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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이혼 후 / 언
유세프 R카드 '새벽 쥐'의 간접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게임 시작 시 선택지의 유세프 대사와 메인스토리 프롤로그 대사를 참고했습니다.
유세프의 손이 통화 버튼 위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마음을 먹고 연락처를 열어 그리운 이름을 찾아내어 보고 있기를 벌써 몇십 분. 통화 버튼 하나를 못 눌러서 귀하다는 변호사의 하루 중 일부가 무던하게 사라져 갔다. 변호사 유세프. 그의 이름 석 자가 박힌 떳떳한 이름표와 상반되는 착잡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결국, 통화버튼을 누르는 엄지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며 액정에 닿았다 떨어졌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다가 음성 메시지 안내가 나오기 직전쯤 끊긴다. 받아줬다는 사실 하나에 유세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 맴돌던 걱정의 말들이 두서없이 쏟아진다. 퍽 변호사 답지 않은, 다소 감성적인 말들이 비처럼 내렸다.
“어…. 나야. 잘 지내고 있어? 밥은…. 먹었고?”
[ 이제 따로 연락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
“걱정이, 되어서. 아기도, 당신도…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 유세프씨. ]
“…응.”
[ 우리 이미 끝난 사이에요. ]
“알아.”
[ 이렇게 자꾸 전화하시면, 저 너무 불편해요. ]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
[ 제가 원해서 한 이혼이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해요. ]
“여보.”
[ 그 호칭도, 더는 부를 일 없으면 좋겠어요. 유세프씨. ]
전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여자의 냉랭한 어조가 유세프의 심장을 움켜쥐듯 숨을 턱 막는다. 내어지지 못할 말들을 속으로 삭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당신이 원해서였지. 나 또한, 당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여자가 내민 서류에 도장을 찍은 것도 자신이지만, 그것마저도 순전히 당신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되돌릴 수 없는 비겁함이었다.
“...행복해?”
[ …불행하진 않아요. ]
“내 곁에 있을 땐, 내가 당신을 불행하게 했을까?”
[ …그만 끊을게요. 아이가 깨서요. ]
“잠시만, 여보…….”
유세프의 미련 어린 목소리에도 통화는 가위로 줄을 자르듯 뚝 끊기고 만다. 그는 끊어진 통화에도 한참을 귀에서 휴대전화를 내릴 수 없었다. 매번 이렇게 끊기는데도 잠깐이나마 들었던 목소리를 놓을 수가 없어서 귓바퀴가 아릴 때까지 여자의 목소리를 몇 번이고 떠올렸다. 서류에 도장을 찍고, 법원에서 판결을 받고. 서로의 등본에서 존재를 지운 후 여자는 집을 나갔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작은 소식 하나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잠깐의 통화에서 작게나마 들리는 아이의 칭얼거리는 목소리와 저녁을 차리는 소음으로 어딘가에서 강단 있게 살아가는 모습만이 어렴풋이 상상할 뿐. 유세프는 지갑을 열어 여자와 찍어두었던 사진을 꺼내었다. 하도 꺼내보아서 테두리가 꼬깃꼬깃해진 사진 속 둘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유세프의 큰 손이 여자의 작은 손을 소중하게 움켜쥐고, 다른 손은 불러있는 배에 올려 귀를 대고 눈을 감은 채 웃고 있는 지독히도 다정한 사진. 유세프는 눈가가 시큰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고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아서, 메어버린 목으로 마른 침을 삼켜내어 울음을 참아내었다.
“나는, 그저….”
그의 말아 쥔 주먹이 떨림을 안은 채 깔끔한 모던 테이블에 구겨진다. 무엇도 그저 변명일 뿐이라, 수없이 떠오르는 단어들을 연결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것들은 많은데, 어떠한 문장도 완성할 수 없는 무력함이 그를 덮쳐왔다. 유세프에게는 남은 게 없었다. 미련하게도 모든 걸 쥐려다 다 잃은 그는 손에서 놓친 후에야 밀려오는 공허함을 이기는 방법은 몰랐다. 책상에 팔꿈치를 박아 입을 꽉 움켜쥐고서 아랫입술을 물어 감정을 죽인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릴 자격이 있을까?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다 되려 사랑하는 이의 믿음을 져버리고, 안정적인 직장을 잃는 게 두려워 비겁하게 익명으로 출고한 소설로만 정의를 외치는 변호사인 주제에. 절망스럽고 통탄한 와중에도 여자가 했던 말 하나 만은 선명하게 귀에 울렸다.
