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연혼제/ 노연
- 어느 날의 할로윈
“성의 문을 열거라!! 사랑하는 백성들을 예로 갖추어 이틀간의 축제를 아름답게 물들여 보자꾸나!”
“기사들은 성문을 개방하라!”
앳된 목소리와 우렁찬 외침이 연이어 울려 퍼지고, 성과 마을 사이를 갈라놓고 있던 거대한 문이 폭발적인 함성과 함께 개방되었다. 얼굴만큼이나 아름다운 왕관을 쓴 남자는 낯설면서도 들뜬 얼굴로 성안을 향해 들어오는 백성들을 주시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하늘에 아름다운 풍경. 드높은 태양이 우리의 낮을 밝히고, 장막에 휩싸인 달이 우리의 밤을 비춰줄 것이니, 오늘은 결단코 찬연함으로 가득 찬 하루가 되리라. 루이는 제 옆 화분에 놓인 천수국을 어루만지곤 아름다운 풍경에 일조하기 위해 뒤돌아 사라졌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늘상 슬프지만, 그것을 겪지 않는 이는 없다. 국력이 강한 왕국의 왕도, 대지의 이름 모를 풀도 공평한 죽음을 맞는다.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닿으면 만날 것이다. 왕국 사람들은 그리 믿었다. 오늘은 연혼제(戀魂祭). 그리운 이가 그리운 이를 만나는 날이다.
루이는 아래로 내려와 자신에게 다가온 아이들의 바구니에 호박 사탕을 넣어 주며 미소를 전했다. 그대들에게 축복이 가득하길. 성 곳곳은 포근함을 풍기는 주황빛 장식품이 즐비했다. 자신이 직접 채택한 색이었다. 소외된 이들까지 모두 포용할 수 있는 따스한 색.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은 모두 그리는 이를 만나길 바라며, 혹여 그렇지 못한 자라도 편히 쉬다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성안을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루이는 신하의 부름으로 성의 뒤편으로 가 사전에 골라 놓은 가면을 썼다. 연혼제 기간엔 다양한 분장을 통해 생자와 사자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것을 행사의 일환으로 여겼다. 저승에서 온 자가 위화감 없이 섞여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가지각색으로 얼굴을 꾸며 생자와 사자를 구분할 수 없도록 함이 마뜩하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귀족이나 왕가는 가면으로 분장을 대신했다.
황금빛 테두리가 둘린 고양이 눈매를 본떠 만든 가면. 그가 아니고서야 누구도 어울리지 아니한 가면이었다. 루이는 아이들에게 나눠 줄 사탕을 소량 챙긴 뒤 기사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나왔다. 복장과 가면으로 금방 들킬 테지만, 기사가 곁에 있으면 백성들에게 다가가기 어렵기 때문에 잠시라도 눈을 피해 다닐 심산이었다.
기사들의 과한 호위도 이해 못 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불과 몇 년 전 쿠탄족의 침입으로 왕국 모든 이의 안전이 위협받았던 만큼, 경계 태세를 강화하는 것은 으레 마땅한 일이었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에 의한 위협이었을 뿐,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은 그렇지 않기에 그는 일탈로 중립을 지켰다.
나라를 혼란에 빠트린 쿠탄족은 아수라장이 된 성을 몰래 빠져나가 이웃 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한 신하 덕분에 몰아낼 수 있었다. 그자가 아니었더라면 난 두 번째 연회가 열리기 전, 한계에 다다른 몸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뒀을지도 모르지. 이름이… 나라의 은인이니 꼭 기억하겠다 다짐했건만, 이상하게 아무리 애써도 기억나지 않는다. 생김새까지도. 그자의 이름이 뭐였더라. 꽤 높은 자리까지 진급했을 터인데, 그 뒤로는 본 일이 없는 것도 이상했다.
지원군의 도움으로 우두머리를 붙잡아, 그들에게 침입을 부탁한 반역자가 누군지도 알아냈다. …레인. 자네가 그랬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어째서냐고 묻는 내 말에 레인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저 일말의 반성도 후회도 없는 얼굴로 날 쏘아보기만 했다. 그에게 후회라면 나를 좀 더 빨리 처리하지 않은 것이리라.
