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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 이랑
※ 정화에 관련된 자체적 설정이 있습니다.
1. 사건의 전말
어느덧 우리가 만났던 날이 다가오는 가을이 왔다. 거리는 단풍으로 울긋불긋 얼룩져있고 걸을 때에는 사부작 소리를 내며 색 바랜 낙엽이 바스러졌다. 너와 함께 찬란한 가을을 걷는 것은 소풍을 나온 것 마냥 마음이 들떴다. 우리가 이렇게 걷게 된 것은 아마도 냥선배 때문이다.
* * *
"매니저, 지금 바쁘냥?"
그녀는 바람이 선선히 불며 열심히 가을 냄새를 나르고 있는 낮의 운치를 즐기던 중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휴식을 불길한 목소리가 방해했다. 원치 않던 방해에 그녀의 미간이 가까이서 봐야만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로만 살짝 찌푸려졌다.
"저.. 저요?"
"그럼 여기 매니저 말고 누가 있냥?"
누구라도 제발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주변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오직 바닥을 구르는 낙엽만이 가득했으리.
이럴 때만 아무도 없지. 다들 일부러 자기를 피하는 게 아닌가 합당한 의심이 들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고 몇 가지 필요한 물품만 사 오면 된다냥. 여기 구매 리스트다냥."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그의 말과는 다르게 리스트에는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로 글씨가 빼곡했다. 언뜻 보기에도 혼자서 사 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럼 수고 좀 해달라냥."
더 이상의 말없이 후련히 가버리는 그의 모습은 얄밉다는 말이 정말 잘 어울렸다. 언젠가 참치 크래커를 몰래 다 먹어버리리다 굳게 다짐하며 그녀는 머릿속에 소심한 복수를 그렸다.
소심한 상상 속의 복수극이 끝나고 걸음을 움직이려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톡톡 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뒤돌아본 그 자리에는 흑발의 사내가 싱글거리며 서 있었다.
"기이?"
"후후후, 멀리서부터 보는데 살벌한 마스터의 눈빛에 참새들이 놀라서 도망가겠습니다."
"처음부터 다 봤는데 안 도와준 거야?"
"후후후후후!!!"
흥미로운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그의 태도는 헛웃음이 나게 했다. 그의 싱글거리는 표정은 그녀를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으니.
"..... 기이 지금 할 거 없지?"
"화나신 마스터를 관찰하는 것을 빼면 그렇습니다만."
"그럼 나랑 어디 좀 가자."
"이번에도 짐꾼으로 쓰시는 겁니까?"
그가 특유의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농담을 했다.
"아니야, 기이랑 같이 가고 싶어서 그렇지!"
"오호."
그는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믿지 않는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가기 싫어?"
"후후후... 새로운 경험은.."
"응?"
"새로운 경험은 언제나 즐거움을 주지요."
그의 눈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내려갔다. 이는 그 나름의 수락이었다.
"그럼 같이 가는 거지?"
"기꺼이 응해드리죠, 후후"
* * *
2. 평화를 파괴하는 자
잎이 푸르던 여름은 간데없이 길거리는 떨어진 낙엽으로 얼룩져있고 걸을 때마다 색 바랜 낙엽들이 바스러졌다. 그와 함께 가을 길을 걷는 것은 묘하게 설레었다. 위에서 내리쬐는 황금빛 태양, 춤추듯 나뒹구는 낙엽, 햇빛을 담은 듯한 단풍, 은은히 불어오는 바람까지 이 모든 것이 그와 함께 걷는 거리를 운치 있게 만들어줬다.
"벌써 가을이네."
"시간 참 빠르군요."
맞는 말이었다. 사신 지부에 들어오며 기이를 만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우리가 만났던 날이 다시 돌아오고 있으니.
그때 매니저의 단말기에서 치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니저, 매니저?"
"네, 네."
"지금 누구랑 있냥?!!!"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 그것의 주인은 냥선배였다. 급하게 무전을 하는 그의 목소리가 안 좋은 상황임을 말해줬다.
