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有緣千里來相會
인연이 있으면 천 리라도 와서 만나리니
인연의 이름 / 필연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 해도 자연의 손길은 당연히 닿기 마련이다. 깊숙하고 고요한 산 위에도 자연의 부드러운 손길이 지나치니 붉은색과 짙은 노란색이 천천히 물들기 시작했다. 그 산의 중턱 부근에는 유일하게 자연이 아닌 것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은 집 한 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집의 주인은 제 영역을 침범한 낯선 이의 흔적을 따라가고 있었다. 분명히 이 근방은 주인인 자신을 제외하곤 동물만이 드나들 뿐, 한동안은 사람의 발길이 뚝 끊긴 곳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인적이라니, 그저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옅은 하늘색의 얇은 비단으로 곱게 내리 묶어낸 자주색의 긴 머리카락이 그가 달리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부드럽게 나부꼈다. 바스락. 일찍 사그라든 나뭇잎이 밟히는 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들었다.
“이쯤인데…”
그는 두리번거리며 흔적을 좇았다. 아, 찾았다. 달리는 것을 멈췄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람 하나가 쓰러져있었다. 비록 치마의 아랫단이 급하게 찢어낸 듯 마구잡이로 찢겨있었지만, 저고리에 놓인 자수라던가 옷을 이루는 비단의 상태가 흔히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한양에 올라간 것은 수십 년, 아니 몇백 년 전이었어도, 양반 행세를 하며 귀한 것과 귀하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는 것을 몸에 밸 정도로 익혔기 때문에 그는 이 낭자가 귀하게 자란 양반집의 아씨임을 쉬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낭자가 어떤 연유로 이곳까지 당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것 또한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한 짐작 속 사유가 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나, 적어도 그는 살아온 기간이 길었고 그만큼 많은 모습을 목격해 그에겐 흔했던 일이었다. 아마 그런 일을 겪었을 것이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사내가 알아야 하는 부분은 아니었으니,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문제는 이 여인을 어떻게 하느냐였다. 사내는 연하늘색의 도포 자락을 부드럽게 걷어내며 무릎을 쭈그렸다. 곱게 땋아 내렸던 머리였던 모양새만 유지하고 반 정도는 잔뜩 헝클어진 연갈색 머리카락을 곧은 손가락으로 치워냈다. 물끄러미 여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잘 모여 꼭 한 폭의 그림과 같아서 저와 연을 맺는 것은 어떻냐며 양반의 체면을 뒤로 한 채 말을 건네는 도령들이 많았을 것 같았다. 빤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이 여인이 눈을 뜨면 저는 어떤 색과 마주하게 될까. 갑자기 그런 호기심이 생겼다. 별 것 아니었지만 그 호기심은 생각보다 제법 커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이곳에 인간은 들이지 않기로 그리 굳게 다짐했건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나보다. 사내는 혀를 차며 쓰러져있는 여인의 목과 무릎 뒤쪽에 손을 넣어 가볍게 들어 올렸다. 사내는 달려왔던 길의 낙엽들을 한 번 더 밟으며 자신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여기를 들어왔다면 저가 붙여둔 부적들의 효력을 무시했다는 소리인데 대체 어떻게?
슬쩍 고개를 들어 여전히 정신이 들지 않은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이 또한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으나 그저 짐작이기에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야 했는데, 어차피 당사자는 제게 대답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신이 들지 않은 자의 얼굴을 쳐다보아야 제 의문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사내는 이내 고개를 들고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에 집중했다.
* * *
여인은 까무룩 정신을 잃은 이후 처음 눈을 뜬 후 마주한 것은 제가 사는, 아니 살던 집의 연갈색의 서까래가 아닌 짙은 고동색의 서까래였다. 진짜로 떠나왔구나.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엔 씁쓸한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 말고 다시 눈을 감고는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오랜 시간 잠들어있었는지 눈도 뻑뻑했고 온몸이 뻐근했다. 주변에 무엇이 있나 둘러보기 위해 눈동자를 도륵, 굴렸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것은 더럽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나 깔끔하다고 말하기도 조금 어려운, 그냥 사람 사는 것처럼 적당히 흐트러져 있는 집안의 모습이었다. 그러다 찬찬히 살펴보다 한 곳에서 그녀의 시선이 멈추었다. 그곳에는 한양에서도 이름난 명인의 자개장이 있었다. 창문의 열린 틈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자개를 더욱 반짝이게 만들어 여인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물을 마시지 못해 버석하게 마른 입술 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저건, 내로라하는 양반가에서도 구하기 힘든 것인데…”
“깨셨군요.”
들려오는 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방의 문은 열려있었고 몹시도 수려한 외관의 사내가 방 안으로 발을 디디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라락. 풀을 잘 먹였는지 문을 스치는 게 듣기 좋은 소리도 함께였다. 사내의 손에는 주목으로 만들었는지 붉은 기가 도는 나무 쟁반이 들려있었고, 그 쟁반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하얀 미음 그릇과 숟가락 하나가 고이 놓여있었다. 덜컥. 사내는 쟁반을 그녀의 옆에 내려두고 다시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 먹은 후엔 날 부르면 돼요.”
