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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 키즈
겨울 上
1.
피어오르는 향내가 지독하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는 듯 그 미소는 눈부시다.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떨궜다. 무거운 공기가 몸을 짓누른다. 스승님의 장례식은 많은 사람의 눈물로 숨이 막혔다.
고작 보름도 채 되지 않은 날을 떠올린다. 합격을 축하합니다. 화면에 떠오른 문장을 보고 제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곰살궂었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다정한 목소리에 담긴 애정을 하나하나 주워 담느라 헤헤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었다. 온 식구를 불러 모으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준비된 따뜻하고 즐거웠던 저녁 식사를 기억한다. 그 모든 것이 아주 오래전 이야기 같다.
같은 신입생들이 학과에서 주최하는 오리엔테이션으로 술에 절어 밤을 보내는 그 시기에 그는 장례식장에서 눈물에 젖어 꼬박 사흘 밤을 새웠다. 부모와 다름없는 이의 장례이나 완장조차 차지 못하고 꾸벅 조문객을 맞이하는 그를 보며 사람들이 가엽다 했다. 이번에 딱 성년이 된다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해 걱정을 덜었다는 위로인지 우롱인지 모를 말을 덧붙여서.
그는 아무것도 듣지 않고 조용히 침잠沈潛하고 있었다. 재가 소복이 쌓인 향로를 멀거니 쳐다보며 생각했다. 잃은 것과 잃을 것. 자신에게는 오직 그 두 가지만이 존재한다고.
겨울은 항상 모든 것을 앗아간다. 그래도 부모라고 정붙이고 살던 이들은 가난한 살림에 입 하나 덜자고 자신을 추위 속에 버렸다. 그런 저를 거두어 사람답게 길러준 스승은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져 허무하게 죽었다. 죽임 당했다. 예전의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를 구하려다 그 아비의 손에.
스승의 곁에서라면 이 차가운 손에도 무언가 쥘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겨울은 비웃듯이 빼앗아갔다. 잃은 것이 전부였다. 이제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 단지 살아있을 뿐이다. 무너질 탑을 공들여 쌓을 필요가 있나. 그건 어리석은 일이지. 아무도 모르게 자포자기한 그에게 어떤 남자가 다가왔다.
“네가 소호… 아니지, 모리가 맞냥?”
“누구시죠?”
“미카는 내게 좋은 벗이었지. 네 얘기도 많이 들었다냥.”
“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남자는 잠깐 나가서 얘기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모리가 상주喪主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러라는 사인이 돌아왔다. 고개를 끄덕이곤 뒤를 따랐다. 몰랐는데 나와보니 하늘이 흐렸다. 소금기 어린 얼굴에 닿는 바람이 차다. 저절로 손이 곱았다. 남자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담배라도 꺼내 피우려는 것일까 생각했는데 제게 건네었다. 무심코 받아드니 핫팩이다. 스승에게 얘길 많이 들었다는 게 겉치레는 아니었는지 제 손이 만성적으로 시리다는 걸 알고 있나 보다.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시죠?”
그런데 이런 걸로 소용없다는 건 듣지 못했나.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이기에 그는 너무 지쳐있었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에는 체념만이 담겨있다. 남자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다짜고짜 이런 말을 전하게 되어서 유감이지만…… 미카의 집은 처분될 거다냥.”
“새삼스럽지도 않네요. 주인 잃은 집이니 당연하겠죠.”
“그래서…… 미카는 혹시 모를 이런 때를 대비해 내게 너를 부탁했었다냥.”
“저는 어린애가 아닙니다.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아무리 딱 부러지게 말한다고 해도 고작 스무 살이다. 경험한 날보다 경험해야 할 날이 더 많은 나이란 말이다. 그런데 눈빛에 불신이 어려있다. 타인을 향해 힘껏 가시를 세운 모습이 오히려 위태롭게 느껴진다. 이 어린애를 홀로 두고 미카가…… 남자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을 이어갔다.
“네가 그렇게 나올 거란 말도 미카가 해줬지. 부탁이라고 해봤자 거창한 건 아니다냥. 살던 집이 처분되고 나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하지 않겠냥? 나는 아는 곳을 소개해 줬을 뿐이다냥.”
“다른 곳이요…….”
스승님이 안 계신 세상에 제가 갈 곳이 있을까요. 그러나 모리는 말을 삼켰다.
