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대해 논하시오. / 리모
그건 마치 하나의 얽히고설킨, 아주 크고 흰 실타래와 같아서. 한낱 우리들의 노력으로는 해결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걸 자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1 매니저는 느리게 무료함과 졸음으로 가득 찬 흑갈색의 눈동자를 두어 번 깜빡였다.
수다 떠는 소리, 실내화를 질질 끄는 소리, 과자 먹는 소리 등등이 교실 안을 꽉 채웠지만 그는 홀로 이 교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홀로 멍하니 엉뚱한 페이지가 펼친 교과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반장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쉴새 없이 말을 걸었었는데 오늘은 포기한 건가? 하긴, 나 같아도 이상해 보이고 대답도 안 하는 전학생 한테는 계속 그럴 수는 없겠지. 매니저는 묶은 브레드 번에서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렸다. 버릇이었다.
고등학교에서는 그렇게 좋은 기억이 있지는 않았다. 학창 시절이 그렇게 즐겁지는 않았으니까. 후, 매니저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냥선배님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니야? 아무리 지난 국제예술학교에서의 잠입에서 20명이 각자다르게 크고 작은 사고를 쳤다지만 나 혼자만 파견을 보내시다니. 매니저는 억지로 포탈에 집어 넣어지다시피 파견을 왔다. 전 후 설명없이 이런 곳에 보내지다니. 고등학교 라는 곳 자체가 매니저와 잘 맞지 않는 공간인 걸지도 몰랐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며 심지어 원혼인지 마물 인지 아니면 그저 파견일 뿐인지도 매니저는 알지 못하는데. 아니 그리고 도대체 왜 갑자기 포탈에다가 나를 집어넣으신 거야? 내가 뭐, 택배야? 만약에 원혼이나 마물이 나오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내가... 주먹으로 때려야 하나? 정말 생각할 수록 너무하시다.
수업은 최대한 빠지지 말라는 냥선배의 전언에 매니저는 꼬박꼬박 출석해야 했다. 그 때문에 돌아다니지를 못해 학교 내외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원래 전학 첫날에는 아무나 설명해주라고 하지 않나? 첫날에 반장 같은 아이가 교내를 구경시켜 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층마다 있는 층 배치도를 꼭 보고 다녀야 길을 잃지 않을 수가 있었다. 이래서는 마음껏 돌아다니면서 이게 원혼인지 마물인지를 알아채지를 못 하잖아. 매니저는 과학 교과서를 챙겼다.
"아."
옆자리 책상에 부딪혔네. 매니저는 누구의 자리인지를 도통 알 수 없는 옆자리에서 흘러내린 학습지를 들어 올렸다. 1학기 성적표... 뭐야 안 나온 지 꽤 됐나 봐. 2학기 학습계획 안내서, 9월 급식표, 이건 뭐지? 두꺼운 종이, 방과 후 설문지, 『운명과 분노』어, 이건 학습지를 스테이플러로 꼽은 건 줄 알았는데 책을 프린트 한 거네? 꽤 두꺼워... 이렇게 막 프린트 해도 되는 건가? 저작권 쪽으로 문제가 없나? ‘그때조차 그녀는 이 세상에 기꺼이, 같은 일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들이란 우리를 엿 먹이기 좋아하는 존재들일 뿐. ’ 이라, 어째서인지 한 번에 눈에 확. 들어온 문장에 매니저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아, 종이 쳤잖아! 매니저는 화들짝 놀라 떨어진 학습지들을 아무렇게나 추려 옆자리 책상서랍에 넣었다. 미안, 누군지 모르는 짝아.
#2 학교의 좋은 점이라고는 정해진 시간에 일정 수준 이상인 급식이 나온다는 것 뿐이었다.
오므라이스와 오뎅탕. 생선까스와 샐러드, 그리고 후식으로는 정말로 좋아하는 키슈 로렌. 오늘은 수요일도 아닌데. 내가 고등학생 때는 이렇게나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지. 매니저는 고소(苦笑)했다. 음, 오므라이스 맛있네. 계란 부치기 힘드셨겠다. 입안에 오므라이스 큰 한 스푼을 넣어 삼키던 매니저는 슬쩍 고개를 들어 끝이 보이지 않게 길게 선 급식줄을 바라보았다.
