물렸다. 어쩐지 그를 다독여주고 싶어져서 손을 뻗었으나, 닿기도 전에 그가 먼저 돌아봤다. 평상시의 유세프 씨였다.
"잘 기억하고 있었네, 매니저."
"그쵸? 그런데 별로 안 놀라네요. 설마 이것도 알고 있었어요?"
"음, 지나가듯이 들은 것 같아."
"......사실 마음 읽고 그러는 초능력 있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모르는 게 없어요."
일부러 과장된 말투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 위로 아른거리는 불빛에 눈가가 붉어 보였다. 한참을 웃던 그가 입술을 귓가로 내렸다. 고마워, 기억하고 알려줘서. 이제껏 들었던 목소리 중에서도 가장 깊어서 솜털이 오소소 섰다. 그, 그럼 우리 다시 소원 빌어요. 황급히 주제를 돌리며 어슴푸레한 주변에 감사했다. 지나치게 빨개졌을 얼굴을 가려줘서. 달그락, 그러나 서로의 어깨가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이미 예민해진 청각은 그의 품안에서 나는 소리까지 들렸다. 내 품 속에서 잠자고 있던 선물이 떠올랐다. 힐끗 돌아본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어떤 소원을 빌고 있을까, 살며시 닫힌 눈꺼풀이 잘게 떨리며 드러난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선물이 있어요."
톡, 잘근 깨물고 있던 입술이 열렸다. 잔뜩 긴장한 손이 내민 하얀 상자를 받은 그가 리본을 풀어내서 뚜껑을 여는 순간까지 조마조마한 눈으로 선물과 그의 표정을 살폈다. 내용물을 본 얼굴이 살짝 멈칫하더니 이내 기쁘게 웃자, 긴장감은 눈 녹 듯이 사라졌다.
"정말 마음에 든다. 고마워."
기다란 손가락이 펜을 꺼내 들었다.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며 손가락에 착착 감기는 모양새가 제 주인을 찾아간 듯 자연스러웠다. 뿌듯함에 잠긴 내 등을 본능이 자꾸 밀었다. 조급한 손길을 이성이 다독이는 사이 한번 숨을 들이켜고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두 감정마저 어떻게 할 수 없는 심장박동에 손 끝에 간신히 걸친 손가락을, 그가 손을 바꿔 잡았다. 유세프 씨.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유세프 씨랑 함께 있으면 즐거워요. 어쩔 때는 꿈결 같아서.. 내가 잠시 환상 속에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
“저랑 오래도록, 같이 있어주실래요?”
모닥불 핑계를 댈 수 없을 정도로 상기된 얼굴일 것이다. 그래도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기를 바라면서, 유세프 씨를 쳐다봤다. 언제나 차분하던 얼굴에 서서히 열기가 올랐다.
“그건 반칙이야, 매니저.”
매번 내가 하던 생각을 담으면서, 부끄러운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눈을 피하는 모습까지 모든 게 좋았다. 가지 말라는 것처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그가 품에서 선물상자를 꺼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을 조심스럽게 개봉하자 영롱한 푸른빛의 나비 핀이 들어있었다.
“이건 아까 유세프 씨가 구경하던…..”
“어느 지역에서는 푸른 나비가 염원을 상징해. 그래서 처음 보자마자 매니저한테 주고 싶었어.”
어떤 염원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그가 핀을 가져갔다. 인파에 치였던 통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길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러웠다. 옆에서 얘기하고 싶고. 머리카락을 고정하느라 가까이 다가온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웃는 얼굴을 지켜보고 싶고. 머리핀을 꽂고 아프던 머리를 정리하는 숨결이 뺨에 닿았다. 항상 곁에 있고 싶어. 코 끝이 스칠 정도로 그가 가까웠다.
"지켜줄게. 언제나."
따뜻한 감촉이 가볍게 이마에 내려앉았다 사라졌다. 스며든 열기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유세프 씨를 기억 속에 담으며, 소원을 이루어 준 이에게 속으로 감사인사를 전달했다. 감사합니다, 수호신 님.
쓸데없이 높고 길다고 투덜거렸던 오르막길이 유달리 짧았다. 벌써 집이 보이자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어차피 내일 볼 텐데. 알면서도 시간을 더 끌고 싶어 눈에 보이는 아무거나 얘기를 던졌다.
“그런데 진짜 신기하네요.”
“뭐가?”
“유세프 씨 말대로 담장 옆에 두니까 눈사람이 안 녹잖아요. 오늘도 그렇고 따뜻한 날씨들 많았는데.”
담장에 드리워진 그늘이 그렇게 넓었나. 슬쩍 보면서 말하자 그가 웃었다.
“매니저가 열심히 잘 뭉쳐서 그래.”
“아니죠. 사실상 유세프 씨가 다 했는 걸요. 어어, 입 삐뚤어졌다.”
말하기 무섭게 동생들이 박아 놓았던 옷걸이 입이 스륵 한쪽으로 기울었다. 도시에 있을 때도 한가하다 함부로 입 놀리면 바로 일거리가 밀려들었는데. 화들짝 놀라 다시 입매를 제대로 고정시켜 주었다. 방긋 웃음짓는 얼굴이, 눈사람에 담긴 추억이 오래갔으면 했다.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푹 쉬어. 내일 봐, 매니저.”
“유세프 씨가 손을 놓아줘야 들어가죠.”