“네? 네…”
마루에서 바닥으로 내려서기 이전, 사내는 우뚝 멈춰 선 후 고개만 살짝 돌려 여인과 눈을 마주했다. 머리의 옅은 갈색보다 더 짙게 물든, 마치 지금 시기쯤 볼 수 있는 밤의 빛깔과 비슷했다. 잘 영글어 단단한 밤이 떠올라 사내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뱉었다. 그 모습에 여인은 미간을 좁혔다. 저를 구해준 사람이라 할지라도 처음 본 것이 뱉어내는 웃음이라면 기분이 썩 좋을 리가 없었다. 그 표정을 본 사내의 얼굴엔 겸연쩍은 표정이 스며들었다.
“미안해요. 눈동자가 꼭… 으음. 뒷말은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해줘요. 아, 낭자의 이름을 내게 알려줄 수 있나요?”
“…”
“물론 이름을 부르는 것, 그 이외의 의도는 없어요.”
말이 끝나고 그의 입꼬리가 곱게 휘어져 올라갔다. 웃는 모습이 그저 그런 표정을 짓는 것보다 조금 과장해 수천 배는 아름다웠다.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름을 알려주어도 되는 것일까.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자개장을 비롯해 이 방의 여러 가지가 저 사내는 양반, 못해도 양반에 버금가는 자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말투는 어찌 보면 격식 있고 어찌 보면 딱딱하기 그지없는 양반이 아닌 평민에 가까웠다. 믿어도 될까? 하지만 이곳을 알려준 친우의 얼굴이 떠오르자 망설임은 접어 내려두었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친우는 믿어도 되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작게 제 이름을 뱉었다. 매, 니저. 그 작은 소리를 용케 들어낸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다 미련이 없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그의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잠깐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듣는 걸 포기한 대신 쟁반에 놓인 수저를 들어 식지 않은 미음을 떴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매니저는 몇 번 후, 불어낸 이후에야 입안에 미음을 넣었다. 아까 들었던 이의 목소리처럼 무척이나 보드라웠다.
* * *
사내는 매니저가 머무는 방에 들어가는 대신 창문이 나 있는 벽에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작고 약한 매니저였지만, 약하지 않았기에 이곳에 앉아있는 저 여인은 아직도 저를 의심하고 경계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표정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 견고한 눈빛 속엔 경계심이 잔뜩 깃들어있는데 어찌 눈치를 채지 못하겠는가. 뭐, 사내는 그편이 더 좋았다. 인간과 엮여봐야 그 길의 끝에서 만나는 건 오랜 시간 동안 저를 옭아매며 좁은 세상 속에 가둬두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사내는 눈을 느리게 껌뻑이다 입을 열었다.
“낭자가 어찌 이곳에 쓰러져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당신은 내게 무슨 답을 바라는 것입니까.”
“글쎄요. 하지만 난 낭자께서 원하는 만큼만 말해도 족합니다.”
“… 나리가 제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이니 기꺼이 뱉어야지요.”
매니저는 후, 숨을 들이쉬었다. 저는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양반가의 자제 중에서도 제일 많은 소문에 휩싸였던 이입니다. 그리 입을 연 매니저는 제 이야기를 천천히 뱉어냈다. 잔잔하고도 무던한 투로 풀어낸 지나온 과거는 한양의 양반가 자제의 과거치곤 순탄치 않았다.
그녀의 아비는 첫 아이인 매니저를 무척이나 아꼈고,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 모든 것을 너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말을 할 만큼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정치놀음에 휩쓸려 이만 숨을 거두었고, 어머니는 이미 한참 전에 세상을 떠났었다. 약해 보이는 아가씨 하나와 재산만이 남은 집은, 욕심이 많은 이들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겠는가. 수도 없는 압력과 협박에도 꿋꿋하게 견디는 매니저는 독하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고, 혼인이나 하라는 말 또한 끊임없이 들었다. 말이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면 되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주위의 적대적인 시선을 받는 것은 기본이고, 어딘가를 돌아다닐 때면 서늘한 칼날이 느껴지는 것은 일상이었다. 저를 알고 아끼던 노비들은 어느새 쫓겨나고 새로운 이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신경을 쓰고 긴장을 하며 살아갔고 몸이 쇠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결국엔 친척에게 모든 것을 넘긴다는 내용을 먹을 곱게 갈아 한지에 적어 내린 이후, 스스로 걸어 나왔다. 나오면서 제 아비와 먼저 떠나간 어미를 떠올리며 꾹꾹 눌러왔던 눈물까지 함께 터뜨렸었다. 하지만 고요함이 깃든 밤이었기에 소리를 흘렸다간 괜스레 소문이 날까 싶어 애꿎은 입술을 깨물며 제가 살던 집의 반대편으로만 걸어 나갔다. 그리곤 제 친우가 사는 곳으로 뛰었다. 누군가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애써 무시한 채 최대한 빠르게 달음박질쳤다. 친우가 사는 곳은 굳게 닫힌 성문 너머에 있었으나, 병사들은 자그만 체구의 여인이었기에 별 의심 없이 내보내 주었다. 제 걸음을 그대로 밟는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다급해졌으나 몸은 따라주질 않았다. 