"기이랑 있어요."
"같이 있는 사신이 있다니 다행이다냥."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더니 이어서 전달 사항을 전하였다.
"근처 산에 원혼을 놓쳤다는 소식을 들었다냥. 지금 너희 둘이 가장 가까우니 그쪽으로 가보도록 하라냥."
"네..."
다급한 목소리에 기가 눌려 차마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알겠다 대답을 해 버렸다. 상사가 시키면 해야지 그녀 스스로 납득시키며 나름의 위로의 말을 속으로 건넸다.
"금방 다른 지부에서 지원군을 보내줄 거다냥."
"네."
힘내라는 짧은 격려와 함께 이윽고 무전이 끊겼다.
끊겨버린 무전을 품속에 넣으며 매니저는 원혼이 나온다는 산을 향해 발을 돌렸다.
"기이 가자."
"후후후, 얼른 끝내야겠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휴일에 끌려 나와 임무를 하게 되었는데도 아무 불만 없이 선뜻 따라주는 그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이따 복귀하면서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겠다.'
* * *
낙엽에 뒤덮인 산길은 걸을 때마다 비쩍 마른 나뭇잎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두 명의 발걸음 소리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엇갈리며 산속을 메웠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는 속에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만화경도 거의 다 채워가네."
"그러게 말입니다."
짧은 맞장구 후 그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매니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마스터의 만화경에도 나비가 채워집니까?"
"음, 나비는 아니고 비스무리한 거."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매니저가 말을 덧붙이며 대답했다. 직원들은 처리한 임무가 환산되어 만화경에 채워져. 얼마 전에 세이 사감님이 강연에서 말씀하셨는데, 또 제대로 안 들었지?
후후후,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매니저가 추궁하자 그는 웃으며 어물쩡하게 넘기려 했다.
"제가 그래도 마스터보다는 사신에 대해 잘 알 겁니다."
그가 으쓱대며 입을 열었다.
"과연~?"
"호오, 내기하시겠습니까?"
믿지 못하겠다는 매니저의 반응에 그가 꽤나 자신 있다는 듯 승부를 제안해 왔다.
"좋아, 내가 낸 문제를 다 맞추면..."
"마스터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의 입꼬리가 매끈하게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좋아, 대신 못 맞추면 기이가 내 소원 들어주기."
"좋습니다."
후후후 그가 작게 코웃음 소리를 흘렸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바라는 바를 성취했다는 듯 빛이 났다.
"그럼 첫 번째, 명부의 의미는?"
그가 그쯤은 우습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오래전부터 사신 활동을 해온 그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문제였다.
"죽을 운명인 자의 이름이 적힌 절대적인 장부."
노련하게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정답을 말한 그는 만족하냐는 듯 웃으며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오래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나비가 뜻하는 것은?"
"후후후, 생명의 영혼입니다."
내는 족족 답을 말하는 기이 때문에 곤란하였는지 매니저가 골똘히 고민을 하며 손가락으로 턱을 받쳤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힘을 쓰는 그녀의 모습이 좋아서 그의 입에 단 웃음을 짓게 했다.
"만화경이 차는 원리는?"
그녀 나름 고심한 문제였는지 회심의 일격이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하게 질문을 이었다.
하지만 나름 고심한 문제도 그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일정 거리 내에 영혼 등, 만화경과 반응하는 것이 있을 때 만화경 안으로 들어오면서 만화경이 차죠."
아무리 복잡한 것이라도 여러 번 들으면 귀에 익기 마련인 것이다.
이내 승리의 확신을 가지며 그가 미소 지었다. 그의 여유만만해 보이는 미소에 자극받은 것일지 매니저가 발끈하며 소리를 냈다.
"마지막으로! 염원이 이루어지는 조건은?"