여기 이 고등학교는 학생 수는 이 근처에 여느 학교와 비슷한 수 이지만 급식실이 터무니없이 작은 나머지, 점심시간에는 이렇게 줄이 길었고 또 급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아서 돌아다니는 미아들도 그만큼이나 많았다. 급식실이 왜 이렇게 작을까. 이곳에 파견된 일과 무언가 관련이 있는 걸까? 아니면 학교 공사 때 자본부족이나 공간부족으로... 아냐 급식실 근처는 아무것도 없던데. 왜 이렇게 작게 지었지?
전학-파견을 온 지는 3일째. 3일 동안 꾸준하게 관찰한 결과 현재 매니저가 앉아 있고 급식실에 제일 구석에 있는 4인 석의 흰색 테이블과 플라스틱으로 된 주황색 의자 3개에는 학생들이 앉는 것을 꺼리는 듯했다. 덕분에 매니저는 기다리는 일 없이 금방 점심을 먹을 수는 있었지만.
왜인지는 몰랐다. 매니저와 같이 혼자서 먹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그 애들은 서서 먹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는 매니저의 식탁으로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앉아서 인가? 아니면 너무 구석자리여서? 맞아. 걸어오는 게 조금 힘들기는 해. 냠, 키슈를 한입에 삼킨 매니저가 퇴식대를 향해 걸어갔다.
걸음마다 시선들이 느껴졌다. 아, 관심 받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3 그리고 또, 이동수업들이 꽤 많았다. 음악이나 과학, 체육 같은 것들은 그렇다고 해도 교실에서 진행하는 수업이 국어와 동아리 뿐인 건 아주 조금 신기했다. 그리고 학교에 남는 교실이 그렇게 많은 것도 신기하고. 학교 자체가 넓기도 했다. 학생들이 점점 적어져서 그런가? 아, 세월의 흐름.
후, 그렇지만 인간적으로 수학 수업 후에 바로 과학인 건 너무하지 않아? 매니저는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면서 2층에서 본관과 별관을 이어주는 구름다리를 건너갔다. 교실은 본관 3층이었는데 수학 교실과 과학 교실은 별관에만 있었다. 이런 비효율적인 교실 배치는 누가 한 걸까. 시릴이 옆에 있었다면 공간이 어쩌고 시간이 어쩌고 라며 말 할 게 뻔했다. 아, 환청이 다 들리네.
매니저는 띵, 하고 울리는 두통을 무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뭔가 파견을 와서 두통이 더 심해진 느낌이야. 원혼을 감지했을 때나... 그런 때 같은 느낌은 아닌데. 소화가 잘 되지 않았던 건가? 이따 보건실에서 소화제나 두통약을 달라고 해야겠다.
"네, 냥선배님. 지금까지 별로 특이한 점은 없었어요."
"그래... 뭐, 힘든 일이라거나 불편한 점은 없는거냥?"
"네. 저... 냥 선배님. 제가 여기에 왜 파견된 건가요? 여태껏 있던 바로는 여긴 그냥 평범한 고등학교 같아요."
"후. 궁금한 거는 이해하지만 절대로. 말해줄 수 없다냥."
"...네?"
"거기서 며칠 요양한다 생각하고 있으라냥-"
"네? 냥선배님? 어?"
#4 무전기가 삐비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냥선배의 목소리가 더 들리지 않았다. 뭐야, 이거 고장 난 거야? 여분은 학교에 안 들고 왔는데. 매니저는 신경질적으로 교복 치마 앞 주머니에 무전기를 찔러넣었다. 아니, 그리고 냥선배님도 왜 내가 파견된 이유를 왜 말씀을 안 해주시는 거야? 날 여기로 파견한 상사잖아! 뭐야, 그럼 뭔 일이 벌어질 때 까지 그냥 이 학교에서 공부나 하라는 건가? 논논이가 더 말을 조리있게 잘 하겠어. 이게 말이야 당나귀야!
