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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지부 유령 사건 / 악개
책이라곤 관심도 없던 퀸시가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책의 삽화만 읽어보는 것 같았지만, 새로운 관심사를 찾은 것 같아 내심 기뻤다. 반납된 도서를 보면 책 커버가 조금씩 망가진 책이 있었다. 삽화가 있는 부분만 골라 읽어, 면지의 상태만 보아도 누가 읽은 책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퀸시는 자유 시간마다 뒷산 나무에 올라 잠을 자곤 하는 것 같았는데, 냥선배는 그를 위해 오두막을 지어주었다고 했다. 가만 보면 퀸시를 참 아끼는 것 같이 보였다. 퀸시는 자주 그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책을 들고 가거나 빈손으로 가거나, 종종 자신의 창을 헝겊으로 닦을 때도 있는 것 같았다. 단서만 있을 뿐 그 장소가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다. 때로는 그곳이 말로만 전해지고, 실체가 없는 곳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 장소가 퀸시에게는 소중하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는 듯 했다. 진실을 알기도 전에 가을이 성큼 다가왔고 제법 쌀쌀해졌다.
최근 내가 퀸시에게 관심이 생긴 이유는 몇 주 째 반납하고 있지 않은 동화책 한 권 때문이었다. 『유령』. 명계 언어로 된 책이었다. 지부 도서관을 둘러보다가 읽어본 기억이 있다. 무시무시한 유령이 남모르게 선의를 베푸는 내용이 담긴 책이었는데, 냥선배의 말로는 그 책에 비밀이 숨겨져 있으니 얼른 가져오라는(아무래도 장기 연체로 인한 분실 여부가 걱정됐던 것 같기도 하지만) 지령을 내렸다. 그런데 좀처럼, 퀸시와 말을 할 짬이 없었다. 그는 당번일지를 채울 시간에도 그 장소에 남아있질 않았고 얼굴 보기가 힘 들었다. 방금전까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신들의 증언을 쫓고 쫓아보아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 번은 잠든 시간 때에 기숙사에 몰래 찾아가 보려고 했더니 그곳에서도 없었다. 베린에게 물어봤지만 모르겠다는 말만 남겼다. 이쯤 되니 다들 나를 속이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해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괜히 짜증을 부렸다. 사신들 모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유세프에게는 밤에는 출입을 자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듣고 아차 싶었다. 매니저로서 의무를 다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고 있던 옷을 여몄다. 찬 바람이 나무를 흔들었고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나는 냥선배에게 보고해야 하는 자료를 잠시 내려놓고 바닥에 떨어진 낙엽 하나를 주워 앞뒤로 돌려봤다. 나뭇잎에는 알파벳이 새겨져 있었다.
[Q]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낙엽이 떨어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토록 찾던 『유령』 동화책이 나뭇가지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끼어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 동화책의 모서리를 만졌다.
‘조금만 더….’
책의 끄트머리를 만지고 조금씩 앞당기는 동안에 희고 작은 손가락이 내려와 그 책의 반대 면을 잡았다. 재빠르게 책을 가져간 장본인과 눈이 마주쳤다. 하늘색 눈동자. 멋대로 뻗친 분홍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자분자분 흔들렸다. 악마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은 반납 못 해”
그 말을 남긴 채 퀸시는 씨익 웃었다. 재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뒷모습을 당황스럽게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악마가 발걸음을 멈췄다.
“아 맞다”
퀸시가 빙글, 뒤돌아서 말했다.
“그 나뭇잎, ‘Q ’가 적혀 있으면 벌레가 많은 거니까 조심하고.”
나는 나무에서 멀어졌다. 몸을 뒤로 내빼는 동안 퀸시가 잽싸게 도망가고 있었다.
“자, 잠깐만 퀸시!”
“그럼! 벌레 조심해!”
퀸시의 목소리만 울릴 뿐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어떤 장난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만 있다보니 조금 괘씸하게 느껴지다가도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의아했다. 나는 매니저 방까지 터덜터덜 걸었다. 연락처를 메모하는 노트의 다음 장을 펼쳐 이렇게 썼다.