급기야 다리가 꼬여 넘어질 뻔하였다. 그때 누군가 매니저를 제 등 뒤로 숨겨주었고, 따라오던 발소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숨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어 확인해보니 제 친우였고, 친우가 저는 지켜줄 수 없으니 저를 대신할 곳으로 이곳을 알려주었으며 오다가 다시금 저를 쫓아오는 자를 피하다 결국 지쳐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그녀가 양반가의 귀한 자제였다는 사실을 누가 알 수 있으랴. 그만큼 고된 삶을 살아온 매니저에겐 후련함과 동시에 서글픈 감정이 눈동자 속에 잔뜩 담겨갔다. 어쩌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모두 들은 사내는 처음 본 이에게 어찌 이렇게 다 털어놓을 수 있나 싶었지만, 이내 믿는 친우가 자신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말한 것이 아닐까.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매니저가 어떻게 부적의 효력을 뚫고 지나왔는지 또한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친우가 제 부적의 존재를 알고 그것을 무시하고 들어갈 수 있는 부적이라도 만들어준 모양이었다. 그래서 쫓아오는 자도 부적의 범위 내로 들어온 매니저를 발견하지 못하고 되돌아갔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아마 이 여인이 말하는 제 친우라는 자는… 제 친우이기도 한 자일 것이다. 처음 여인을 보았을 때처럼 혀를 가볍게 차며 질문을 던졌다.
“낭자가 말한 친우는 눈처럼 희고 고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푸른 눈동자의 사내가 아닌가요?”
“역시 나인을 아시는군요.”
“… 오랜 시간 알고 지냈으니까요.”
너무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내 그만 봐도 괜찮을 지경이었다. 나라 하나가 바뀌고도 계속 알고 지냈기에 굳이 연락을 취하지도 않았건만… 하지만 나인 나름대로 제일 나은 선택지를 건넨 것일 테다. 아닌 것 같아도 단호함을 지닌 이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과거 정을 잔뜩 쏟아부었던 인간에게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은 일이 있었던 나인이 제 진짜 이름을 알려줄 만큼 마음을 연 친우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게다가 동족 중에서도 소수만 아는 사내가 사는 곳을 알려줬다는 건 신뢰가 꽤 두둑하다는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고요한 자연 속에 파묻혀 홀로 살아가는 것은 지루하던 찰나였다. 물론, 정은 주지 않고 그저 지켜만 볼 요령이었다. 그것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리 생각하며 저의 오랜 친우가 인정한 인간은 어떤 자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났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낭자는 제가 그대를 여기서 내쫓는다면 갈 곳이 없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그런 상황을 생각하니 매니저의 입에선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제 정말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고개가 푹 가라앉았다. 낭자. 매니저의 반응을 보던 사내는 창문에 턱을 괸 채 매니저를 불렀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매니저로서는 도무지 속내를 파악할 수 없는 미소였다.
“재밌을 것 같으니까, 살아도 괜찮아요. 참, 이 방 그대로 써요. 난 다른 방 쓰면 되니까.”
재밌을 것 같다니, 대체 무어가 재밌을 것 같다는 말인가. 매니저는 얼떨떨했으나, 앞으로 살게 될 곳이 생겼다는 사실에 아까와는 다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매니저를 보며 사내는 눈을 천천히 껌뻑이며 과거에 겪었던 기억 속으로 잠겨 들었다. 이제는 제 친우와 저만 기억하는 과거의 기억 속으로.
* * *
시간이 흐르고 화려하게 물들었던 단풍잎이 모두 지면서 가을의 끄트머리가 다가왔음을 두 사람에게 알렸다. 매니저는 빗자루로 앞마당에 소복하게 쌓인 낙엽들을 한 곳으로 밀어내다가, 마을에 다녀오는지 양손에 약재 꾸러미를 쥐고 있는 사내와 눈을 마주치니 그에게 돌연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생겼다.
“저기.”
“응?”
“왜… 이름을 안 알려주는 건가요?”
“하하, 그걸 이제야 물어보는 낭자도 신기하네요.”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더 편해진 말투로 제게 말을 건네는 사내가 조금은 얄미웠다. 자신은 이미 이름을 알려주었는데 왜 저만 사내의 이름을 모른단 말인가. 입술이 삐죽하니 튀어나오자, 사내는 매니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곤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비밀이에요.”
매니저는 간지러운 숨결이 느껴져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황급히 제 귀를 감싸며 약간 억울하다는 듯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하지만 제 이름은 진짜 알려줄 수 없었다. 이름을 알려주면,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때문이다. 이것을 말해줄 순 없으니 아예 비밀로 치부해버리는 것이 편했다. 사내는 그리 생각한 후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이제 몸은 좀 괜찮나요?”
매니저는 잠시 생각에 빠지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경 써주신 덕에 괜찮은 것 같네요.”
