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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닮았다 / 욕망아지
1.
푸른 하늘이 유달리 높은 것을 보니 가을이 오는 모양이다. 한낮을 뜨겁게 내리쬐던 태양의 온기는 차츰 식어가고, 선선한 바람을 타고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던 식물들이 열매를 맺는다.
한가롭게 앉아서 계절의 변화를 만끽하는 일상이라니. 예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라, 기이는 씩 입꼬리를 올렸다.
불그스름하게 노을이 질 무렵, 모두가 식사하러 간 사이 그는 정원에 혼자 남아 경치를 감상 중이었다. 방금까지 14지부 사신들이 모여 요란했던 정원이 허전할 만큼 조용해졌다. 허전하다는 감정, 그것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계절이 바뀌듯 그저 당연하게 이어지는 일상이 소중해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깊은 상념에 잠긴 기이는 오르락내리락하는 분수대의 물줄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 느낌은.”
익숙한 위화감이 들어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기다리던 것은 찾았나?”
힉, 숨을 들이켠 기이가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고요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긴장으로 감돌았다.
그― 천계신은 무엇으로도 나타날 수 있는 존재였다. 정원에 핀 꽃, 분수대의 물, 하다못해 흩날리는 바람으로도. 그러나 웬만해서는 직접 움직이지 않았기에 이곳까지 행차한 데는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거였다.
달가운 주제는 아닐 거라 여기며 기이는 신의 형체를 찾지 못해 허공에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때였다.
“기이!”
“!? 아, 잠깐…….”
말릴 틈도 없이, 매니저가 해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왔다. 기이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신이 행여 그녀에게 관심이라도 가질까 전전긍긍하며, 최대한 그녀를 제 안으로 숨겼다.
기이가 몸을 가까이 붙여오는 게 그늘을 만들어주는 것이라 생각한 매니저는 까르르 웃고서 오늘은 덥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우물쭈물하는 기이를 향해 “짠!”하고 손을 내밀었다.
“…?”
“벌써 새빨갛게 물들었더라고~ 예쁘지!”
기이는 그녀의 손에 담긴 단풍잎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을 펼친 모양처럼 곧게 뻗은 나뭇잎 자락이 붉다 못해 탐스럽게 익어있었다. 홍조를 띤 그녀의 볼처럼 어여쁘다고 생각하는 찰나, 매니저가 선수를 쳤다.
“히히, 기이 눈동자랑 닮았어.”
그러면서 매니저는 붉은 단풍잎을 들고 있던 책 사이에 끼워 건네주었다. 기이는 불청객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후후.” 웃으며 능청스레 말했다.
“제 눈동자가 이렇게 예쁘다는 뜻입니까?”
“그럼, 당연하지.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기이는 무섭지 않다니까.”
언젠가 기이가 저 자신의 외모를 차가운 느낌이라 별로라는 말을 한 이후, 그녀는 유별나게 그를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기이의 입에서 스스로를 칭찬하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항상… 기이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오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마치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듯이. 서럽도록 다정하다.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그런다고 제 험악한 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습니다?”
“또또 그런다. 기이는 루이를 반쯤 닮아야 해. 너무 자기애가 없어.”
글쎄, 그건 매니저가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닐까. 그동안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내가 나인 게 만족스러웠던 적이 없다. 내가 나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그녀와, 모두를 만날 수 있었던 게 ‘지금’의 나라서 감히 행복하다고까지 느끼는 중이었다.
온화하게 눈웃음 지은 기이가 매니저와 함께 걸음을 떼려는데, 다시금 천계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의 인연을 만난 것 같군.”
왜. 그 말이 축복이 아닌 저주처럼 다가오는 걸까.
갑작스레 서늘해진 기운을 풍기며 기이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무리 선한 의도가 있다 해도, ‘신’이란 예측불허였다. 얽혀서 좋을 게 없었다.
기이는 끝까지 상냥히 웃으면서 매니저를 먼저 돌려보내고, 반쯤 몸을 돌려 여전히 어디 있는지도 모를 신을 향해 차분히 대답했다.
“지금 제 옆에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번에는… 진짜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는 중입니다.”
“음… 아니, 그게 아닐 텐데.”
“?”
굵직한 회오리바람이 기이가 서 있는 정원을 꿰뚫었다. 그가 강한 압력을 이기지 못해 한 걸음 물러나자, 마침내 천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뾰족하게 세운 귀와 위협적으로 벌어진 입, 야생 그대로의 날 선 노란 눈동자. 회색 늑대의 형태였다. 기이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을 때, 신이 말했다.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충분히 누리고 있잖습니까.”
“천사조차 제 탐욕을 통제하지 못해 사신이 된 마당에, 너는… 충분히 누리고 있다?”