오늘 되는 게 없어. 정말, 아까 체육 시간에 넘어져서 발목도 시큰거리는 데 말이야. 별관 뒤편에 있는 텃밭에서 그림자에 숨어 무전기로 보고를 하고 있던 매니저는 아무렇게나 놔두어서 흙이 묻은 그의 검은색 백팩을 집어 들었다. 금요일이라서 내일 토요방과후에 오는 것을 제외하면 7교시가 끝난 이제부터는 완전하게 매니저만의 시간이었다. 벌써 계획도 다 세워 놓았다. 토요일은 학교 갔다가 자고, 일요일은 그냥 자는 완벽한 주말 계획.
아... 호텔 근처에 당근케이크 맛집이 있다던데... 오늘 사서 호텔에서 먹을까? 이번 임무에서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호텔 객실을 생각하며 매니저는 걸음을 옮겼다. 파견 온 건 이거 하나는 좋아. 아무리 늦어도 6시 전에는 끝나잖아? 사신청이었다면... 저녁 먹고 또 일하러 갔을 텐데. 간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도 있고. 아, 그렇지만 돌아가고 싶어. 여기서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아, 머리 아파. 매니저는 관자놀이 부근을 어루만졌다. 아까 두통약까지 먹었는데 왜 또 이러지? 이틀 연속으로 약 먹은 적은 없었는데. 소화불량인가.
#5 예상치 못한 만남은 언제나처럼 당황스러웠다.
금요일 오후의 시내인 만큼 사람이 많아 역시나 인파에 휩쓸렸던 매니저는 결국에는 넘어졌고 그런 그에게 손을 내미는 그 사람은... 매니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짙은 미역을 꼭 닮은 색의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그와 같은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었고 '그때' 쓰고 있던 모자는 없어 붉게 빛나는 눈을 볼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홀릴 것 같은 기분이 들던 매니저는 처음으로 그를 만났을 때 생긴 일을 상기시키고선 정신을 잡았다.
매니저는 앞에 내밀어져 있는 희고 긴 손을 바라보았다. 그때랑 똑같잖아.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매니저는 급격하게 거세진 두통에 입을 오물거리며 조용히 그 손을 잡았다. 뭐지? 요니스가 왜 이곳에? 교복을 보니 그 학교의 학생인가? 설마 이번 파견의 목적? 그럼 왜 나를 도와준 거지? 단단히 삐어서 통증을 유발하는 오른 발목을 애써 무시해본 채 매니저는 요니스를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참 너무하네요." "요니스..." 하고 싶은 말이 혀 끝에서 맴돌았다. 요니스가 싱긋 웃고서는 살며시 잡은 매니저의 손을 놓았다. 여유롭게 어딘가를 향해 가는 요니스의 뒷모습을 보며 접어 웃어 보였던 그의 눈에 매니저는 멍하니 한참을 제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잠깐, 뭐지?
요니스 쟤는 왜 저렇게 자연스러운 거야? 누가 보면 슬프게 헤어졌던 전 애인을 장 보다가 만난 줄 알겠어. 이거, 냥선배님께 말씀 드려야겠지? 꼭 말씀 드려야지. 뭐 저런애가 있어? 하마터면 분위기 때문에 눈물 지을 뻔했네. 우리가 재회한 애틋한 사이도 아니고 분위기가 이게 뭐야. 호텔가서 무전기가 구식이라는 것과 함께 꼭 말씀드려야 겠어. 매니저는 케이크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6 매니저는 숟가락으로 푹푹 당근 케이크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퍼 입으로 집어넣었다. 호텔 밑 편의점에서 아무거나 손에 집히는 걸로 사 온 아이스크림이었는데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았다. 지나친 달달함에 두통이 스르륵 알아서 제 존재감을 지웠다. 매니저는 두 눈을 깜빡 거렸다.