그러나 말이 끝나자마자 얕은 기침을 뱉어냈다. 심하진 않았지만 쉽게 멈추지 않는 기침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기침을 신경도 쓰지 않고 쓸어내던 낙엽을 다시금 쓸어내기 시작했다. 대답을 들었으니 사내에게 그곳에 덩그러니 서 있을 명분은 없었다. 그래서 약재를 보관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척했지만,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손수 땋아 내려 붉은 댕기로 고정한 연갈색의 머리카락은 등 뒤로 드리워있었고, 빗자루의 나무 막대를 잡은 작고 하얀 손에 저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이 갔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든 사내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었고, 이내 떼던 걸음을 마저 떼었다.
* * *
그날 밤, 칠흑 같은 먹으로 물들여 주변의 색을 잡아먹은 밤하늘 가운데, 유일한 빛인 달이 휘영청 밝게 떠 두 사람이 사는 곳에 은은함을 스며들게 했다. 하지만 곧 낮 동안 모아둔 낙엽에 불을 붙여 작은 모닥불을 만들어내 주위의 어둠을 꿀꺽 삼켜냈다. 타닥, 타닥. 불꽃에서 작은 불똥들이 이곳저곳으로 튀겨냈다. 매니저는 넓적한 돌 위에 앉아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사내는 아까 미리 다려둔 차 한 잔을 건네었다. 매니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드러냈다.
“감사합니다.”
“뭘요.”
으차. 사내는 가져온 쟁반을 옆에 내려두고 제 몫의 찻잔만 손에 쥔 채로 매니저가 걸터앉은 돌 위에 자연스레 앉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먼 것 같았지만 묘하게 가까웠다. 매니저는 그것을 의식했지만, 사내는 의식하고 있지 않은지 적당히 식은 차만 홀짝일 뿐이었다. 저가 이상한 건가 싶었기에 그녀도 그냥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은 뒤 따스함이 남아있는 찻잔을 손으로 감쌌다. 다려낸 지 얼마 안 된 터라 온기가 날아가지 않고 남아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식은 물로 다려낸 차였기에 그리 뜨겁진 않았지만, 매니저는 뜨거운 것을 워낙 못 먹는 까닭에 후, 불어가며 식혀서야 한 모금을 목 뒤로 넘겨냈다. 코끝에 맴도는 부드럽지만 씁쓸한 차의 향기가 제 옆에 앉아있는 사내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차마저도 본인 같은 것을 마시는 걸까. 그리 생각하니 매니저의 입술 새로 가벼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사내는 고개를 조금 돌려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에서 웃는 건지 알려줄 수 있나요?”
사내는 은은한 미소를 그려내며 물었다. 매니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에게 익숙해졌는지 다시금 웃음을 흘리며 사내의 녹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비밀이랍니다.”
물론 이건 그녀 나름대로 낮에 제 귀에 속삭였던 일에 대한 소소한 복수였다. 그건 분명 작고 얕은 복수였음에도 사내의 마음엔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잔잔하고 작은 연못의 수면이라면 아주 작은 조약돌이라도 던지면 부드러운 결을 그리며 요동치기 마련이었다. 이와 같은 이치였다. 톡 던진 조약돌은 마침 커다란 호수가 아닌 이제 막 솟아나기 시작한 연못에 던져졌기에 그 영향은 무척이나 컸다. 묘하게 노란빛까지 겹쳐져 감도는 녹색의 눈동자가 곱게 휘어지는 매니저의 눈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불꽃이 일렁이며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매니저는 뻘쭘해진 이 상황을 피하려 고개를 불 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사내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 집중되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결국엔 매니저가 먼저 자리를 뜨려 몸을 일으키다가 중심을 잃어 뒤로 넘어지려 했다. 사내는 가까이 다가가 재빠르게 그녀의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맞닿게 된 얼굴의 간격이 생각보다 가까웠다. 사내도 놀랐고, 매니저도 놀랐기에 두 사람은 그 자세 그대로 멈춰있었다. 하지만 곧 매니저는 제 뺨이 붉게 상기된 채로 사내의 가슴팍을 밀어내곤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내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낮보다 깊어진 기침 소리가 방안에서 들려왔다.
* * *
시간은 물 흐르듯 빠르게 흘러갔다. 한 공간에서 책을 읽거나, 호수를 거닐거나, 조금 가야 있는 마을의 오일장에 다녀오는 정도만 했을 뿐인데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세 번째 가을이 다가와 아침과 저녁엔 서늘한 바람이 맴돌 무렵, 매니저가 쓰러졌다.
