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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를 길들이는 방법 / 매의른
"사람이 진짜 아는 건 자기가 길들인 것뿐이야. 이제 사람들은 아무것도 알 시간이 없어. 가게에서 다 만들어진 물건을 사거든. 하지만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친구가 없지. 친구를 원한다면, 나를 길들여줘!"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
작열하던 지난여름 태양이 한껏 누그러져 부드러워지고 덥고 습하던 공기가 식어 제법 날카로워지기까지 한 날이었다. 모리는 가을 하늘처럼 파랗게 휘날린 제 머리를 정리하며 계절의 변화를 실감했다. 추위를 심하게 타는 탓에 차가운 계절이 오는 것을 달갑지 않아 하는 그였다. 그나마 남은 손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유지하려 소매를 당겨 손을 넣어보려 했지만 팔찌에 걸려 포기했다. 손을 대충 품에 욱여넣으며 장갑을 다시 끼고 다녀야겠다고 다짐했다.
장갑을 가지러 가려 잠시 하던 정원 산책을 마치고 지부에 돌아가던 중 그의 시선이 건너편 벤치에 앉아있는 따뜻한 갈색 머리칼에 닿았다. 무언가 골몰하게 읽으며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에 방해가 될까 봐 조금 망설이다 그녀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매니저님,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매니저는 은은하게 울리는 방울 소리와 나긋한 듯 어딘가 장난기가 어린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목소리는 아마도 그가 생전 있었을 사원의 향내처럼 어딘가 나른하면서도 강하기에 구별하기 쉬웠다.
"모리였구나. 날씨가 밖에서 책 읽기 좋을 것 같아서 책 읽고 있었어."
모리는 제가 아니라 누구였기를 기대한 건지 물어보고 싶어진 치기 어린 욕구를 평소와 같이 웃는 얼굴에 감추었다. 웃는 얼굴로 자신의 이런 당황스러운 감정을 감출 수 있어 안도하면서도 감추고 있는 욕심을 알아주길 바라는 위선적인 생각이 들었다.
"흠, 어떤 책이요?"
"어린 왕자. 꽤 유명한 책이라 어렸을 때 많이 읽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다시 읽고 있었어. 지금 읽으니까 새롭네."
"아, 저도 읽었던 것 같네요. 결말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작은 행성에 사는 금발 왕자가 다른 행성들의 사람들과 동물들을 만나는 이야기죠?"
"응, 맞아. 모리도 읽은 적 있구나. 어디가 가장 인상 깊었어?"
"글쎄요, 아마도 여우가 나오던 부분 아닐까요? 제일 유명하잖아요."
"하하, 의외네. 모리라면 뭔가 돈을 좋아하는 사업가가 사는 행성 편을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짓궂으시네요, 매니저님. 제가 아무리 그쪽에 밝다 해도 항상 거기에만 관심이 있진 않아요."
항상 야살스럽게 웃던 그의 눈매가 살짝 찡그려지자 매니저는 어딘가 모를 귀여움에 피식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장난이야. 그래서 왜 여우가 나오던 부분이 가장 좋았어?"
모리는 찡그렸던 미간의 긴장을 풀고 습관적으로 턱 주변에 손을 대며 잠시 침묵한 후 말문을 떼었다.
"길든다는 의미에 대해서 말하잖아요. 여우를 보다가 예전 생각이 나서 그런지 뭔가 동질감을 느꼈어요. 길들인 사람이 특별한 의미가 될 때쯤 이별이 너무 힘들어지고..."
잠시 추억에 잠긴 듯 좀처럼 보기 힘든 슬픈 얼굴을 한 그의 시선이 그의 팔찌에 내려앉았다가 다시 평소처럼 웃는 얼굴에 그 찰나의 그리운 듯한 얼굴이 다시 감추어졌다. 그는 조금 갈라지던 목소리를 한번 큼 하고 가다듬고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조금 어리석다는 생각도 했어요.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을 쉽게 믿고 길들여주기를 바라는 건지 그게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말이에요.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달라고 할 때도, 비밀을 알려줄 때도, 그가 떠날 때도 어린 왕자는 하나뿐인 그의 장미 생각뿐이거든요. 여우는 알면서도 그저 그에게 길들어서 친구가 되고 그가 떠나면 그를 그리워할 방법들을 생각하고요. 퍽 로맨틱한 청승을 떤다고 할까요."
썩 의미심장하고 심오한 대답이었다. 모리는 그의 스승에 대한 그리움을 감추려다 어느새 여우에게 이입하여 무심코 그녀를 어린 왕자로 만들어 묘한 질투와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애써 꾀를 부려 감춰둔 게 무색하게 엉겁결에 드러내 버린 이 마음을 그저 책에 대한 사설로만 생각했으면 싶다가도 기저에 숨겨둔 자신의 마음을 그녀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게 꼭 자신이 어린아이가 된 것만 같았다.
