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마음의 온도 / 익명
-매니저님, 저기 보세요.
-아...
매니저라고 불리운 갈색 머리의 여성은 알바생이 가르킨 곳을 보고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하면 좋나.
그 곳에 서 있는 상대는 무슨 말에도 쉽사리 설득될 것 같지 않았다. 항상 그 아이의 페이스에 휘말려 버린다.
"모리."
푸른 머리의 소년은 눈꼬리를 길게 휘어 웃고는 언제나 앉던 자리에 앉아 톡톡, 가늘고 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린다.
"그렇게 놀라시다니, 역시 연락이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 봐요."
모리는 이어서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끝나면, 잠깐 시간 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머.." 모리의 등장을 알려주었던 알바생이 뒤편에서 모기만한 탄성소리를 낸다. 또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들숨을 쉬어 내리누른 뒤 서비스직 미소만 가볍게 지어보였다.
"오늘은 늦게 끝날 것 같은데."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 저 공부할 책 가지고 왔어요."
"..."
두꺼운 전공서적같은 걸 가죽 크로스백에서 꺼내고는 음료 주문까지 들이민다. 손님으로 왔으니 내쫓을 순 없겠죠, 하듯 당당한 표정이다.
"블랙 커피 한 잔만 부탁드릴게요."
예의바른 말씨와 예쁜 미소를 하곤 이내 얌전히 책을 들여다보는 이 어린 친구에게, 미운 마음이 들 리가 없다. 오히려 블랙 커피뿐만 아니라 서비스로 쿠키와 담요를 꺼내 주고 난로 근처의 가장 따뜻한 자리를 내 주고 싶지. 마음은 그랬지만 정작 트레이에 얹어진 것은 작은 커피잔 하나 뿐이었다.
-달그락.
고작 스무 살. 앞날이 창창하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훨씬 더 근사한 사람들을 만나 가는 발길마다 사랑받을. 이 아이는 잠깐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 카페를 지나친 사람일 뿐이다. 마치 이 카페의 지박령처럼 일터와 집만 오가면서 어느덧 매니저 자리까지 오른, 삶에 찌들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자신과는...
'안 될 일이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기억에서 지우려고 하는 것들 중에는 며칠 전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라는 짧은 말과 함께 내밀어진, 정성스럽게 포장된 꾸러미 안에 들어 있었던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매니저를 뒤에서 바라본 모습이 그려진 초상과, 요즘 보기드문, 정갈한 글씨로 빼곡히 채워진 편지지까지.
ㅡ커피는 한참 전에 놓아진 그대로였다.
'뜨거운 걸 못 마시나 보네...'
책장을 팔락 넘기는 모리의 손끝으로 시선이 잠깐 갔다가, 다시 재고관리 챠트로 시선을 내린다. 그림을 하도 잘 그리길래 미대생인 줄 알았는데, 경제학 서적을 보는구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ㅡ사실 모리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었구나 하는 생각. 하지만 역시 솔직함보다 임기응변이 더 먼저 나왔다.
"그... 기다리느라 지루할텐데, 빨리 끝내야지 하는 생각. 미안해."
"아니에요. 일하시는 모습까지 포함해서, 보고 싶어서 온 거니까."
"... ... ..."
어떻게 저런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겠지? 실례되는 생각이 들다가도, 다시 그 편지와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집안사정상 어릴 때부터 동생들을 챙기느라 바빴고, 학생 땐 또래들이 감성 맛집과 여행을 찾아다닐 때 대학조차 사치같아서 일자리를 찾느라 바빴다. 그렇게 적금 통장에 돈을 채우며 일만 하다가 어느덧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버린 매니저였다. 누군가와 진지하게 사귈 만한 여력이 나지도 않았고, 그 와중에 고백해 온 사람들과는 짧은 연애만 종류별로 하다가 흐지부지 지나갔을 뿐. 하지만 그렇게 대하기에는, 이번 상대는 너무 어리고, 마치 귀한 보석같았다.
자신이 모리에게 보여준 건 전부 삶에 찌든 꼰대같은 모습 뿐이었을텐데, 이런 마음이 가득 담긴 선물을 받아버리다니. 매니저는 편지를 손에 들었다 내려놓었다 하며 밤을 지새웠었다. 하지만 모리가 그 다음날 일을 그만두고 나가지만 않았다면, 하루종일 거절의 말을 고민하다가 건네주었을 터였다. 이런 사람 좋아하지 말라고, 정말 꼰대 어른같은 말이라도 넌지시 섞어가면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12월 초의 밤 거리는 당연하다는 듯 캐롤이 울려퍼지는 성탄 분위기였고, 온통 밝은 빛과 예쁜 오너먼트로 장식되어 있었다. 연인들이 거닐면서 사진을 찍기 딱 좋은, 하긴 카페 위치가 대학가니까. 모리와는 놀랄 만큼 짧은 대화를 나눈 뒤 헤어졌다.