그냥, 무어 하나 다를 거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그저 매니저는 날이 좋으니 호숫가나 거니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꺼내며 방을 걸어 나올 뿐이었다. 사내는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긍정의 말을 뱉어내기도 전에 그녀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니 안 그래도 차가운 사내의 손끝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사내는 무슨 정신으로 며칠을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적부터 썩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 사실 사내는 그녀가 언젠간 쓰러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놀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고작 제 친우인 나인과 친우라는 이유로 만나게 된 인연이었다. 함께 한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았다. 부러 이름 또한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세상을 겪은 구미호는 한 번 제 감정의 실 끝자락을 움켜쥐더니 금세 진실에 도달했다. 어느새 자신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준 게 틀림없었다. 작은 틈이라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매니저는 어느새 나갈 줄 모르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제 마음을 깨달은 사내는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한 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녀의 얼굴을 젖은 천으로 닦아주기만 했다. 그 손길은 무척이나 보드라워 마치 귀한 것을 다루는 손길과 같았다. 그녀와 있을 땐 언제나 함께하던 미소는 지워지고 서늘하게 굳어있는 무표정만이 남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러다 다신 보지 못하는 거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정말이지,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마 나인이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그럴 줄 몰랐다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을 터였다. 차라리, 그래도 좋으니 깨어나 어떤 어조로 말을 해도 편안해지는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다.
그리 생각하며 천을 거두고 새것으로 바꿔오려던 찰나, 아주 작지만 얕게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놀라 뒤를 돌았고, 매니저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급하게 자리에 앉아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깬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소리를 들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흐드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려 손을 뻗자, 그녀가 사내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가지, 말아요…”
자그맣게 웅얼대는 소리는 아마 자신을 누군가와 착각하여 내뱉는 것이 분명했다. 뜨거운 온기가 찬 손을 통해 전해졌다. 굳이 내칠 필요는 없었기에 사내는 그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으며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꾹 쥐고 있는 매니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언제쯤 깨어나 날 바라봐줄까. 느리게 눈을 껌뻑이며 잡은 그녀의 손을 들어 손등에 제 입술을 담백하게 부딪쳤다. 그리고 눈을 살포시 감았다.
깨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이렇게 해서라도 당신에게 전해지길.
* * *
매니저는 울리는 머리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치, 이곳에 처음 온 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는 어디 갔는지 제 옆에 없었다. 부르려 입을 열었지만, 목에서 까슬함이 느껴져 쉬이 내뱉지 못했다. 오랜 시간 누워있던 것인지 온몸이 뻐근했으나 애써 몸을 일으켜 창문이 나 있는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좌우를 둘러보았다. 아, 저기 있구나. 해가 두 번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는 사내를 부르는 호칭은 저기, 당신 정도가 다였다. 처음엔 끈질기게 물어보았으나 가르쳐주지 않은 것엔 다 사정이 있겠거니 싶어 그냥 묻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서 이름 대신 저기, 라며 목에 힘을 주고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사내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빠르게 고개를 돌려 그녀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눈이 무척이나 커진 채, 매니저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창문 밖으로 빠끔 튀어나온 머리를 끌어안고 천천히 쓸어내렸다.
“뭐, 뭐 하는…”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야…”
묘하게 물기 어린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 목소리를 듣자 매니저는 밀쳐내려던 손을 멈추고 그녀 또한 사내의 어깨를 감싸 안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저를 꽉 끌어안는 사내가 저를 걱정한 것이 여실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 있다가 매니저가 먼저 목소리를 내었다.
“근데… 저 목마른데…”
매니저가 멋쩍은 소리까지 흘리자 사내는 후다닥 떨어지곤 물을 가져오겠다며 자줏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혼자 남은 매니저는 상념에 잠겼다. 이번엔 천운이 도와 이리 깨어났지만, 아마 곧 있으면… 저 사내의 얼굴을 보는 것도 마지막인 날이 올 것이다. 원래 죽는 날이라는 것은 본인이 제일 잘 아는 법이었다.
게다가 처음 만나고 길고 긴 과거사를 뱉어냈던 날, 단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몸이 쇠약해진 이후, 잔기침이 잦아지고 가슴께가 턱 하고 막혀오는 일이 많아져 의원을 불러보았더니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지금으로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 숨을 거두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라 했다. 그 말을 들었지만, 그녀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버티고 또 버텼다. 마치 금이 가 곧 깨지기 직전 사기그릇의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었다. 매니저는 살짝 떨어지기만 해도 쩌적, 갈라지며 본래의 형태를 잃을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물론 현재의 안색이야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죽음을 목전에 둔다면 아프던 사람이 갑자기 좋아진다는 것 말이다. 매니저는 딱 그 말이 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굳이 사내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잔뜩 걱정한 이에게 큰 짐을 하나 더 지워주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안되었다. 그렇기에 푸, 깊은 한숨만을 내뱉으며 사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서늘하게 식은 가을의 바람이 그녀의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 * *
그녀가 깨어나고 며칠이 지났다. 깨어났던 직전보다 상태가 좋은지 마루에 앉아 눈을 감고 햇볕을 쬐고 있던 그녀의 앞에 가벼운 봇짐을 멘 사내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는 무얼 하냐, 그리 물었고, 그에 사내는 쓰러지기 전에 호숫가에 가자고 했던 것을 가기 위함이라 답했다. 그러자 매니저는 좋은 생각이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사내는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늘은, 이 산의 호숫가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갈 거예요.”
“응? 근처에 호수가 또 있단 말이에요?”
“음… 그런 셈이죠.”
하하.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그녀를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은 더 빛이 나고 있었다. 매니저는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저 흐음, 소리를 흘리며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사내는 그저 미소를 그리며 손을 그녀에게 뻗었다.