여전히 여유로워 보이는 그의 태도에 분했는지 매니저는 못 맞추길 바란다는 눈빛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후후후후, 만화경이 다 채워지면 그 자리에서 바로-"
나란히 걸으며 혹여 그가 답을 맞힐까 노심초사하며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던 매니저가 갑자기 그를 멈춰 세웠다.
"쉿."
"마스터?"
"원혼의 기운이 느껴져."
그녀가 숨을 죽이며 그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낮게 달싹였다. 잔뜩 찌푸려진 그녀의 미간이 상황의 정도를 말해 주었다.
그녀의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위에 스산한 공기가 깔리고 바람이 거칠게 일었다.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한 기이가 매니저를 자신의 등 뒤로 세웠다. 전투 인력이 자기밖에 없는 상황에서 무슨 수를 써서든 그녀를 지켜내야만 했다.
삐 삐 삐
그때 매니저의 단말기가 다시금 울렸다.
"매니저, 긴급 명부다냥! 기이한테 발송할 테니 지금 바로 같이 확인하도록 하라냥."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의 주인은 냥선배였다. 긴장감이 흐르는 순간에 추가 임무를 던진 그는 많이 성급했는지 더 이상의 말없이 바로 무전을 끊어버렸다. 휴일에 둘만 임무를 보낸 것도 모자라 추가 임무까지 주다니 급한 일임을 알고 있었지만 묘한 짜증과 위화감이 일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명부 한 장이 그의 앞으로 날라왔다.
팔락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펼쳐 본 명부에는 딱 단 한 번 냥선배의 책상 위의 서류에서 보았던 익숙하고도 낯선 이름이 단정하게 적혀있었다. 몇 번 보지도 불러보지도 못했지만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름,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이 소중한 이름을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모든 게 꿈이라고 말해 주었으면 하였다.
"기이?"
"....."
"왜 그래?"
그녀가 거듭하여 부르는 소리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빈 광장 같았다.
그의 이름을 여러 번 불러도 눈에 생기를 잃은 채 대답하지 않자 기다리다 못한 매니저는 그의 손에게서 명부를 집어 들었다.
그의 손에서 뺏어 든 명부에는 매니저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그녀의 두 눈을 의심하였지만 몇 번이나 읽고, 또 읽고 내려가도 같은 이름이 읽혔다. 틀림없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붉은 두 눈이 칠흑 같은 흑발에 가려질 때까지 고개를 푹 떨구고 이를 바득바득 갈던 그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목을 잔뜩 긁으며 겨우 목소리를 냈다.
"마스터는..."
그의 꽉 움켜쥔 주먹은 점점 새하얗게 질려갔다.
"제가 지키겠습니다."
매니저에게 걱정하지 말라 이르면서도 그는 전혀 진정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다.
그 스스로 그리 말하면서도 그녀를 지켜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그녀마저 잃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매니저만큼은 지켜내고 싶었다.
3. 신기루가 이는 날
바람은 한층 더 사나워지고 빈 나뭇가지들이 요란스럽게 부딪혔다.
짤막하게 오가던 대화를 들은 것인지 잠잠했던 원혼이 일어났다. 그는 공중을 날아다니며 그의 공간에 들어온 침입자를 찾아 숲을 뒤지기 시작했다.
원혼의 움직임이 느껴지자 기이는 재빠르게 매니저의 팔을 잡아끌어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무기를 소환하고 경계를 바짝 한 채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공격할 때를 엿보던 찰나였다.
"찾았다."
음습하고 어두운, 오랜 세월을 보내며 귀에 익은 목소리가 하늘 위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곳에는 수 많이 봐왔던 원혼 아니, 원혼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얼핏 열은 되는 듯했다. 대부분 조용히 있었기에 이렇게 많은 수가 있는지 파악을 못한 모양이었다.
기이는 매니저의 손을 잡고 원혼들을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달리고 또 달려도 날아다니는 원혼을 따돌리기란 불가능했다. 도망치면 칠수록 어둑한 숲속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 들어갈 뿐이었다.