한 번도 제 발로 걸어본 적 없는 삶이었다.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까지 왔을 뿐. 그러니 또 휩쓸려가면 그만이다. 휩쓸리고 휩쓸리다 마침내 잔잔해지면 그대로 가라앉아 바다의 품으로 돌아가면 된다.
“사신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다고 들었는데……. 마침 내 예전 직장 후배가 그 옆에서 하숙집을 하고 있다냥. 말이 하숙집이지 주 수입원은 아니라서 아는 사람들 필요하다면 세를 주는 거지만. 그래서 물어봤더니 편하게 들어오라고 했다냥.”
“마음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이제 가라앉을 때가 왔을 뿐이다. 제 스승의 명패가 걸린 장례식장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모리의 단호한 대답에 남자는 겸연쩍게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더 할 말이 없으신 것 같으니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말하려는데 남자가 먼저 입을 열어 모리를 붙잡았다.
“…… 사실 미카가 가서 이미 계약했다냥.”
말문은 막혔는데 입은 슬며시 벌어진다. 눈썹은 위로 솟는데 눈꼬리는 아래로 내려간다. 이런 경우는 황당한 걸까 당황한 걸까. 두 눈을 꿈뻑이기만 하다가 말을 간신히 쥐어 짜냈다.
“네?”
“역시 말 안 했냥? 미카네 집에서 사신대를 통학하기에는 거리가 있으니까…… 나름의 배려였을 거다냥.”
“…… 스승님은 저를 댁에서 내보내실 생각이었을까요?”
“서서히 독립시킬 생각이긴 했지. 본인이 없어도 괜찮도록.”
“제가 성가셔서?”
“아닌 걸 알면서 왜 그러냥.”
모르겠어요. 몰라서 묻는 거예요. 하지만 남자에게는 투정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말은 애초에 안 하는 것이 낫다.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제 스승의 이름을 들먹이지만 않았다면 그대로
“미카가 너를 생각하며 마련한 곳이니…… 생판 모르는 데로 가는 것보다는 위안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냥.”
“……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가겠습니다. 스승님이 계약하신 거니까……. 그렇다고 오래 있진 않을 거지만요.”
“뭐, 가기만 하면 일단 됐다냥. 이건 내 명함이고, 이건, 내 후배…… 하숙집 명함.”
받아든 종잇조각이 손바닥을 파고들 것처럼 날카롭다.
겨울 上
2.
관이 떠난다. 모리는 소호小狐를 함께 보냈다.
겨울 上
3.
온기 없는 빈집을 바라본다. 과거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창을 비추었다. 집을 나설 때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면 당연하게도 다녀오려무나 대답이 돌아오던 때가 있었다. 외출했다 돌아와 다녀왔습니다 하고 말하면 다정한 목소리가 이제 오니 하던 때가 있었다. 이곳을 돌아올 곳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그럴 수 없겠지.
안녕히 계세요. 그는 아무도 없는 집을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돌아보지 않겠다 다짐하며 현관을 나섰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무겁게 옮겨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짐이 많지 않아서 가능했다. 애매한 시간의 버스는 승객이 없어 한산했다. 옆자리에 짐을 올려두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제 옆에 짐가방을 올려두고 그는 휙휙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변하는 풍경이 낯설다. 오랜 시간 버스에 앉아있으니 잠이 쏟아진다. 창에 머리를 기댔다.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 눈을 붙여도 괜찮을 테다.
겨울 上
4.
도르륵, 짐가방이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 소리가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울렸다. 대학생이 주로 사는 자취촌이라 학기가 시작되지 않은 지금은 인적이 눈에 띄지 않는다. 휴대전화를 들어 지도 앱을 켰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있는 프랜차이즈 베이커리를 오른쪽에 끼고 쭉 걷다가, 하늘색 간판의 편의점이 보이면 왼쪽으로 꺾어 보라색 간판의 편의점이 보일 때까지 걸으면, 그 맞은편이 하숙집이다. 하늘색 간판의 편의점에서 꺾지 않고 직진하면 사신대학교고.
하숙집은 회색과 벽돌색이 적절하게 섞인 외벽의 3층 주택이었다. 그다지 크지 않고 그리 낡지 않았다. 마당 없이 바로 이어지는 공동현관 앞에는 관리가 잘 된 화분들이 줄지어 놓여있었다. 막상 도착하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새로운 곳에 발을 들이는 것이 두려워 초인종을 누르기 망설여졌다.