‘동화책’, ‘냥선배?’, ‘Q’, ‘퀸시의 도망?’
이해관계가 그다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추리를 할 만큼 단서가 모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노트를 덮었다. 볼펜을 책상에 딱딱 두드리다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의 일을 끝마치지 못했다. 다시 업무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어둑해진 지부는 외부와 동떨어져 있는 느낌을 자아냈다. 나는 마력이 담긴 차를 끓여 컵에 담았다. 따뜻한 차의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한 모금 마셔보았다. 영의 피로를 풀어주는 향이 부드럽게 입에 감겼다. 그때 저 멀리 으슥한 나무 그늘 밑에서 준이 나오는 것을 보였다. 일상복을 입고 있던 그는 무언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좌우를 둘러봤다. 나는 취침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준!”
준은 화들짝 놀란 듯이 어깨를 떨었다. 무언가를 들킨 것처럼 매니저 룸을 올려다본 준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반대 손은 등 뒤로 숨긴 채 ‘아하하’, 웃는 소리가 멀리서도 들렸다. 준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윤기를 내는 게 보였다. 얼굴에 진 그림자가 조금 섬찟하게 느껴졌다. 준은 눈동자가 예리하게 움직였다. 내가 있는 층수를 세는 것 같았다. 준은 내가 쫓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조금 안심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뭐라도 말해 준을 붙잡고 싶었다.
“등 뒤에 뭘 숨긴 거야?”
나는 최대한 창문 뒤로 몸을 빼네 무엇을 들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그러나 준은 건물 기둥 틈 사이에 겨우 보이는 것이어서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손등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오려는 징조가 없었는데, 갑자기 억수처럼 쏟아졌다. 준도 당황했는지 배시시 웃으며 자리를 떴다. 저 멀리서 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척 해 주십시오! 곧 좋은 소식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대로 사라지는 준을 보내고 나는 그 장소로 내려가기 위해 가디건을 걸쳤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주위는 점점 어두워졌고 나의 낯빛도 점점 구겨지는 것 같았다. 나는 계단에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추합했다. 어떤 음모가 하나씩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다녔다. 이 기시감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우산을 펼쳐 들고 준이 있던 위치를 찾아갔다. 나뭇잎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일말의 증거가 모두 빗물에 쓸려 사라졌을 것 같았다. 나는 냄새에 집중했다. 톡 쏘는 듯한, 약물의 냄새가 퍼져 나왔다. 나는 약초를 잘 아는 사신들에 대해 의심되기 시작했다.
퀸시는 찾을 수 없을 게 당연했고 나는 당번일지를 확인해서 베린이 있을 만한 위치를 추려냈다. 오전에 본 냥선배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그대로 가던 길을 갔다. 연체된 도서에 관한 압박이 느껴졌다. 냥선배도 의심스러웠지만, 뭐라 따질 만한 게 없어 그대로 두었다. 나름의 각오를 하고 사신지부 순찰을 맡은 베린을 찾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다행히,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 지부의 복도에서 랜턴을 들고 서쪽 방향으로 순찰을 하는 베린을 찾았다. 나는 그에게 어젯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젯밤에 별 일 없었지? 준이 왔다거나, 퀸시가 또 무슨 장난을 쳤다던가….”
베린은 피곤한 표정으로 나를 힐끗 쳐다봤다. 부쩍 수척해진 얼굴을 보니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희미한 웃음을 짓곤 고민하듯이 입을 다물었다가 맥없는 소리를 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매니저님”
나는 갑자기 답답해졌다. 드디어 무언가 하나 풀리려고 했는데, 좌절된 기분이었다.
“그러지 말고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 조금의 귀띔이라도 해주면 안 될까? 톡쏘는 듯한 냄새가 나는 약초에 대해 혹시 알고 있는 거 없어?”
베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턱을 쥔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눈부시게 흰 피부가 빛을 받아 더욱 창백하게 느껴졌다. 창문 틈새로 조금씩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팔뚝에 조금씩 소름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베린은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나에게 물었다.
