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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권태 / 한
또 창밖을 바라본다. 밖에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 건지. 돌아간 고개는 좀처럼 그녀를 보질 않는다. 아니다. 재밌는 게 있었다면, 적어도 표정이 저리 지루해 보이진 않았을 거다. 손끝으로 딱. 딱.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일정하다. 저 무표정 속에 무슨 생각이 담겨있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다. 그녀는 가만히 있는 커피잔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리곤 그를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은행잎 하나가 바람에 날려 떨어진다. 샛노랗게 물든 걸 보니 어느새 가을이 왔나 싶다. 그를 처음 만난 날도 꼭 이 같은 날이었는데. 노랗고, 붉은빛으로 물든 가을날. 다정한 그가 좋아서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은 장난스러운 부분도. 그러나 언제부터인가는, 그녀가 그를 더 많이 사랑하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연인 사이에 그게 무슨 문제인가 싶지만. 오늘 같은 그의 표정을 볼 때면 늘 생각했다. 재미없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왜인지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에, 그녀가 그만 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잔 바닥과 테이블이 부딪쳐 나는 소리가 둘 사이의 정적을 가른다. 그리고 그제야,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는다. 늘 똑같이 다정한 표정. 그렇지만 어딘가가 변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다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유세프 씨는, 내가 헤어지자고 해도 별로 안 슬플 거 같아서요.’
언제였더라. 최근 작은 다툼이 일어난 날, 그녀가 홧김에 뱉은 말이었다. 이 말이 왜 지금 생각났는진 모를 일이었다.
“… 우리 헤어질래요?”
그리고 지금 왜 이별을 고하는지도, 그녀는 모를 일이었다. 그냥 힘들어서 다 끝내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조금은 체념한 듯이 뱉은 말이다. 어쩌면 그의 마음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오래전에 떠났을 수도 있었다. 꾹 꾹 참다 겨우 꺼낸 말. 그녀의 말에, 그의 다정했던 얼굴에 조금은 굳은 티가 났다. 슬픈 표정은 아니었다. 그에 그녀의 가슴이 또 한 번 씁쓸해진다. 그는 지쳐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늘 그랬듯이. 다시 원래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뻣뻣하게 다물린 입꼬리는 평소와 똑같았지만, 그녀는 덜컥 겁을 먹었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분명 그녀였는데. 그에게서 흘러나올 말이 예상이 돼서 겁이 났다. 그의 입이 열리려는 걸 눈치챈 그녀는, 그와 마주친 시선을 그만 서서히 떨궈버렸다. 그리고는 반 정도 비워진 카라멜 라떼만 뚫어지게 바라본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는 덤덤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좋지 않은 예상은 틀리는 법이 없는지. 헤어지자. 이어지는 그의 말에, 그녀는 그만 제 옷자락을 꽈악 쥐었다.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질질 끌어봤자 서로에게 상처만 될 연애. 이 정도면 괜찮게, 추하지 않게 잘 끝낸 거라고. 그녀는 애써 저에게 위로를 건네본다. 그럼에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떨리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잘 있어요. 그게 그녀가 그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인사였다.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담담한 이별. 그 둘은 그렇게 이별을 했다. 그는 그녀가 나가고 나서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러나 다 식은 커피는 맛이 없었다. 마치 둘의 사이처럼.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카페를 나서자마자, 거짓말처럼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리더라. 뚝 하고 떨어진 것이 그녀의 구두 코를 적셨다. 그게 시발점이 된 것인지, 이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다 끝났다는 생각을 하니 그만 울음이 터졌다.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냥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엉엉 울 뿐이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든 말든. 누군가가 괜찮냐고 묻는 것 같았지만, 답할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비틀비틀 일어나서 그대로 길을 걸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땅거미가 지고 난 깜깜한 시간. 그녀는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보니 울긋불긋해진 제 발이 눈에 들어온다. 아픈지도 몰랐는데. 눈으로 보고 나니 그제야 구두에 까진 발 뒤꿈치가 아프다. 너무 아파서 또 눈물이 나온다. 그녀는 또 한 번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3년.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길 그들의 연애가 끝이 났다.