천계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모르겠어서, 기이는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못마땅한 천계신이 불호령을 내렸다.
“네가 그것을 깨닫기까지, 너의 가장 소중한 걸 가져가겠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
갑자기 번개가 내리쳐진 듯 번쩍― 섬광이 일어나더니, 세상이 온통 시커멓게 번져갔다. 멀리서부터 아지랑이처럼 퍼져오는 어둠이 기이의 전신에 둘러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 기이는 달라져 있었다.
2.
정갈하게 하나로 묶은 새까만 머리칼에 경직된 얼굴.
아침조 조원들의 항의로 마지못해 기이를 방으로 호출한 매니저는 급격하게 분위기가 달라진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굳게 다물린 입술은 좀처럼 웃을 기미가 없었고, 단풍잎을 닮은 붉은 눈동자는 빛깔을 잃은 듯 냉기가 서려 있다. 그가 스스로를 차가운 인상이라 했던 말처럼,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알아차린 기이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업무가 끝나셨다면, 이제 면담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딱딱한 말투 속에는 용건만 간단히 해라, 라는 속뜻이 포함된 것 같다. 멋쩍은 미소를 지은 매니저는 애써 분위기를 띄우려 “커피 마실래?” 묻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냥 선배에게 제출할 업무일지를 마무리하느라, 기이를 기다리게 만든 참이었다. 평소의 장난기 많은 그라면, 그녀가 일부러 일을 끝내지 못하도록 옆에서 방해하기 바빴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얌전히 기다려주는 게, 서운하다니 말이다.
사신지부가 훤히 내다보이는 창문 바깥을 괜히 한 번 바라본 매니저가, 기이의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내려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조원들의 불만이 뭐라고 하던가요.”
“어? …으음.”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그동안 아침조 조원들의 항의라고 해봤자― ‘자고 일어나니 얼굴에 낙서가 되어 있는데 기이가 한 짓 같다.’, ‘기이가 논논을 훈련시킨다며 헨젤과 그레텔 동화처럼 사료로 길을 만들어 놨다.’, ‘기이가 만든 인형이 계속 쫓아온다.’ 따위의, 일종의 귀여운 해프닝에 불과했다.
그런데 최근 별안간 쌀쌀맞게 변한 기이에게 조원들이 갖게 된 불만은 약간 위태로운 수준이었다.
“정화를 하기 전에, 먼저 그 원혼의 한을 풀어주는 방식이 한심하다고 했다면서?”
그로 인해 리히트와 큰 말다툼을 했다고 들었다. 14지부는 정화율에만 집착하는 무자비한 사신들과는 다르지 않느냐는 리히트의 말에,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는 사신은 자격이 없다고 기이가 처음 보는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고.
재채기를 반복하며 기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전하는 엘에게 매니저는 걱정하지 말라고 호언장담했다. 겉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엉뚱한 행동을 해도 그녀가 아는 기이라면, 누구보다 속 깊은 인물이니까.
그런데 정말, 그에 대해 조금도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기이가 지쳤다는 태도로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한을 풀어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신은 원혼을 정화하면 그만입니다.”
“…기이, 갑자기 왜 생각이 바뀐 거야? 원혼을 ‘사냥’하는 방식은 그 일을 수행하는 사신들에게도 잔인한 짓이라고 했었잖아.”
지난날을 떠올리면 언제나 무너져 내릴 듯한 얼굴을 하던 그였다. 정화 임무보다 당번을 서는 걸 더 즐거워하고, 원혼의 사연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기이였는데.
“어차피 소멸할 영혼에게 낭비할 시간은 없습니다.”
‘제 눈동자가 이렇게 예쁘다는 뜻입니까?’
칼날처럼 날카로운 핏빛 눈동자가 매니저를 냉담하게 응시한다. 기이의 눈동자는 전처럼 예쁘지 않았다. 그녀는 턱을 꽉 깨물었다.
“그럼 하나만 묻을게. 이곳에서의 추억도… 시간 낭비야? 어차피 염원을 이루면 각자 흩어질 테니까?”
“…….”
“대답해 봐, 기이. 우리들이… 내가, 시간 낭비야?”
3.
대답하기는커녕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매니저는 욱하고 성질이 올라왔다. 이대로는 저 또한 기이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해버릴 것만 같아, 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내버려 두고 방에서 나왔다.
자신이 화를 내면서 뛰쳐나왔는데도, 기이가 쫓아오지 않는다. 쫄래쫄래 따라와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긋 웃으며 사과를 해올 줄 알았다. 그러면 이번에는 장난이 도가 지나쳤다고 혼쭐을 내줄 심산이었는데…….