캐리어를 옆에 두고 기웃거리고 있으니 뒤에서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 혹시 오늘 오기로 한 소호? 세상에. 잠깐 나왔는데 그 사이에 올 줄은…… 많이 기다렸어?”
앳된 목소리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리니 역시 앳된 얼굴이 있었다. 제 또래로 보이는……. 그래서 처음에는 다른 하숙생인 줄 알았다. 그러나 모리는 눈치가 좋았다. 그가 건넨 말과 손에 들고 있는 장바구니에 담긴 날것의 식재료를 보건대, 그는 집주인이었다.
“아뇨, 아직 초인종도 안 눌렀어요…… 모리라고 불러주세요. 소호는 아명兒名이라서요. 반갑습니다.”
“헉! 미안해. 아명이라는 말을 듣지 못해서. 어서 와, 모리. 예쁜 이름이다.”
“감사합니다.”
“내가 이 하숙집 매니저야. 사장이라고 부르는 하숙생도 있는데, 그 호칭은 어색해서…….”
그렇게 말하며 겸연쩍게 뺨을 긁는다. 띡띡 띡 띡띡띡띡 띠로리.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경쾌하게 움직인다. 스승님의 친우의 전 직장 후배라는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사고로 부모를 동시에 여의고 하숙집을 물려받았다고 했다.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다른 입장에 서있으니 닮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공동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1층에는 아마 주인집으로 추정되는 안채문과 식당이라 손글씨로 적힌 문패가 달린 중문, 그 사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테이블이 크니까 일단 여기서 이야기할까?”
그는 식당이라 적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모리 역시 현관 앞에 대강 짐을 놓아두고 따라 들어갔다. 막상 들어가니 대여섯 명이 앉을 수 있을 법한 식탁 외에는 식당이라기보다는 조금 큰 가정집 부엌에 가깝다.
“식당 겸 공동 부엌이야. 가스레인지 빼고 마음껏 써도 돼. 가스레인지는 쓰기 전에 꼭 말해주고. 아침은 일단 하숙생 인원대로 차릴 거고, 저녁은 먹을 사람만 문 앞 화이트보드에 적어주면 돼. 학교 가기 전에 아침밥 먹으러 와! 요리는 제법 자신 있거든.”
“네. 시간 되면요.”
“마실 건 어떤 게 좋아? 오렌지주스? 녹차? 커피? 커피는 믹스지만.”
“안 주셔도…… 저도 커피로 부탁드려요.”
딱히 생각이 없어 거절하려 했으나 이미 머그잔 두 개를 꺼내 들고 초롱초롱 쳐다보는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잔에 커피믹스와 뜨거운 물을 붓고 티스푼으로 휘휘 저으며 모리에게 앉으라고 했다. 모리가 엉거주춤 자리에 앉자 그는 미리 준비해놓은 듯 테이블 위에 이미 올려져 있는 서류를 모리 쪽으로 밀었다. 그러고는 옆에 커피 또한 내려놓았다. 모리는 따뜻하게 데워진 컵의 표면을 감싸 쥐었다. 달콤한 향이 올라왔다.
“계약서야. 와서 계약하신 미카님이 보고 알려주셨겠지만 당사자가 다시 확인해야지.”
안 알려주셨는데요. 아마 못 알려주신 거겠지만. 모리는 이걸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방은 303호라고 걸어둔 곳을 쓰면 돼. 추위를 많이 탄다며? 전열기구는 금지지만 온수 매트는 괜찮아. 대신 전원 잘 꺼주고. 여기 적힌 것들은 방에 두지 말고 나한테 맡겼다가 필요할 때만…….”
그러나 고민하는 사이 매니저가 어디선가 꺼낸 펜으로 친절하게 밑줄까지 치며 다시 설명해 주었기에 얌전히 듣기만 하면 되었다. 네. 네. 네. 형식적인 대답들이 재미없게 이어졌다. 딱 하나를 제외하고.
“어어, 그리고 혹시 담배 피워? 당연하지만 방에서는 피우면 안 돼.”
“아뇨… 비흡연자입니다만.”
“그래? 미안.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나서.”
“…… 아, 스승님께서… 함께 살던 미카님께서 피우셨거든요. 아마, 그래서…….”
“그러셨구나. 어쩐지. 금연하시면 좋을 텐데.”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으나 모리에게는 그 대화가 각별했다. 아직 스승님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내가 죽음을 알리지 않으면 당신에게 나의 스승님은 살아있었다…….