“이리로, 오겠어요?”
“기꺼이 가야죠.”
매니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사내는 실례, 라고 작게 말하며 그녀의 무릎 뒤쪽과 등 뒤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헉. 놀란 매니저의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팔은 자연스레 사내의 목을 감쌌다.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어 매니저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것은…”
“아무래도 난 양반은 못 되나 봐요.”
장난스레 웃는 그 얼굴에 매니저는 무어라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그저 꾹 감을 뿐이었다. 사내는 그것이 좋을 거라며 계속 눈을 감고 있어 달라고 말했다. 애초에 양반가 자제가 사내와 이리 붙어있을 일은 없었다. 그나마 손을 붙잡는 정도는 이곳에 머무르며 익숙해졌으나, 이 정도의 밀착은 거의 없었기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뺨은 붉게 상기되고 있었다. 사내는 그것을 보지 못한 척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을의 밤은 여름보다 빨리 찾아오니 서둘러야 했다.
* * *
무얼 했다고 잠든 건지는 몰라도 매니저가 눈을 뜨니 어느새 하늘엔 쪽빛이 사라지고 먹빛이 물들고 있었다.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제가 기대고 있던 것이 사람 여러 명보다 더 두꺼운 굵기를 자랑하는 곧은 나무였음을 깨닫고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와. 그녀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고운 빛깔로 물든 단풍잎들이 무척이나 화려했다. 깨어난 매니저를 본 사내는 잘 되었다는 듯 풀고 있던 봇짐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매니저의 귓가에 들려와 고개를 내려 사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응…?”
“평소에야 차가 더 좋지만, 경치 좋은 곳에선 술 한 잔이 빠지면 섭섭하지 않겠어요?”
평소에도 한없이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장난을 치는 것이 참 독특한 사람이라 여겼다. 그런데… 여기서 술을 꺼내 들 줄이야. 매니저는 그리 생각했지만, 오래간만에 맛보게 될 취기에 조금은 기대감을 품으며 사내가 내미는 백자 잔을 받아들었다. 사내가 새하얀 백자병을 틀어 막아둔 마개를 빼자, 달콤한 매실 향이 살살 퍼져나갔다. 그는 매니저의 잔에 따라준 후, 제 잔을 스스로 채우려 했다. 하지만 매니저의 손이 그것을 저지했다.
“앞에 사람 두고 뭐하러 혼자 따르나요.”
“하하, 그게 맞는 말이네. 그럼, 부탁할게요.”
사내의 잔이 채워지자 두 사람은 잔을 소리 내어 부딪힌 후, 각자의 입으로 술을 쭉 흘려 넣었다. 입안 한가득 매실의 향이 메꾸었다. 그가 가져온 것은 아무래도 최상품의 매실주인 것 같았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이 일품이라 한 번 더, 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렇게 한 번만 더를 외치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매니저의 뺨은 물론이고 손끝까지 붉어져 있었다. 그에 반해 사내는 술 특유의 향만 근처에 맴돌았을 뿐, 붉어진 곳은 전혀 없었다.
“술, 못 마시는 것 같은데 너무 마신 거 아닌가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매니저는 느릿하니 말을 내뱉으며 짙은 미소를 그려내었다. 푸스스, 그녀의 입술 새로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평소엔 자주 보여주지 않는, 그런 짙은 미소였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고, 휘영청 뜬 달이 물결 한 점 없는 호수에 비쳤다. 그녀는 술잔을 옆에 내려둔 뒤 두 다리를 접어 끌어안았다. 풀을 먹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엷은 복숭아색 치맛자락에선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대화가 끊기고 사위에 적막만이 흐르던 도중, 흐리게 눈을 뜬 채로 호수를 바라보던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응?”
“… 그냥 술기운에, 하려는 이야기니… 흘려들어도 괜찮아요.”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기에 이리 뜸을 들이는 것일까. 사내는 그리 생각하며 매니저가 앉아있는 옆쪽을 바라보았다. 작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언젠가 떠올렸던 생각을 느리게 뱉어냈다.
“가끔은 말이죠. 책 속 이야기에 나오는… 입맞춤이라는 게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어요…”
부끄러움 탓인지, 아니면 점점 오르는 술기운 탓인지 안 그래도 붉게 물들었던 매니저의 뺨이 더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사내는 그런 매니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경청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그것도 모른 채 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런데, 으음, 이젠… 어딜 가지도 못하니… 누구와 만날 일도 없고…”
“…”
“말하고 보니까, 진짜, 부끄럽네요…”
상대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매니저는 부끄러워진 마음에 무릎을 더 끌어모으며 그 위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매니저는 그리 중얼거렸다. 사내는 생각에 잠긴 듯 눈동자를 잠시 내리깔다가, 이내 결심한 듯 매니저의 얼굴 곁에 제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러면…”
사내가 운을 떼다가 만 탓에 다음에 이어질 말이 궁금해진 매니저는 감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바로 앞에 있는 사내의 연녹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껌뻑, 껌뻑.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얼굴엔 평소 그리고 있던 부드러운 미소와 장난기는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매니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눈을 감았다. 쿵, 쿵, 쿵. 누구 가슴께에서 들리는 것인지 모르는 소리가 두 사람 귓가에 들려왔다. 사내는 조심스레 그녀의 이마 위에 제 입술을 꾹 누르듯 올려두었다. 매니저는 제 이마에서 말캉하고도 까슬한 감촉의 입술이 느껴짐을 알았다. 사내의 입술은 이마에서 시작해 콧잔등으로 내려왔고 이내 같은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매실의 단 향이 코끝을 은은하게 맴돌았다.
