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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 [기사, 에단] 카드의 내용 스포일러 및 각색이 존재합니다.
올해도 수호목(守護木)에 단풍이 예쁘게 들었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본 그의 눈에 붉게 물든 나무가 비쳤다. 지역과 지역을 나누는 경계에 위치하는 높지 않은 동산 위로 우뚝 선, 성인 하나의 아름으로는 채 다 안을 수 없는 둘레의 거대한 나무. 나이 지긋한 이장님의 고조할아버지가 이 마을에 정착하기도 전부터 거기 있었다는 나무는 항상 이르게 단풍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푸르던 나무가 하루아침에 붉게 물드는 일은 이 마을 사람들에게 아무 일도 아니다. 매년 있는 일이니까. 시선을 돌려 책상 위에 세워둔 달력을 보았다. 25일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진 9월 달력. 그리고 오늘은…… 어김없이 9월 25일이다.
9월 25일이면 이 마을 수호목에는 이른 단풍이 든다.
그는 달력에서 시선을 거두고 빼곡히 정리된 책장에서 한 권을 빼어 가방에 넣었다. 고급스러운 표지였으나 손이 많이 탔는지 언뜻 보기에도 낡고 헤진 책이다. 얌전히 꽂혀있는 다른 책들은 새것과 같은 상태였기에 평소에도 퍽 이질적인 느낌을 주곤 했다. 책을 담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그는 미리 준비한 텀블러와 작게 다발로 엮은 코스모스를 손에 들었다. 혹시라도 텀블러에서 내용물이 새어 책을 적실까, 꽃은 가방에 넣었다 눌려 망가질까 하는 이유였다. 발을 끼운 운동화의 앞코를 가볍게 통통 두 번 튕기고 그는 집을 나섰다. 커튼을 치지 않고 나가 창밖으로는 여전히 동산 위 단풍나무가 보였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도착한 곳은 동산 아래였다. 따로 동산을 오르는 길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밟고 지나간 자리는 풀이 눌려 더 이상 자라지 않아 암묵적으로 입구가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초라한 입구 앞에서 그는 잠깐 숨을 고르고는 동산을 올랐다. 높지 않았기에 순식간에 오를 수 있었다.
정상에 발을 딛자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그는 눈을 감고 기분 좋은 바람을 느꼈다. 가을이라지만 아직 오후의 해는 뜨거웠기에 송골송골 맺혔던 땀이 바람을 맞고 사라졌다. 나뭇잎과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고 강아지풀이 발목을 간질였다. 건조한 풀 내음이 났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먼저 온 손님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자꾸만 눈앞을 가려 쓸어 넘겼다. 그러자 거대한 단풍나무가 시야를 가득 채워 세상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아직 다 바래지 않아 푸릇한 잔디와 대비되는 완연한 가을의 색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붉게 물든 단풍 가지 아래, 꼭 이르게 물든 단풍과 같은 선객이 있었다.
“아직 시기가 아닌데 단풍이 든 것이 신기하여 가까이서 보려고 했습니다.”
“처음 보나요? 우리 마을 사람이 아닌가 보네요.”
“예. 우연히 지나가는 길입니다.”
선객은 갑자기 말을 거는 낯선 이에게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두꺼운 나무줄기에 손을 올렸다. 가만히 얹었을 뿐인데 쓰다듬는 것 같았다. 마침 또 바람이 불어 수호목의 나뭇잎이 살랑거렸다. 선객의 손길에 화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선객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코스모스 송이를 나무 아래에 내려놓고 텀블러는 그에게 건넸다. 선객이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빙긋 웃었다. 커피 좋아해요?
“이르게 단풍이 드는 이유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길지 않으니 마시는 동안 들어볼래요?”
선객은 커피를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방에서 낡은 책을 꺼내 펼쳤다.
단풍나무 아래에는 기사의 시체가 묻혀있다
이 작은 마을은 사실 성(城)터예요. 왜, 마을 입구에 보면 다 무너진 벽돌담이 있는데, 봤어요? 그게 성곽(城郭)이 남은 흔적이고요. 크지 않은 마을이니 크지 않은 성이었죠. 왜냐하면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어린 왕자가 쫓겨나듯 도망쳐서 살던 성이거든요.
그래도 다행히 힘없는 왕자에게는 충성스러운 기사가 있었어요. 대대로 왕가와 나라를 수호하던 가문의 후계자였던 남자. 가문의 상징을 가지고 태어나 태어난 순간부터 기사였던 남자.
선왕이 승하(昇遐) 한 후 선왕의 동생은 조카인 왕자를 내쫓고 왕위를 차지했어요. 왕자가 너무 어리니 성년이 될 때까지 대신하겠다는 핑계로요. 처음부터 왕좌를 노리고 있었으면서……. 정당한 후계자인 왕자를 몇 번이나 죽이려고 했죠. 자식인 왕자가 없으면 계승권은 선왕의 형제에게 돌아가니까.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걸까요. 선왕은 선대,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에게 왕자를 지켜달라 부탁했고, 선대는 약속했어요. 가문의 명예를 걸고 왕자님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약속은 선대가 더는 검을 잡을 수 없는 몸 상태가 되어 후계자에게 넘어갔어요. 그의 아버지가 끝까지 지켜주길 바랐던 왕자를 지키는 것이 그의 사명이자 숙명이 되었죠.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어요. 그게 그의 명예였거든요.