루이는 입가에 걸린 쓴웃음을 힘들게 삼켜냈다. 사정이 있었겠지. 모두를 위험에 빠트린 그를 용서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세상을 떠난 자는 말이 없고, 남겨진 자는 들을 수 없으니 그럴 거라 믿을 수밖에.
사색에 잠긴 채 성 밖을 거닐던 루이는 어디선가 들리는 쿵― 소리에 주변을 살폈다. 소리가 날카롭지 않고 뭉툭한 것으로 보아 나무나 풀 따위가 무성한 곳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한 곳밖에 없지. 루이는 곧장 걸음을 옮겨 성 한 켠에 조성해 둔 뜰로 향했다.
푸릇한 수풀 사이로 보이는 나무의 기둥보다는 옅은 머리 하나. 거기 누구 있느냐. 차분한 음성에 갈색 머리가 들썩였다. 잠깐의 움직임이 멎고 천천히 들린 고개는 루이와 얼굴을 마주했다. …여인이로군. 루이는 여자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잡고 일어나시게. 그러나 허공에 위치한 손은 바른 짝을 만나지 못했다.
“…루이?”
“…음? 그렇다네.”
“어, 왕관?”
“그래, 이것은 왕관이지?”
루이의 차림새를 하나하나 뜯어보던 여자는 이내 제 실수를 알아챈 듯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죄, 죄송합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제가 정신이 혼미한 나머지…!! 루이는 다시금 손을 뻗었다. 괜찮으니 이 손을 잡고 일어나게나. 루이의 눈을 마주친 여자는 천천히 허공에 내밀어진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런데 그대는 일반 백성들과는 다르게 얼굴에 천을 두르고 있군. 루이가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살피자 여자는 황급히 제 얼굴을 가렸다. 뭐? 다 이런 거 아니었어?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얼굴에 분장을 했을 뿐, 자신과 같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여자는 당황한 감정을 숨기고 군데군데 놓인 테이블 위의 다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저, 저는… 이… 축제를 총괄 관리하는 지배인… 그러니까, 매니저인 터라, 혹여 문제가 생기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얼굴은 가리되 분장은 않기로 했습니다.”
“오, 그렇군! 그대가 이번 연혼제를 통괄하는 자였다니, 내 미처 알아보지 못했네.”
당연하지. 거짓말이니까. 여자는 괜찮다는 뜻으로 가볍게 눈을 접어 보였다. 변한 거 하나 없구나. 동그랗게 뜬 눈을 곧 완만한 곡선으로 휘어 웃는 저 모습. 정말 루이다. 그토록 그리던 루이가 눈앞에 있다.
당장이라도 그의 몸을 그러안고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곳에서의 그는 한 나라를 통치하고 수많은 백성을 책임지는 왕의 자리에 오른 자. 더 이상 14 지부의 왕자를 담당하던 루이는 없었다.
“그런데 그대의 목소리가 묘하게 낯이 익은데, 나를 아는 일이 없는가?”
“…살아있는 것들의 소리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연혼제가 열리는 시기는 저녁이 이른 가을날. 무더운 계절을 지나 낮과 밤의 길이가 서서히 바뀌는 때다. 당신이 눈을 감을 때와 같은 어둠으로 채우고, 어둠에서 느꼈을 고독을 달래려 빛이 담긴 등을 띄운다.
청연한 하늘은 어느새 누릇누릇 익어갔다. 그가 간택한 색이 하늘에도 전해졌음이 틀림없다. 루이와 여자는 자잘한 소음이 깔린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여자는 그것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애가 탔다. 잘 지내나 확인하고 남모르게 사라지려고 했더니만, 들킨 것도 모자라 같이 걷게 되다니.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도 같이 가도록 하지.’
‘네?!’
‘왕은 언제나 백성을 보살펴야 하는 법. 사랑하는 백성들이 1년에 한 번뿐인 연혼제를 잘 즐기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나. 연혼제에 대해선 그대가 나보다 견문이 넓을 테니, 그대만 괜찮다면 동행하고 싶네만.’