‘어차피 소멸할 영혼에게 낭비할 시간은 없습니다.’
원혼이라도 씌었나, 차라리 의심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원혼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게 그의 본성이라 여겨질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동안 기이의 모습이 모두 연극이었다 해도 믿을 법한 자연스러운 냉소. 그건 마치… 지겹도록 세월을 흘려보낸 자만이 풍길 수 있는 무감함 같아서. 새삼스레, 그의 고독이 실감 되는 것이었다.
늘 지금이 가장 즐겁다고 말하곤 했던 기이는 대체, 우리를 만나기 전에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던 걸까. 그것만 생각하면 매니저는 왈칵 눈물이 차오르곤 했다. 혼자라는 외로움, 혼자 남겨졌다는 적막감이 어떤 건지 그녀 역시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후후, 마스터는 제게 아주 중요한 분입니다.’
기이가 해주는 말들이 좋았다. 영원 같은 시간을 혼자서 버텨낸 사람이 나를 중요하고 특별한 존재로 바라봐주는 게 좋았다.
아침마다 매니저의 운세를 봐주는 기이는, 어떻게 해야 그녀의 관심을 사로잡을지 잘 안다는 듯이 굴었다. 잠깐 심심할라 치면 어디선가 튀어나와서 놀라게 하고, 너무 힘들어서 기운이 없을 때면 슬그머니 다가와 달콤한 간식거리를 주고 갔다.
매사 가벼운 장난이나 치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누구보다 매니저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피고는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 서툰 진심이 정말로 소중하게 느껴졌는데.
“진짜 무슨 일 있는 건가.”
실컷 화를 내고 나니, 문득 방에 혼자 두고 온 기이가 신경 쓰였다. 어쩌면 그도 반성하고 있을지 모르고. 머뭇머뭇 그녀가 복도를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멍!”
복도 끝, 정원과 이어지는 아치형 기둥 쪽에서 웬 짐승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뾰족하게 세운 귀와 초롱초롱한 노란색 눈망울이 귀여운 강아지였다. 의아해하며 다가간 그녀가 무릎을 굽혀 앉고서 머리를 쓰다듬었더니, 강아지가 기분 좋은 듯이 비비적거린다. 몸을 뒤덮은 회색 털이 보드라웠다. 그녀는 “흐음.” 콧소리를 내면서 강아지에게 물었다.
“늑대 새끼 같기도 하고. 귀여워~ 여기 어떻게 들어왔니?”
4.
분명히 기억은 하고 있다. 천계신을 만나기 전 자신이 어땠었는지 잊은 건 아니니까. 그래서 더욱 답답한 일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나는 그토록 밝게 웃고, 실없는 장난이나 치며 재미있어했는지. 그리고 그녀는.
‘이곳에서의 추억도… 시간 낭비야? 어차피 염원을 이루면 각자 흩어질 테니까?’
왜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상처받은 표정을 했고, 왜…….
그 모습에 내 심장이 덜컥거리며 산산조각 난 느낌이 드는지.
결국 냥 선배에게까지 불려가 잔소리를 듣고 나오는 길이었다. 냥 선배조차도 사무실에 들어선 기이를 보고서 꽤나 놀란 눈치였다.
‘기이 너, 뭔가 달라졌다냥. 음… 정확히는 예전처럼 돌아왔다냥.’
피도 눈물도 없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생긴 험악한 사신. 지나가는 영혼마다 옷깃이라도 스칠까 벌벌 떠는 무시무시한 존재. 그게 뭐가 잘못된 건가. 사신은 원래 그런 위치다. 생명을 앗아가는 마당에 공포의 대상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자꾸만, 매니저란 여자의 가냘프게 떨리던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는다.
‘우리들이… 내가, 시간 낭비야?’
얼마나 애틋했는지 하마터면 아니라고 반사적으로 대답할 뻔 했다. 시간 낭비일 리 없다고, 그러니 울지 말라고.
당신이 울면, 어째서인지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다고.
“불쾌해.”
내가 모르는 나의 감정이 불만스러워, 기이는 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정원으로 나오자 강한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쯤이었나, 얼마 전 제멋대로 찾아와 자신을 엉망으로 흩트려놓은 천계신을 만났던 장소가.
“나한테, 뭘 바라는 겁니까.”
저물어가는 태양 아래, 가을의 쌀쌀한 바람이 유난히도 살갗을 따갑게 지나친다. 그는 삐딱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포근해 보이는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청명한 색감의 하늘. 이 차디찬 바람이 부는 계절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마치 저처럼.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아.