“음! 이 정도면 해야 할 얘기는 대강 다 한 것 같네. 짐 풀어야 할 텐데 오래 붙잡아서 미안. 앞으로 잘 부탁해, 모리.”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아주 조금이지만 어차피 머물러야 한다면 여기가 낫겠다고 생각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남자의 말대로였다.
봄부터 가을까지
1.
슬픔을 숨기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그의 전부가 무너져도 이 세상은 흘렀다. 가라앉지 않으려면 헤엄쳐야 했고 지푸라기 마냥 뭐라도 붙잡아야 했다. 모리는 펜을 잡기로 했다. 다른 이들은 시험 때가 아니면 펴보지 않는 전공책을 펴 하얀 부분이 보이지 않게 글씨를 썼다. 가독성은 사치인 듯 공책을 빼곡히 채웠다. 공부를 하는 동안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됐다. 학과 사람들과의 교류는 최소한으로 했다. 천성이 능청스럽고 꾀가 많아 그 정도로도 어울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인 대학 생활은 사뭇 지루했다. 그러나 그게 차라리 편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2.
하숙집 근처에는 도서관이 있었다. 학교와 하숙집 딱 가운데에. 좋은 점 중 하나였다. 일어나면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 강의를 듣고 강의가 끝나면 주로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저녁 시간이 되면 하숙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었다. 단출한 일상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3.
요리는 제법 자신이 있다던 매니저가 준비한 식사는 정말로 맛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식비를 절약하기 위해 꼬박꼬박 먹으려던 것뿐인데 이제는 식사 시간이 은근히 기다려졌다. 일주일씩 걸어두는 식단표를 확인하는 것이 월요일 아침의 소소한 재미가 되었다.
하루는 시간을 착각해 평소보다 조금 일찍 식당으로 내려갔다.
“매니저님은 아침에 블랙커피신가요?”
“커피는 다 좋아해. 모리도 한 잔 마실래?”
“좋아요. 저도 커피를 즐기거든요,”
그날 이후로 하숙집에는 원두가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아침 식사 전에 조금 일찍 내려가면 두 사람만의 커피타임이 생겼다. 다른 하숙생들은 모르는 시간. 모리는 그 사실을 깨닫고 조금 기뻤다.
봄부터 가을까지
4.
운이 좋게도 하숙집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일과가 늘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5.
어린 시절 버려진 나를 거두어 키워주신 스승님은 헤비 스모커였다. 아직 학생이던 내 앞에서 피우지는 않았지만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다. 쓰레기통은 항상 꽁초와 빈 담뱃갑으로 가득했고 탈취제를 아무리 뿌려도 그 사이로 담배 냄새가 풍겼으니. 답지 않게 취향은 또 무거워서, 스승님이 담배를 피운 직후에는 근처에만 가도 눈이 매웠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나갔다 돌아온 스승님께 달려갔다가 눈물 깨나 쏟았더랬지. 그날부터 스승님은 담배를 피운 후에는 꼭 주변을 걸으며 바람을 맞았다. 나를 배려해 최대한 연기를 날리고 들어오려는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담배 자체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나는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는 스승님을 위층에서 쳐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스승님은 항상 라이터가 아닌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언제더라, 궁금해서 왜 굳이 성냥을 쓰냐고 물었더니 빙긋 웃으며 라이터의 불과 성냥불의 맛이 달라서라 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끝이 빨갛게 타오르는 담배를 물고 팔짱을 낀 채 몇 번 연기를 뱉다가 이내 펼친 손바닥만 한 휴대용 재떨이에 재를 터는 스승님은 평소 모습과 달랐다. 특히 스승님이 담배 연기를 뱉을 때. 뿌옇게 퍼져나간 연기가 스승님 얼굴을 가렸다가 사라지면 꼭 신이 새벽안개와 함께 지상으로 내려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었지.
이제 스승님은 안 계시는데 나는 왜 여전히 아래층을 내려다보고 있는 걸까.
“모리~”
소호야. 하고 올려다보던 얼굴을 기억한다. 꼭 저랬다. 팔짱을 낀 손을 빼내어 가볍게 흔들면 흘러내린 머리카락도 함께 흔들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그러고는 손을 모아 뒤로 감춘 후 천천히 건물 쪽으로 걸어오며 말을 걸었다,
“위험하게 왜 그렇게 몸을 내밀고 있어.”
“…… 아, 매니저님. 외출했다 돌아오셨나요? 나가신 줄 몰랐어요.”