타당한 이유 없이 그의 청을 거절할 순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왕이 아닌가. 여자는 눈물을 머금고 루이를 안내했다. 나도 모르는데 어떡하지. 애초에 분장부터가 꽝이었다. 왕족은 가면을 쓴다길래 일반 백성들은 천 같은 걸 두를 줄 알았더니, 아예 분장을 하는 거였잖아. 리히트한테 가면 빌려왔으면 더 큰일 날 뻔했네.
나라는 건재하다. 루이도 무사하다. 테오의 보고로 알고 있던 사실임에도 제 눈으로 확인하니 더욱 안심이 되었다. 할로윈 얘기가 나오자 제 나라에도 그런 것이 있다고, 왕국에 존재하는 몇 없는 축제라 기억한다며 즐겁게 얘기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했다. 신이 나 이것저것 얘기해준 덕분에 이렇게 다시 만날 방법도 강구할 수 있었지.
연혼제. 사자를 기리는 생자들의 제사.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이들은 깊은 슬픔 대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를 택했다. 이별 후에 찾아올 재회를 기다리고, 그때가 오면 최선을 다해 기뻐하고 슬퍼하면 된다.
‘보이지 않는다고 잊히는 것은 아니라네. 마음에 담아 그리워하고 있지.’
모두가 나를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왕자의 바람은, 단순한 기억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훗날 자신이 이곳을 떠나더라도 또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려달라는 희원과도 같았다. 하나둘 켜지는 등 아래 웃고 있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간만에 만나는 이에게 무어라 말할까 긴장하던 어제도 잠시, 건네지 못할 말을 삼키고 환히 웃어 보였다. 같이 있다는 믿음이면 충분했다.
“다들 행복해 보이네요.”
“느핫핫핫! 이 루이가 사랑으로 통치하고 있으니 백성들이 행복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 더군다나 오늘은 좋은 날이지 않으냐.”
“네. 그래선지 폐하도 행복해 보이세요.”
“그럴 수밖에. 사랑하는 것들이 한데 모여 있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내가 오랜 시간 꿈꿔왔던 일이기도 하기에 더욱더 그렇다네.”
왕의 꿈이라. 의아한 표정을 지은 여자의 얼굴 위로 말이 얹어졌다.
“그대는 쿠탄족이 침입했을 때를 기억하는가. 혼란으로 뒤덮인 백성들을 보며, 나는 굳게 다짐했네. 어떤 일이 있어도 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지키겠다고.”
“…….”
“나에겐 백성들이 전부이니 말일세.”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은 평소에도 그런 웃음을 많이 지어봤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기념일이 아니라도 폐하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지내는 백성들은 매일이 좋은 날 아닐까요?”
“그대는 정녕 말로 꽃을 피워내는 자로군. 그렇게 여겨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루이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여자의 눈을 얼마간 마주하곤,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앞장서 걸었다. 참으로 웃긴 일이다. 왜 그 기억이 떠올랐을까.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꽃과 같이 아름답지만, 꽃처럼 시들어 버리진 말아 주세요. 장차 왕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사랑해 주세요.’
나는 그런 왕이 되었는가. 변함없이 백성들을 사랑하는 왕이, 과연 되었을까. 루이는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닫지 않는 곳까지 달하고서야 걸음을 멈춰 세웠다. 여자는 이곳이 어디인지,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꽤 오래전부터 맡아온, 그러나 이제는 풍기지 않는 익숙한 향. …아름답네요.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지 않은 정원엔 노을의 그것보다도 붉은 장미가 즐비했다.
루이는 그것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을 골라 여자에게 건넸다. 그대에게 바치는 선물이네. 여자는 제 앞에 놓인 장미를 선뜻 받지 못했다. …아, 이건. 사양하지 않아도 돼. 아니, 사양이 아니라…. 응? …가시가. …가시? 네… 가시가 있어서 받기가 좀….