"흠. 그래서 모리는 어린 왕자가 그의 장미만 신경 썼다고 생각해?"
"모든 순간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은요."
그의 대답에 매니저는 무언가 조금 생각하는 듯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음, 내가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부분은 본질을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부분이었거든. 어쩌면 우리가 눈으로만 보는 정보보다 더 신뢰가 가는 건 마음으로 느껴질 때가 아닐까 싶어."
애매모호한 답변에 모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보이지 않는 데 그걸 어떻게 알아보고 믿죠?"
"가끔 누군가가 배려해준다거나, 신경을 써주거나 할 때 그걸 굳이 그 사람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전하고 싶은 의미를 알 수 있을 때가 있잖아. 말투는 투박해도 따뜻한 배려를 해줄 수도 있고, 말 대신 포옹이나 손을 잡아주는 거로 그 사람의 마음이 전해질 수도 있고."
"...손."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듣던 모리는 스승님이 처음 저에게 손을 잡아주던 순간이 떠올라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비록 장미를 더 신경 쓰는 것처럼 어린 왕자의 말이 적혀있을지라도 그가 여우를 특별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쏟아낸 사실은 변함이 없잖아? 그랬으니 아마도 여우도 그에게 길들여졌겠지. 여우가 길들인다는 의미를 어린 왕자에게 말해줬다는 건 어린 왕자를 만나기 전에도 누군가에게서 이미 길들어져 본 경험이 있어서 안다는 거일 테니까."
그녀 또한 어렴풋이 그가 의미한 바를 대충 짐작했다. 그녀가 그러했듯이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서로 숨은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대답에 슬며시 떠오르는 기대감에 아무렇지 않은 척 그저 떠보는 것일 뿐이라고 스스로 되뇌며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럼 어린 왕자도 여우만큼 그를 좋아했을까요?"
그의 물음에 매니저는 아마도 그가 원하는 답을 줄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에 웃으며 대답했다.
"응, 여우가 사는 행성을 떠나고 나서는 그를 내 여우라면서 굉장히 특별하게 생각하고 좋아하고 또 그리워했어. 그의 장미처럼 감정에 책임을 졌지. 서로 멀리 있더라도 그 추억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언제든 여우를 찾을 수 있게 되었고."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여우도 어린 왕자에게 특별한 존재로 사랑받았다면 좋은 결말이에요."
그는 그 대답에 제법 만족한 듯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고 그 웃음만큼은 평소처럼 속내를 감추려는 미소가 아님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어린 여우처럼 보기 드문 맑고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가을 하늘과 같이 푸른 그의 머리칼이 바람에 흐트러져 미소를 가리려 하자 매니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그의 노랗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황금빛 밀밭이 단박에 떠오른 그녀는 문득 여우가 황금빛 밀밭을 보면 어린 왕자를 떠올릴 것 같다던 말이 어쩐지 이해가 갔다. 그 손길에 모리의 귀 끝이 단풍처럼 물들었다.
"그나저나 날이 제법 쌀쌀해졌네. 진짜 가을이다. 그렇지?"
"그러네요, 바람이 제법 차가워요."
모리가 대답하며 온기가 식어 차가워진 손을 살짝 비볐다.
"아, 맞다. 모리 추위 잘 타잖아. 손 시렵겠다."
매니저는 뒤늦게 알아차려 미안한 마음에 재빨리 모리의 얼음장같이 찬 손을 따뜻한 자신의 손으로 감싸 덥혀주었다.
"난 손이 따뜻한 편이니까 모리가 손 시릴 때마다 이렇게 잡아줄게. 아니면 장갑을 하나 더 사주는 게 좋으려나?"
그녀는 항상 이런 식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로 애써 웃는 얼굴과 뻔뻔함에 감춰둔 그를 기어이 발견해 감춰둔 모습을 녹여내곤 했다. 드러난 그 자신은 볼품없이 나약하고 초라한 자신이어도 그녀라면 무언가 아무래도 좋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어리숙하더라도 제대로 녹아들기 시작한 이곳에 있는 자신과 동료 사신들, 그리고 그녀를 언젠가 스승님을 다시 만나는 날 스승님께 꼭 소개하고 싶어졌다. 이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이미 매니저에게 길들어질 대로 길들어졌음을 받아드린 모리는 그저 같이 있는 이 시간만큼은 이대로 그녀를 온전히 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아니요, 그냥 매니저님이 손잡아주시는 게 더 좋아요. 역시 이편이 좀 더 설레는 것 같아요."
"뭐야-하여간 장난치긴. 푸흐."
매니저 또한 느닷없이 능청스럽고 직설적인 그의 여우짓에 가끔 당황스럽다가도 어리광부리는 그가 꽤 재밌고 귀여워 마음대로 하게 두었다. 그녀 역시 그에게 길들어져가고 있었다. 차디차던 그의 손이 그녀의 따뜻한 손으로 제법 따뜻해진 가을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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