아무 채널이나 틀어놓은 호텔 티브이에서는 한창 수요 미니 시리즈가 방송 중이었다. 헐, 어떻게 전개가 저런 식으로 되는 거야? 내가 써도 저거보단 나을 거야. 매니저는 여주인공이 전 화까지 본인을 괴롭힌 남주인공의 약혼자이자 본인의 이부동생의 두 손을 애틋하게 잡는 것 까지 보고는 입안에 있는 케이크를 계속 먹으며 침대 베드에 기대어 멍하게 조금 전 일어났던 일을 다시 상기시켰다.
원혼인지 마물인지 모르는 걸 잡기 위해 파견을 왔는데 거기서 요니스를 만났지. 요니스가 마물인지 살아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인지 조차도 나는 모르고, 또 걔는 나와 같은 교복을 입었어. 이곳으로 파견 된 이유가 요니스 때문인 건가?
잠깐, 요니스를 내가 혼자 어떻게 제압해? 요니스는 내 주먹으로 쓰러질 그런 애가 아닌데. 파견의 이유가 그 애 때문이었으면 한 명 정도는 같이 보내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요니스 때문에 내가 이곳에 온 게 아닌가? 그래,요니스 때문이었으면 아무리 그랬어도 나 혼자 아무말도 없이 보내지를 않았었겠지. 그럼 그 것도 해결하고 요니스 까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말도 안 돼!
매니저는 얼음찜질 중이며 차가움에 감각이 마비된 것만 같은 오른발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이걸 냥선배님께 말씀을 드려야 할까? 시내에서 요니스를 봤다고? 파견된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고? 그래야 할까? 매니저는 묶은 브레드 번에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돌렸다. 어라, 지금 이걸 왜 내가 고민하는 중이지? 매니저는 침대 옆 서랍에 넣어둔 여분의 무전기를 꺼냈다.
#7 "엠마, 2주 전에 준 곡 벌써 완곡 했니?" "네, 쌤이 오늘 오면 저 새 곡 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래? 그럼 잠깐만 기다려 봐. 이번에도 아이돌 곡으로 준다?" "아 쌤! 이번에는 드라마 OST로 하면 안 돼요? 그, 그 운명적인 그대요! 수요 미니시리즈!"
이 교실이 드럼 방과 후 전용이었구나. 드럼소리와 말 소리가 한데 어울려 꽤 시끄러웠다. 바깥에서는 작아 보였는데 드럼이 4대나 들어가네. 매니저는 전신 거울 앞에 쭈르륵 놓인 의자에 앉아 뻘쭘하게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았다. 뭐하지, 할 게 별로 없는데. 매니저처럼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있는 아이들은 반은 문제집을 풀고 반은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두 시간 동안 여기서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거지? 원래 예체능 방과 후는 이러나... 정말 할 게 하나도 없네. 어제 도서관에서 책이라도 빌릴 걸 그랬어.
이왕이면 토요방과후로는 주변을 좀 돌아다닐 수 있는 배드민턴이나 앉아서 하는 독서 토론 논술을 선호했지만 2학기 중간에 전학 온 매니저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방과후중에서 자리가 남는 게 오직 드럼 뿐이었다니. 이렇게 대기 시간이 길어서 학생들이 적었던 거구나. 이해가 가네...
후, 핸드폰으로 할 건 다 했으니까 이제 생각이나 다시 해보자. 매니저는 어젯밤에 다시 무전을 걸어 진행 상황을 전부 보고했다. 요니스에 관한 걸 제외하면 말이었다. 내가 왜 어제 요니스에 관련된 걸 말하지 않았을까? 어째서이지? 정말로 그 애 때문에 내가 여기로 파견 온 거라면 하루라도 빨리 말을 해야 했는데. 나 또 홀린 건가?
매니저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호텔에서 단단히 묶고 출발한 붕대가 어느새 느슨하게 되어 있었다. 으음, 짜증 나네. 한숨 소리를 내며 매니저는 오른 발목에 묶여 있는 붕대를 다시 묶었다. 어디를 묶어야 풀리지 않는 자리인지 알 수 없어서 두어번 감고는 리본을 만들었다. 하, 나 붕대는 정말 못 묶는구나. 어설프게 묶여 있어 금방이라도 풀어질 것 같은 붕대는 매니저는 더 손을 대지 않았다.
