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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너를 위해서 너만을 위해서
난 세상 모든 걸 다 안겨 주지는 못하지만
난 너에게만 이제 약속할게
오직 너를 위한 내가 될게
-All For You, 정은지&서인국
너만을 위해서 / 필연
오늘로 며칠째인지도 모르겠다. 매니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집 방향도 같고 거리도 멀지 않아, 강의가 끝나는 시간이 비슷하다면 늘 같이 집에 가거나 밥을 먹던 이가 시간이 없다며 자신을 피하더니 이젠 전화도 잘 받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물론 피하는 게 아닐 수 있었지만, 제 친구 노아인 이상 이건 분명 피하는 게 맞았다. 그는 바쁜 것이 확실하다면 늘 그렇듯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혹은 미소가 아니더라도 우선 매니저에게 양해를 구했을 테니까. 게다가 곧 생일인데… 적어도 늘 생일날 약속이 있냐며 묻기라도 하던 그 다정한 미소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듯 눈만 감으면 절로 그려졌다. 아차. 이러면 뭔가 이상한 것처럼 느껴진 매니저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무튼, 그녀가 평소에 아는 노아라면 그렇게 굴지 않을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함께 했다. 물론 모든 걸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그의 성향 정도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예 노아가 올 시간에 맞춰 그의 집 앞에서 죽치고 서 있기로 했다. 노아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직전에 있는 가로등 아래에서 말이다. 노아는 시험이 끝나지 않았으니 도서관에 갔다가 아마 11시가 넘어서 들어올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 전에 나와서 기다리면 충분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매니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저가 사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의 집 근처에 유일하게 서 있는 가로등 아래에 매니저는 쪼그리고 앉았다. 그가 자신이 한눈파는 사이에 올까 싶어 부러 휴대폰도 보지 않았다. 안 그래도 휴대폰으로 편하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 편한 시대에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누군가는 미련하다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가까이 지내는 친구…인데도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그 연락을 받지 않는 상대가 평소에 잘 연락하던 사람이라는 것은 그녀의 오기 아닌 오기를 불러왔다. 그리하여 좋게 말하자면 아닐로그적인 방식을, 좀 안 좋은 방향의 단어를 택하자면 구식인 길을 택해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그녀도 약간의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어쩌면 안 들어오거나 더 늦게 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당연히 그가 올 거라 믿었다. 그냥… 왠지 모를 확신이었다.
어두운 골목엔 환한 가로등이 주된 빛이 되었고, 근처 주택들에서 새어 나오는 빛들이 남은 빛의 전부였다. 매니저는 손목을 들어 올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괜한 오기를 부렸나 싶은 후회도 잠깐 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아 꾹 참고 버티기로 했다. 어차피 자취하는 중이니 늦게 들어가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마다 힐긋 쳐다보고 가기 마련이었다. 그중 노아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올려다보아도 그녀가 원하는 사람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째깍, 째깍. 손목시계의 초침이 바쁘게 굴러가는 소리만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아무 말 없이 멍을 때리고 있으면 사람의 생각은 산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그녀는 노아가 왜 자신을 피할까, 라는 기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게 아닐까, 내가 싫어졌나, 그리고 애인이 생겨서 거리를 두고 있는 건가, 라는 생각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거기까지 가자 매니저는 헉,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설마 그래서 그런 건가?”
“응? 뭐가?”
“허, 헉.”
너무 놀라면 소리를 삼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매니저는 자신이 그걸 경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생각보다 가까이 보이는 얼굴에 매니저는 정면으로 마주친 녹색의 눈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1시간 넘게 기다리던 얼굴이 나타나자, 반가움이고 뭐고 순간 감정이 터져 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평소에 하던 것처럼 그 감정을 꾹 눌러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아 또한 그녀와 눈을 맞추기 위해 굽혔던 허리를 폈다.
“매니저, 이 시간에 여기서 뭐해? 종강한 거 아니었어?”
그 말을 듣자 매니저는 팔짱을 딱 끼며 입을 열었다.
“아주… 잘 아시네요?”
“그럼요, 내가 매니저 시간표도 모를 줄 알고?”
“그러면 연락은 왜 안 받았는데?”
“아, 그게…”
“변명이라도 일단 들어는 줄게.”
노아가 뺨을 긁적였다. 아마 말을 고르는 것이겠지. 노아가 변명을 사서 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매니저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는 생각을 굳히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연녹빛의 눈동자는 여전히 부드러웠고, 와인색의 머리카락은 세팅한 게 다 흐드러져 자연스러움만 남아있었다. 그것마저 잘 어울리게 소화하는 얼굴이었다. 사실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며 굳게 다짐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매니저는 노아에게 스스럼없이 잘생겼다고 말하며, 잘생긴 걸 잘생겼다고 하지 뭐라 말하겠냐고 하던 편이었다. 그래서 노아도 듣는 데 익숙해졌고-물론 겸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매니저 또한 평소에 대화하는 데엔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순간이 고비였다.