“응. 바로 앞 도서관에 잠깐.”
왜 하필 그 순간에, 당신이, 거기에.
과거의 잔상殘像과 동작이 겹친다. 비록 담뱃대가 아닌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6.
닮았다. 전혀 닮지 않았다. 그에게서 흔적을 찾다가도 전혀 다른 모습에 안심하는 날이 반복됐다.
봄부터 가을까지
7.
적응하느라 바쁘던 대학 첫 학기는 적응할 때쯤 끝이 났다. 3층을 사용하는 하숙생 네 명 중 셋은 방학 동안 방을 빼기로 했다. 하나는 다시 들어오겠다 했고 둘은 모르겠다고 했다. 2층을 사용하는 두 명은 아예 하숙집을 나간다고 들었다. 하나는 기숙사로 들어가서, 다른 하나는 자취방을 구해서.
그렇게 둘만 남았다.
“모리 너까지 나갔으면 많이 적적할 뻔했네. 이렇게 다 나간 적은 처음이라서.”
“모처럼 자유로울 기회를 제가 방해한 걸까요?”
“아니야! 난 하숙집이 복작복작한 게 좋아. 모리가 남아줘서 다행이야.”
“이런, 제가 여러 사람분을 하게 노력 좀 해야겠는데요.”
“사실, 모리만 있으면 충분해서 괜찮아.”
귀 끝이 붉게 타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다행히도 머리카락이 가려줄 것이다. 당신은 알까. 호의로 거둔 푸른 머리 짐승이 이런 불경한 마음을 품었다는걸. 꿈에도 모르길 바란다. 숨기고 숨길 테니.
봄부터 가을까지
8.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렸다. 일부러 하숙집에 있는 시간을 줄였다. 한시라도 빨리 하숙집을 벗어날 자금을 마련해야 했음과 동시에 그와 마주치는 일이 최소한이 되도록. 단둘이서 즐기던 아침의 커피 타임도 이제는 없다. 그래. 이대로. 이대로만…….
봄부터 가을까지
9.
저녁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귀가할 때면 자정에 가깝다. 그러니 1층 공동 주방의 등은 꺼져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모리는 골목 입구에서부터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았다. 끄는 걸 잊어버리셨나. 대신 끄고 올라갈 생각으로 부엌문을 열고 들어가 발을 들였다.
“모~리~ 아르바이트 끝나고 지금 온 거야? 늦게까지 고생했네에.”
“…… 이 시간에 뭐하고 계세요, 매니저님?”
흐느적흐느적. 모리를 보고 반갑게 흔드는 손이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반대쪽 손에는 내용물이 남아 찰랑이는 맥주캔이 들려있다. 술에 절은 혀가 제멋대로 미끄러져 말은 늘어지는데 목소리는 평소보다 고조된 상태다. 술 냄새가 물큰하게 풍긴다. 시각 청각 후각 어디로 봐도 취한 사람이다. 그동안 열심히 피해 다녔는데 이렇게 딱……. 그렇다고 이리 두고 뒷걸음질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몰래 뱉는 한숨이 무겁다.
“보다시피! 한잔했지롱.”
“아무리 봐도 한 잔이 아닌데요.”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모리는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빈캔들을 주워 분리수거통에 와르르 쏟으며 말했다. 그게 뭐가 재밌는지 술기운에 배실배실 새던 웃음도 와르르 터졌다. 발그레한 뺨이 씰룩거린다. 그렇게 귀엽게 웃지 말란 말이에요. 보면 안 될 것을 엿본 것마냥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하하하, 들켰다. 모리 너도 같이 마실래~?”
“들켰다뇨, 숨기지도 않으시곤. 이거 제가 마실 테니 매니저님은 그만 드세요.”
그의 손에 들려있던 나머지 캔을 제 손으로 옮겨왔다. 무력하게 빼앗기는 모습을 보니 맥주캔이 손에 들려있었다기보다는 맥주캔에 손을 대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 내 건데 치사해! 모리랑 같이 마시고 싶다구.”
“네네. 여기 한 잔 받으세요.”
모리는 찬장에서 컵을 꺼내 생수를 꼴꼴 따라주었다. 그는 받자마자 한입에 털어 넣고 테이블 위에 컵을 탁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찹찹 입맛을 다시더니 이리 말하는 것이다.
“오. 술에서 물맛이 나. 나 많이 취했나 봐.”
“푸핫.”