#8 일요일은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또 할 수 있는 일 중에서는 하고 싶은 일이 없어 매니저는 그저 푹신푹신한 킹사이즈 침대에서 누워만 있었다. 매트리스에 파묻혀질 정도로 푹신거리고 넓은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으니 점점 더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이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더욱더 경건하고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더위가 살며시 물러가고 어느새 나무에 색색옷이 입혀진 계절은 잠이 자주 왔다.
아무런 방해없이 이렇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도 생각하면 혼자 파견을 온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분명 다른 사신들과 함께왔다면 지금쯤 사고 수습이나 꼼짝없이 잡혀서 관광을 하고 있었겠지. 파견이 아니었다면 또 사신들의... 사고를 처리하고 있었겠고. 아, 상상만 해도 어깨가 절로 뻐근해졌어. 일 생각은 그만해야겠다.
아, 도대체 무슨 꿈이야 이게? 매니저는 꿈에서 온통 같은 질문에 휩싸이는 꿈을 꿨다. 매니저, 매니저, 누나, 매니저님, 매니저님, 매니저...■■. 머리도 아파져 왔다. 차라리 악몽을 꿀래... 파견에서도 사신청의 일을 해결하고 싶지 않아...
누워서 잠을 자다, 깨다를 반복하니 창 바깥으로는 어느새 노을이 져 있었다. 벌써 7시네. 점심을 안 먹었더니 배가 고픈데 저녁은 밖에서 먹어야지. 뭐 먹을까~ 매니저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간 양말 한짝을 찾아 신고는 밖으로 나섰다.
#9 쟤 왜 저기 앉아 있어? 8,200원 짜리의 계란 후라이와 미역국이 기본이며 깍두기와 단무지 같은 기본 반찬은 물론, 제육볶음까지 나오는 일반 백반을 시킨 매니저는 본인이 앉은 테이블을 건너 건너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있는 요니스의 미역색 뒷머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왜 자꾸 내 앞에 나타나는 거지? 나 잡아가 주세요~하며 시위하는 건가?
셀프인 물을 연거푸 들이마시던 매니저는 벌떡 일어나 요니스 앞자리에 착석했다. 오늘은 또 모자를 썼네? 식당 안인데? 눈을 마주치며 말 건네기를 시도 하려 했으나 실패한 매니저는 후,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왜 자꾸 제 앞에 나타나세요?"
"제가요? 제 자리 앞에 앉으신 건 매니저님 이신데요."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귀여우신 표정 해도 아닌 건 아닌 거에요."
저 사람이 지금 뭐라니? 매니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이 빨개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 아니 왜 저 말에 내 얼굴이 빨개진 거지? 어떻게 저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거야. 매니저는 미간을 찌푸리고 요니스를 보았다. 여유 있는 동작으로 물을 삼키는 요니스는 그런 매니저를 보고 실실 웃다가 입을 열었다.
"매니저님, 정해진 운명을 믿으세요?"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생뚱맞은 소리 하지 마시고 왜 자꾸 제 앞에 나-"
"날 때 부 터 모든 게 정해진 세상의 모든일이 필연적 법칙에 의해 일어난다고 생각하시냐고요."
진짜 갑자기 저게 무슨 소리야? 중간에 말이 가로막힌 매니저는 슬며시 팔을 괴었다. 운명이라, 매니저는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거니까. 그리고 태어났을 때 부 터 모든 불행과 사고가 결정된다면... 그런데 얘는 이런 말은 갑자기 왜 하는 거야.
"그야, 없지 않을까요? 내가 고르는 작은 선택으로 미래는 바뀔 수 있는 거니까요. 인과에 따라 달라지는..."
"결정론이네요?"
"결정론?"
