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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너를 많이 좋아했어. 잘 지내.
첫사랑이었다. 이별을 고한 건 내 쪽이면서도 그날 밤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제일 친한 친구에게 문자를 남겼다. 나 헤어졌어. 바로 전화가 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끅끅거리며 이야기를 토해내는 나에게 친구가 말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더라.
첫사랑의 법칙 / 키즈
왜 이렇게 되었더라. 수강신청을 잘못했는지 2학년 수업을 홀로 듣는 신입생을 챙겨준 것이 계기였지. 지금은 아끼는 후배가 되었다. 시간표가 맞으면 점심도 같이 먹는. 오므라이스를 먹을까 우동을 먹을까 물어봤으면서 어째 돈가스를 썰고 있다. 참 유쾌하다니까. 그 유쾌한 후배가 깨끗하게 비운 접시 옆에 수저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언니, 과팅 생각 있어요?"
"과팅?"
나 삼학년인데? 과팅은 신입생 때나 하는 거 아니야? 어리둥절하게 반문하자 까르르 웃는다. 아이, 나도 이학년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그렇다. 이제는 신입생이 아닌 후배가 자초지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지난 학기 교양에서 조별 과제로 만난 남자애가 썩 괜찮아서 친해졌고 연락도 계속하는데 - 이성적 호감은 전혀 없고 친구로서 좋은 애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 어쩌다 보니 미팅 과팅 이야기가 나왔고 해본 적 없다고 하니 자기도 그렇다고, 그래도 한 번은 해보고 졸업해야 하는 거 아니냐 같이 하자 말이 나와서 사람을 모으는 중이란다.
"근데 걔가 자기랑 친한 형 하나 부른다고, 삼학년. 삼학년 하니까 언니 생각 나가지구요. 언니도 과팅 이런 거 안 해봤을 거 같아서."
"안 해보긴 했는데……."
"그럼 같이 나가요! 과팅은 뭐 비장하게 애인 만들러 나가는 거 아니고 그냥 술 한 잔 같이 하고 친구 먹으려는 거죠."
"와, 말하는 것 봐라. 너 과팅 처음 맞아?"
"알면서잉."
같이 할 거죠? 응? 내가 한 숟가락 남은 밥을 씹어 삼키는 동안 후배는 과장스럽게 손을 모으고 부탁하는 자세를 취했다. 음…… 글쎄. 아~ 언니~ 다른 때라면 조금 더 고민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2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이 여유로웠고,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과팅을 기대하는 후배가 귀엽기도 했고, 저 말고도 삼학년이 나온다고 하고, 정말 솔직한 심정으로 과팅 같은 거 해보고 싶었어서…… 그래, 한 번쯤은. 가벼운 마음으로 오케이 했었다.
"앗싸~ 그럼 톡방 파면 초대할게요!"
누가 나오는지 알았다면 한다고 안 했을 텐데.
톡방에서 이름만 봤을 때는 에이 설마 했다. 흔한 이름이니까. 대화라고는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한 것밖에 없었고. 프로필 사진도 기본 이미지였다. - 나중에 들은 건데 과팅이나 미팅으로 톡방을 팠을 때는 자기 얼굴을 프사로 하는 것이 매너란다. 이번 일을 겪고 나서 다른 의미로 격하게 공감했다. - 걔 말로는 진짜 잘생겼대요. 경행남신으로 대숲에도 자주 올라온다는데? 궁금하면 찾아봐요. 경찰행정. 경찰이 꿈이었던 누가 생각나긴 했지만 SNS를 안 해서 대나무숲을 찾아보진 않았다.
과팅 당일, 상대 쪽에서 먼저 자리를 잡아두었다 연락이 와서 상대 얼굴을 아는 후배 뒤를 졸졸 따라갔다. 가는 동안 후배가 처음에는 사대사를 생각했으나 좋은 술집이 자리가 너무 좁아 삼대삼이 되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너 어차피 나랑 언니 말고 더 부를 사람 없잖아, 같이 온 다른 후배가 깔깔 웃었다.
"여기야!"
"헬로. 우리 왔다. 안녕하세요."
"야, 형, 경영학과 왔어. 안녕하세요! 편하게 앉으세요."
