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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 그리고 진심 / 예솜al
정오의 지부 복도, 또각또각하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품을 살짝 내뱉으며 손에 쥐인 종이뭉텅이들을 훑었다. 아침조부터 밤조까지는 다 걷었으니 남은 건 새벽조뿐이네. 내가 낸 아이디어긴 하지만 일지를 일일이 걷는 건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다. 아, 여기서 일지라 하면, 흔히 지부에서 사용하는 당번 일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일지는..
"매니저, 뭐해?"
"으악!"
웃기게도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고, 몸뚱이가 뒤로 빠르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고 말았다. 그때 이런, 하는 소리가 들리며 단단한 무언가가 허리를 받히는 게 느껴진다. 살며시 뜬 눈에 보이는 건..
"유, 유세프씨?"
"이런, 많이 놀랐나 보네. 매니저."
아, 죄송해요.-라고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나도 참, 별것도 아닌 일에 놀라고 말았다. 유세프씨는 그냥 날 부른 것 뿐인데. 멋쩍은 얼굴로 사과를 하던 중, 그의 손에 들린 것이 눈에 띄었다.
"아, 저거 혹시.."
"그래, 산책도 할 겸 직접 전달해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가 은은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것을 쥔 손을 내밀었다. 팔을 뻗어 잡은 그것을 아까 쥐고 있던 뭉텅이에 겹쳐 올려놓았다. 모두 앞면에 '독서일지'라는 글자가 박혀있었다.
이 독서일지라는 게 무엇인지 잠깐 설명하자면... 아까 말했듯이 내가 지부장님께 건의한 일이다. 이유를 묻는다면, 벌써 가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생각했던 것이지만 지부의 도서관은 그 넓이에 비해 가끔 사신들이 정보를 찾는 것 외의 용도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게 조금 아쉬웠던 참에, 학창 시절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각자 골라 읽던 경험이 떠올랐고, 그걸 실행에 옮긴 결과물이 이것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니까! 처음엔 잘 따라줄지 걱정하기도 했지만, 모두 불평없이 받아들였다. 한 사람만 빼고.
"아, 퀸시는..."
"으응, 이번에도 실패. 미안해 매니저."
"아니에요. 유세프 씨 탓이 아닌걸요."
-라고 말하긴 했지만 여전히 비어있는 퀸시의 일지를 보니 한숨만 나왔다. 여전히 미안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기니, 등 뒤에서 잘 가 라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이상하게도 퀸시만 책 읽기를 거부했다. '흥! 마계의 왕이 될 몸이 왜 그런 걸 읽어야 하는데! 싫어!!'라고 말이다. 순순히 동참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계속 잔소리를 해봐도 책의 ㅊ자도 입 밖으로 꺼내질 않을 정도였다. 억지로라도 읽힐까 싶었지만 그러면 책을 더 싫어할지 모른다는 유세프씨의 조언에 따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계속 지켜본다고 읽을 애가 아니니 더 걱정이다. 지금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다간 겨울이 될 때까지 1권도 못 읽을 것 같다. 역시 이 방법밖엔 없으려나... 하고 생각하며 매니저룸의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래서, 퀸시는 오늘부터 나랑 1:1로 독서일지 쓸 거야. 알겠지?"
말을 마치며 어느새 멍해진 퀸시의 푸른 눈을 마주 보았다. 산책하던 중에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니 적잖이 당황스러운 모양인지, 입을 꾹 다문 채로 아무 말도 안다가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이런 말 하려고 부른 거야?! 아침부터 졸려 죽겠는데 기껏 나와줬더니!"
됐어 나 갈거야-라고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니, 테이블이 퀸시의 두 손과 부딪히며 쾅 소리를 냈다. 큰 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을 꼭 감고 말았다. 다시 눈을 뜨니 뒤를 도는 모양새가 뛰어가려는 것인 듯했다. 나도 벌떡 일어나 퀸시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러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분홍빛 정수리에 주먹을 박았다.
"어허! 어른한테 야라고 하면 어떡해!"
"악, 아프잖아! 씨이... 몰라! 어쨌든 책은 안 읽을 거니까 알아서 해!"
하아, 어쩔 수 없다. 이 방법까진 안 쓰려고 했는데. 그래, 이건 퀸시를 위해서다! 쪽팔리지만 어쩔 수 없어! 숨을 들이키며 퀸시를 더 끌어당겼다. 5cm도 안 될 것 같은 거리로. 갑자기 좁혀진 거리의 조잘대던 퀸시의 입도 꾹 다물어졌다. 눈도 마찬가지인지 느린 간격으로 깜박거렸다. 그런 눈을 조용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퀸시. 잘 들어. 나는 매니저로서 사신들을 돌봐야 할 이유가 있어. 이건 다 우리 14지부, 그리고 너를 위해서야."