ㅡ역까지만 데려다 드릴게요. 일을 그만두어서 같이 퇴근하지 못하게 됐잖아요, 매니저님 혼자 이 시간에 이 거리를 걸으실 게 갑자기 마음에 걸려서 온 거였어요.
그리고 역 앞에 다다라서는,
ㅡ내일 또 올게요. 그리고 저, 계속 매니저님 좋아해요.
그래놓고 뭐라고 거절할 타이밍조차 주지 않고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매니저를 남겨놓고.
그리고 정말 그 다음날도, 그 다다음날에도. 모리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전공서적을 읽다가 매니저가 퇴근할 때면 크로스백을 매고 조용히 따라 나섰다. 그렇게 매일밤 역까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지는 일이 반복되자, 역시 이게 아닌데 하고 이마를 짚게 되는 매니저가 있었다.
하지만 모리는 그 나이대의 남자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술이나 한 잔 하고 가요" 하며 퇴근길의 피곤한 매니저를 괴롭히지도 않았기에(덕분에 처음에 조금 그런 상황을 예상했던 매니저는 혼자 뒤통수라도 맞은 기분이었고.), 마땅한 거절의 사유는 발견되기 어려웠다.
대다수 로드샵의 셔터가 내려진 시간대의 음침한 밤길, 그 술냄새나는 대학로에서 그의 흰 피부와 밝은 사파이어빛 머리칼은 마치 홀로 빛이 나는 듯 했다. 모리를 곁눈질로 쫓으며 걷는 일은 새로웠고, 모리가 들려주는 부동산과 회계학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그래서, 요즘 잘생기고 어린 남자가 누나를 따라다닌다며."
"...그렇게 말하면 뭔가 이상한 것 같아, 레비..."
"다 들었는데. 누나 직원이 얘기해줬어. 매일같이 역까지 바래다 준다고."
매니저는 정말로 이마를 짚었다. 왜 사람들은 남의 연애 이야기같은 가쉽에 이다지도 관심이 많은 걸까.
'레비는 아직 어린 학생인데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이상한 사람이면 말해, 누나. 내가 매일 가서 바래다주면 되니까. 나도 다 컸어. 누나보다 키도 크잖아, 봐."
반에서 가장 키가 크다며 자랑하는 레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짓게 되는 매니저였다. 응, 든든하지. 역시 레비밖에 없지. 귀엽게 웃으며 팔짱을 껴 오는 레비의 어깨는 벌써 매니저가 살짝 기댈 수 있을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동생과 학원 앞에서 헤어져서 돌아선 매니저의 시야에 익숙한 밤거리가 비쳤다. 레비에게 맛있는 걸 사 주겠다는 목적으로 휴일날 나온 거리는, 언제나처럼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제 이 길을 혼자 걷는 게 어색할 정도인가.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리.
자신만만하고 예의바른 말투에, 빈틈없고 야무진 일처리에, 가늘고 재빠른 몸맵시. 벌써 n년 경력의 자신보다도 완벽한 서비스직 미소. 요즘 애들같지 않게 근태 이슈도 없는데다 여성 손님들에게 인기가 대단하니 사장님도 좋아했지...
어리지만 존경스럽기까지 한 그에게 상처를 준다는 걸 처음엔 상상도 할 수가 없었지만, 사실 매니저는 명확한 거절의 말을 이제까지 몇 번인가 했었다. 그 때마다 모리는 산뜻하게 웃으며 "저는 그래도 좋아하니까 괜찮아요." 하며 "내일도 올게요." 로 마무리하곤 했었고. 이런 행운이 언제까지 반복될 수 있는 걸까. 무슨 자격으로 계속 그를 거절하고 있는지도 이제는...
"모리...?"
머릿속에서 생각하던 상대를 눈 앞에 딱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매니저의 발길이 멈추었다. 심지어 그 상대가 펑펑 내리는 눈 속에서 빨개진 눈으로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고 있을 때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매니저조차 이런 상황에는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면 좋을지 몰라 잠시 쩔쩔맸다.
하지만 이윽고 저도 모르게 한 일은 서둘러 다가가 자신의 머플러를 끌러내려 모리에게 둘러주는 일이었다. 마치... 포유류 어미들의 본능처럼.
"왜... 무슨 일이야, 누가... 괴롭혔어...?"
마치 '말해 이 누나가 다 혼내줄게' 라고 하듯 미간에 힘을 주며 말하는 매니저에게, 모리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작게 대답했다.