“좌절만 해서는 희망을 볼 수 없다, 고 했었지.”
유세프의 손이 책상 위에 얹어진 명패를 잡는다. 이내 뒤로 돌려내면 그의 이름이 숨겨지고 아무것도 써지지 않은 면이 드러난다. 오늘만큼은 변호사를 놓고, 한 사람의 남편이었던 유세프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기억을 더듬어 어디서부터 자신의 잘못이 시작되었는지 찾아야 했다. 이미 떠난 여자는 돌아올 리 없었다. 한 번 선택하면 후회가 들어도 번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그건 유세프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그가 사랑한 여자는 결과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며 성장하는 사람이었다.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를 죄어왔지만, 사랑하는 사이 닮아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당신을 떠나보낼 연습을 하려고 해.
건물 밖으로 나오자 눈 위를 강하게 덮는 노을빛에 유세프는 팔로 시야를 가렸다. 그의 입꼬리엔 씁쓸함이 배어있었다. 내딛는 발걸음에 노을이 그림자로 따라붙는다. 제법 쌀쌀해진 바람이 얇은 코트 사이로 밀려들어 와, 품으로 가을이 사무쳤다. 곧 있으면 발꿈치 뒤로 낙엽이 엉키겠구나. 유세프는 코트를 여미며 발걸음을 옮겼다.
***
문이 열리면 맑은 풍경 소리와 함께 직원의 미소 띤 얼굴이 유세프를 반겼다. 익숙하게 포스기를 누르는 손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카라멜라떼랑 모카라떼 따뜻한 거로 한 잔씩 드리면 될까요?”
“앞으로는 카라멜라떼만 주세요.”
“아, 네! 쿠폰은 필요 없으시죠?”
늘 그렇다고 대답했던 유세프는 잠깐의 고민 끝에 손을 내밀었다. 아뇨, 주세요. 직원의 눈에 의아함이 담겼다. 그가 카페의 단골이 된 지는 오래였지만 그간 한 번도 쿠폰을 받아간 적이 없었다. 단순 변심이라기엔 매번 형식적으로 묻는 말에도 아니라 답했으니, 필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직원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벙쪄있다 뒤늦게 비어있던 쿠폰에 도장 하나를 찍어 건네었다. 유세프의 손에 쿠폰이 들어오면, 그는 지갑 한쪽에 넣어두고 가까운 자리에 앉아 가죽 윗부분을 매만졌다. 눈을 감고, 턱을 괴어 생각을 곱씹는다. 비죽, 허무한 웃음이 지어졌다. 손에 쥔 지갑마저도 여자의 온기가 남아있는 물건이었다. 작년 생일 선물로 받았던가, 선물은 괜찮다고 답했음에도 작은 손편지 카드와 함께 변호사 체면은 사소한 곳에서부터 챙겨야 한다고 쥐여주었던 것. 아마 당분간은 이것도 바꿀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될 터였다.
‘난 아마, 앞으로도 당신이 보고 플 때마다 카라멜라떼를 찾을 거야. 그렇게 당신 생각이 쌓일 때마다 쿠폰에는 그리움이 채워지겠지. 내가 당신을 잊지 못할 거란 걸, 잘 알잖아. 그러니 이런 작은 것에라도 의지해야,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까 싶어.’
그렇지 않으면 평생을 당신 생각만 하다가 갈 거 같거든. 편지를 쓰듯, 마음속으로 읊조린다. 저릿한 마음이 가시질 않아서 유세프는 그리 즐겨 마시던 카라멜라떼를 받고도 입에 댈 생각을 안 했다. 차가운 음료 속 녹아가는 얼음들은 서로의 사이를 메워가며 엉겨 붙는데, 당신과 나는 이미 물과 기름이 되어버린 것 같아. 유세프는 절로 피어오르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카라멜라떼는 한 입을 채 머금지 못하고 그가 있던 자리에 덩그러니 남았다.
