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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첫눈 / 김육회
잠든 세상이다. 달게 들어찬 만월 아래, 회백색 풍경. 나약한 편린이 서리와 얽혀 녹으면, 우리는 날 적부터 언어의 수단을 잃은 이들처럼 적요만을 위시한다. 고요한 순간 뒤에 숨어 불안을 묻어 감추고, 얼마나 남았더라, 부러 시간을 가늠하면 언제까지고 그 찰나가 영세할 것만 같았다.
……날이 많이 추워졌네.
부스러지는 네 목소리 속, 가닿을 곳 없는 걸음을 옮기는 동안 지난 자취를 더듬고 거스른다. 그러면 곧, 내 추억의 근간이 온통 너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 만다. 인식하고, 인지하고, 좋아하고, 끝내는 사랑하고. 수많은 이들의 이름 속, 유독 네 것만이 선연했다. 우리가 영영 함께라면 좋을 텐데. 정말로 좋을 텐데.
언제고 반듯한 옆얼굴을 훔치듯 보다가 난 기어코 너를 입에 담고,
데이.
…응?
너는 내게 느지막한 답을 준다. 꼭, 겨울에 감긴 목소리로.
아니, 그냥…….
우리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서. 조금 멀어진 기억을 어림 짚다 꺼내니, 다스한 눈꼬리가 내내 뺨 위에 머문다. 어느 절명에 잠기었을지언정, 단 한순간이라도 떠나지 않을 것처럼. 너의 눈동자에 내가 비치고, 비친 나의 눈동자에 네가 비쳐온다. 너의 바다를 거듭 거듭 건너 그 안에 죽는 날까지 고일 수 있다면 감히 평생을 꿈꿀 수 있을까, 처절할 정도로 우스운 바람을 탐하다가 내 이마에 톡, 닿는 네 이마에 몰래 고인 슬픔을 넘긴다.
네 눈이 목도한 내가 괜찮은 꼴로 웃고 있었으면.
……저기, 매니저님.
네가 날 부르는 일이,
왜, 데이?
내가 널 부르는 일이,
……우리랑 있어서… 즐거웠어?
잠잠한 목으로 내놓는 답이 빤한 질문에,
응. 아주 잠시도 빼놓지 않고, 전부.
같이 잠잠한 목으로 빤한 답을 내놓는 일이, 언제 이토록 소중해졌을까.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너의 덕이라고, 그렇게 더 말하고 싶은 것을 홀로 곱씹고 만다. 몸을 돌려 다시 앞을 보면 여전히도 백과 묵이 점철된 세상이다. 여기는 너무도 춥고,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기약 없는 고별처럼 잠들 이 곳에 너를 두고 가야 하는구나.
전부가 내게는 즐겁고, 또 행복했어. 그래서 더욱 모두가 그리울 거라고 생각해.
….
물론 난 데이가 제일 그립겠지만.
네게 받은 위안을 세다 뜬 눈으로 맞은 새벽이 몇 번일까. 저 멀리 보이는 뒷모습에 날 듯 마음이 부푼 것도, 누구에게나 보여 내는 미소가 내 앞에서 조금 더 해사함을 알았을 때 목을 꽉 틀어막은 벅참도, 맹목적이어서 생경하기까지 했던 애정과 동경도, 전부가 익숙해졌는데.
말을 잃은 입술 끝을 빤히 본다. 미묘히 달싹이기만 하던 것이 끝내 힘을 가지고 벌어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않으면,
……매니저님.
….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
너는 작은 바람에도 쉬이 흐트러지는 물음을 건넨다. 대답 대신 가만히, 구불구불 휜 머리칼에 눌어붙은 눈의 자국을 닦았다. 첫눈이 남긴 자취, 어설피 녹은 눈의 물 자국, 눈물, 자국. 시린 손끝을 곰질거리면 눈치를 보다가 슬쩍 닿아오는 볼 한 쪽이 참으로도 뜨겁다. 딱 네 마음만큼 뜨거운 온도라, 어찌 할 수 없는 살가운 웃음을 피어본다. 머물던 말을 뒤로 물리고,
……있지, 데이.
대신 한 자, 한 자, 찬 숨 섞인 부름을 보얗게 뱉고 묵연히 내게 꽂힌 눈을 마주한다. 감히 내가 사랑하노라 외쳤던, 고운 빛의 눈. 아아, 데이. 열이 오르는 살갗을 언 손으로 매만졌다. 미안하게도 나만이 분에 겨운 애정을 받았던 나날인 것 같아, 사죄처럼 시선을 내린다. 그저 네 것이라 좋아했던 색은 이 곯은 마음 앞에서도 여전히 찬연한데, 무엇도 줄 것이 없는 나는 황망히 후회를 삼키고 만다.
회한이 일그러뜨린 입술로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앞둔 이처럼 말로의 너를 읊조리는 일.
데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없기에,
무르익은 설움을 알면서도 너를 피하지 못 해.
네가… 보고 싶을 거야.
네가, 보고 싶을 거야. 진실은 서글프기에 진심만을 둔다. 그것으로도 족하다 여긴다. 머문 침묵 속에서 함께 발을 딛고 있는 하잘 것 없는 순간조차 소중해, 감히 무언으로 영원을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팔을 내려 손을 쥐면, 똑같은 겨울을 맞았는데도 홀로 따뜻한 살결이 잡혔다. 곧, 손등을 감싸오는 너른 손바닥. 머뭇거리던 마디마디가 이내 긴밀히도 접하고, 조금 숙였던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은 안쓰럽게도 웃는 면면.
…첫눈이야, 매니저님.
너는, 그리고 나는,
……그러게. 첫눈이네.
우리의 마지막에 서있어.
희게 쉬어버린 세상에 눈을 둔다. 소복이 쌓인 길에 묵묵한 자국을 남기며, 추위로 곱아드는 발가락을 꾸역꾸역 폈다. 끝을 알면서도 멎지 않는 것은 마음이다. 떠나는 이는 혼자지만, 둘 모두가 남는 자로서 서로를 그릴 것 또한 안다.
조금 더, 손을 굳게 맞잡았다. 영원을 단언키 힘든 결속임에도 틈새를 떠도는 온기를 어느 날과 같은 평이한 인사처럼 나누었다. 데이, 내가 없더라도 네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의 또 다른 이름이 긴 시간 드리워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들리지 않을 미련을 우물거리면, 넌 가만히 곁을 지킨다. 오롯,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매니저님.
구름이 뒤덮은 하늘 아래서도 네게서는 언제나 햇살의 냄새가 난다. 계절을 불문하고 저 머리 위에 만연히 피어오른, 그렇기에 언제고 턱을 쳐들면 둥근 그리움이 쏟아질 햇살의 냄새. 데이, 네가 그리우면 난 어떡하지. 어느 날 사무치게 네 얼굴이 보고 싶다면 어떡하지. 누가 너만큼 날 좋아해줄 수 있을까.
……응, 데이.
달군 숨을 뭉텅이로 삼키고, 들끓는 가슴 한 켠에 너를 새긴다. 너 없는 생을 살아갈 내게 최후의 위안을 그려 넣고, 감정을 저미는 이별 안에서 흐트러지지 않도록 몇 번이고 덧대었다. 참으로 사랑하였고, 영영 사랑할 너의 모든 것.
……괜찮아.
괜찮아, 매니저님. 괜찮아. 정말, 괜찮아.
그래. 우리는 아프지 않을 거야.
‘첫눈이야, 매니저님.’
왜 그 말만이 이리도 시려올까.
있잖아, 데이.
너를,
더 일찍 사랑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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