말을 계속 이어가며 아주 조금씩 거리를 좁혀갔다. 미성년자에게 이런 짓을 해도 되나 싶지만...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피하는 것을 보니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새 이마가 작게 톡, 소리를 내며 맞닿았다.
"-책 읽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좀 전에 말해줬잖아. 그러니까... 나는 퀸시가 잘 따라줬으면 좋겠어. 너를 위해서라도. 알겠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떼었다. 동그란 얼굴에서 멀어지니, 아까 잡힌 모양새 그대로인 몸뚱이가 보였다. 퀸시는 아까처럼 멍하게 날 응시하더니,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푸-소리를 냈다.
"매니저, 푸흡, 얼굴 완전 왕재수 머리색이, 큭.."
결국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배꼽을 잡으며 웃기 시작했다. 당황해 두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니, 그제야 내 얼굴에서 홧홧하게 열이 오른 걸 알았다. 이런 스킨십 아닌 스킨십은 처음이라 적응을 못하겠나보다. 괜히 부끄러워져 그, 그만 웃어!-라고 빽 소리쳤다. 퀸시는 다시 고개를 들고는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큭, 웃긴 걸 어떡해. 뭐 어쨌든... 아까 말한 건 성의를 봐서, 친히 받아줄게."
-라고는, 바로 몸을 돌리며 그럼 난 이만 간다~-라며 지부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에 바로 정신이 들어 오늘 저녁 6시까지 도서관으로 와야 해!-라고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어렴풋이 알았다 알았어!-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 긍정적으로 끝났으니 다행이려나. 입꼬리를 올리며 테이블에 털썩 앉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 묻는다면, 아까 말한 그대로다. 퀸시를 위해서. 퀸시의 과거를 들은 후부터 더 이상 표면의 그를 진짜라 생각할 수 없었다. 항상 보이지 않는 가면으로 모든 걸 가린 그에게 이 일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랬다... 정말 그것 뿐이다. 정말로. 괜히 머리가 복잡해져 테이블에 엎드리니, 단풍나무 향기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워!"
"으악! 퀴, 퀸시? 언제 왔어?"
별 생각 없이 연 문이지만 나보다 빨리 와있을 줄은 몰랐다... 막상 하려니까 의욕이 생기려는 걸까? 생각을 끝낼 틈도 없이 야, 계속 넋 놓을 거면 나 그냥 간다? 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고개를 들고 도서관 안으로 발을 디뎠다. 가자, 가!-라고 외치는 것도 빼먹지 않고.
지부의 도서관은 일반 도서관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거대한 크기 정도려나. 이동식 책장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양쪽 벽면, 그리고 그 사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우뚝 서 있는 책장들은 모두 책으로 빈틈없이 쌓여 있었다. 곧 그 사이로 들어가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새하얀 표지 위에 검은빛 세 글자가 프린트되어있는 약간 두께 있는 책. 그때 분홍빛 머리칼이 불쑥 시야에 들어오더니 책을 순식간에 가져갔다. 미간을 찌푸리며 표지를 살펴보던 퀸시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 책을 나더러 읽으라고? 이 두꺼운 걸?"
"음... 다른 책들에 비하면 두꺼운 건 아닌데... 혹시 못 읽겠어? 대신 이 책 1권만 읽으면 되는데.."
역시 이런 책은 무리려나 생각하던 참에, 좋아! 한 번 해보지 뭐!-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나도 모르게 크게 뭐!? 라고 소리치고 말았다.
"깜짝이야! 뭘 그렇게 놀라?"
"아니, 네가 그렇게 순순히 읽는다고 할 줄은 몰라서.."
"허 참,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당연히 퀸시로 보지-라고 말하긴 좀 그래서 입을 꾹 다물었다. 푸른빛 눈동자가 그 모습을 흘깃 쳐다보더니 책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기익-하고 의자가 마찰하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의자에 고쳐앉은 그는 바로 앞표지를 집고 옆으로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세상에, 살다살다 퀸시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보다니. 그리 생각하던 와중에 톡톡, 하고 뭔가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옆에 좀 앉아있어 줘."
"ㅇ, 어?"
"혼자 읽으려니까 집중이 안 돼. 이리 와서 좀 앉아있어 봐."
괜히 집요한 시선을 외면할 수 없어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앉은 걸 확인하더니 다시 글에 집중하는 그였다. 멍하니 얼굴의 이곳저곳을 응시하다, 혹시라도 민망해할까 봐 챙겨왔던 커피를 홀짝거렸다. 하지만 이렇게 조용한 퀸시는 처음이었기에 마시면서도 눈이 그를 쫓았다.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커피가 찰랑거리는 소리와 종이가 마찰하는 소리, 그리고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저기.."