다행히 후배의 '교양 같이 들으면서 친해진 걔'는 통로 쪽에 앉아 찾기 수월했다. 걔가 후배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고 웃으며 반겨주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미 구면인 둘을 제외하고 어색한 인사가 오갔다. 아무래도 통로 쪽에 앉은 걔와 후배를 마주 보게 앉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안쪽으로 들어와 앉았다. 걔가 편하게 대하는 걸 보아 그 바로 옆에 앉은 사람도 이학년인 것 같고. 이학년끼리 놀게 자리 잘 잡은 거 맞지? 혼자 속으로 뿌듯해하며 삼학년일 제 앞의 상대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하세요."
가게 조명은 꽤 어두웠기에 안쪽에 앉은 사람은 자리를 잡고 나서야 얼굴이 보였다. 만약 통로 쪽에 앉았으면 벌떡 일어나 그대로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럼 대나무숲에 올라갔으려나. 'ㄱㅇ학과 M씨 과팅 상대 얼굴 보고 도망감' 이렇게? 뭐 후배가 교양 같이 들으면서 친해진 걔 좋은 애야, 라고 했으니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너…… 너?!"
분명 낯선 목소리와 얼굴인데 낯설지가 않다. 아는 건 더 앳된 목소리다. 얼굴선도 더 얇고. 그러나 기억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와 선이 굵은 얼굴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삿대질을 하며 튀어나온 외침에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미 시선은 쏠렸다. 손가락이 가리킨 상대가 멋쩍게 머리를 만지며 입을 열었다.
"하하, 오랜만이야. 아니지, 처음 뵙겠습니다?"
아, 제발. 많이 변했으면서 어딘가 맹하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노아 카인드.
중학생 때, 그러니까 아직 어리던 나의…… 첫사랑.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 올라갈 때였나. 마음이 있던 남자애에게 고백을 받았다. 노아 카인드. 아직 미성숙한 얼굴로도 알음알음 잘생겼다 유명하던 애. 무술을 배운다더니 그 영향인지 또래보다 키가 크고 손이 단단하던 애. 체육시간에 팀별 대항전을 하면 서로 데려가려고 난리던 애. 그에 비해 나는 편식이 심해서 키도 작고 깡마른 데다 체육은 젬병이고, 당시에는 낯가림까지 심해서 그런 애가 있었나? 하는 애.
중학교 2학년 어느 가을, 그날의 체육은 짝피구. 우연히 짝이 된 노아 덕분에 처음으로 피구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날이었다. 제게 날아오는 공을 모두 막고 결국 승리까지 따낸 노아는 오히려 내 덕분이라며 다정하게 웃었다. 나는 옷깃을 붙잡고 있던 것이 전부였는데.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느라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짝사랑을 시작했었다.
학년이 바뀌는 날, 언뜻 들은 노아는 3-B반. 제 통지표에 적힌 것은 3-A반. 갈라진 반 배정에 속으로 눈물을 삼키고 있는데 노아가 다가왔다. 몇 반이야? 나한테 묻는 거야? 응. 나는 A반인데…… 노아 너는? 아…… 나는 B반이야, 다른 반이네, 아쉽다. 왜 아쉬운데?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인데 노아가 속마음을 들었던 걸까.
다른 반이면 자리 바꿔달라고 못하잖아. 응? 너랑 가까이 앉으려고 매번 애들한테 자리 바꿔달라 했는데. 응? 너랑 가깝고 싶다는 말이야. 응…… 응? 다른 반이어도 가까울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네가 허락해 줄지 모르겠네. 뭔데…?
"…… 나랑 사귀어 줄래?"
너를 좋아해. 지금 생각해보니 유치한 고백이었는데 그때는 엄청 설렜었다. 내가 좋아하는 애가 나를 좋아한다. 그 사실이 너무 기적 같았다.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던가? 그건 미화된 기억이다. 세차게 끄덕였던 것 같다. 부끄럽게도.
우리 말고도 커플은 제법 있었지만 금방 헤어져서, 한 학년 내내 사귄 건 우리가 유일했다. 공식 1호로 불리면서 - 진짜 1호는 따로 있었는데 3학년이 되자마자 깨져 우리가 이어받았다 - 선생님들까지 인정한 커플이었다. 제법 거리가 있는 고등학교로 갈라지면서 도저히 장거리 연애를 할 자신이 없어 헤어진 사이지만, 좋은 추억으로 남은…….
