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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던 어느 날 / 익명
Ⅰ
내 눈앞에서, 한 천사의 날개가 부러졌고 이내 숨이 멎었다. 힘이 풀려 주저앉는 천사의 그 모습은 소름 끼칠 정도로 잔혹하고 절망적이다. 동시에 빠르게 도망치는 짐승의 발자국도 들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짐승은 살해당한 것 같았다. 짐승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짐승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생사의 호흡을 들이마시며 내쉬었다. 그러나 결국은 숨을 거두었고, 그로부터는 그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깊은 산기슭에 무뎌져 온 울새들이 두려움에 몸 가누지 못하던 칠흑같이 어두운 밤, 나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 익숙하고 따스한 향기가 나는 것들에게 쫓기고 있다, 상당히 묘하다. 내가 오래도록 찾던 아이들의 흔적이 왜 정체 모를 그 녀석들에게 묻어있는 거지? 그런 향기를 풍기고 있는 녀석들에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이끌린다. 다가갈까? 아니야. 나는 지금 속고 있는 거야. 도망친 끝에 나는 벼랑에 내몰렸다. 더 이상 가망이 없는 걸까. 영문도 모른 채 스러져 가고 있다…….
벌떡-.
일찍이 일어난 매니저는 요즘 들어 이상한 꿈을 꾸고 있다. 그것은 해몽인가, 악몽인가.
창밖을 보니, 여태껏 마주한 적이 없는 고요한 첫눈이 쌓여있었다. 그 어떤 발자국 하나 없이 숨이 멎을 듯 고독한 낮의 풍경이 고개 든다. 가리어진 태양이 보이지 않는 한겨울. 떠오르는 단어는, ‘스산하다’.
겨울을 맞이하고 나서부터 사신 지부는 영문 모를 고독에 휩싸여있다. 어찌 된 일인지 지부에 남아 있는 이들은 서서히 활기를 잃어갔다. 스무 명이었던 사신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줄어들어 단 한 명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사신들 전원이 무사히 만화경을 채워 각자의 염원을 이뤘다. 그건 분명 기뻐야 마땅할 터인데, 어디선가 잠재울 수 없는 슬픔이 일렁인다.
Ⅱ
방 밖에서는 꿈에서 들은 그 울음소리는, 생전 시리도록 차가운 날마다 계속된 전쟁에 지친 채 죽음을 맞이한 영혼들의 비통한 울음일 것이라는, 세이 사감의 설명이 들렸다. 그의 곁엔 마지막 남은 사신, 엘이 있었는데 시종일관 매니저에게서 걱정스러운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엘은 걱정스러웠다.
어여쁜 빛을 밝히던 진갈색 눈이 오늘따라 쓸쓸함을 머금은 모습 때문에,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그 태도에 더더욱 걱정스러웠다. 언제나 정의롭고 강인한 결의와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지닌 천사이나, 사랑하는 이의 주변에선 어쩐지 약해진다. 달빛이, 그보다 더욱 강력한 태양의 앞에서는 결국 무뎌져 버리는 것처럼. 내 몸이 태양이 될 수 없음을 원망했다. 날개를 날개처럼 펼치지도 못하는 천공의 사자. 그 사실에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고 싶었다.
“에취-” 이 재채기는 곧 그가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였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것을 오래 지켜 봐온 동료들은 엘의 반응에 매우 익숙했다.
매니저는 그런 엘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 지었다. 매니저는 소년들을 오래 보아왔고, 소년들에 대해 잘 알았다. 엘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도 일찍이 간파했다. 엘은 매니저의 미소를 보고 화답하듯 옅게 웃었다.
“매니저가 잠시 안정을 취할 수 있게 시간을 주도록 하자냥.”
냥선배가 말했다. 곧이어 세이 사감에 의해 방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매니저는 웃고 있었다. 엘은 매니저의 그 따스한 미소에서도 무기력을 느꼈다. 그 때문에 더욱 걱정스러웠다. 걸음을 옮기며 사무실에서 멀어지는 순간에도, 그는 물끄러미 매니저가 있는 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Ⅲ
심심하고 밀린 일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한가한 날이니, 매니저는 눈을 밟았다. 생각한 것보다 스산한 공기에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떨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새하얀 눈밭에 새겨지는 새하얀 발자국도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었다. 소복하게 눈이 쌓인 정원을 거닐다 보니 저기 가까운 곳에 커다란 눈사람이 보였다. 누가 만든 걸까. 꽃이 시든 정원에 홀로이. 그녀는 우뚝 서 있는 눈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눈사람 앞에 매니저는 무릎을 꿇었고, 눈사람의 어깨에 뺨을 기대 보았다. 차가웠다. 밤낮을 지새우며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눈사람의 얼굴엔 아무것도 없었다. 일말의 표정조차 없이 깨끗한, 꾸며지지 않은 눈사람이었다. 홀로 얼마나 외로웠을까. 갓 생겨난 눈사람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과 처음 보는 세계에서 여기가 어딘지 알려주는 이가 없었을 거라는 동정심에 매니저는 서글퍼졌다.