그와의 첫 만남에 왕자는 떨며 말했어요. 자신은 왕이 되지 못할 테니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돌아가라고. 그러나 기사는 단호하게 대답했어요. 자신은 왕이 될 사람을 지키러 온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는 왕자 앞에서 맹세했죠. 그의 자부심이던 가문의 혈통과 이끌던 기사단의 명예, 그리고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 당신을 지키겠노라.
“이해할 수 있나요? 그의 삶을 존중하지만 나는 여전히 모르겠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선객은 책을 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덤덤하게 이어졌다.
왕자는 여전히 목숨을 위협받았지만 실력 있고 충성스러운 기사단장 덕분에 성년을 코앞에 둘 수 있었어요. 네. 왕좌를 되찾을 날이요. 국왕은 조급해졌어요. 정당한 후계자가 사라져야 자신이 계속 왕위를 차지할 수 있으니. 그러나 암살자를 보내도, 독이 든 와인을 선물해도 늘 왕자 곁의 기사단장이 알아차리고 처리했어요. 국왕과 후작이 왕자 암살을 사주한 것까지 눈치챘고요. 국왕과 국왕의 충실한 개인 후작에게 기사단장은 눈엣가시였죠,
그러다가 처음으로 기사단장이 왕자의 곁을 비울 일이 생겼어요. 후작은 이 사실을 알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했고요. 기사단장은 눈치챘어요. 후작이 워낙 멍청해서 티를 냈거든요. 왕자를 그에게 호의적인 옆 왕국으로 피신하도록 했어요. 그러나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촉박해서 후작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묶어둘 필요가 있었고, 기사단장이 홀로 남겠다 자처했어요. 왕자는 말렸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죠.
왕자를 태운 마차가 서서히 멀어져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작이 군대를 이끌고 왕자가 있던 성으로 쳐들어왔어요. 기사단장은 검으로는 수십을 상대로도 유리하게 항전했지만…… 날아오는 수많은 화살을 피하지는…… 못해서…… 결국…….
그는 책을 덮고 손을 모았다. 기도하는 것처럼. 이번에는 말을 잇는 것 또한 힘겨워 보였다. 선객은 기사단장의 최후를 짐작하고는 그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되도록 말을 끊었다.
“……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만, 이 나무에 이르게 단풍이 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하하, 아직 이야기가 더 있어요.”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아직 등장인물이 하나 남았거든요.
결론만 말하자면 기사단장은 죽고…… 왕자는 살았어요. 결과적으로 기사단장의 명예는 지켜졌죠. 왕자가 살았으니까. 그리고 살아남은 왕자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죽은 기사단장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었어요. 왕족에 버금가는 규모의 장례식을. 다만 왕족과 일부 고위 귀족은 대신관이 장례식을 주관하는 것이 보통인데, 왕자는 대신관이 아닌 수석 신관에게 장례를 맡겼어요. 일부러요.
왜냐하면…… 사랑하던 사이였거든요. 수석 신관과 기사단장은. 신의 종이라 불리는 신관은 사사로이 타인과 맺어지는 일이 어려웠고 기사단장 역시 우선해야 하는 주군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늘에서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는 걸로 만족하고 있었죠. 그러나 왕자는 알고 있었던 거예요.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왕자의 배려로 수석 신관은 사랑하는 기사의 마지막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어요. 미처 편히 감지 못한 눈을 감겨주고, 피가 굳어 엉킨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살아있을 때는 닿은 적 없었던 입술을 이마에 맞춘 후…… 관을 닫고, 그를 차가운 땅에 묻고, 그 위로 나무 묘목을 심었어요. 무덤에서 자란 나무를 지역의 수호목으로 삼는 것이 그 나라에서 영웅을 기리는 방식이거든요.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신관은 눈물을 허락받지 못해서 참고 또 참다가, 장례식이 끝난 후 꼬박 나흘을 울면서 보냈어요.
닷새가 되는 날. 신관은 무작정 펜을 들었어요. 그리고는 써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힘이 없어 쫓겨난 어린 왕자가 왕좌를 되찾기까지의 여정과 그 과정에서 희생한 충성스러운 기사단장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할 수 있도록. 기사단장을 잊지 않도록.
책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세 계절이 지났어요. 신관은 완성된 책이 제 손에 들어온 날, 가장 먼저 기사단장의 무덤으로 달려가 소리 내어 읽었고요. 그날이…… 9월 25일. 우연히도 기사단장의 생일이었어요.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을 덮은 신관이 나지막이 뱉었어요. 생일 축하해. 보고 싶어. 그러자 신기하게도 제법 자란 묘목의 푸르던 나뭇잎이 붉게 물들었어요. 기사단장이 찾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 후로도 이 수호목은 매년 9월 25일, 그의 생일이면 단풍이 붉게 물든다고 해요.
“왜 단풍입니까?”
선객이 묻자 그는 책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는 나긋한 목소리로 첫 문장을 읽었다. 붉은색 머리와 다른 색의 눈동자. 이건 대대로 왕족과 나라를 수호하는 기사단으로 지낸 그의 가문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었다.
“그가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거든요.”
“…….”
“당신처럼…….”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붉은색의 머리카락이 아래로 길게 늘어져 흔들렸다. 오른쪽에 낮의 태양을, 왼쪽에 밤하늘을 담은 다른 색의 눈동자가 그를 쳐다보았다. 낡은 책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진다. 남자가 머뭇거리던 손을 뻗어 눈물을 거둬 주었다. 그는 와락 남자에게 안겼다. 들고 있던 책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그 위로 낙엽이 떨어졌다. 오래되어 색이 바래고 해진 양장 표지에는 다른 글도 그림도 없이 오직 제목만이 적혀있었다. 기사, 에단.
“어서 와, 에단. 오래 기다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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