밤이 깊어간다. 하늘이 남색으로 뒤덮이고, 구름이 달을 가렸다. 그의 왼손에는 편의점에 들러 산 술병이 봉지 가득 채워져 있고, 오른손에는 반 이상 비운 한 병이 쥐어져 있었다. 남들이 완벽하다고 말했던 그도 결국은 사람인지라, 알코올의 기운을 빌리지 않고서는 무너지려는 이성을 버틸 수 없었다. 알딸딸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자연스레 옮긴 발걸음 끝에는 도서관이 있었다. 여자와 처음 만났던 장소이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된 곳이었다. 매일같이 법학 서적을 빌리러 오던 대학원생과 그를 반기는 입장인 사서의 인연은 생각보다 쉽게 깊어졌었다. 저무는 노을에서 떠오른 달빛으로 바뀐 시간의 도서관은 모든 불빛을 잃은 채였다. 유세프는 여자와 자주 앉아있던 도서관 앞 벤치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우연이라도 이 앞에서 만나기를 고대하며 어슬렁대던 과거의 자신이 그려졌다. 우연도 제 편은 아니었는지 단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실낱같은 희망이 이곳으로 그를 불러들였다.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무너져서 결국은 다신 오지 않으려 마음을 먹었음에도 이성이 무너진 후의 본능은 도돌임 표처럼 그를 다시 행복했던 장소로 데려왔다. 팔에 무게를 지탱해 고개를 든다. 별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도심의 밤하늘이 꼭 제 앞날 같아서 유세프는 잠시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깜깜한 눈두덩이 위로 바깥의 빛이 일렁였다. 두어 바퀴쯤 눈을 굴렸을까, 이유 없는 서글픔이 그의 눈에서부터 목, 가슴까지 천천히 밀려와 덮친다. 미간이 찌푸려져 눈썹이 일렁였다. 이어 숨이 턱 막히고, 입술이 떨렸다. 사무치는 외로움이 해일처럼 휘몰아쳤다. 비어있는 옆자리가 쓸쓸하다. 다시는 곁에서 맡을 수 없을 모카라떼의 향기가 그리웠다. 그렇게 참아내던 눈물이 결국 떨리는 속눈썹에 맺히다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속절없이 응어리진 말들이 쏟아졌다.
“당신이 없으니까 좌절밖에 못 하겠어.”
당신이 내 희망이었어, 당신을 위해 살았어. 그런데도 당신을 위험에 빠트린 것도 나여서,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 했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을, 그리고 아이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는데. 당신이 느낄 서운함을 헤아리지 못했어. 당신을 믿으면서도 기대지 않았어, 의지하지 않았어. 혹 내가 잘못된다 해도 혼자 남을 당신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당신의 안위에만 집착했던 거야.
“그러니까, 당신은 너무 걱정이 많다고 했잖아요.”
이제는 환청마저 들리는 모양이었다. 유세프는 귓가에 환영처럼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추켜들었다. 술에 취하면 헛것을 보나 보다.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여자가 눈에 담긴다. 모카색을 닮은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린다. 하얀 원피스에 가벼운 가디건을 걸친 여자가 귀 뒤로 머리칼을 넘겨내고 있었다. 유세프를 내려다보는 여자의 눈썹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여기서 뭐 해요. 혼자 처량하게. 술 취하면 아무한테나 뽀뽀하고 다니면서.”
“여보…. 진짜, 당신이야?”
“그럼 가짜도 있을까 봐요?”
여자는 유세프의 비어있는 옆자리에 앉았다. 여기에 있을 것 같았어요. 한동안 당신을 지켜봤었으니까. 여자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은은한 코튼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맡아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헛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섣불리 손을 뻗어 여자를 잡지 못하고 들었던 고개를 툭, 떨구었다.
“내가 모질게 대해서 힘들어요?”
유세프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 수가 없어, 그저 여자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럼 도장을 찍지 말지 그랬어요. 바보같이, 내가 원한다고 그냥 찍어줬죠? 유세프씨는 늘 내가 먼저잖아요. 자신보다.”
“그건….”
“알아요. 당신 지금 위험한 거. 내가 남편이 쓴 글도 모를 줄 알았어요?”
“알고 있었어?”
“알면서도 그냥 기다렸어요. 우리가 결혼을 결심한 건, 서로 믿어서 아니었어요?”
아까 곁에 있을 때 불행했었냐 물었죠. 네, 불행했어요. 당신한테 나는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위험에서 그저 지켜져야만 하는 사람이구나. 내가 당신의 불안 그 자체가 되어버렸구나. 그래서 이혼을 결심했던 거에요. 당신의 약점이 되기 싫어서요. 그런데도 당신은, 끝을 내고서도 내 생각만 하네요. 전화가 올 때마다 참았을 말들을, 여자는 쉼 없이 뱉어내었다.