“눈사람아, 예쁜 눈사람아, 혼자 있느라 외롭진 않았니? 너는 혼자고, 나 역시 혼자구나. 나에게는 아침부터 창문을 여는 버릇이 있어. 그 창문을 열면 사신 20명의 북적이는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아……, 하늘을 넘어서, 공기 중을 가르며.”
돌아오는 대답 하나 없는 곳, 매니저는 그간의 속마음을 담담히 읊조렸다.
“나는 오래전부터 사라진 동생을 만나고 싶다고 염원하고 있어. 처음엔 염원하는 게 그것밖에 없었거든. 그런데……, 최근에는 염원 한 개가 더 생겼어.”
그러자 놀란 듯 반응하는 인기척이 어디선가 느껴졌다. 매니저는 그것을 감지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신들을 떠날 보내는 날, 자리에 있던 모두가 축하의 갈채를 보냈어, 그러나 정말로 떠나보내야 할 때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었지. 난 다시 한번 사신들이 보고 싶어. 그게 내 두 번째 소원이야. 그러나 분명, 전부 다 자신의 꿈을 이루며 잘 살아가고 있을 거야. 그리고 사신들을 다시 지부로 부르는 행동은 사신들이 살아가는 현실의 걸림돌이 되어 버릴 거야.”
매니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 달래며 위안하였다. 그러나 공허했다. 텅 빈 마음에 때때로 사무친 괴로움이 몰려왔다. 매일 같이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태껏 함께 동고동락한 아름다운 추억들은 천천히 뇌리에서 사라져 간다.
영겁의, 영원할 것 같았던 시간은 희끄무레한 안개구름 속으로 망연히 흘러만 가는 걸까. 전부 다.
“매니저님?”
예고 없이 들려오는 맑은 음성에, 그것도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바람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비틀거릴 때, 넘어지지 않도록 그가 나의 팔을 잡아주었다. 고갤 돌려 얼굴을 확인하니, 엘이었다.
“죄송해요! 다치진 않으셨어요?”
Ⅳ
매니저는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나의 팔을 잡는 그의 몸이 희미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잘못 본 것일까 의심스러워 눈을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그러나 틀림없었다. 그것은 천사의 빛이었다. 성스러울 정도로 고귀하고 찬란한 천사의 빛이었다. 새하얗고 은은한 등 뒤의 날개가 그의 눈이 부신 빛을 감싸 안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 고결하고 숭엄한 광채는 첫눈에 인간을 사로잡네. ……잠깐, 내가 대낮에 시를 쓸 때가 아닌데. 정신 차리고 보니, 엘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매니저의 팔을 놓지 않고 붙잡고 있었다. 매니저는 허둥지둥 바삐 일어났다.
“아아……! 엘! 너였구나? 나, 나는 정말 괜찮아! 하하! 네가 잡아줘서 다친 곳은 없어.”
“다친 곳은 없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매니저님이 혼자 눈밭을 걸으시는데 혹시라도 추우신 건 않을까 걱정이 돼서 나왔어요. 자, 이거 걸치세요!”
그 소년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슬며시 자신의 점퍼를 벗어 매니저에게 입혀주었다. 매니저의 뺨이 붉게 상기되었다. 추위가 아닌 다른 이유로.
“정말 고마워, 엘. 하마터면 엉성한 꼴로 넘어질 뻔했지 뭐야! 십년감수했어~ 근데 내가 이거 입으면 엘 너는 춥지 않아?”
“전 괜찮아요! 그나저나 이 커다란 눈사람은 뭐예요? 정말 예쁘네요. 매니저님이 만드신 거예요?”