“아닌데. 매니저가 붙잡고 있잖아.”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서로가 손을 풀지 않았다. 한참을 마음에도 없는 대치를 벌이다 먼저 두 손을 든 건 유세프 씨였다. 정말로 들어가서 잘 시간이야, 매니저 어린이. 다정하게 어르는 말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손을 뗐다. 온기가 없는 손이 허전하고 내일이 오기까지의 시간이 일주일 같다. 몇 발자국 떼다가 뒤돌아서 그에게 달려갔다.
“내일 봐요. 유세프 씨.”
살짝 까치발을 들어 그의 턱에 입술을 부딪히고 떨어졌다. 그리고 황급히 집안으로 도망쳐버렸다. 스쳐 지나가면서 본 눈사람의 입이 이번엔 위로 올라가 있었던 것 같다.
매니저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진 뒤에도 유세프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나비가 앉았다 날라간 턱을 매만지던 얼굴에 견딜 수 없는 웃음이 피어 올랐다. 콕콕, 그의 팔을 찌르는 손길이 있었다. 한방 맞으셨습니다. 히죽거리는 입꼬리를 앙상한 나뭇가지로 가리고 웃던 눈사람은 지그시 내리 꽂히는 눈길에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축제 구경은 어떠셨습니까?”
“행복했지.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표현할 수 없을 거야.”
그렇죠, 저 분과 함께라면 무엇인들 안 그러겠습니까. 눈사람이 고개를 젓자, 두 눈덩이가 마찰하면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유세프는 그녀가 들어간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던 집안이 환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방에 불이 들어올 때까지. 가만히 보고 있으니 2층 창문이 열리고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환한 미소에 유세프도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동생들이 부르는지, 그녀는 아쉬운 표정으로 창문을 닫았다.
“문제는 해결하셨습니까?”
단추 눈을 들썩이며 눈사람이 묻자 유세프는 아침의 일을 회상했다.
조금이라도 일찍 보고 싶은 조바심에 어느새 그녀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을 이른 시간이라 담장에 몸을 기댔다. 살면서 이런 급박한 감정을 느낄 일이 손에 꼽을 정도라 신선하기만 했다. 그렇게 그는 아침 바람을 쐬면서 낯설고 기분 좋은 시간을 음미할 생각이었다. 눈사람이 건넨 말이 없었더라면.
‘어제 아가씨가 많이 피곤해 보였습니다. 축제에서 문제가 있었던 듯싶은데, 돌아오시자마자 옆에 앉아서 얼굴을 이렇게 찡그렸다가 화내다가 울상이기를 한참 반복하셨습니다.’
입꼬리를 마구 늘어뜨려가며 눈사람이 열심히 설명할수록 유세프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유세프 형. 어제...’
그리고 그녀가 통통거리며 위로 올라간 뒤,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둘째 동생이 다가왔다. 눌러 참은 말이 가득한 얼굴과 시선을 맞추니 아이가 머뭇거리다 자세한 사정을 털어놓았다. 눈사람이 말한 정황에 살을 붙이는 상황 설명을 가만히 듣던 그는 아이를 다독여주었다.
‘정말 의젓하게 잘 대처했어, 레비. 누나가 덕분에 든든했을 거야.’
신경이 꽤나 쓰였던지 그늘진 아이의 얼굴이 점차 밝아졌다. 그래서 말인데요. 아이가 조그마한 손을 꼼질거렸다.
‘오늘 많이 놀고 와도 돼요. 누나 캠프파이어 좋아하니까, 그거 보고 기분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훨씬 더 의젓한 말을 하는 아이가 기특해서 자그마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보다도 어른스럽네, 레비. 칭찬을 받은 아이는 신이 나서 뽀르르 제 동생에게 달려가느라 서늘하게 번득이는 검은 눈동자를 보지 못했다. 그 뒤는 간단했다. 어느 순간부터 따라붙은 또다른 기척을 그녀가 알아채기 전에 차단시켰을 뿐. 뺨을 가를 듯 스치고 벽에 단단하게 박힌 다트촉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떠올린 유세프의 얼굴에 매니저는 본 적 없을 냉소가 걸렸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주제를 파악했겠지만 그 치가 그녀 앞에 나타날 일 없도록 못 박아 둘 생각이다. 너는 그녀와 가족들을 계속 지켜. 단호하게 울리는 낮은 음성에 눈사람은 얼굴도 모를 멍청한 이의 팔자에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직접적인 위협이 있다면 그 근원을 없애면 되지만 유세프에게도 어쩔 수 없는 위협이라는 게 있다, 병마라던가. 유세프가 눈을 감았다 떴다. 수초도 되지 않을 깜박임 같은 짧은 시간이었다. 그 잠깐의 시간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그를 위했던 사람과 달리 다가가지도 못했다. 잃고 나서야 유세프는 바랬다. 무한한 시간의 굴레 속에서 옷깃이라도 스칠 행운이 다시 한번만 허락되기를. 마지막이 있는지도 모를 영원과 같은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공기가 변했다.
건조한 숨에 스민 물기가 까끌한 목을 적셨다. 새벽 내내 눈이 하얗게 내린 날이었다. 저도 모르게 일어난 유세프는 제 감각이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어딜 향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무작정 내딛는 발에 맡긴 걸음은 동그란 정수리 앞에서 멈추었다. 손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전율과 함께 점점 유세프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숙인 고개가 점점 들리고, 갈색 눈동자가 유세프를 향했다.
기억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겉모습이 달라도 개의치 않았다. 먼저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줬음에 감사할 뿐. 어리둥절한 모습도 사랑스러운 그녀에게 다시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을 올렸다.
“안녕.”
나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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