“아, 혹시 매니저님은 유령을 믿으시나요?”
나는 ‘유령’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요 몇 주간 자신을 괴롭힌 타이틀이자, 이 사건의 핵심처럼 느껴졌다.
“원혼도 보는데, 당연히 유령도 포함돼있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뒤돌았다. 지부 복도로부터 매니저룸까지 가는 길이 지나치게 멀게 느껴졌다. 발을 딛고 있는 흰색 타일 바닥은 어지럽게 굴곡을 드러내는 것 같았고 나의 다리도 가늘게 떨려왔다. 베린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매니저님, 악마의 술수에 넘어가지 마세요.”
이놈이고 저놈이고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호흡이 안정되고 울렁거리던 시야도 점점 고정되는 것 같았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나의 혼란을 계획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이 퀸시임은 명백한 사실일지도 몰랐다.
그날 저녁은 입맛이 없어 굶었다. 매니저룸에서 조금 누워있기로 했다. 십 분, 정도 눈을 붙였을 뿐이었는데, 긴 악몽을 꿨다. 악몽의 서막은 그림자극장에서 시작됐다. 무대 옆으로 잭오랜턴과 무덤, 뱀파이어의 관이 장식되어 있었다. 내부는 좁았다. 관객은 나 하나뿐이었고 내 의자에는 세 페이지 분량의 팜플렛이 놓여 있었다. 그 팜플렛에는 각각의 페이지당 스탬프를 찍는 항목이 놓여 있었다. 종이에서는 달콤한 사탕의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았고 나는 그 면지를 손으로 쓸어 코에 가져다 보았다. 향이 호흡기를 넘어가면서 독한 냄새가 냈다. 나는 재빨리 팜플렛에서 손을 뗐다. 면지에는 도장이 하나 찍혀있었다. 그 도장의 모양은 ‘[Q]’였다.
“참나”
나도 모르게 웃었다. 입이 벌어지고 웃음이 튀어나오련 찰나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스피커로부터 우스꽝스러운 음악이 재생됐다. 음악에 묻혀 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대의 커튼이 벗겨지고 뱅글뱅글 돌아가는 룰렛이 보였다. 등 뒤로 빔프로젝터가 작동했다. 무대를 향한 빛은 나를 경유하고 있었다. 빛이 피부에 닿은 부분이 조금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빛의 세기가 강렬해 공기 중에 부유하던 먼지들이 선명하게 빛났다. 나의 그림자가 무대에 드리워져 있었고, 그 그림자를 피해 박쥐 그림자가 움직였다. 나는 뒤돌아서 빔프로젝터를 작동시킨 장본인을 보고 싶었지만, 공연 중 안내사항이 무대 위쪽에서 내려왔다. 이 또한 마찬가지로 빔프로젝트로 인해 생긴 내 그림자를 계산하여 만들었는지, 외형이 아치형으로 굽어져 있었다. 내레이션의 목소리는 준과 베린의 목소리가 겹쳐 있었다. 베린의 목소리는 준의 목소리보다 느렸고 2번쯤 넘어가서야 두 사람의 목소리는 완전히 겹쳐졌다.
1. 극장 내에는 정숙
2. 그림자들의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3. 뒤돌아보지 마세요. 실명의 위험이 있습니다
“공연은 오 분이면 끝나”
누군가 귓속말로 내게 속삭였다. 나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꿈이 끝난 다음에야 그것이 누구인지 확신했다. 악마였다.
공연의 내용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나는 일렁이는 그림자들을 보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유추해내기 위해 애썼다. 처음에는 손바닥만 한 그림자 유령이 스파클과 함께 반짝거리면서 춤을 추며 마을에 도착했다. 낫, 또는 곡괭이 같은 것을 쥔 유령이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내쫓고 왕이 되고 그 마을을 떠다니던 도중에, 커다란 괴물로부터 잡아먹혔다. 막강한 힘을 가졌을 것만 같던 유령이 먹히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펑, 폭죽 소리가 들렸다. 무대에는 다음과 같은 모양의 글자가 나타났다.