숨이 차게 달려가는 둘을 농락이라도 하듯 원혼들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계속 달리다 지쳐 발걸음이 느려진 그들 주위를 어느새 원혼들이 둘러쌌다.
이대로라면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엄습해왔다.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극을 향해 치달려갔다.
그때, 대치하고 있던 한 원혼이 매니저에게로 달려들었다.
"마스터!!!"
기이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그 바람에 무게가 뒤로 쏠려 둘은 동시에 뒤로 넘어졌다. 넘어지는 도중 기이가 그녀를 팔로 감싼 덕분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자칫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다. 혹시라도 기이가 팔을 잡아끌지 않았더라면. 오싹한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 갔다. 항상 간접적으로 경험해 왔던 죽음이 지금 가장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매니저만 공격하는 걸 보았을 때, 그들의 목표물은 매니저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금 공격을 피하느라 둘 다 바닥에 쓰러져있는 이 상황은 가장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호흡을 가다듬던 그녀가 눈을 잠시 감았다 뜨고는 큰 결정을 내린 듯 입술을 뗐다. 단둘 밖에 없는데 수십 마리의 원혼에 둘러싸인 상황, 자신의 명부까지 발송된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고 어떤 것이 현명한 결정인지도 잘 알고 있다. 한 명이라도 구하기 위해서는-
"기이, 내가 막을 테니 너라도-"
"아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내 말 들어-"
"아니요! 저는--"
"기이!! 명부는 절대적이야."
그녀가 그의 팔을 잡고 마구 흔들며 소리 질렀다. 그의 팔을 움켜쥔 그녀의 손에는 간절하게 부탁을 하듯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명부는 절대적, 오래전부터 그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야기였다. 하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아니라는 걸 어떤 수를 써서라도 증명해 내고 싶었다.
본디 사신의 운명은 인연을 거두어 가는 것에 있지만 이번만큼은 그 인연을 지켜보고자 하였다. 하지만 운명은 그 무엇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들 주위를 둘러싼 원혼들이 웅성거리며 마치 금방이라도 달려들 거처럼 꿈틀댔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매니저는 만화경을 꺼내 바닥에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마스터, 뭐 하시는 겁니까?!"
그의 고함에도, 그의 만류에도 멈추지 않고 내려치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주위를 에워싸며 키득거리던 원혼들이 매니저에게 달려들었다.
쩌적
내려치기를 반복하며 그녀의 손에 들린 만화경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만하십시오!!"
쩌적
다시 한번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보랏빛 섞인 오묘한 빛들이 뿜어져 나왔다. 단언 장관이었다.
그와 동시에 원혼들이 매니저의 등을 깊게 찔러왔다. 흘러나오는 화려한 빛의 파도에 밀려나는 듯 그녀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바닥에 나뒹굴던 빛바랜 낙엽에는 단풍이 들었다.
그녀는 반쯤 쓰러져 기이의 품에 안긴 채로 여린 숨을 간신히 색 색 내쉬었다. 그녀는 손에 든 부서진 만화경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그의 만화경이 있을 왼쪽 가슴께에 가져다 댔다.
눈꺼풀이 그녀의 눈동자를 완전히 덮었다. 매니저는 눈을 감은 채로 바싹 마른 입을 달싹였다.
"기이... 염원을 이뤄."
안된다는 그의 비명과 함께 찬란한 빛들이 공중으로 그의 만화경 속으로 퍼져나갔다.
원혼들은 그녀의 상처를 더욱 깊게 파고들었고 만화경을 쥐고 있던 손에는 힘이 풀려 그녀의 손을 타고 원통의 만화경이 굴러 내렸다.
찬란한 빛들이 어둑한 숲속을 메우며 높푸른 하늘로 솟아올랐다. 멀리서 봐도 선명히 보이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과 함께 보랏빛 신기루가 이는 하늘에 나비 두 마리가 하늘거리며 춤추듯 날아올랐다.