"매니저님 때문이에요..."
"....아."
맞지. 내가 나쁜 년이지. (이런 예쁜 애를 울리다니. 매니저는 한강 수온체크 앱을 켜 볼지 잠시 고민했다.)
"미안해..."
"뭐가요. 흑.."
"모리를 힘들게 한 거랑, 몰랐던 거. 이렇게 모리를 힘들게 하고 있었는데..."
마음이 타들어갈 것만 같아 매니저는 발끝만을 내려다보다가, 언제부터 밖에 있었는지 얼어붙어 빨갛게 된 모리의 손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모든 용기를 다 쥐어짠 말을 내뱉었다.
"모리... 안아도 돼? 지금은 다른 것보다도... 모리를 안아주고 싶어."
"..."
모리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은 뒤, 천천히 말했다.
"안 돼요...
싫어요...
왜냐하면... 애인... 있으시잖아요..."
".......
...응?....?? ...??"
-
"남동생이 있으신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응. 남동생만 두 명이야."
서둘러 상비하고 있던 스페어 키로 가게 문을 따고 들어와 코코아에 마쉬멜로우 몇 개를 띄운 머그잔을 모리에게 처방했다. 담요로 돌돌 몸을 만 채로 다시 여느때의 차분한 얼굴로 돌아온 모리를 보며, 매니저는 그제서야 한 숨을 돌렸다.
"저는 알고보니 사실 매니저님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네요."
그 말을 듣고 매니저는 작게 웃었다. 사회적 매니저가 한 꺼풀 벗겨지고, 그제서야 솔직함이 나왔다.
"나도, 모리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모리가 몸을 일으켜, 매니저가 앉은 바 스톨 바로 옆자리에 다가와 앉았다. 의자를 당겨 앉는 그를 보고 마치 까탈스러운 고양이가 다가와 몸을 기대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모리의 금색 눈동자가 가까이에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부터 서로 알려주면 되죠."
"...응... ..."
"좋아해요."
이젠, 정말로 졌다. 아마 앞으로도 영영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모리는 벌써부터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고, 눈이 오는 성탄절 날,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한참동안 놓지 않았다.
-
After Story.
-모리와 사귀면서 알게 된 것. 모리는 눈치가 정말 빠르다. 모리의 등 뒤에서 아무리 살금살금 다가가도, 등에 눈이 달린 사람처럼 싱긋 웃으며 여유롭게 먼저 돌아본다. 아마도 모리를 놀래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 같다.
-매니저님에 대해 추가적으로 알게 된 것. 매니저님은 사실 괜찮은 척을 많이 해요. 매니저님께서 괜찮다고 하실 때면, 한 번쯤 다시 체크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고, 겁도 많고 속으로 끙끙 앓으실 때도 많고. ...그러지 말란 말이에요.
-...모리는 항상 눈을 감고 있지만,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빠르게 두 배는 더 넓게 보는 것 같아.
-^^ 칭찬이죠? 고맙습니다.
-그런데 왜 그 때는 레비가 내 남동생이란 걸 몰랐을까. 딱 봐도 남매처럼 생기지 않았어? 우리.
-아... 그건...
-...? 잠깐, 왜 시선을 피하지... 이건... 모리가 나한테 거짓말을 들켰을 때 반응인데.
-실은... 아주 멀리서 봐도 매니저님 동생인 것 쯤은 당연히... 네... ...
-!!!!? 알고 있었구나 !!!!! 그 눈물!!! 죄다 연기였어!!!!!! 모리~~~~!!!!!!
-아하핰. 실감나고 진짜같았죠? >_<
-너... 너무해. 난 정말 미안해서 죽는 줄 알았는데...
-하지만 정말 거짓된 눈물은 아니었어요. 그 땐 매니저님이 자꾸 저를 밀어내는 것 같고, 매일 매일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지만 실은 속상하고. 그런데 동생분한테는 그렇게 환하게 웃어주시고...
-아..아앗... 미안해... 모리... 내가 그 땐 정말 잘못했... 아니 잠깐... 뭔가 당한 것 같은데 또...
-그래서, 제가 싫어요...?
-... 아니....
-그럼요? (귓가에 키스하며)
-... 좋아해...
~Fin~
'네 번째 계절 > 우리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리매니][온기]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 키즈 (0) | 2020.12.18 |
---|---|
[모리매니] [자유주제] 해피엔딩 / 익명 (0) | 2020.12.18 |
[데이매니] [첫눈] 첫눈 / 김육회 (0) | 2020.12.18 |
[노아매니] [첫눈] 너만을 위해서 / 필연 (0) | 2020.12.18 |
[세이매니] [자유주제] 끝 / 라일락 (0) | 2020.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