…… 추억으로 남아야 했는데. 왜 눈앞에서 추억이 살아 움직이지. 꿈이면 깨어나라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싶었다.
과팅이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다. 자리가 좁아 사대사를 삼대삼으로 만든 좋은 술집의 안주는 맛있었으나 이게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둘이 아는 사이냐는 물음에 중학교 동창이라고 대답한 기억은 있는데. 우리가 그냥 동창이었어요? 노아가 그리 말해서 말을 돌리려고 애쓰기도 했고. 중학교 동창인데 왜 존댓말을 해요? 음, 과팅 상대에 대한 예의? 노아 선배 웃기다. 그러게. 깔깔. 웃긴 대답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그냥 동창이냐는 노아의 말을 흐지부지 넘길 기회라 따라 웃었다. 아하하.
그 뒤로는 술 게임을 열심히 했다. 그러나 목요일이었고 여섯 중 다섯이 금요일 수업이 있었다. 심지어 둘은 1교시였다. 다들 내일을 위해 걸어서 집에 들어가자는 말에 동의했기 때문에 후반에는 술 대신 물을 들이켜며 게임을 했다. 덕분에 안쪽에 앉은 나는 화장실을 가느라 고역이었다. 막차 시간 때문에 열한시쯤 파했다. 일곱시에 만났으니 네 시간을 논 것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일단 나는 네 시간이 사십 시간 같았다. 노아 때문에.
다행히 나는 금요일 1교시 수업이 아닌 11시 수업이었다. 덕분에 잠도 충분히 잤고, 술에 비해 물을 왕창 마셔서인지 숙취는 덜하다. 그러나 오랜만에 몸에 알코올이 들어온 자극은 남아있었다. 강의 시작까지 여유가 있어 좀 쉴까, 가방을 옆에 걸고 책상 위로 엎어지려는 찰나 같이 수업을 듣는 후배가 쪼르르 달려와 옆자리에 앉았다. 저보다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쌩쌩한 낯빛이다. 너는 숙취 없어? 네 없어요. 좋겠다. 히히. 후배는 시답잖은 질문에 대답하다 퍼뜩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니 그것보다 언니! 대박! 이거 봐요!"
갑자기 눈앞에 들이밀어진 것은 스마트폰 액정이었다. 까만 액정에 제 얼굴이 비쳤다. 응…… 내 얼굴 대박이네. 헉! 그게 아니고요! 장난이야. 허겁지겁 잠금을 풀자 화면이 파랗게 올라왔다. 나 빼고 다 하는 SNS다.
사신대학교 대나무숲 #200910번째외침
어제저녁 14비어에서 여자셋 남자셋이서 술 마시던 테이블 중에 자주색 머리 남자분! 과팅?하시던 것 같은데... 경행이라 소개하시는 거 들었어요ㅠ 혹시 과팅 잘 안됐으면 연락해도 될까요?
어제저녁 14비어, 우리는 거기에 있었다. 여자 셋 남자 셋, 우리도 여자 셋 남자 셋이었고. 자주색 머리 남자분, 응, 우리 중에 있었지. 과팅, 우리가 한 거 맞고. 경행, 그 자주색 머리 남자분 경찰행정학과 맞다.
"우와. 그냥 노아…… 얘기네."
"아니아니아니 언니, 댓글까지 봐요."
댓글까지 보라고? 아래 옆에 작게 숨어있는 '댓글' 글자를 누르자 로딩을 알리는 점점점이 뜨더니 말풍선이 좌르륵 올라온다.
하나
@두리 어제 14비어 그 사람 경행남신 맞다니까
경행남신후배
@노아 이 형입니다
시안
@노아 또 너냐? (♡1)
노아
아, 과팅 상대 중에 잘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미안해요. (♡7)
댓글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노아 얘도 SNS를 하는구나, 였다. 그다음으로 든 생각은…… 옆에서 온몸으로 후배가 오두방정을 떠는 바람에 정신 사나워 잊어버렸다.
"웬일이야! 잘해보고 싶은 사람 백퍼 언니예요!"
"아닐 거야."
"에이, 어제 노아 선배가 언니 엄청 티 나게 챙겼거든요?"
