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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겨울과 계절 / 솜튼
언젠가부터, 세상의 계절들이 순환을 멈춰버렸다. 계절은 더 이상 달리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무언가가 아니었다. 그나마 특정 날씨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간들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구분지어 불렀을 뿐이다.
모든 계절에는 이를 관리하는 역할의 담당자가 존재했는데, 이들을 확인하고 계절을 점검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로 매니저였다. 비록 까칠한 상사와 엄격한 동료와 함께하느라 피곤한 일도 많았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직업이라 매 순간 열심히 임하고 있었다.
•••
'가을'과 '겨울' 사이에, 누군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두꺼운 털옷과 부츠를 신고, 양손에 큼지막한 짐가방을 잔뜩 든 채로. 푹 눌러쓴 모자 사이로 황금빛 갈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린다.
살며시 달린 명찰은 이 사람이 '매니저'라고 넌지시 알려주는 듯 했다.
매니저는 두 계절의 경계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 중이었다. 보이지 않는 선이라도 존재하는 듯, 매니저가 서있던 곳은 푸른 하늘과 발 밑 가득히 쌓여가는 낙엽들이 인사해주는 반면 반대쪽은 굵은 눈발 때문에 눈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매니저가 이번에 점검을 맡은 계절은 봄이었다. 그러나 하필 봄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 혹독하기로 유명한 겨울을 통과하는 방법뿐이라 유난히 걱정되는 이번 임무를 떠올리며, 겨울로 들어가기 전 매니저는 마음을 다시 한 번 굳게 다잡았다.
"여기서부터는 차가운 겨울이야."
혼자서 중얼거려 보았지만 물론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은 없었으므로, 매니저는 머쓱한 듯 고개를 젓고서는 얼어붙은 공간 속으로 들어섰다.
•••
그러나 몇 분 나아가지도 못하고 매니저는 멈춰서는 수 밖에 없었다. 차디찬 눈보라에 금세 길을 잃어버렸고, 생각보다 바람이 거센 탓에 입고 온 털옷도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온통 추위뿐이야. 게다가 날씨도 궃은데, 이렇게 차가운 곳에서 사람이 살 수는 있을까?'
주변은 눈보라로 온통 새하얗게 변했고, 바람소리에 모든 소리가 묻혀 희미해져갔다. 뼈 속까지 시린 느낌에 주춤했던 그 순간이었다.
"...매니저님!"
매니저는 고개를 들었다. 작긴 했지만, 분명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만 같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 자그마한 외침 속에서 따스함을 느낀 매니저는 그 근원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매니저님! 이쪽이에요!"
멀리서 희미하게나마 사람의 형태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매니저는 상대방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나아갔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뒤편에 자그마한 집이 있는 것을 발견했고, 자연스레 매니저의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
"헉...허억..."
가뿐 숨을 내쉬며 매니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날씨가 이렇게까지 궃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그나마 집이 따뜻해,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걱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콜록! 콜록 콜록!"
안내자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매니저가 황급히 다가간 그 순간, 그는 그대로 풀썩 쓰러져버렸다.
"괘...괜찮으세요!?"
"안쪽에... 쿨럭... 침실이..."
안내자를 부축하며 침대에 눕혀준 매니저는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서야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찬찬히 바라본 안내자의 모습은 의외로 자신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17살에서 18살 사이 정도의 소년이었다. 연회색빛 머리카락에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으나 몸은 굉장히 가냘팠고, 보기 안쓰러워질 정도로 피부가 창백한 탓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더 신기해질 정도였다. 겉옷에 붙은 명찰에는 '베린'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다.
그가 근방의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점과, 집 안에 제 3자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이 겨울의 담당자는 '베린'인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밖이 이렇게나 추운데, 몸도 약해 보이는 사람이 여기서 혼자 살고 있다니."
멍하니 중얼거리며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매니저는 문득 상대방이 눈을 떴음을 알아차렸다. 추운 날씨임에도 볼이 살짝 달아올랐다.
"음, 저기, 반가워! 조금 전 눈보라 속에서 날 불러줬듯이 내 정체는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난 계절의 관리확인 및 점검을 맡은 매니저라고 해. 짧은 만남일지 몰라도 잘 부탁할께!"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일부러 더욱 밝게 인사한 매니저는 베린을 바라보았다. 상태는 많이 괜찮아진 듯 했지만, 베린이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연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봄으로 가기 위해 여길 지나가신다고 들어서, 제가 길 안내정도는 하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네요. 음... 사실 여긴 오는 사람도 별로 없고, 저도 별로 활달한 사람이 못 되서 점검할 것도 없지만... 아무튼 저도 잘 부탁드릴께요..."
가까이서 들어보니 베린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조용조용한, 왠지 모르게 힘이 빠진 듯한 느낌으로, 말투부터 낮은 자존감이 느껴지는 듯 했다.
"첫 만남부터 이런 모습이나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그래도 전 정말 어쩔수-콜록 콜록!"
당황한 매니저가 황급히 일어서자 오히려 베린이 더 놀란 듯 했다.
"아녜요, 고작 이런 일로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고작 이런 일이라니.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늘 조심하는게 좋아. 더군다나 매니저의 업무에는 계절을 관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담당자 또한 세심하게 신경써야 하거든. 그러니까 너무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 알았지?"
매니저가 웃으며 말해주자 베린은 그제서야 마음을 조금이나마 놓은 듯 했다.
"오늘은 쉬어가고, 길은 내일부터 떠나는게 나을 것 같아. 하룻밤 푹 쉬는 사이 눈보라가 가라앉을지도 몰라.하룻밤만 신세져도 괜찮을까?"