내내 무표정하려 노력하던 모리는 결국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모리 웃는 거.”
“아…… 그런가요?”
“음. 생각해 보니까 모리 자체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요즘 밥도 안 먹으러 오고. 아침에 커피도 안 마시고. 서운하게에.”
“서운…하셨어요?”
“응. 난 모리 너랑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멀뚱하게 서있던 모리는 그제야 의자를 빼어 매니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터진 웃음이 뒤늦게 민망한지 뒤통수를 긁적이던 손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런 모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돌연 밝은 목소리를 냈다. 우리 짠, 하자. 짜안~ 모리는 엉겁결에 들고 있던 맥주캔을 그가 높이 치켜든 잔과 부딪쳤다.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맥주캔에 입을 가져다 대는 모리와 다르게 매니저는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잔을 털었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꺾더니 이내 깨달은 표정을 짓곤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 방금 원샷 해서 빈 잔이었어.”
솔직히 이건 웃을 수밖에 없지 않나.
그 후로는 완전히 긴장이 풀려 함께 술자리를 즐겼다. 후에 생각하길 과실過失이라면 과실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과실果實이었다. 아주 달콤한 금단의 열매. 술이 들어갔기 때문일까,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눌 뿐인데 즐거워 견딜 수가 없다. 사실 알고 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상대가 매니저이기 때문이란걸. 시간이 흐른 줄도 몰랐다. 매니저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오지 않았다면 계속 몰랐을 테다. 깜빡하면 고개가 꺼떡였다. 그제야 아차 시계에 시선을 준다. 새벽이 깊다.
“정리는 제가 할 테니 들어가서 주무세요, 매니저님.”
“모리이. 있잖아.”
그의 부름에 테이블 위를 바쁘게 정리하던 손이 멈췄다.
“나, 사실 사장님이라고 불리는 게 무서워. 분명 우리 어머니가 불리던 호칭인데…… 갑자기 나한테 넘어오다니…… 어머니가 이제 내 곁에 없다는 게 실감이 나서.”
“…… 매니저님.”
“너만은 항상 매니저라고 불러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이제는 상체를 일으키고 있는 것조차 버거운지 매니저는 철푸덕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검지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웃는 얼굴이 씁쓸하게 보인다.
“다른 하숙생들한텐 비밀이야.”
이내 스르륵 손이 떨어졌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린다. 뒤늦게 테이블 위로 엎어진 매니저를 부축하려 했으나 요지부동이다. 어쩔 수 없이 제 방으로 올라가 담요를 들고 내려왔다.
“사실 스승님은…… 제가 이 하숙집에 들어오기 직전에 돌아가셨어요.”
“…….”
“그래서 첫날, 매니저님이 아명인 줄 모르고 소호, 하고 불러주셨을 때…… 스승님이 살아서 돌아오신 것 같았어요.”
대답이 없다. 그래서 말할 수 있었다.
“저도 비밀이에요.”
방금 전 매니저와 같이 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렸다. 그의 곁에 자리를 지키며 아침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봄부터 가을까지
9.
불편하게 잠든 탓에 이르게 일어난 매니저가 상황을 파악하고는 모리에게 사과했다. 상황을 파악한다는 건 기억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디까지 기억하시나요, 라는 물음에 그가 빈 잔으로 짠 한 것까지, 라고 대답해 둘 다 웃음보가 터졌다.
식사를 준비하려는 매니저가 냄비 앞에서 숙취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으니 대신 콩나물국을 끓여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도서관으로 가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하숙집으로 향했다. 저녁 아르바이트에 일찍 출근해 폐기 김밥을 꾸역꾸역 먹으며 일하지 않고 매니저가 차린 저녁을 먹은 후 여유롭게 출근했다. 잘 다녀오라는 말이 듣기 좋다. 다녀오겠습니다 말하는 성대가 간지럽다. 다음날부터 다시 모닝커피를 마시기 위해 일어나면 식당으로 내려갔다. 같이 보내는 커피타임이 역시 더 즐겁다며 매니저가 웃었다. 모리도 따라 웃었다.
…… 이렇게 지내다 겨울이 오기 전에 떠나자. 겨울이 또 모든 것을 빼앗아 가기 전에.
겨울 下
1.
왜 겨울은 오겠다는 말도 없이 오는가. 그냥 어느 날 눈을 뜨니 겨울 냄새가 났다. 창문 너머로 느껴지는 공기가 차다. 분명 찬바람이 닿는 건 피부인데 아리기는 뼛속이 그렇다. 모리는 아침 식사를 하러 간다기에는 조금 과하다 싶은 겉옷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잘 잤어? 좋은 아침.”