이미 예전에 헤어져서 그런 거 아냐. 뒷말을 삼켰더니 후배는 무언이 긍정인 줄 알고 조잘조잘 잘도 말한다. 언니 잔에 물도 계속 채워주고, 언니가 냅킨 찾을 때 냅킨 언니 쪽으로 밀어주고, 언니 화장실 가려고 할 때 테이블도 당겨주던데요?! 너네였어도 해줬을걸. 노아가 원래 친절이 몸에 배서 그래. 중학생 때도 그랬어. 그럼 중학생 때부터 언니를 좋아한 거 아닐까요?! 꺄! 중학생 때는 서로 좋아했으니 반은 맞는 말이다. 어차피 과팅도 끝나 다시 볼 일도 없는데 그냥 헤어진 사이라고 말할까? 어제야 술자린데 분위기 불편할까 입 다문 거였으니까. 그래, 말하자. 저기 있잖아. 넹? 사실은……. 타이밍의 신이 있다면 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했다. 벌컥 문이 열리고 교수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이런. 칠판 위에 걸린 시계는 어느덧 11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말 칼 같은 교수님이다. 별거 아냐, 강의 끝나고 말할게. 그래요. 한 시간 십오 분 수업은 평소처럼 지루했다.
정확히 12시 15분에 강의가 끝났다. 교수님, 정말 시간 꽉꽉 채워서 수업하시는군요. 내 다음 수업은 2시 반. 후배는 1시. 밥 먹을 시간이 촉박해 얼른 움직여야 했다. 가방에 필통과 교재를 쑤셔 넣으며 물었다. 학식 먹을 거지? 대답이 없다. 편의점이 나아? 다르게 물었는데 이번에도 대답은 없고 대신 내 어깨를 툭 쳤다.
"헐. 언니."
"왜?"
"저기에."
후배가 손가락으로 슬쩍 강의실 앞문을 가리켰다. 강의실을 빠져나가고 들어오느라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 우뚝 가만히 서있는 사람은 눈에 띄었다. 자주색 머리 남자분. 대나무숲에서는 그렇게 불렀지. 눈이 마주치자 자주색 머리카락을 살랑이며 손을 흔드는 남자. 노아 카인드였다. 잘못 본 건가? 금요일 공강이라는 사람이 왜 학교에 있는데. 거기다 경찰행정이면서 경영학과 강의실에. 안타깝게도 잘못 본 건 아닌가 보다. 똑바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가 환각이 아니라면.
"안녕. 수업 끝났어요? 친구도 안녕하세요."
"…… 안녕."
"안녕하세요, 노아 선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제 유일하게 금공강이라 모두의 부러움을 샀으면서!"
"우리 톡방에서 시간표 교환했었잖아요. 보니까 12시에 끝나고 다음은 2시 반 수업이길래. 오랜만에 재회한 건데 점심이라도 같이 먹을까 해서요. 물론 선약이 없다면. 친구도 같이 갈래요?"
나한테 SNS 대나무숲을 보여주고 노아가 말한 '잘해보고 싶은 사람'을 멋대로 나로 확정한 장본인이 실실거리며 웃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어째 빗나가질 않는다. 선약이 있어서 안 되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선수를 빼앗겼다. 헤어진 사이라고 진작 말할걸!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아~ 언니 원래 금요일은 혼자 먹어요! 제가 1시 수업이라! 촉박해서! 끝나고 먹으려고요! 두 분이서 드세요!"
"그래? 아쉽다. 친구도 다음에 같이 먹어요."
"넵!"
아니, 너 학식 15분이면 다 먹잖아! 금요일에 우리 항상 같이 점심 먹잖아! 아연해 말문이 막혀 눈으로 쏘아봤다. 우리가 알고 지낸 지 일 년이 넘었는데 이 정도는 통하리라 믿는다, 후배님. 그 후배님은 이쪽을 보더니 뻐끔뻐끔 입 모양으로 말한다. 눈치 있게 빠져줄게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 지금 눈치 하나도 없어요! 뭐가 그리 뿌듯한지 윙크까지 찡긋해 보이곤 강의실을 빠져나간다.