그렇게 한참을 맞대다가 매니저는 순간적으로 입을 벌려 사내의 입술을 깨물었다. 사내는 눈가를 찡그리며 입을 벌렸고, 두 사람의 혀는 얽어 들었다. 달콤하던 매실과는 달리 알싸한 술의 향이 느껴졌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사내의 어깨에 제 손을 얹었고, 사내는 매니저의 팔에 제 손을 얹었다. 으, 으음. 기분이 이상했다. 그저 입과 입을 맞대고 말캉거리는 혀가 맞닿았을 뿐인데 싸늘한 가을의 바람은 느껴지지도 않았고 되려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매니저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렇게 숨이 모자랄 때까지 서로의 숨을 앗아가다가 버티지 못한 매니저가 눈을 뜨며 먼저 입을 뗐다. 가쁜 숨을 몰아서 쉬는 매니저의 뺨은 아까 전보다 더 상기되어있었다.
“허억, 헉…”
“그래서, 어떤 느낌, 이던가요.”
매니저. 사내는 그녀의 밤색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하며 물었다. 매니저는 숨을 가다듬으며 제가 느낀 것을 말했다. 사내의 눈을 마주한 채 말하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당연했다.
“무언가, 간질거리는 것만 같고, 생소한 느낌이었어요.”
“그렇구나.”
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으니 한 번만 더… 해봐도 괜찮을까요? 이런 말을 뱉는 것조차 부끄러운지 더듬어가다 종국엔 들리지도 않을 크기로 말하며 붉은 뺨을 더 붉혔다. 사내는 그 모습, 그리고 그녀의 모든 것이 무척이나 좋았다. 이것은 다 분위기 때문이고, 술기운 때문일 것이다. 물론 사내는 취한 상태가 아님에도 그리 생각하며, 거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입을 열었다.
“노아.”
“네…?”
“내 이름은 노아예요. 매니저.”
“노, 아… 예쁜 이름이네요.”
매니저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노아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금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이젠 아까 나던 매실 향이 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무척 가까이서 오목조목 자리 잡은 이목구비를 보고, 그중에서도 입술을 맛보는 것이 좋을 뿐이었다. 노아의 손은 매니저의 뒤통수를 받쳤고, 안 그래도 밀착되어있던 두 사람의 간격은 더 줄어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다시금 숨이 부족해진 매니저가 먼저 입을 뗐다. 이젠 술기운은 다 달아난 상태라 괜히 눈을 마주치기 부끄러워 매니저는 돌아앉았다. 노아 또한 원래 앉아있던 것처럼 호숫가를 향해 앉았다. 아까 전보다 더 적막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분위기가 차분하게 식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흘러 달이 하늘 꼭대기에 걸렸을 무렵, 매니저는 제 눈꺼풀이 무거워짐을 알아채곤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제 눈에 담는 모든 것이 마지막이겠구나. 그리 생각하며 덤덤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아까 그렇게 잤는데도, 이상하게 졸리네요…”
저 조금만 잘게요. 아무렇지 않게, 그리고 제 마음이 이끄는 대로 매니저는 노아의 어깨에 제 머리를 톡 기댔다. 그리곤 끔뻑, 끔뻑,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 시간이 더 오래 갔으면 하여 졸음을 쫓아내려고 한 깜빡임이었으나 영원함이라는 무게가 실린 잠은 그깟 깜빡임으로는 물리칠 수 없었다. 노아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어깨를 내어줄 뿐이었다. 매니저는 제 오른손을 움직이다 노아의 손을 찾자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 탓에 노아는 흠칫 놀랐으나, 아닌 척 가만히 있었고, 매니저는 충동적이었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노아가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입을 천천히 열었다.
“잘, 자요…”
“참… 노아는, 처음부터 끝… 까지…”
제게 친절하, 네요. 깊은 졸음이 몰려온 탓에 그녀의 말은 띄엄띄엄 이어졌으나, 노아는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매니저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새근거리던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고, 두 사람이 있는 곳에는 한 사람의 숨소리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노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 어깨에 기댄 매니저의 코 아래에 잡지 않은 손의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손이 턱, 하고 떨어졌다.
오랜 세월 동안 생명이 피고 지는 것에 익숙해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내 착각이었던 걸까. 아닌가. 이것은 저주 때문일까. 아니면 온전히 당신이라서일까. 노아는 여전히 붙들고 있던, 온기가 남은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대었다. 따스했다. 찬 바람을 몰고 오는 가을에도 여전히 온기는 남아있듯, 그녀에게도 온기가 남아있었다.