요니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매니저는 느리게 고개를 기울었다. 언젠가 누가 이런 말을 했었는데.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생각해? 유세프 씨였던가 기이였던가... 우리가 함께하는 지금 이렇게 함께하는 시간이 만약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한다면 매니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때도 나는 '미래는 제가 개척해나가는 거에요.' 그래. 매니저는 '결정론'이구나? 아, 유세프 씨 셨나? 사감님 같기도 한데. 매니저는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파견 나가기 전에도, 그 전 파견에도, 사신들만 갔던 파견에서 받은 무전에서도 요즈음 '운명'에 대해 논하는 일들이 많았다. 전에는 단체로 카티의 별자리 잡지를 나눠 본 후에 감성에 젖어 물어본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다 똑같은 내용을 물어봤잖아? 아침조 엘부터 시작해서 새벽조 퀸시 까지. '매니저는 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라는 걸 믿는가?'
"그런 건 왜 물어 보는 거에요?"
"궁금해서요?"
"도대체 왜요?"
백반 나왔습니다. 아! 감사해요! 이런, 자리를 마음껏 바꿨는데. 매니저는 일단 숟가락을 들었다. 곧이어 요니스의 것도 나왔다. 요니스가 더 빨리 시켰는데 왜 내 게 더 빨리 나오지? 매니저는 노른자를 터뜨렸다. 반숙 좋아하세요? 네. 신기하시네. 뭐야. 그 이후로는 대화가 없었다. 둘 다 묵묵히 아래만 바라보며 밥을 먹고 있었는데 매니저와 요니스 사이로 사이다 한 캔이 스르륵 미끄러져 왔다. 둘이 연인이에요? 네, 네? 어머, 아닌가? 아직 친구 사이? 아니에요! 친구는 무슨... 아, 아직 썸 타는 중이시구나? 서비스니까 드세요. 네? 네...? 아, 아니! 잘 먹겠습니다. 어느새 사이다가 요니스의 긴 손가락으로 의해 따져 있었다. 뭐 하세요? 네? 서비스였잖아요.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연인이라는 걸 부정하셨어야죠! 뭔 상관이에요. 매니저는 마지막 깍두기 까지 입에 집어넣는 요니스를 약간의 황당을 담아 바라보았다. 자기, 단무지 드릴까요? 단무지는 남았어요. 필요 없어요!
#10 호텔에 도착한 매니저는 바로 무전기를 찾았다. 왜 내가 바로 보고를 안 했었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랬었던 거야. 과거의 자신을 책망하며 서랍 깊숙이 놓아 두었던 무전기를 꺼낸 매니저는 일말의 지체도 없이 바로 무전을 쳤다. 이제야 정신이 맑게 바뀌는 느낌이었다. 뚜, 뚜 몇 번의 지직 거리는 연결음이 들리고 냥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매니저, 무슨 일이냥?"
이런 늦은 시간에... 냥선배의 목소리의 졸음이 묻어나왔다. 이런 칼퇴근 후에 주무시고 계시던 중이셨나? 매니저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9시 밖에 안 됐는데. 팔자 좋으시네. 아, 아니 이럴 때가 아니고.
"냥선배님, 요니스를 봤어요!"
"요니스...? 그게 누구냥."
"...르젠다 호수로 자선행사 갔을 때 만난 마... 아마 마물이요. 다른 이를 현혹하고 과거를 보여주는 능력이 있었던."
냥선배님의 말이 없었다. 설마 모르시나? 에이... 설마. 르젠다 호수에서 있었던 일의 피해만 해도 얼마나 많았는데 모르시겠어? 상부에도 보고도 됬었는데. 현혹에 관한 재주가 있음. 이른 시일 안에 처리할 것. 매니저는 브레드 번에서 삐져나온 머리를 손가락으로 휘휘, 돌렸다.
"암튼 파견에서 마물을 봤다는 이야기냥?!"
모르시는구나. 매니저는 입을 합, 하고 다물었다. 모르셔서 날 이곳으로 파견하신 거 셨어. 하긴 보고서는 사감님이 직접 가서 올리셨으니까. 냥선배의 말에 긴장감이 느껴졌다... 말씀이 덜덜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안마의자 사용 중 이신가?