"왜?"
"그냥... 왜 그렇게 열심히 읽나 해서."
"....아까 유세프한테 한 소리 들었어."
"유세프씨한테? 왜?"
"흥, 왜겠어? 매니저 일이면 서슴없이 나서는 사신인데."
"그렇구나.."
저절로 떠오른 다정한 얼굴에 금세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중에 고맙다고 해야겠네-라고 생각하던 와중에, 갑자기 느껴지는 위화감에 고개를 돌렸다. 퀸시의 표정은 불퉁해 보였다. 원래 그랬지만 평소보다 더. 그런 표정으로 묵묵히 책만 읽으니 그걸 멀뚱히 쳐다보다, 혹시 유세프 얘기에 관심을 보여 기분이 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평소에도 다른 사신들 얘기는 자주 했는데. 여러 의문이 들었지만 드물게 보는 진지한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닫았다. 왜인지 점점 눈꺼풀이 내려오는 느낌이다.
"다 읽었다!"
책을 탁-덮고 소리치자 책상에 꼭 붙어있던 갈색 머리칼이 흩날렸다. 벌떡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눈동자는 잠에서 깬 듯 몽롱해 보였다. 책에 집중하느라 잠에 든 것도 눈치채지 못했나보다. 뭐야..다 읽었어?-라며 입을 열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리칼을 닮은 갈빛 눈동자는 곧 시계로 시선을 옮겼고 곧 동그랗게 커졌다. 이유는 뻔하다. 2시간 만에 다 읽었으니까, 누구도 아닌 내가.
"와... 2시간만에 다 읽다니... 대단하네."
순간 부드러운 손이 머리에 옮겨지더니, 이내 좌우로 움직이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했어-라는 목소리와 함께. 괜히 머쓱해져 입을 열었다. 좀 놀려줘 볼까.
"근데 매니저, 이런 소설이 취향이었어?"
"...뭐?"
"여기, 이 부분 말이야."
씨익 웃으며 책의 후반부를 펼쳐 보였다. 전쟁터에서 상처를 입은 주인공에게 자신의 어머니의 말을 전해주는 주인공의 친구에 대한 부분.
"봐봐, 입술이 닿았다고 나와 있잖아. 근데 두 사람 다 남자고. 안그래?"
매니저, BL이 취향이었어? 라고 씨익 웃으며 말하니,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가 내 팔뚝을 내려쳤다.
"뭐, 뭔 헛소리야! 너 자꾸 그럴래?!"
"푸흡, 알,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맞은 팔은 계속 쓰라려왔지만 토마토와 흡사해진 그 얼굴을 보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만하겠단 말에도 계속 씩씩대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 느낌이다.
"음... 그럼 이제 그 독후감인가 뭔가 써야 되는 거야? 약골이 그러던데. 책 읽고 써야 한다고. "
"응? 아, 아니야. 퀸시는 제외. 이제 가도 돼."
말을 마치더니 다시 손을 올려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열심히 읽어줬으니까 난 이걸로 충분해. 수고했어."
그러고는 씨익 웃어 보이는 그녀였다. 그 웃음에 왠지 모르게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느낌이다. 아까 매니저의 얼굴과 흡사하지 않을까. 괜히 부끄러워져 몰라 나 갈거야-라고 말하며 벌떡 일어났다. 뒤통수에서 들리는 그래 얼른 들어가-라는 목소리는 아까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눈을 꼭 감고 코앞으로 다가온 도서관 문고리를 꽉 쥐었을 때
"아, 자, 잠깐만! 이거 깜박했다!"
-하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벌떡 일어나 주머니를 뒤지는 그녀가 보였다. 몇 초 후 마침내 찾은 듯 뭔가를 꼭 쥐고 내 쪽으로 달려오더니 손에 그것을 올렸다.
"..단풍잎?"
"응, 아까 주웠는데 예뻐서 코팅해봤어. 책갈피로 써."
싫다고 했다간 금방 얼굴에 실망이 비칠 것 같아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에 싱긋 웃어 보이곤 갑자기 나를 꼭 껴안았다.
"퀸시,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을 지 난 헤아릴 수 없겠지만... 이젠 우리랑 나눠줬으면 좋겠어. 기쁨이든, 아픔이든, 어떤 감정이든 네가 가능한 선에서. 분명 어색해하겠지만...이젠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니까.
등을 두어 번 쳐주곤 몸을 떼고 내 손을 쥐여주는 온기에 눈을 계속 깜박거렸다. 방심했다간 눈물이라도 몇 방울 쏟아낼 것 같아서.
코앞으로 다가온 갈색 눈동자를 보니 입이 저절로 열렸지만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웃어 보였다. 활짝,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단풍나무의 꽃말: 사양, 은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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