둘만 남으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했나. 노아 얘는 왜 나랑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 걸까. 보통 중학생 때 사귀다 헤어진 사람이랑 대학생이 되어 재회하면 같이 점심을 먹나요? 검색포털 지식is에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아, 상상 속에서 답변이 달렸다. Best 답변. 미쳤어요? 그렇군. 노아 카인드는 미쳤나 보다.
"어디 갈래요? 나는 다 잘 먹어."
"나 지금 밥 먹으면 체할 것 같은데……."
"체하면 안 되는데. 음, 그럼 가볍게 팬케이크 먹으러 갈까요? 좋아하잖아."
"헉. 나 체할 것 같다고 입으로 말했니?"
"응."
여전하네. 옛날에도 가끔 생각만 한다는 걸 소리 내서 말했잖아요. 내가 그랬어? 그랬어. 나는 몰랐는데. 나는 알았는데? …… 너도 별로 안 변했어. 그래요? 내가 어떤데? 뻔뻔해. 하하, 지금 상황은 조금 인정하지만…… - '알고 있어?!' - 나 중학생 때도 뻔뻔했던가? 왕뻔뻔했지. 와, 어제오늘 중에 제일 진심인 표정이었어. 아, 어제 하니까, 어제 그 자리에서 딱 마주치고 생각한 건데 어딘가 맹한 것도 그대로더라 너. 나 맹해? 응, 뭐랄까 맹-했지. 재밌다, 나 그대로인 점 또 없어요? 또? 음…… 아.
"…… 긴장을 잘 풀어주는 거. 방금까지 불편해서 체할 것 같았는데 얘기하다 보니 괜찮아졌어."
"다행이다. 그럼 밥 먹으러 갈까요?"
"참나. 그래요, 왕뻔뻔씨."
"하하."
말렸다. 말려들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세상을 누구보다 불신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나 사실 단순한가? 회유도 잘 당하고? 몇 안 되는 친한 후배고 동기고 다들 내게 옥장판 사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하는 이유를 알아버린 것 같다. 아까까지만 해도 불편해 죽을 것 같던 전 남친 맞은편에서 아무렇지 않게 라자냐를 떠먹으며 생각했다. 늘 가던 먹자골목 보다 조금 더 구석으로 들어갔더니 나온 파스타집은 입맛을 딱 사로잡았다. 근처에 이렇게 취향인 파스타집이 있는 줄 몰랐는데. 학교 삼 년 헛 다녔다.
여기는 어떻게 알았어? 어쩌다 보니. 자주 와? 제법? 너는 파스타보다 밥류 좋아했잖아, 맞다, 아직도 새우볶음밥 좋아해? 응. 기억해 주다니 기쁜걸. 그걸 어떻게 잊어, 너네 집 놀러 갈 때마다 먹었는데. 놀러 오면 또 해줄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대화가 그 말로 둑을 쌓은 듯 뚝 끊겼다. 이쪽에서 끊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만 노아는 개의치 않은 듯 보였다.
"하나 물어봐도 돼?"
"여럿 물어도 돼요."
"…… 내가 너 찬 거 기억하지?"
"하하, 아픈 곳을 찌르네.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어."
나를 많이 좋아했다고 그랬잖아요. 과거형으로. 잘 지내라고도 하고.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뛰어가서는 그대로 내 번호 차단했잖아. 집에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자주 가던 곳 계속 돌아다녔는데 한 번도 못 만났었네. 노아의 말을 듣고 입술이 달싹였다. 너랑 헤어지고 틈만 나면 우느라 고등학교 예비소집일까지 집에만 틀어박혀서 지냈어. 자존심이 있어 뱉지는 않았다. 대신 가시 박힌 목소리가 나간다. 알면서 왜 이래?
"음, 어제 만난 과팅 상대랑 잘해보고 싶어서?"
"과팅 상대…?"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지금 내 앞에 있는 분이요."
여전하네. 속으로 그대로인 점을 하나 추가했다. 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 15살의 어느 가을, 아직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오후의 햇살 아래, 날아오는 공을 요리조리 피하고 막고 던지느라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상태로, 햇살과는 달리 제법 시원해진 바람을 맞으며, 네 덕분에 이겼어-하고 다정하게 보여줬던 미소. 내가 첫사랑 겸 짝사랑을 시작하게 만들었던 그 미소. 변하지 않은 점이었다.