유세프는 수건을 젖은 머리에 걸치며 휴대폰을 들었다. 빈 화면과 빈 알림창. 뭘 하려고 했더라, 생각하던 그는 무의미하게 시간만 확인하고 휴대폰을 도로 내려놓았다.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고, 책 한 권을 들어 침대에 털썩 앉았다. 평소와 똑같은 일상인데 무언가 다르다. 그는 또다시 휴대폰을 바라본다. 여전히 빈 화면. 그는 그만 헛웃음이 나왔다. 어디가 평소랑 같다는 건지. 저도 모르게 초조한 마음이 드는 이유를 모르겠다. 헤어졌다. 이 네 글자가 하루종일 머릿속에 맴돈다. 그러니까, 이제 그녀의 연락은 오지 않을 터인데. 조용한 휴대폰이 오늘따라 어색하기만 하다. 곧 액정이 반짝이며, 뭐해요? 아직 안 자죠? 사랑해. 따위의 문자가 울릴 것만 같았다. 그가 바란 일상의 변화가 정말 이런 것일까. 지나치게 공허하다. 이 공허함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늘 오던 문자의 부재? 아니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그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건지, 일부러 그런 건지. 그는 그만 그녀를 떠올리는 걸 멈추고 컵을 찾았다. 팔을 뻗으니 가장 먼저 새하얀 머그컵이 손에 잡힌다. 그리고 커피를 따르기 시작하는데, 그는 그 하얀 컵 안에 커피가 채워지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아끼는 컵이었다. 그녀가 선물해 준 건데…. 아. 또다시 떠오르는 그녀의 생각에 그가 멈칫한다. 그러다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컵을 들어 올렸다. 한 모금 마셔 보는 데 너무 쓰다. 그는 원래 쓴 것도 잘 마시는 사람인데. 유독 오늘 커피는 써서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그는 결국 애써 내린 커피를 싱크대로 부어버렸다. 그리곤 휴대폰의 진동모드를 해제했다.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 * *
하루, 이틀하고 어느새 일주일. 그녀는 일부러 바쁜 나날을 보냈다. 원래라면 하지 않았을 일거리들을 떠안으니, 그녀의 주변에선 하나같이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색할 수 없었다. 몸이라도 힘들지 않으면, 그 생각이 너무 많이 날 것 같아서였다. 그는 나쁜 사람이었다. 헤어질까 물으니 그렇게 냉큼 그러자고 대답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그녀는 그 말을 뱉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데. 슬픈 티 조금은 내줄 수 없는 거냐며. 그런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렇지만 한 번 물어볼 걸 후회도 해본다. 나를 사랑하나요? 하고 한번은 물어볼걸. 3년 전, 그가 그녀에게 고백한 그 계절처럼, 아직도 나를 사랑하나요? 하고. 그러나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한편으론 궁금했지만, 한편으론 두려웠을 대답이었으니까. 게다가 답은 누구보다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어쩐지 비참해지는 기분. 며칠 잘 참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일그러지는 시야에, 그녀의 눈이 절로 꾹 감긴다. 그 상태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데, 그만 누군가와 부딪혀버리고 만다.
“어.”
단단한 곳에 부딪힌 코가 얼얼하다. 그녀는 순간 인상을 찡그리며 뒷걸음질을 친다. 휘청휘청 거린 탓인지, 짐 더미 위에 올려놓은 서류들이 볼품없게 떨어졌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가 주우려고 허리를 숙여봤지만, 그녀와 부딪힌 남자가 조금 더 빨랐다. 그러고 보니 누구랑 부딪혔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목에 걸린 사원증이 눈에 띈다. 옆 부서… 노아 카인드. 아, 회사 사람이었구나. 잠시 뒤, 그가 다시 무사히 올려주는 서류에. 그녀는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리고는 제 갈 길을 가려고 했다.
“또 우네요.”