아주, 아주 조금의 정을 줘버린 것이 문제였던가. 몇백 년 동안 지켜온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제게 저주를 걸고 죽었던, 제 아비에게 원한이 있던 늙은 여우의 웃음소리가 노아의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아직도 그날의 광경이 눈앞에 훤히 펼쳐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곁에 서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그자의 눈이 뒤집히며 입이 열렸다.
인간에게 정을 주고 이름을 알려주는 순간 너는 평생, 인간이 생을 반복하는 동안에도 한 인간만 사랑하게 될 것이니라. 하지만 그 인간은 네가 사랑을 깨닫는 순간 떠나가리라.
그것은 허무맹랑하면서도 한편으로 사랑을 깨달은 이후 그 상대가 떠나는 것은 너무 잔혹하다고 생각해 인간에겐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노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문득 그의 머릿속으로 시가 한 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인연이 있으면, 천 리라도 와서 만나리니…”
이 구절이 마치 저와 같다고 여겼다. 인연이었던지라 천 리를 와서 만났는데, 그 인연의 상대를 제 욕심 때문에 눈을 감겼다. 그렇게 그녀의 이번 생은 끝이 나버렸다. 그러다 노아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랑을 깨닫고 떠나갔다면, 그녀의 다음 생을 찾으면 될 일 아닌가. 찾는 것이 고되고 역경이 가득할지라도, 저의 길고 질긴 생이 끝나는 날까지 찾아낼 것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눈을 꾹 감고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댔다. 그의 서늘한 기운이 그녀에게 남은 온기를 천천히 앗아갔다. 다시 한번 그의 눈가에 굵은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노아는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든, 어떤 사람이든, 내가 찾아갈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줘요. 그리고, 부디 날 기억해줘요.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새빨갛게 물든 나뭇잎을 가득 흩날렸다. 마치 저주를 이겨내지 못하고 인간을 사랑하고야만 노아를 비웃는 듯,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었다. 그에게만 매정한 가을의 밤은 끝없이 깊어만 갔다.
* * *
수백 년이 지나도 가을의 밤바람은 싸늘했다. 옅은 갈색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노아는 오래간만에 나인을 만나 술을 마신 뒤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걸어가는 곳은 도심 한가운데로 사람이 꽤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었다. 그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많은 것이 바뀐 뒤에야 그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 나왔다. 이곳을 걷다 보면 언젠가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가 떠올랐고, 마지막 가을밤이 생각났다. 노아의 입가엔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과는 대비되는 씁쓸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뻘쭘한 건 싫어 피하려고 했으나, 굳어버린 듯 움직여지질 않았다. 그리곤 홀린 듯 늘 그리고 그리던 그녀의 이름을 툭, 뱉어냈다.
“매니저.”
“저, 저를 아세요?”
그녀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노아는 제가 실수했음을 알아차리고 죄송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려던 찰나였다. 무언가 생각하던 여자가 노아의 손을 턱 하니 잡아챘다. 노아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것 같은 노아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 묻어나던 당황은 놀라움으로 바뀌어 갔다.
“… 혹시 이름이 노아예요?”
“그걸, 어떻게…!”
그의 녹빛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고, 매니저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초면에 이런 말을 하면… 미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요즘 제 꿈에 그, 노아 씨가 계속 나오더라고요.”
그랬다. 그녀는 요즘 조선 시대쯤에 살던 것처럼 보이는 어떤 여인이 되어 제 눈앞에 서 있는 남자와 살았고, 마지막에는 꼭 키스를 하고 제가 죽어야 끝이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다만 꿈에서 깨어나면 제 얼굴엔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있었고, 약 2년을 함께 한 사내의 얼굴은 흐릿했지만, 노아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제 꿈에 매번 나오던 그 남자라고. 그리고 놓쳐선 안 된다고. 예민한 그녀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니저는 후,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평소 하지 않던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혹시 번호 좀 주실 수 있겠어요? 매니저는 그냥 넘어가긴 그렇다며 꿈에서만 보고 어쩌면 초면인데, 초면인 사람에게 번호를 달라고 하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횡설수설한 투로 말했지만, 노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 같은 하늘 아래 서 있는 것만으로 족했다. 그래서 흔쾌히 그녀의 휴대전화를 받아 제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고 노아, 라는 이름까지 야무지게 눌러 번호를 저장해주었다. 숫자 11자리를 누르는 내내 감출 수 없는 행복함이 노아의 귓불에 물들어 약간 달아올라 있었다. 인연이기에 시대마저 뛰어넘어 재회한 이들을 부러워하는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어색하게 서 있는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세 번째 계절 > 우리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이매니][이별&재회] 수레바퀴 / 이랑 (0) | 2020.09.20 |
---|---|
[기이매니][자유주제] 가을이 찾아준 봄 / 블루베리 (0) | 2020.09.20 |
[노아매니][이별&재회] 날 잊어줘 / 유설 (0) | 2020.09.20 |
[나인매니][이별&재회] 너를 위한 이별 / 루베아 (0) | 2020.09.20 |
[루이매니][자유주제] 연혼제 / 노연 (0) | 2020.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