엘은 평소와 다른 자신의 태도에 깜짝 놀랐다. 평소엔 우물쭈물 곁을 맴돌며 망설일 뿐, 어찌 행동할 바를 몰랐을 천사였을 텐데 갑자기 이러한 용기가 생긴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했다. 그러나 후련하고 기뻤다. 엘은 오랜만에 매니저 앞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한 것에, 지금 매니저의 곁에 있다는 것에 희열감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기분이 좋아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자랑스러운 이 시간이 영원히 지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늘에게 소리쳐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린 사랑을 하는 누구나가, 좋아하는 대상 앞에서는 정숙하고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 법이다. 그러한 마음이 엘의 희열을 절제했다.
그들은 눈사람에 기대에 앉았다. 엘과 매니저의 대화에는 소소한 담소가 오갔고 그들은 즐거워 보였다. 그러다 매니저가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엘에게 물었다.
“……엘. 만약에, 너의 눈앞에 소원을 이루어주는 전령이 나타난다면……. 너는 그때 어떤 소원을 빌 거니?”
겨울을 등지고 여인은 처연히 물었다. 그 모습은 확고하고 진지한 결의에 찬 동시에 자책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 되지 않아 매니저는 체념한 듯 한숨 지었다. 이루어지지도 못할 게 뻔할 텐데, 이토록 애타게 갈망하는 마음이, 부푼 기대에 넌지시 던지는 물음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모든 것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역시, 잠에서 덜 깼나 봐. 세상에 그런 게 어디에 있겠어-”
“전, 딱 한 가지의 소원이 있어요.”
의외의 물음에 매니저는 순간 멈칫했다. 분명히 터무니없는 소리였는데도, 내게 응답하는 소년의 섬세한 눈길과 부드러운 목소리만으로도 매니저는 위로가 되었다.
“그건…….”
“그건……, 뭔데? 궁금해, 말해주라!”
매니저는 궁금한 나머지 밝게 웃으며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그 모습에 엘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떨려서, 별안간 매니저의 시선을 회피하며 멀어지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바짝 다가오며 장난스레 추궁하려는 매니저의 태도 때문에 엘은 더욱 난감하고 당황스러웠다. 긴 시간 동안 몰래 숨겨오던 비밀이 들통날까 초조한 마음에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비밀이에요……!”
“비밀? 뭐야! 그런 게 어딨어? 궁금해 죽겠단 말야! 그러지 말고 나한테만 조금이라도 알려주면 안 돼?”
“그, 그거야! 세상에서 단 두 개뿐인 소원 중 하나니깐……. 그만큼 소중한 비밀인걸요! 매니저님이 아무리 그러셔도 전 알려드릴 수가-”
그러다가 엘은 팔꿈치로 눈사람을 세게 쳐버렸다. 그 바람에 눈사람이 흔들리더니 결국엔 함박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너무나 빨리 떨어져서 피할 수 없는 눈이었다, 하지만 그때 아주 빠른 무언가가 매니저의 손을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매니저는 눈을 맞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앞엔 급하게 숨을 고르는 사람이 있었다.
“괜찮으세요? 많이 놀라셨죠, 정말 죄송해요……! 제가 팔로 눈사람을 툭 쳐버리는 바람에-”
매니저는 등 뒤에 눈이 묻은 엘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엘은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는 건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티 없이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절로 기뻤다.
“괜찮아,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는 법이니까~ 자, 옷 돌려줄게. 이제 빨리 지부로 돌아가자, 너 눈 맞아서 감기 걸리겠다. 어서 눈 털고 이거 입어! 그나저나 아쉽네. 너한테 단 두 개뿐인 소원이 뭔지 모르게 돼서. 그래도 즐거워졌어.”
엘은 그 말에 마음이 놓였다. 나의 정숙하지 못한 행동에 실망할까 걱정스럽고 초조했던 마음이 금세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해맑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천사의 마음이 벅차올랐다. 매서운 한기도 이제는, 저기 희끄무레 붉은 빛을 비추는 황혼 속으로 평온하게 떠내려갔다. 그녀의 얼굴은 어두운 기색 없이 환했다. 천사의 얼굴에도 초조한 걱정이 가시고 천사다운 순결함으로 화사하게 빛이 났다. 찬란히 부서지는 황혼을 넘어 어디선가 괘종시계의 알림음이 귓가에 오랫동안 맴돈 후, 저 멀리 힘이 닿는 곳까지 퍼져나갔다.
세상에서 단 두 개뿐인 그의 소원은, 그녀의 수호천사가 되는 것과 그녀가 슬프지 않고 행복한 것이다. 비록 오늘은 용기 내어 고백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그녀에게 전하겠노라며 소년은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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