그러다 들려오는 그의 말에 그녀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또 운다니. 그녀는 그제야 제 뺨에 눈물이 한줄기 흐르고 있음을 인지했다. 재빨리 손으로 쓱쓱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를 조금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혹시 언제 만난 적이 있었나 생각하는데, 그도 그걸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이야길 꺼낸다. 그때, 카페에서…. 거기까지 들었는데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그리고 곧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약간은 놀라워하는 표정. 그러면서 창백해지는 안색에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괜히 말한 것 같았다는 듯. 언제부터인가 시선이 가던 사람. 그녀는 저의 존재도 모르고 있을 테지만. 동료 직원들이 가끔, 좋아하냐? 하고 물어보면 멋쩍게 그러게. 하고 넘겼던 사람. 며칠 전, 카페 앞에서 서럽게 울고 있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또 그대로 보낸 게 마음에 걸리기도 하였고. 그런데 이렇게 또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같이 커피 한 잔이라도 하고 갈래요?”
알림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유세프는 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확인해보니 늘 오던 스팸 문자. 그는 한숨을 쉬며 제 머리칼을 헤집었다. 이 짓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머리가 아프다. 착잡함에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한 번 더 알림음이 울린다. 그는 다시 다급하게 손을 뻗어 확인해본다. 그러나 혹시나 해보지만 역시나. 그는 마일로라고 적힌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통화버튼을 누르곤 귀에 가져다 댄다. 전화를 받자마자 작가님!! 하는 커다란 음성이 그에게 꽂힌다. 그는 조금 인상을 찌푸리다가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놓았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며칠째 연락 두절인 건 아시냐는 둥. 차기작 집필은 어떻게 되는 거냐는 둥. 말을 이었다. 편집장으로부터 쏟아지는 잔소리에, 그가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는다. 시끄러운 목소리 탓도 있었지만, 며칠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술을 마신 이유가 더 컸다. 그 공허함이 뭐라고, 그는 요새 지독하게 취하지 않으면 눈을 붙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리며, 마일로의 말에 건성 건성 대답했다. 그러다, 그렇게 집에만 있다간 돌아갈 머리도 안 돌아갈 거라는 말에 피식거린다.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계속되는 잔소리에, 그는 눈을 가늘게 떠 보이며 알았다고 대답한다.
“작가님, 그럼 카페에서 봬요.”
뚝. 전화가 끊어지고. 책상에 앉은 채로 꼿꼿하게 있던 그의 고개가 젖혀진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아본다. 여전히 어지러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모습에 속이 울렁거린다. 아직도, 있을까. 너는 그곳에. 내뱉는 중얼거림이 어쩐지 그와 어울리지가 않았다.
* * *
괜찮다며 극구 사양해봤지만, 이것도 인연이라며 그가 사겠다는데 딱히 거절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노아의 등 떠밀림에 못 이겨 커피 한 잔을 손에 쥐었다. 대화해보니 그리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더라. 그냥. 그녀의 팀장이 그의 학교 선배였다느니, 같은 이런저런 이야기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절로 웃음도 몇 번 나왔다. 누군가와 이렇게 편하게 대화해 본 게 얼마 만인지. 그녀는 새삼스럽단 생각을 했다. 이곳에서 그에게 이별을 고한 게 바로 며칠 전인데. 그래서 그때는, 어쩌면 그를 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그녀가 노아와 함께 카페를 나가려던 순간. 어서 오세요. 하는 점원의 인사와 함께 딸랑,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위로 향한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고 만다. 유세프 씨. 입에서 절로 나오는 이름에, 그녀가 흠칫 놀란다. 어쩌면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전 연인의 모습에, 그녀는 애써 고개를 돌리고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에, 그만 발걸음이 뚝 멈춘다.
“오랜만이야.”
오랜만. 유세프는 저가 뱉어놓고도 스스로 조금 놀랐다. 과연 우리가 오랜만인 건 맞을까. 적어도 그에게는, 일주일이 한 달 같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너도 그럴까. 그는 멍하니 서 있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어쩌다 보니 조용히 서로의 눈만 바라보게 되었다가, 그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고 시선을 거둔다. 그러다 그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힐끔 본다. 친구인 건가, 동료인 건가. 어쨌든 그가 모르는 사람임은 확실한데. 어쩐지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날이 서 있다. 그는 답지 않게 감정이 요동치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겉으로 무심해 보이는 척, 입을 열었다.