찰싹 소리가 나도록 양 뺨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우와. 하마터면 홀릴 뻔했다. 노아가 놀라 휘둥그레 뜬 눈으로 쳐다봤다. 뭐야 그 표정, 밥 먹다가 제 얼굴 치는 사람 처음 봐? 처음 보겠지. 민망함에 전투적으로 라자냐를 입에 욱여넣었다. 그러다 진짜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요.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삼키지 못한 라자냐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다. 식당에서 틀어둔 유명한 클래식 사이로 수저와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났다.
같이 먹은 상대가 전 남친인 걸 차치했을 때 라자냐는 맛있었기에 제법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왔다. 자기가 오자고 한 거니 둘 다 계산하겠다는 노아를 밀어내고 부득불 더치페이를 했다. 네가 계산하면 나 불편해서 먹은 거 얹혀. 그렇게나 말해야 시무룩한 얼굴로 겨우 따로 계산해 주세요, 한다.
"커피 정도는 사도 되죠?"
"왜 뭘 못 사줘서 안달이야?"
어째 하루 종일 노아에게 질문만 하는 기분이다. 선약도 안 잡고 무작정 찾아온 거니까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래. 안 그래도 되는데, 대답하려다 눈썹을 내리고 빤히 쳐다보는 표정이 퍽 처연해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직 두 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라 바로 강의실로 돌아가기도 싫었는데 잘 된 일이지 생각하기로 했다.
뭘로 마실래요? 역시 모카 라떼? 그걸 기억해? 그럼, 누구 취향인데요. 응. 모카 라떼로 부탁해. 아이스? 아이스. 아이스 모카 라떼 두 잔이요. 매장에서 드시나요? 어떡할래요? 노아가 돌아보며 묻는다. 테이크아웃 할게요. 네, 진동벨로 불러드리겠습니다. 손바닥만 한 진동벨과 영수증을 받아들며 말했다.
"좀 걷자."
아이스 모카 라떼를 각자 한 손에 들고 캠퍼스를 정처 없이 걸었다.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법과대- 경찰행정학과가 여기 속한다 -를 지나치면 제1광장이 나온다. 제1광장에는 피크닉 테이블이 여럿 놓여있는데 날이 좋아서인지 이미 학생들로 그득했다. 제1광장을 가로질러 똑바로 걸으면 공과대 건물, 공대생이 아닌 이상 1학년 때 교양필수로 기초코딩을 들을 때 말고는 올 일이 없는 곳이다. 공과대 건물 뒤로 난 계단을 오르면 경영대다. 건물 중앙에 박힌 경영관이라는 글자를 보자 힘이 쫙 빠진다.
휴대전화 화면을 켜 시간을 보니 이제 두 시를 넘겼다. 강의실에 들어가긴 이르고 더 걷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차라리 제2광장 쪽으로 돌아서 중앙도서관을 찍고 올 걸 그랬다. 그럼 딱 적당하게 시간이 남았을 것 같은데. 산책 겸으로 걷자고 한 건데 습관적으로 늘 다니는 길을 밟아 버렸네. 후회해도 지금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음이 녹아 약간 밍밍해진 모카 라떼를 머금으며 어쩔까 고민하고 있으니 노아가 어깨를 툭툭 쳤다. 건물 뒤쪽에 벤치 있어. 거기 좀 앉을래요? 경행이 경영관에 올 일은 없었을 텐데 잘도 알고 있다. 심심하면 학교 구경하며 돌아다녀서. 생각을 읽혔는지 묻지도 않은 말에 노아가 대답했다. 그랬어? 한 번도 안 마주친 게 신기하네. 마주쳤으면? 피해 다녔겠지. 하하, 그럴 것 같아서 아는 척 안 했어.
"엥?"
"나는 알고 있었거든. 네가 이 학교 다니는 거. 1학년 때 우연히 봐서요."
내 놀란 표정에 노아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보고 싶은 사람이랑 우연히 같은 학교에 운 좋게 같은 학번으로 입학하고, 엄청 넓진 않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우연이 겹치면 인연이라잖아요. 그럼 인연이 겹치면 운명 아닐까? 중학생 때 인연이랑 대학생 때 인연이 겹쳤으니까, 우리.