"네, 파견된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접촉해서 대화도 나누어봤어요. 요니스가 운명에 관한 말을 꺼냈었는-"
삐비빅. 매니저는 허망한 표정으로 무전기를 바라보았다... 무전기들은 도대체 왜 하나같이 이렇게 나약한 거지? 포탈에 집어 넣어질 때 어딘가에 부딪힌 건가. 아니면 배터리 문제? 스르륵 몸의 힘을 빼자 매니저는 침대 베드에 머리를 대고 흐물거리는, 마치 갖고 싶은 장난감을 무슨 짓을 하더라도 얻을 수 없게 된 어린 아이 같은 꼴이 되었다. 한술을 더 떠 머리까지 더 아파지자, 아니 요즘에 대체 왜 이런 거지. 두통이 왜 이렇게 심한 거야. 매니저는 베개를 들어 머리를 꼭 덮었다. 귀가 꼭 막혀 백색소음이 귀 근처에서 부산스럽게 소리를 내었다.
#11 "안녕, ■■." "하..." "왜 보자마자 한숨을 쉬고 그래."
매니저는 탄식을 흘렸다. 내 옆자리가 요니스였어? 어떻게 알았는지 본명을 잘도 입에 담는 요니스를 매니저는, "너희 둘 아는 사이였어?" "응, 꽤 각별한 사이." "뭐라고?" "아, 그럼 전학생 학교 안내는 네가 해주면 되겠네. 이따 점심시간에 갔다 와." 허. 째려보았다.
미쳤어요? 아뇨?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요. 명계인끼리. 나 참 정말 어이가 없어서... 명계인? 요니스, 마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나? 매니저는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창백하기는 했지만 명백하게 살아 숨 쉬는 요니스를 슬쩍 바라보았다. 학교에서는 모자 착용이 금지라서 그런지 요니스는 모자를 착용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왜 자꾸 쳐다봐요? ...몰라도 돼요. 진짜 명계인 인가? 그러면 잡아갈 명목이 없는데.
1교시 시작 5분 전이었다... 미술이네. 교과서를 챙겨야지. 책상서랍에 넣어놓은 교과서를 손의 감각만으로 찾던 매니저는, 아. 내 옆자리가 요니스의 자리이면 그 책은. 요니스의 것 이었던건가? 『운명과 분노』... 라는 제목이었었는데. 그러고 보니 제목 자체 부터가 운명이 들어가잖아... 운명에 한이 맺혔나? 매니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실 뒤편에서 탕탕, 사물함의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저렇게 세게 닫히면 문이 다치잖아. 책상서랍에 미술은 없었다. 사물함에 넣었었나?
매니저는 사물함에 걸린 자물쇠에 비밀번호를 풀고 유난히 긴 길이 덕분에 홀로 누워있는 미술을 꺼냈다.
"매니저님."
사물함 안으로 그늘이 졌다.
"책상 안에 들어 있던 거, 보셨어요?"
매니저는 꿀꺽, 침을 삼켰다.
"뭘, 말씀하시는 거에요?"
뒤를 돌았다. 어, 키가 꽤 크구나. 길고 구불거리는 짙은 미역색의 머리카락이 매니저의 뺨을 건드렸다. 살짝 인상을 써 찌푸려진 미간은, 아니 왜 인상을 쓰고 그래. 무섭게. 매니저도 마찬가지로 얼굴을 찌푸리며 요니스를 올려다보았다.
"아시면서 뭘 물어보세요?
"아, 제가 저번 주 목요일날 책상을 건드렸는데-"
"아, 건드리신 거에요?"
요니스가 뒤로 물러섰다. 매니저는 황당에 입을 살짝 벌렸다. 뭐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몰아세운 거야? 매니저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요니스가 우물쭈물하며 사과를 건넸다. 죄송해요. 뭐, 귀엽네... 뭐? 귀여워? 뭔 소리야 쟤가 왜 귀여워. 정신 차려.
"아니, 건드린 게 아니면 제가 왜 그 종이들을 만졌겠어요."
"제 자리니까 그러신 줄 알았죠."
쟤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내가 남의 자리를 마음대로 뒤지는 사람으로 보이는 거야? 매니저는 가라앉은 눈으로 요니스를 바라보았다. 요니스가 그제야 잘못 말한 걸 깨달았는지 입을 벌렸는데.