“남자친구인가 봐.”
단지 한 문장뿐이었는데. 그의 말을 들은 그녀의 가슴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아파왔다. 아니, 뚫리다 못해 갈기갈기 찢겨진 기분이었다. 서러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난 아직 당신 때문에 힘든 게 많은데. 아침 눈을 떠서부터 새벽 눈 감을 때까지 생각나는 게 그인데. 그는 그간 사랑했던 기억은 온데간데없는 건지. 그의 무심한 말은 그녀에게 너무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저도 모르게 금세 눈물이 차오른다. 덤덤한 그의 말투가, 표정이. 그녀에겐 그냥 차갑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그의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을 짓고 있는데, 그는 그대로 카페를 나가버린다. 이젠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싫은 걸까. 그녀는 저를 지나쳐 가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따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곤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빼내 던져버렸다. 여태껏 한 번도 뺀 적이 없었던 둘의 커플 반지. 그게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그녀는 제 발밑을 지탱하던 땅이 무너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작은 반지가 그의 발치에 떨어져 나뒹군다.
“신경 쓰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마구 떨려온다. 그녀의 말에, 이번엔 그의 걸음이 멈칫한다.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려, 그녀를 한 번. 떨어진 반지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미 잔뜩 고인 눈물을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 괜히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앞을 바라봤다. 그렇게 꾹 참다가 겨우 또 말을 뱉는다.
“이제, 나 안 좋아하잖아요.”
그건 거의 흐느끼는 투에 가까웠다. 그 말에, 이번엔 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린다. 아까부터, 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어지는 마음에, 그는 다급하게 팔을 뻗어본다. 그러나 그녀는 벌써 도망치듯 그 자릴 뛰쳐나간 뒤였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그녀였잖아. 왜 그런 말을, 그렇게 상처받은 얼굴로 하는 건데. 그는 이유 없이 울렁거리는 속에,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마일로가, 그보고 왜 밖에 나와 계시냐며 말을 걸어 줄 때까지.
그녀는 그곳에서. 그가 있는 곳에서 멀어지기 위해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서, 사람이 없는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정말, 일주일 전이랑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녀를 뒤따라온 노아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아마 정말 멀리까지 가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만 멈춰 서서 숨을 헐떡였다. 그리곤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그대로 쪼그려 앉아 고개를 파묻었다. 노아는 그런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옆에 나란히 벽을 기대고 선다.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은데. 그렇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다가.
“많이 좋아했나 봐요.”
그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질문을 건넨다. 그녀는 그런 그의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좋아하는 사람의 전 연인에 대해 묻고있는 이상한 상황. 아, 이 질문은 조금 마음이 아픈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음 질문을 뱉었다.
“… 아직도?”
이번엔 조금 머뭇거리다가, 또 한 번 끄덕여지는 그녀의 고개. 그렇구나. 씁쓸하게 미소 지은 그의 입가에서, 한숨 섞인 말이 흘러나온다. 그는 뭐라 더 할 말이 없어 그 뒤로 그냥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그녀의 어깨가 들썩인다. 애써 울음소리를 참는 것인지, 작게 히끅대는 소리가 골목에 퍼진다. 그녀의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세게 무릎을 잡았다. 싫다, 정말. 그녀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잊기는 뭘 잊는다는 거니. 어쩌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와 다시 잘 될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을. 그러나 이별 시점부터 질질 끌던 그 생각은, 오늘에서야 무너지게 되고 말았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데 왜 저는 아직도 그가 좋은 것인지. 그녀는 그 사실이 정말 싫었다.
유세프의 손이 더듬 더듬, 탁자 위를 짚었다. 또 술에 잔뜩 취한 채로. 그런 그의 손끝에 컵 하나가 닿는 순간. 덜덜 떨리는 손이 컵을 집으려다 허공을 맴돌고 만다. 쨍그랑, 하고 컵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그에게 아프게 박힌다. 아끼는 거였는데. 그녀에게 선물 받아 많이 아끼는 거였는데. 자꾸만 눈에 거슬려서 차마 치우지도 못했던 저 컵. 정말, 거슬렸던 게 맞긴 할까. 어쩌면, 이 집에 남아있는 유일한 그녀의 흔적이라. 그래서 자꾸만 눈에 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거기까지 깨우친 그는 결국 무너졌다. 너무 느린 깨달음이었다. 이미 깨진 컵은 조각을 이어 붙여도 돌이킬 수 없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머릿속에선 아까의 일이 반복적으로 떠오른다. 마치 영사기로 재생을 하듯, 선명하게.