“네, 좋은 아침입니다. 매니저님도 안녕히 주무셨나요?”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면 풍겨오는 고소한 냄새와 따뜻하게 몸을 감싸오는 온기, 달그락거리는 식기들과…… 상냥하게 반기는 목소리. 이제는 모리에게 일상이 된 아침.
“아, 모리! 나 오늘 갑자기 나갈 일이 생겼는데…… 오후 늦게 들어올 거라 저녁 준비할 시간이 빠듯하겠더라구.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같이 배달시켜 먹지 않을래?”
“재료가 있다면 제가 준비해도 되는데요.”
“아냐, 아무리 그래도 하숙생한테 집주인 밥을 부탁할 수는 없지. 혹시 약속 있어?”
“오늘 하루 종일 집에 있을 거예요.”
“좋아좋아~ 그럼 내가 집에 오는 길에 포장해오는 게 낫겠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는 모리가 하겠다고 나섰다. 설거지 정도는 종종 하숙생들이 도와주곤 했기에 매니저는 부담 없이 그럼 부탁 좀 할까, 하고 넘겼다. 모리가 설거지를 끝냈을 때 그의 외출 준비도 끝나있었다. 마침 나가려는 그를 종종걸음으로 쫓아가 배웅했다. 기분 좋은 미소가 화답한다.
“다녀올게. 오늘은 인사가 반대네.”
“하하, 그러네요. 잘 다녀오세요.”
성큼성큼 걸어가는 매니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오랜만이네. 무얼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지…… 생각이 뻗치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러고 보니 책 반납을 해야 하네. 바로 앞이니까 잠깐 다녀올까.”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다. 직접 반납하지 말고 무인 반납함에 넣을걸. 괜히 다른 책을 빌릴까 하지 말걸. 매니저님이 추천한 책이 재밌어 보인다고 그 자리에서 펼쳐보지 말걸. 답지 않게 책에 빠져 시간을 잊고 있다 매니저가 올 때가 되어 허둥지둥 하숙집으로 돌아온 모리는 생각했다.
겨울 下
2.
왜 미련하게 겨울이라는 걸 잊었을까.
겨울 下
3.
손목시계를 본 매니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이 어둑하다. 겨울이라 해가 짧은가. 아니면 눈이 오려고 하늘이 흐린가. 한발 늦게 탄내가 났다. 헷갈리게 왜 항상 타는 냄새 속에는 단내가 물들어 있는 건지. 고개를 들었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하늘을 덮는다. 오라고 손짓하는 것도 아닌데 홀린 듯 연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순서가 틀렸다. 그가 가는 길에 연기가 깔린다.
불길이 시작되었다는 옆 빌라는 이미 새카맣게 그을린 채였다. 들리는 소리로는 실화失和라고 한다. 전열기구가 과열되어 터졌고 조각난 잔해들은 날이 건조한 탓에 온갖 것에 옮겨붙어 몸집을 불렸다. 화마火魔는 바람을 따라 번졌다. 하필이면 바람이 하숙집 쪽으로 불었다. 번뜩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오늘 하루 종일 집에 있을 거예요.
“모리……!”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다. 불을 피해 혹은 불을 보러 나온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심장의 고동이 거세져 손끝까지 떨린다. 덜덜거리는 손으로 불구경하는 사람 아무나 붙잡았다. 운이 좋게도 모든 상황을 주워들은 사람이었다. 처음 불이 난 빌라에서는 두어 명이 가벼운 화상을 입었을 뿐이고 옮겨붙은 하숙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알려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할 여유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헤집었다.
“모리! 어딨어? 모리…!”
사람 무리와 점점 멀어진다. 그럴수록 모리가 가까워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앞을 보며 달리려는데 돌연 시선이 옆으로 비껴갔다. 길고양이나 지나다닐법한, 골목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샛길. 방향을 꺾었다. 건물 그림자 속에서 푸른색 머리카락이 그을은 듯 검게 물들었다. 쭈구려 무릎을 안고 얼굴을 묻은 채 있는 인영人影을 본다.
“…… 모리. 무사해서… 다행이야.”
“전부…… 저 때문이에요.”