루이의 녹안이 온전한 원형을 드러냈다. 둥그렇게 커진 눈은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안정을 되찾았다. 이런, 내가 무심했군. 정원의 장미는 언제든 나눠줄 수 있도록 매일 관리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다정한 미소였다. 여자는 그제야 머뭇거리던 팔을 뻗어 장미를 받아 들었다.
루이에게 받는 꽃이 얼마 만이지. 꽃을 받은 순간, 아주 잠시나마 그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침이면 당연한 장미 향이 코를 간질이고, 그가 지나간 자리엔 발자국 대신 꽃잎이 떨어져 있던. 사신으로서 존재가 당연하던 때. …제각각 무기를 들고 쫓아가는 에단과 테오를 말리느라 아침마다 진이 빠졌었지.
“꽃을 아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군.”
“사랑스러운 사람이 생각나서요. 장미를 좋아했거든요.”
“그대가 어여삐 여기다니, 그자는 참으로 복이 많구나.”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하하.”
월출한 하늘 위로 성대한 폭죽이 터졌다. 어느덧 어둠에 잠식된 시야가 일순 밝아졌다. 얼굴 가득 불꽃의 푸른빛을 담은 루이가 여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곧 저녁 행사가 시작이라지? 여자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흐름상 저 폭죽이 그 시작을 알리는 포고이리라.
“그대에겐 오늘을 함께할 그리운 자가 있는가?”
“…….”
“…….”
“네. 꽤 오랜 시간 그리워하고 그린 사람이에요.”
“그대는 소중히 여기는 이가 많구나. 베풀 줄 아는 자는 돌려받기 마련이지. 틀림없이 그대가 소중히 여기는 자도 그대를 소중하게 여길 거야.”
“폐하는 그리운 분이 계신가요?”
“이 몸 말인가? 느핫핫핫! 이 몸이 그리워하는 자는 없다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모두 이곳에 있기 때문이지!”
절로 내려가는 눈꼬리는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여자는 저도 모르게 실망했다. 그의 기억이 말끔히 지워진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일 처리가 완벽했다는 증거이기도 한데 어째선지 자꾸만 슬퍼졌다. 오히려 기억하면 큰일이잖아. 이러지 말자.
“…그러시군요. 하하,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음? 그대. 안색이 급격히 나빠진 것 같네만.”
“…그럼 반대로 누군가가 폐하를 그리워하는 상황이 된다면, 어떤 왕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기억이라… 글쎄…. 기왕이면 좋은 수식어가 붙길 바라네만, 백성들이 나를 기억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족하네.”
가끔 그는 이런 말을 내뱉었다. 그대는 나처럼 아름다운 왕자를 본다면 잊을 수 있겠는가? 곧바로 농조 짙은 목소리가 따라붙기 일쑤였으나 꾸밈은 없었다. 그에 여자는 이렇게 응하곤 했다. 루이 같은 왕자가 있다면 평생 잊을 수 없겠지. 그 말 역시 거짓되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왔지 않나. 어느새 왕이 되어버린 왕자가 있는 곳으로. 다만 여자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아름다운 왕자를 잊을 순 없지만 아름다운 왕자는 그렇지 않은 자들을 잊었다는 것이었다.
조금은 기대했었다. 낯이 익다는 말을 들었을 땐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주변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잘 닦아낸 보석과도 같은 눈동자를 마주했을 땐 드디어 날 알아보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와- 상부에서 일 처리를 엄청 잘했나 보네. 기쁘고도 슬픈 일이었다.
대답 없는 여자의 옷 사이로 괴상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 …리냥! 여자는 제 허리 쪽을 보더니, 이어 작게 “아이고, 들켰다” 하며 몸을 움찔했다. 하긴 여기로 온 지 좀 됐지. 슬슬 가봐야겠네. 여자는 고개를 들어 루이의 눈을 마주한 뒤 살풋 웃어 보였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를 찾는 분이 계셔서요.”
“…아, 그래. 그렇다면 가 봐야지.”