‘신경 쓰지 말아요.’
어째서.
‘이제, 나 안 좋아하잖아요.’
아니야.
그런 게 아니었어. 그렇게 생각하던 그의 숨이 턱 막힌다. 심장이 저 밑바닥 까지 내려앉는다. 다 나 때문이었구나.
‘… 우리 헤어질래요?’
바보 같은 그는, 그녀가 어째서 그런 말을 했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도 안 했다. 그날. 그때. 그녀의 표정이 어떠했더라. 아니, 저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이별을 고했던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새카맣게 타들어 갔을까. 허망함과 허탈감. 그다음엔 미안함과 저를 향한 원망. 그는 입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 꽤 세게 문 건지, 조금 비릿한 피 맛이 섞여났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차라리 누가 더 세게 때려준다면 좋을 텐데. 그의 눈시울이 어느새 붉게 물든다. 그는 그렇게, 깨진 컵 조각을 치우며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한참을 앓았다. 며칠을 지독한 열병에 시달리며, 그는 끊임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 *
1년. 다시 돌아온 가을. 그는 그동안 수도 없이 펜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무슨 글을 쓰려 해도 온통 그녀의 생각밖에 나질 않았다. 무어라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하루종일 문자 창 하나 띄워놓고 이도 저도 못 하는 모습이, 꼭 구질구질한 구남친 같았다. 어리석게도. 그녀에게 그런 상처를 남겨놓고. 이미 차단한 건지 아닌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는 끝내 문자를 완성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그의 감정을 세상 밖으로 꺼냈다. 여태까지 써온 글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녀에게 전하는 말인지, 그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그건 아무도 몰랐다. 그저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었다. 그의 마음의 변화가 세상 눈엔 미친 작가의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고 들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마일로는 수습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시냐면서 그에게 꿍얼거렸지만. 그는 그런 마일로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참 웃기지. 세상에 후회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그는 그녀에게마저 권태로웠던 지난날의 자신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프고. 미안하고. 그리워하는 마음만이 커져갔다. 스스로도 몰랐던 마음의 크기들. 그는 저가 이렇게 많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음에 매일 매일 놀란다. 그리고 여전히, 보고 싶다. 그의 중얼거림이 닿을 수 없는 허공의 퍼진다.
사계절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녀의 시간 또한 빠르게 흘러갔다. 일부러 멀리 장기 출장을 다녀오기도 하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공부도 잔뜩 해대며. 가끔, 그의 생각이 날 때면 술을 마시기도 했고. 이별 노래를 들을 때면, 청승맞던 저가 떠올라 울적해질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었다. 사실은, 아픈 기억이 덕지덕지 붙은 카페는 발길을 끊었고. 그는 그답게 잘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견뎌낸 것도 없다고는 못하겠다. 어쨌든 의식적으로 그에 대한 것들을 하나, 둘 외면하며. 그렇게 혼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서점에 진열된 책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린다. 로맨스 소설 코너에 있는 베스트셀러치고, 그 책은 제목도 표지도 그 무엇하나 로맨틱하지 않았다. 권태. 그녀는 책 제목을 조용히 혼자 곱씹었다. 그러다 밤색 표지를 조심스레 쓰는 손이, 필명이 박힌 부근에서 멈칫한다. 바보 같아.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말이었다. 그녀는 코를 한번 훌쩍이곤 고개를 숙였다. 누가 볼 새라 재빨리 눈물을 훔치고는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1년이 지났지만, 아직 지우지 않은 그의 번호. 하루라도 기다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혹시라도 연락이 오진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그의 번호는 그녀의 휴대폰에 한 번 떠오르는 날이 없더라. 또다시 눈시울이 시큰. 그녀는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책을 들고 계산대로 향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을 펼쳤다. 그의 덤덤한 문체로 써 내려간 그 책을. 모두 모르는 이름들. 모르는 이야기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그녀밖에 알아보지 못할 것들이었다. 무슨 보고 싶다, 미안하다는 단어가 이렇게 많은지. 그녀는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손가락을 접어가며 보고 싶단 단어들을 헤아려보았다. 그러는 와중에 페이지에 찍히는 그녀의 눈물 자국. 뚝 뚝 흘러내려 어느새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못된 말을 하고 헤어졌으면서, 이제 와서 절절히 후회하는 그가 많이 밉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분노보다, 원망보다. 그녀는 안도감이 더 먼저 들었다. 우리의 이별이 나 혼자 힘든 게 아니었음이. 그게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까지 넘긴 그녀는 결국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보고 싶어. 이런 반칙이 어디 있냐며 하고 울어버렸다.