어느새 굳어버린 얼굴은 제겐 잘 보여주지 않아 익숙하질 않았다. 그런 모습이 그녀에게 그의 외모를 눈에 들어오게 했다. 갑자기 눈치 없는 그녀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대체 왜. 친한 친구 사이에 빠르게 심장이 뛸 일이 뭐가 있지? 같이 놓칠 뻔한 버스를 뛰어서 탄 것도 아니었고, 강의에 지각해 뛴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잘생긴 건 잘생긴 거고 친구는 친구인데. 그리고 우린 친구여야만 하는데. 매니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감정을 다시 한번 꾹 눌러냈다. 이 감정의 이름을 매듭지으며 이름 붙이는 순간, 관계의 다리는 내려 앉아버릴 것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다짐은 노아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뱉어내는 말에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아주 쉽게, 폭삭 주저앉았다. 그의 손엔 어느새 작은 케이스가 들려있었다.
“며칠 후엔 매니저 생일이잖아. 생일 선물이랑… 같이 전해줄 말을 고르느라 연락을 못 했어. 연락을 하면 이 결심이 괜히 어그러질까, 무서웠거든. 있잖아. 음… 하하. 역시 말을 꺼내려니까 너무 어렵네.”
“그게 무슨 말이야. 돌리지 말고 말해봐.”
매니저의 단호한 어투에 노아의 미소는 조금 더 진하게 덧그려졌다.
“매니저가 지금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아. 얼굴에 다 쓰여있거든.”
“…”
“물론 나도 같은 고민을 하는 게 크지만?”
굳어있던 얼굴은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다시 환해져 있었다.
“고민, 정말 오래 했어. 이 말을 해도 될까,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런데 이제 말, 해보려고.”
“무슨, 말…을 하려고?”
“있잖아, 매니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 세상의 모든 걸 가져다줄 순 없고, 저 하늘의 별도 따다 줄 순 없어.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약속할 수 있어. 너만을 위한 내가 되어주는 것.”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너를 영원토록 …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주는 것.”
노아가 조금씩 간격을 두며 뱉어내는 말 하나하나에 매니저의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제대로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말을 듣고 그저 어어, 어버버 거리는 사이 그들의 머리 위로 차가운 것이 떨어졌다. 매니저는 노아의 시선을 피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인 줄 알았더니 눈이었다. 그것도 함박눈. 첫눈치고 새하얗고 부드러운 눈이었다. 노아의 손은 자연스레 매니저의 머리 위로 향했다. 눈이 들어가지 말라고 막아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노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거절의 답이어도 괜찮아. 나는 이대로만 지내도… 좋아, 하하. 어떤 관계가 되던 매니저는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말이야?”
“얘는 정말…!”
최근 들어 잘 하지 않아 잊고 있었다. 사람 부끄럽게 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노아의 말버릇 말이다. 그걸 직격으로 맞은 매니저의 뺨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러면서 타인에게 듣는 건 부끄러워하는지 매니저가 복수 삼아 비슷한 말을 돌려주면 귀가 붉어지던 모습까지 떠올랐다. 타인이라고 하기엔 다른 친구들이 그런 말을 해도 웃으며 넘어갔던 거 같은… 데… 생각해보면… 매니저의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가다가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도달하기 싫었던, 그렇게 피하던 감정의 이름이었다.
“진짜 괜찮으니까, 이 모든 건 내 감정인 거고 네 감정은 따로 있잖아.”
노아는 그렇게 말하며 케이스 안에 들어있던 목걸이를 꺼내 그녀의 목에 손수 걸어주었다. 헉 소리 나게 비싼 건 아니었지만, 몇 달 전 같이 시내에 나갔다가 지나가듯 맘에 든다고 말했던 목걸이가 분명했다. 연녹빛으로 물든 에메랄드가 작지만 예쁘게 세공되어있는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을까. 매니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선물과 모든 것을 별개로 자신이 노아와 어울리는 사람인지가 걱정스러워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노아는 그것마저 알아차린 듯 선선히 웃어 보였다.
“매니저는 지금 모습으로도 충분해. 어떤 모습이어도 매니저는 매니저니까.”
“…”
진짜… 말을 절로 잃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매니저는 잠시 시선을 피한 다음 심호흡을 했다. 후. 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싼 뒤 대답을 웅얼거렸다. 노아는 그 말을 들었지만, 못 들은 척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뭐라고?”
“…나도…좋…해…”
“잘 안 들려, 매니저.”
“나도 좋아한다고!”
에휴우… 매니저는 다시 쪼그려 앉아버렸다. 도저히 얼굴을 못 마주치겠다. 그러자 노아는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같이 쪼그렸다. 그러면서 매니저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제 품 안에 넣었다. 매니저는 잠시 움찔거렸지만, 굳이 벗어나지 않은 채 노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차피 제 얼굴은 붉게 달아 올라있을 것이 분명했다. 다시 한번 그녀의 입에서 깊은숨이 흘러나왔다.
“고마워. 대답해줘서.”
그와 동시에 노아는 매니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고, 다시 그녀를 감싸 안았다. 따스한 감촉이 이마에 닿자 매니저는 그들 위로 떨어지는 눈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이후 노아의 입에선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고, 매니저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새로운 관계에 적응하려 할 뿐이었다. 온기가 가득한 겨울밤이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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