그런데 지금 분명 냥… 이라고. 눈매가 살짝 올라간 사내가 고양이 가면을 쓰고 고양이의 언어를 흉내 내니 그 모습은 상당히 절묘하면서도 꽤나 어울렸다. 여자는 루이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면 좀 많이 혼나겠는데. 청소로는 안 끝나겠지? 으으- 그래도 괜찮아. 이렇게 봤으니까.
루이는 멀어지는 여자를 뒷모습을 꼿꼿이 응시했다. 해가 저물도록 함께했건만, 이름 하나 듣지 못했다. 저 모습을 다신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 루이는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런 적이 또 한 번 있었지. 쿠탄족의 침입을 몰아내고 성대한 파티가 열렸던 그날.
‘그대가 우리 왕국의 영웅이네.’
‘아니에요.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오늘 이 자리에서 백성들에게 그대의 공을 알리고 소개하고자 하네만, 어떻게 생각하는가?’
‘네? 그건 안 되는데… 매니저님이 절대 알려져선 안 된다고….’
‘그대?’
‘포도주가 떨어졌네요. 새로 가져다드릴게요.’
그리고 사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분명 같은 공간에 있었을 터인데,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누구도 사내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었는데도 말이다. 마치 신의 놀음에 제대로 놀아난 기분이었다. 조명 아래 단정한 머리를 걸음에 맞춰 살랑이던 사내는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흩날리는 머리의 색이 비슷해서인가, 여자에게도 자꾸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연혼제 때문인지 여자 때문인지 오늘따라 제 머릿속 잊고 있던 기억들이 툭하면 솟아오른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끌고 온 저 자가 내가 그리워하는 자인가. 루이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음을 깨닫고 실소를 터트렸다. 나도 참 별생각을.
이제 그만 시선을 돌리려는 루이의 시야에 불현듯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잘 가던 걸음을 돌려 루이를 마주 본 것이다. 왕자님! 형체를 드러낸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했다. 여자는 그런 루이의 반응 따윈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내년에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리곤 다시 걸음을 재촉. 역시 루이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는 행동이었다.
루이는 크게 소리쳐야만 간신히 들릴 거리에서 조용히 읊조렸다. …그래. 생각해 보니 여자와 함께하며 연상된 기억들은 모두 과거 왕자 시절이었다. 루이는 실로 오랜만에 듣는 왕자 소리가 새삼스러우면서 반가웠다. 여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기에 더욱 그런 것도 같았다. 오늘이 지나고 여인을 잊는다면 그때는 정말 그리워하는 자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그대를 만나게 될 수 없는 날에는… 그대를 그리워할 날이 오겠지?’
…뭐지, 내가 저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 언뜻 떠오른 기억에 무표정한 얼굴로 모퉁이를 주시한 루이는 어느덧 사라진 여자의 모습에 시선을 거뒀다. 정말이지 기묘한 날이야.
“아, 루이 초상화 보고 가야 하는데!”
무전기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던 여자는 불쑥 떠오른 생각에 아쉬움이 남는 눈빛으로 불빛이 가득 찬 성을 바라봤다. 저 안에 있을 텐데…. 루이가 그렇게 기대하던 초상화. 매니저, 듣고 있어? 곧 포탈이 열릴 거야. 내가 알려준 자리에 대기하고 있지? 여자는 무전기로 흘러나오는 소리에도 성에서 눈길을 떼지 않다 이내 결심한 듯 대답했다.
“응. 대기하고 있어.”
내년에 또 올게.
오늘은 연혼제. 그리운 이가 그리운 이를 만나는 날이다. 간혹 그곳엔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섞여 들어온, 사자가 아닌 것들도 있다고 한다.
'세 번째 계절 > 우리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아매니][이별&재회] 날 잊어줘 / 유설 (0) | 2020.09.20 |
---|---|
[나인매니][이별&재회] 너를 위한 이별 / 루베아 (0) | 2020.09.20 |
[라이매니][자유주제] 놀이공원 / 라일락 (0) | 2020.09.20 |
[데이매니][이별&재회] 미련의 잔재 / 익명 (0) | 2020.09.20 |
[노아매니][이별&재회] 첫사랑의 법칙 / 키즈 (0) | 2020.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