* * *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떨어진다. 시간은 참 무심하게 흘러, 어느새 가을도 다 지났다. 유세프는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여전히 매일 방문하고 있는 카페로. 그는 그날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에 들렀다. 어떤 날은 하루종일 앉아 일을 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그저 목적 없이, 카라멜 라떼 한 잔을 시켜놓고 몇 시간을 죽치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혹시라도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녀가, 이곳에.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하며. 아주 우연찮게도 지나가지 않을까 하는 헛된 생각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그녀를 기다리러 가던 그는, 카페 근처 은행나무 밑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그리고 그만 넋을 놓았다. 저가 헛것을 본 건 아닐까 의심해봐야 했다.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그에게 도달한 순간이었다. 툭. 늘 가지고 다녔던 그녀의 반지가. 코트 주머니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던 반지가 그의 손가락에 닿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그의 심장이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불규칙하게. 그의 눈앞에 그녀가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니었어서 그런 건지. 그녀는 머리만 조금 자랐을까, 그의 기억과 똑같은 모습으로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기다리고 있던 그녀도 눈치 없이 뛰어대는 심장이 오늘따라 야속하기만 하다. 진짜 오네.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만약 저가 책을 읽지 않았으면, 힌트 속 장소를 틀려버린다면, 무엇보다. 그녀의 마음이 다 떠나가 버렸으면 어쩌려고. 어쩌다 이렇게 미련한 사람이 된 건지. 그녀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왜 매일 이곳에 왔어요? 왜 날 기다렸어요? 왜, 그런 이야기를 썼어요? 아직도 날 좋아하는 것처럼. 막상 얼굴을 보니 다 들어가 버린 질문들이었지만. 그녀는 멍하게 서 있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쏴아 하고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후드득 떨어지는 은행잎이 아니었다면. 그 둘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서로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길 한참. 그녀는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왜… 연락 안 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멈춰선 채. 겨우겨우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뗐다. 그러면 그는 홀린 듯이 대답한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라고. 그의 말은 정말이었다. 사람이 너무 그리워하면 헛걸 본다는 소리도 있던데. 그는 아직까지도 저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녀가 그의 코앞까지 도달했을 때. 그녀가 그의 허리를 천천히 끌어안을 때. 그제야 그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다, 이내 툭 하고 떨어진다. 만나면 정말 때려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속삭이던 그녀는 그를 조금 더 세게 안아버렸다. 그도 그녀를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아 보인다. 그리웠던 품. 아이처럼 우는 그의 모습에, 그녀의 눈시울도 덩달아 달아오른다. 이렇게 울 거면서 왜 헤어지자고 했는지, 그도 그녀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치만 좋은 걸 어떡해. 그녀는 그의 옷깃을 꽉 붙잡으며 마지막 질문을 건넨다.
“정말로, 아직도 나를 사랑해요?”
그녀의 말에 그의 손이 흠칫 떨린다. 그러다, 곧 그녀의 귀에 속삭이듯 말한다. 울음소리 탓에, 목소리가 볼품없이 끊어져 나왔지만 상관없었다.
“사랑해. 아주. 많이.”
오래도록 전하지 못한 그 말이, 이제서야 그녀에게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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