익사 직전에 건진 듯 물에 푹 잠긴 목소리다. 단단하게 몸을 말고 있는 모습이 터지지 않는 공기방울 속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높이를 맞추어 다리를 접고 허리를 숙였다. 눈 대신 정수리가 바로 앞에 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옆집에 난 불이 옮겨붙은 거라며.”
“하필 도서관을 다녀온 그 사이에…… 제가 외출하지 않고 집에 있었더라면, 금방 끌 수 있었을 불인데…….”
“그 큰불을? 설령 집에 있었다고 해도 얼른 대피하는 게 맞지. 잘했어.”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는 손길에도 모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과연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리기는 했을까 싶게 만드는 말을 이어간다.
“아니, 애초에 제가 이 하숙집에 오지 않았더라면…….”
“아까부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넌 잘못한 거 없어.”
“불행은 저를 쫓아온 거예요…….”
얼토당토않은 소리라 치부하기에 모리는 몹시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나오는 음성은 점점 작아지고 쥐어 짜낸 소리가 난다. 끝에 와서는 거의 단어를 토해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뱉는 것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제가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가져가려고…….”
“…… 모리.”
“제가 이 하숙집을…… 당신을 사랑해버려서…… 이런 일이…….”
“모리!”
모리의 뺨을 감싸 고개를 들게 했다. 감촉이 거칠었다. 난리 통에서 뒤집어썼을 재와 먼지로 얼룩덜룩한 얼굴에 눈물길이 몇 줄 선명하다. 빛을 잃은 금색 눈동자가 그를 보곤 폭풍을 맞은 배처럼 흔들렸다. 차마 침몰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 눈꺼풀을 닫아버린다.
“나를 사랑해?”
“안 돼요…….”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지금.”
“저는 아무것도 사랑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눈물길의 갈래가 늘어났다. 흘러내린 것이 축축하게 그의 손끝을 적셨다. 닦지 않고 그대로 얼굴을 붙였다. 도도록한 살이 맞닿는다. 찬바람을 맞으며 골목을 뛰어다니는 동안 얼마나 짓이겼는지 살이 부르트고 일어나 까칠하다. 그리고 차가웠다. 밀담密談이라기엔 초라하고 위로라기에는 과분하다. 소금의 맛이 났다. 서서히 숨결이 섞인다. 열은 형태가 되어 둘의 틈 사이로 피어올랐다.
비로소 뜨거워진다.
“…… 아시잖아요…….”
“네가 사랑하는 것들은 전부 사라지기 때문에?”
억지로 끄덕이는 고개가 죄를 고하는 신자처럼 무겁게 떨어진다. 홀로 품어왔던 추상抽象을 꺼내니 형태가 갖춰져 비참함이 더하다. 세상으로부터 귀를 막았다.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불행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특히 매니저에게는.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귀를 통해서가 아니라 머리에서 직접 울렸다. 마치 신神의 음성처럼.
“나도 그래.”
“….”
“내가 사랑하는 것들도 전부 사라지더라. 부모님도, 동생들도…… 물려받은 하숙집과… 잘못됐으면 모리 너까지.”
“…….”
“이번 화재는 나를 따라온 걸지도 몰라.”
누가 침묵은 금이라는 말을 하였나. 침묵으로 지불해야 하는 값이 금이라면 또 모를까. 이 침묵에 전 재산을 치러도 모자라다. 모리는 파리해진 입술을 뻐끔거렸다. 막힌 목이 쉬이 뚫리지 않는다. 침묵을 깬 것은 결국 그였다. 빚을 졌다.
“우리 내기할래?”
“…… 내기요…?”
“내가 사랑하는 네가 먼저 사라질까, 네가 사랑하는 내가 먼저 사라질까.”
“…….”
“둘 중 누가 이기는 때까지 곁에 있자.”
이길 수 있는 내기가 아니면 시작하지 않는다. 모리는 겁쟁이기 때문이다. 모리는 와락 팔을 뻗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목뒤로 둘러진 손이 가늘게 떨려온다. 어깨가 젖는다. 두 사람은 눈을 감고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저와 닿아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이도록.
“매니저님.”
“응. 모리.”
“당신은 죽지 마세요. 그럼 나도 따라 죽을 거예요.”
“너도 죽으면 안 돼. 마찬가지니까.”
두 사람은 앞으로 서로를 살리기 위해 제 목숨을 인질로 잡고 살아갈 것이다. 붙잡은 손의 온기가 스러질 때까지.
“돌아가자.”
“…… 네. 돌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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