베린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매니저는 집의 손님방에서 지내다 가기로 결정되었다. 짐을 간단히 정리해둔 매니저는 문득 베린이 생각나 그의 방문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노크를 했다.
"..."
"베린? 벌써 자는거야?"
"...아녜요... 들어오셔도 돼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매니저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와보니, 침대에 앉아 창 밖을 가만히 바라보는 베린이 눈에 띄었다.
"뭘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거야?"
고개를 돌린 베린은 매니저를 뚫어져라 보았다. 마찬가지로 매니저 또한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깊이있게 바라보는 베린의 눈동자에, 매니저는 겨울을 떠올렸다. 그보다 더 겨울이 떠오르는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한 쌍의 하늘색 눈동자가 얼음이 서려있는 듯 오묘하게 빛났다.
"...매니저님?"
"어?"
"쓸쓸해요."
의외의 말에 매니저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여긴 정말 추워서,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온 몸이 얼어붙어버릴-콜록, 콜록!-지도 모르는 그런 곳인데, 사람도 저밖에 없고, 가끔씩 다른 계절에서 온 사람들이-케엑 켁!- 도와주러 오긴 하지만, 그래도 저 혼자 있기엔 너무 쓸쓸해서..."
베린은 말을 멈추고 매니저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누군가 이렇게 곁에 오래 있어준 건 오랜만이네요... 콜록... 이렇게 추운 곳에 오래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보니..."
매니저도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창밖의 눈보라가 집 안에서 보니 별 것 아닌 듯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시 베린을 바라보는 매니저의 눈길이 반짝였다.
"그럼 우리 밤 새서 대화나 해보지 않을래?"
"...네?"
"쓸쓸하다고 했으니, 다른 사람들과 대화도 별로 못 해봤을 것 같아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나한테 전부 털어놔도 좋아! 그 대신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할 꺼니까."
"...저기... 그렇다면..."
베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밤새도록 두 사람이 이야기꽃을 피어가기 시작할 무렵, 눈보라 또한 잦아들기 시작했다.
•••
다음날 아침, 어제의 눈보라는 거짓말이라는 듯 맑게 겐 날씨에 매니저의 발걸음도 분주해졌다. 두 사람 모두 잠은 거의 자지 못했지만 뜻밖에도 피곤하기는 커녕 기운이 넘치는 것만 같았다. 베린과 함께 밖으로 나가보니 추운 날씨는 여전했지만, 어제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겨울만의 아름다움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나무들에는 새하얀 눈이 덮여졌고, 나뭇가지 밑으로 긴 고드름이 나란히 매달렸다. 여기저기서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매니저를 관찰하는 동물들이 보였고,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폭식폭신한 눈이 발 밑을 감싸주었다. 눈꽃을 닮아 섬세한 날개를 가진 나비들이 온통 하얀 겨울풍경에 장식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은 집 앞의 정원이었다. 어제는 왜 보지 못했는지 의아해질 정도로 다양한 식물들이 추운 날씨에도 꿋꿋하게 자라났고, 그들이 모여 이루는 조화만 봐도 잘 관리받았음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제가 직접 기르는 약초들이에요."
베린이 매니저의 반응을 확인하며 말했다.
"약초 기르는게 취미라... 제 건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주기도 하고요."
"멋있는 취미네! 특히 약초라면 이런 계절에서 기르는게 결코 쉽지만은 않을텐데."
매니저의 칭찬에 베린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 것도 잠시, 어디선가 불어온 겨울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흐트려놓았다.
"정말 하룻밤만에 떠나시네요."
문득 아쉽다는 듯 베린이 입을 열었다.
"조금만이라도 더 오래 남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은 욕심인 걸까요..."
매니저도 아쉬움이 앞섰으나, 지금은 주어진 역할을 마냥 내버려둘 수만은 없었다.
"주어진 일을 전부 끝내면, 꼭 다시 돌아올께.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거 약속해주시는 거죠?"
"그래. 반드시 이 겨울로 돌아올 테니까."
매니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겨울의 끝자락까지 걸어갈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마침내 저 멀리서부터 부드러운 꽃향기가 나고, 눈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릴 무렵 베린은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혼자서도 잘 찾아가실 수 있을꺼예요."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매니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베린."
그렇게 말하고는 뒤를 돌아서, 매니저는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곧 조금만 더 나아가면 봄이다.
"매니저님!"
그 순간, 베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통 고요하기만 하던 겨울의 세계에 금이 가 있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가다듬은 베린은 입을 열었다.
"매니저님은 제게 계절 그 자체세요. 머무르지 않지만, 금세 떠나갈지도 모르는 존재지만 제게 수많은 변화를 가져다주는 소중한 사람이니까. 흘러간 계절은 그 어떤 형태든, 반드시 돌아온다고 해요. 그러니까 저도 여기서 매니저님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꼭 다시 와주셔야 해요!"
매니저는 뒤를 돌아보았다. 기침 한 번 없이 저 긴 문장을 말하다니, 괜찮은 걸까. 베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답례를 말하는 대신, 매니저는 그에게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잠시동안 매니저를 바라보던 베린은 슬며시 웃으며 작게나마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걸로 됐다. 언젠가 반드시 돌아와야지, 그게 언제가 될 지는 몰라도 꼭 돌아올꺼다. 그렇게 다짐하며 매니저는 발걸음을 옮겼다. 소복히 쌓인 발자국이 유난히 오랫동안 남겨져있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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