[♡]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 글자는 지나치게 화려했다. 자글자글하게 모양을 감싼 금색 자수의 프릴은 기괴함을 더했다. 그것을 보고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어라”
“일어났어? 매니저?”
유세프였다. 유세프는 창가 앞 간의 책상에 앉아 시집을 읽고 있었다. 나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 한 잔을 들이켰다.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저녁 안 먹는다길래, 걱정돼서 올라왔어.”
“유….”
나는 유세프를 부르려 했다. 그런데 극장에서 보았던 주의사항을 기억하게 됐다.
‘2. 그림자들의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그 유의사항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아직 그림자와 사신들의 연결 관계가 불확실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게 내게 좌절감을 더했다. 그런 와중에 유세프가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요새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저번에도 퀸시를 애타게 찾던데, 얼굴은 좀 봤어?”
“네. 잠깐 봤어요. 그리고 다시 사라졌어요.”
유세프는 온화한 미소를 띈 채 찾잔을 손끝으로 만졌다. 포트에는 물이 끓고 있었고 나는 그 수증기를 넋 놓고 바라봤다. 얼마나 뜨거울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포트는 외부가 흰 제품이었다. 그래서 물이 어떻게 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위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에 의해서 물이 끓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유세프에게 물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욕구도 일었다. 그러나, 기숙사에서 나를 제재하던 유세프를 생각하면 나의 말을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있죠. 혹시 유령에 관해 아는 거 있어요?”
미간이 움찔, 하는 게 보였다.
“아하하, 갑자기 웬 유령? 원혼들을 상대하는데 유령이 무서워?”
나는 그 말에 맘이 팍 상했다. 유세프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기대했던 바가 깨지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뒤로 유세프와는 업무 효율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고 그는 돌아갔다. 나도 매니저 전용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가디건과 가방을 챙겼다. 가방 안에는 며칠 전에 적었던 노트도 들어 있었다.
‘동화책’, ‘냥선배?’, ‘Q’, ‘퀸시의 도망?’
나는 그 지면을 찢었다. 반으로 찢은 다음, 반을 겹쳐 반으로 찢었고, 반으로 겹친 종이를 다시 반으로 찢었다. 소각용 쓰레기통에 버릴까, 싶다가 불길한 그것을 불태우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냥선배의 지하실에 있는 마계의 불꽃은 인간계의 불과는 다르게 어떤 물건을 태우면 그 물건에 기억된 일들을 재생시켜준다. 나는 불꽃이 있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곳은 냥선배가 아끼는 물건을 수납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나에게는 그곳으로 갈 수 있는 열쇠가 있었다. 이런 사적인 일로 사용하기 위한 열쇠가 아니었지만 나는 이 종이가 명계에서 사라지길 원했다.
지하실까지 가면서 마주친 사신이 없었다. 문을 열고 창고로 들어갔다. 마계의 불꽃 속에 찢은 종이를 하나씩 집어넣었다. 내가 업무를 하며 만졌던 흔적이 재생됐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괜히 한숨이 나왔다.
불꽃 속에 다른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났다. 그때 동화책을 집었던 희고 작은 손가락이었다. 그는 페이지를 넘기다가 내가 메모한 페이지에 도착했다. 나는 푸른 빛으로 불타고 있는 물건의 기억을 보았다. 그 손가락은 각각의 글자에 이런 표식을 새겼다.
‘○’, ‘X’, ‘○’, ‘X’
종이에 적혀 있던 글자들과 겹쳐지면서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동화책과 Q는 맞고, 냥선배와 퀸시의 도망에는 옳지 않다. 나는 그의 치밀함에 놀라우면서도, 이제는 진절머리가 났다. 귓속에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날은 잠을 설쳤다. 퀸시가 반납하지 않은 책은 오랜 기간 연체됐고 나는 이 일에 관여할 자신을 잃었다. 저 멀리서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첩된 바람은 세기가 각각 달랐고 건물에 부딪히면서 웅장한 소리를 냈다. 나는 숨죽여 바람에 집중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살아있는 생물의 목소리를 닮은 소리였다. 해가 뜰 때쯤에 잠이 왔고 나는 간만에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부랴부랴 옷을 걸치고 기숙사를 나왔다. 우체통에 물건이 도착해 열어보았다. 현란한 형광 핑크로 포장된 무언가였는데, 급한대로 가방에 넣고 지부 사무실로 향했다. 물건을 확인하는 것보다 지각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었다. 빨리 움직여야 했다. 정신이 조금씩 흔들렸다. 다리의 속도에 의해 시야가 불확실하게 번져갔다.