"말을 되게 오해 받게 하시네요? 제가 다른 사람 책상을 함부로, 그것도 일부러 보는 사람처럼 보이세요? 하,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구나!"
"아니 매니저님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가 맞는데요? 와, 진짜 어이가 없네. 나는 파견와서 당신이 여기서 학생 노릇 하면서 재미 보는 것도 몰랐고, 내 옆자리가 당신인 줄도 몰랐는데 내가 뭘 당신 책상을 뒤졌다고 그러세요? 이런 학교에 나 혼자 파견 온 것도 서러운데 30초 전만 해도 같은 명계인 끼리 친하게 지내보자~ 했으면서 뭐? 아, 건드리신 거였어요? 나는 매니저님이 내 책상을 뒤지신 줄 알았지~ 라니!"
"잠, 잠시만요. 그렇게는 말 안 했는데... 매니저님. 정말 사과할게요. 아, 제가 여기있는 걸 모르실 줄은 몰랐어요. 요즘 천계랑 명부 고위 관직자 사이에서 크루세이더를 포함한 무리들... 을 잡으려 혈안이라 제가 요즘 예민해서요. 아, 물론 저는 그런 불순한 무리가 아니에요! 아무튼 정말 죄송해요."
저는 매니저님이 저를 잡으려고 이리로 파견오신줄 알았어요, 정말 죄송해요... 요니스가 연이어 사과하는 것 같았다. 크루세이더라니? 매니저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와 멍해지는 머리를 애써 붙잡고서는, 크루세이더라면 그, 매니저는 파견 직전 보게 되었던 폐기 대상 문서를 생각해냈다. 크루세이더 및 그와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불순한 무리, 다른 지부들의 사신들이 받은 피해가 상당함. 주로 운명에 관련된 물음을 하는 것이 주로이며 천계에 반하는-
몇몇 이들의 운명이 정해진 수순으로, 대체로 절망하고 의지할 것 없는 삶처럼 흘러가는 것에 가장 큰 불만을 가지며 그걸 뒤집어놓으려고 함. 사신 및 관련자들에게 은폐 필요. 14지부 특히 언급금지.
요니스가 눈을 깜빡였다. 매니저는 진정했다. 찾지 못했던 가장 중요한 퍼즐 하나가 퍼즐판 밑에 있었던 걸 알아낸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아무 말도 없이 날 파견을 보내신 이유가 이거 때문인 거야? 아하. 그러니까 그 문서는 내가 봐서는 안되는 거였는데, 내가 그걸 본 거를 아시고 아무 곳이나 설정해 포탈로 날 보내신 거구나? 무전기 중 하나인 냥선배님의 것은 음성의 소리나 상태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삐비빅. 내가 계속 물어볼까 봐 끄신 거야? 몇몇 이들의 운명이 정해진 수순으로. 그러니까 다들 운명론을 믿느냐며 물어본 거였다. 너, 알아? 네 운명이 너로 인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이렇게 된 걸. 물론 그 보고서에는 매니저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고 있었다. 이 곳으로 파견오지만 않았더라면 매니저도 그걸 보고 놀랍다고 생각했겠지 그게 본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봤을 때만 하더라도 별 생각이 없었으니까.
매니저는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요니스가 블러로 칠한 듯이 희미하게 보였다. 종은 먼젓번에 쳤는지 교실에는 매니저와 요니스 둘 뿐 이었다. 볼이 차가웠다. 매니저는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른 하늘에 구름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 요니스가 손을 잡아 왔다. 여느 때 같았더라면 운명적인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고 말할 만큼 정말로, 좋은 날 이었다.
'세 번째 계절 > 우리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셒매니][독서의 계절] 가라앉은 가을 / 설유 (0) | 2020.09.11 |
---|---|
[유셒매니][이별&재회] 이혼 후 / 언 (0) | 2020.09.11 |
[엘매니][독서의 계절] 便紙 / 청화 (0) | 2020.09.11 |
[에단매니] [이별&재회] 단풍나무 아래에는 기사의 시체가 묻혀있다 / 익명 (0) | 2020.09.11 |
[베린매니][이별&재회] 낙엽 / 김도이 (0) | 2020.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