* * *
4. 졸업
매미도 울기를 멈추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은, 사신 지부는 고요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게 말이 돼? 갑자기 두 명이 졸업을 한다는 게!"
조기 졸업한 두 명을 위해 열리는 졸업식, 그 성스러운 날에 한 사신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 위에서 내린 결정이다냥."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주인공이 없는 졸업식이 사신 지부 강당에서 열렸다. 말만 번지르르한 졸업식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상부라고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당에는 성대한 졸업식이 열렸다. 두 사람이 졸업한 사신 지부는 평화로웠다.
* * *
5. 다시 돌아오는
[XXXX년 인간계]
-아직 누리지 못한 것이 많은 아이이나, 너를 두 번 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 수 있도록, 네게 선물을 주마.-
길거리를 검은 장발의 사내가 홀로 걷고 있었다. 그의 눈은 단풍이 든 것처럼 짙붉었고, 걸을 때마다 그의 길고 검은 머리가 가볍게 일렁였다.
또다시 가을이 왔다. 도로 위의 차들은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며 쌩쌩 달렸음에도 거리가 단풍으로 울긋불긋 얼룩진 대다, 걸을 때에는 사부작 소리를 내며 색 바랜 낙엽이 바스러져서 꽤나 운치 있게 느껴졌다. 은은히 코끝을 맴도는 가을 냄새와 귀를 간질거리는 가을 소리가 어딘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괜히 바닥에 떨어진 단풍을 구경하며 걷던 중 앞에 걸어가던 사람의 지갑이 떨어졌다.
펼쳐진 채 떨어진 지갑을 들어 올리자 지갑에 꽂혀있는 신분증이 눈에 들어왔다.
신분증 사진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라테 모카색에 어깨 기장의 머리. 그리고 반듯하게 적힌 이름.
잊고 지내왔던 지난날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네 인연을 만나면 알아볼 수 있도록, 네게 선물을 주마.-
잠들기 마지막 순간에 들렸던 운명의 목소리까지 선명하게 기억났다. 아, 그에게 선물을 받았구나. 모든 것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명부에서 봤던 그리웠던 그 이름을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이제야 다시 만났구나.'
마스터, 잊고 있었던 그 그리운 호칭을 다시금 입에 올려 보았다.
'먼저 만나러 와주신 저번 생과는 달리, 이번에는 제가 먼저 찾으러 가겠습니다.'
그가 조금은 빠른 속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지갑을 떨어뜨리셨습니다."
"네?"
부름에 뒤돌아본 그녀는 예전과 달라진 것 하나 없는 헤어지기 바로 전 모습 그대로였다.
"아, 감사합니다!"
".... 마스터."
믿기지가 않아 무심코 작은 목소리로 달싹거려보았다.
"네?"
"아닙니다, 제가 아는 사람과 많이 닮으셔서 말입니다."
[그 누구라도 좋으니 지금 함께하는 저들과 어떤 인연으로든 다시 만나게 되길.]
과거 사신 시절에 겨우 찾아낸 염원. 과거 만화경에 빌었던 그 염원을 나는 이뤘구나. 그녀를 이렇게 마주하니 확신하게 되었다.
"아, 그런가요? 저도 어디서 뵌 거 같기도 하고."
"후후후"
"혹시 저희 어디서 만났나요?"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시끌벅적하던 거리가 고요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우리 둘 밖에 이 거리에 없는 거 같았다. 살짝 선선하고 따뜻한 바람이 장난스럽게 가슴을 간지럼 태우며 은은히 일었다.
우리가 만났던 계절, 우리가 헤어졌던 계절, 우리가 사랑했던 계절, 우리가 다시 만나는 계절, 가을이 돌아왔다.
비상하게 만났던 우리가 평범하게 만나는, 이생을 소중히 하리다.
우리들의 인연은 이렇게 다시 이어진다. 어김없이 다시 돌아오는 가을처럼. 빙글 뱅글 다시 돌아오는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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