“그러니까, 이젠 당신 생각 좀 해요.”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보면, 여자는 유세프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웃었다. 평생을 사랑해 마지않던 미소였다. 밤하늘이 여자의 눈에 온전히 담긴다. 심해 같은 푸른빛이 여자의 갈빛 동공을 덮으면 유세프는 마주한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내 여자의 손이 볼을 감싸왔다. 오랜만에 닿아온 온기에 유세프는 작은 손 위로 제 손을 자연스럽게 겹쳐 잡았다. 여자의 얼굴이 가까워져 오면,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차올랐다. 유세프는 볼 아래로 눈물을 떨구며 다가온 입술을 마주했다. 서로가 행복했을 때처럼 허리를 끌어안지도, 사랑한다는 말도 속삭이지 못한 채 그저 맞닿은 면적만으로 마지막 온기를 느꼈다.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린다. 마지막인 것은 여자의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졌다. 이제는 가끔이나마 받아주었던 전화도, 무엇도 닿을 수 없음을 짐작했다.
“저 갈게요. 잘 지내요.”
여자의 시선이 까지 않은 술병들에 머물렀다가 거두어졌다. 잔소리하고 싶을수록, 걱정이 쌓여서 미련이 깊어질 걸 알았다. 여자는 머뭇거림 없이 뒤돌았다. 울고 있는 유세프를 위로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숙인 고개에, 눈물이 턱 끝에서 모여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멀어져가는 발소리 끝에 유세프는 결국 참아왔던 모든 설움을 담아 눈물을 쏟아내었다. 어떻게든 이성을 잡아보려 해도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막아낼 수 없었다. 완전한 이별의 파장은 그를 무너트리기엔 충분했다. 마지막 인사에 입맞춤은 너무했어. 당신은.
“당신은, 나를 울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구나.”
내 사랑. 우리가 사후에도 인연이 닿는다면, 그때는 당신에게 숨기는 것 없이 곁에 서고 싶어. 그렇게 그저 당신만을 사랑하고 싶어. 내 온 마음을 담아, 당신을 놓치지도 실망하게 하지도 않을 거야. 혹 내가 정말로 잘못된다면, 먼저 가서 당신을 기다릴게. 내 곁에서 멀어져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다가 나를 만나러 와줘. 사랑했어, 여보.
***
유세프의 손이 괜히 한 번 정돈해둔 제복을 다시금 매만지며 훑었다. 후, 긴장이 여력한 숨을 뱉고 마지막으로 넥타이의 위치를 정돈하고서야 새벽조 방을 나선다. 오늘은 매니저가 오는 날이었다. 세이사감의 사무실에 들렀다가 책상 위에 놓여있던 서류에서 매니저의 얼굴을 먼저 본 후로 긴장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마른 침을 삼켜내고 시간을 확인한다. 아마 지금쯤이면 소개를 받고, 기수장인 엘의 옆에 서 있겠지. 긴장되면서도 설레는 감정이 피어오른다. 몇 년을 기다렸는지. 어느샌가 흐른 시간을 재어보는 것도 그만둘 정도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후세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나, 실제로 마주하고서는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행히도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염원이 생겨난 거라 당신과의 기억을 끌어안고 살 수 있었다.
“진짜 마지막 기회, 겠지.”
사후세계가 또 존재하지는 않을 테니. 유세프는 입술 끝에 미소를 걸었다. 생전 사랑해 마지않던 연인을 닮은 미소를. 내딛는 발끝에 힘이 실린다. 멀리 보이는 모카색 머리칼 끝자락만으로도 다시금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혹시 새로 온다던 매니저?”
“아, 안녕하세요!”
“안녕, 유세프라고 해. 혼자 있었어?”
“엘이 돼지를 잡으러 가서요! 어디로 가야 하나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구나, 내가 말동무가 되어 줘야겠네.”
“그럼 감사하죠, 유세프씨도 사신인 거죠? 과거에 이루지 못한 염원이 짙은 사람이 사신이 된다고 하던데….”
“응. 그렇지? 그러고 보니 이런 자기소개 오랜만에 해보네. 이곳에 오기 전에는…. 흠…. 이런저런 재밌는 일을 좀 했었어.”
“궁금하네요, 무슨 일 하셨는데요?”
“언젠가 때가 되면 알려줄게. 지금은 과거보다는 앞으로의 얘기를 할 때잖아?”
유세프가 매니저의 손을 이끌었다. 첫 만남으로 돌아온 것만 같다. 아마 당신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 같지만, 그건 문제가 없었다. 인연은 쌓아가는 거니까. 손등에 입술을 찍어 누르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느릿하게 손을 놓는다.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반가워, 매니저. 앞으로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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