노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허공에 팔을 휘저었다. 잠깐만. 노아. 나 착각할 것 같은데. 네 말 되게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알아? 꼭……. 헤어지고도 계속 날 좋아했던 것 같잖아, 라는 말은 스스로 말하기 창피해서 뱉을 수 없었다.
"맞아요. 차이고 나서도 계속 좋아했어. 지금까지."
얼굴에 화끈 열이 오르는 게 느껴진다. 아이스 모카 라떼를 쥐고 있어 차가워진 손바닥을 급하게 얼굴에 붙였다. 나 또 입 밖으로 말했어? 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 안 해도 알 수 있는 표정이라서. 희미하게 웃는다.
키 때문에 노아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살짝 들어야 했다. 덕분에 노아 뒤로 탁 트인 하늘이 보였다.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 하늘은 정말 파랗다. 짝피구를 했던 그날도 이렇게 하늘이 좋았는데. 구름 한 점이 상처처럼 아프게 보일 정도로 깨끗하고 높고 파랬던 가을 하늘. 하늘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눈이 부셔 세상이 잠깐 하얗게 변했다. 그 잠깐 사이에 옛날 일이 스쳐 지나간다. 꺽꺽 울던 중학생의 내게 당시 제일 친하던 친구가 전화 너머에서 속삭였지.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더라. 라고.
"…… 노아, 첫사랑의 법칙 알아?"
"첫사랑의 법칙?"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더라."
그러니까 나는 안 될 것 같아. 티셔츠 아랫단을 말아쥐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옆에 내려놓은 플라스틱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흘러내려 벤치를 적셨다. 눅눅한 감정이 어깨를 누른다. 발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노아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첫사랑이었어요?"
"응."
"나도 첫사랑이었어."
아,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손에 힘이 들어가 구겨진 셔츠단이 애처롭다. 전부 버렸다고 생각한 감정이 저 구석에 숨어있었던 걸로 모자라 갑자기 몸집을 불린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더라. 이 법칙은 스스로 하는 위로임과 동시에 방패였다. 우리가 헤어진 건 당연한 순서야.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만드는.
나 강의 들으러 갈게. 노아는 붙잡지 않았다.
큰일이다. 강의 내용이 하나도 머리에 남아있지 않다. 이 교수님 문제 깐깐하게 내는데…….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있으니 옆에서 말을 건다. 안 가? 가방 정리 좀 하고 가려고, 잘 가. 그래 주말 잘 보내. 다들 짐을 챙겨 강의실을 나가는 동안 빠진 정신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가방 정리는 무슨. 그러나 생각 정리 마음 정리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에코백 안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를 꺼냈다. 톡 알람 배지가 잠금 화면 위로 뜬다. 미리 보기로 보이는 메시지를 읽었다. 강의 시작도 전에 후배가 보낸 둘이 무슨 얘기 했어요?! 하나. 고등학교 친구가 보낸 ㅠㅠ - 아마 애인 하소연일 것이다 - 여섯. 18시 택배 배달 예정입니다. 하나. 그리고…… 노아. 기다리고 있으니까. 다섯.
뭘 기다리고 있다는 건데? 답장 얘기야? 설마 한 시간 넘도록 계속 거기 앉아있는 건 아니겠지? 딱딱 손톱을 물어뜯으며 한참을 상단바 위에 손가락을 두고 머뭇거렸다. 확인할 용기도 확인하지 않고 넘길 용기도 없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도 없었다. 결국 질끈 눈을 감고 톡방을 누르고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더 위로 올라가지 않는 채팅방의 말풍선 다섯 개를 순서대로 읽어내렸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한 번 헤어졌잖아요. (14:37)
다시 하면 두 번째 사랑인데 (14:38)
첫사랑의 법칙은 상관없는 거 아닌가? (14:38)
어떻게 생각해요? 대답해 줘. (14:39)
기다리고 있으니까. (15:29)
생각해보면 노아 얘는 항상 어려운 문제를 쉽게 일축하곤 했다. 고백만 해도 그랬지. '반이 갈려서 자리 바꿔달라고 못하니까 대신 사귀자.' 새삼 이렇게 줄이니 어이가 없다.
정문이 아닌 뒷문 쪽으로 내려갔다. 점심때와 달리 바람이 부니 제법 선선하다. 가을이 성큼 다가오긴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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