“네? 퀸시가 자백했다고요?”
나는 놀라서 어깨에 걸치고 있던 가방을 떨어트릴 뻔했다.
“이놈을 좀 보라냥.”
“나비 씨, 잘 못 했다니까요.”
테이블 위에는 동화책 『유령』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냥선배가 아끼던 지팡이가 보였다. 그 물건은 지하실에 있는 물건 중 하나였다. 분명 문단속을 철저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토록 찾던 퀸시는 의자에 다리를 꼰 자세로 편안하게 앉아있었다. 냥선배의 털이 곤두서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그는 퀸시를 가리키며 화를 냈다.
“크아악! 어젯밤에 지하실에 들어온 범인이라냥!”
“네~ 네~ 죄송해요.”
지하실, 이란 글자에 나는 가방 속 열쇠를 뒤졌다.
“이거 찾아, 매니저?”
퀸시의 손가락에 걸린 열쇠가 빛났다. 나는 알 수 없는 패배감과 좌절, 섬뜩함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냥선배는 화가 난 것 같았고, 퀸시의 볼살을 잡고 좌우로 늘렸다. 퀸시는 내 쪽에서 보이도록 손을 들었다. 그 손가락은 나를 가리키고 있었고, 다음과 같은 글자를 남겼다.
[M]
나는 그 자리에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베린과 마주쳤던 복도는 예전에 비해 그 길이가 늘어간 것처럼 보였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복도를 꾸준히 달렸다. 복도는 풍선껌과도 같은 달콤한 냄새가 났다. 사방에서 분사하고 있는 것처럼 향의 농도가 선명했다. 그 끝에 있던 계단에 발이 닿았고 한참 동안 계단을 내려갔다. 바깥은 금방이라도 천둥이 칠 것처럼 하늘이 어두웠다. 그 방향으로 갈 생각이 아니었는데도 다리는 준이 무언가를 꾸미던 수풀로 향했다. 수풀에는 무언가를 인도하듯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풀에 붙어 있는, 야광 마법을 따라 숲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바지에 덤불이 붙어 따가웠고 우수수, 마른 잎과 낙엽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야광 마법이 끝나는 곳에는 흰색 오두막이 있었고 나는 그 오두막의 벽면을 타고 위쪽으로 올라갔다. 오두막 안에는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의자에 앉아 숨을 골랐다. 땀이 턱 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온몸에 힘이 풀렸다.
오두막 바닥에 널브러진 가방에서 상자가 떨어졌다. 네모난 형광 핑크 상자 안에는 유령이 자수 놓인 팔찌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 팔찌를 손가락으로 집어 불길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그 팔찌를 들고 있는 손이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을 다시 깜빡이자 손은 원래 모양으로 돌아왔다.
“이 공간은 명계에서 유일하게 그림자가 안 져. 아주 조용한 곳이야.”
오두막에 난 작은 창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검은색 신발에 흰 반 스타킹, 초콜릿 색 바지에 보라색 프릴이 달린 셔츠, 분홍 머리카락에.
“내가 만든 연극은 좀 재미있었나?”
퀸시의 표정이 천진했다.
“해피 핼러윈 매니저”
그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잔디 위에 서 있는 그는 그림자가 없다. 나는 오두막에서 숨을 죽이고 상황에 집중했다. 뭐라도 말을 해보고 싶었지만 침만 삼키게 될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저 멀리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랜 침묵 속에 그가 입을 열었다.
“나의 유령이 되어줘”
퀸시의 눈동자가 파랗게 빛났다. 나는 그것이 매혹술의 전조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악마의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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