삶의 모든 인연을 만나는 날까지 시간을 허락해주겠다던 천계신의 판단은 결국 틀린 거 아닐까. 지난번 이유를 알 수 없이 분노한 그는 기이의 가장 소중한 걸 가져가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조금 사교성이 떨어졌을 뿐,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지 않은가. 그러니 아무래도 명계가 무너졌을 당시 소멸한 사신들에게 저주를 받은 게 틀림없다. 혼자 살아남았으니 평생 혼자 살아보라는 저주.
“평생… 혼자.”
냥 선배의 잔소리, 함께 해온 동료들, 천계신이 허락한 시간. 켜켜이 축적되어 온 기억들을 담담히 곱씹으면서 기이는 잠시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차분히 머리를 식히고자 한 거였는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사육장 관리 당번인 엘이 사육장 방향이 아닌, 기숙사 건물 쪽에서 사료 그릇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기이가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만 있는 것을 질문이라 생각한 엘이 허둥지둥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이건, 그, 매니저님이 강아지 한 마리를 발견하셔서…….”
“강아지?”
“네! 아직 새끼인지 엄청나게 작고 귀엽더라고요. 매니저님 옆에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해요. 그래도 주인은 찾아줘야 하니까, 일단 냥 선배님께 보고하러 가는 길이었어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넘기려던 기이가 이어지는 엘의 말에서 번득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 어… 생긴 게 꼭 새끼 늑대 같기도 하다고요……?”
뾰족한 귀, 회색 털에 노란 눈동자, 라고 했다.
기이의 호흡이 순식간에 가팔라졌다. 그가 이를 꽉 깨물며 엘에게 그녀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엘이 당황한 기색으로 기숙사 뒤편의 호수에서 강아지와 놀고 있다고 말했다. 무어라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기이는 본능적으로 내달렸다.
묘한 느낌을 감지한 엘이 뒤쫓아 갈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냥 선배에게 알리고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던 터라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5.
깊이가 가늠되지 않아 물속이 시커멓게 내비치는 호수 근처, 잎이 무성히 늘어진 버드나무가 서 있다. 자욱한 안개가 시야를 흐릿하게 방해하는 꼴이, 마계에 온 듯이 음기가 가득해 보인다.
이곳이 원래 이렇게 음습한 분위기였나.
머릿속에서 기억하는 이 장소는 매니저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신나게 웃고 떠드는, 활기찬 공간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제 마음을 대변하듯 서늘한 기운마저 풍긴다. 어둡고 음침한 게 퍽 저와 어울리지 않느냐 자조하며, 기이가 거리를 좁혀갔다.
바닥으로 떨어져 얽히고설킨 낙엽 더미를 밟으며 걸어갈 때마다, 잘그락잘그락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새빨갛게 물들었더라고~ 예쁘지!’
단풍잎…… 홍조를 띤 그녀의 볼을 닮아 예쁘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지금은 색이 다 바랜 채 제 발에 밟혀 엉망으로 뭉개지고만 있다. 그런데도 정말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나.
‘네가 그것을 깨닫기까지, 너의 가장 소중한 걸 가져가겠다.’
사교성이 떨어졌을 뿐…이라고?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들이 말해주고 있다. 기이는 틀림없이 곁에 있는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즐거워했고, 그녀의 앞에서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하곤 했다. 이토록 마음이 공허하지 않았다.
소중한 걸 빼앗긴 지금의 기이는 놀랍게도 쓸쓸했다. 쓸쓸하다 못해 평생 혼자일 거라 생각하니, 스스로가 비참하기까지 하다. 이 마음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 내가… 그녀를 걱정하고 있는지도,
“아야!”
느닷없이. 그의 의식을 번쩍 깨우는,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살피던 기이가 예의 그 버드나무 위로 시선을 올렸다.
낙엽과 비슷한 머리색을 가진 그녀가 호수 방향으로 뻗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었다. 나뭇가지 끝에 아슬아슬하게 앉은 강아지를 잡으려 팔을 내밀다 긁힌 모양인지, 그녀는 뚱한 표정으로 벌겋게 부어오른 팔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중이었다.
기이는 알 수 없는 간지러운 감정이 스멀스멀 퍼지는 걸 느꼈다.
“지금…….”
목구멍에― 자신이 방금 짓이긴 낙엽의 가루라도 얹힌 양,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녀가 하늘과 맞닿은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일까. 밝은 빛이 전부 그녀에게로 쏠린 것 같다. 기이는 햇살 한 줄기가 무대 조명과도 같이 환하게, 하늘에서부터 그녀를 내리비추는 장면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삭막하기만 한 기이의 계절과는 전혀 다른, 화사하고 찬란한 가을이 보인다. 쿵, 심장이 아프게 요동을 친다.
“위험하게,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경험 때문에 호수를 무서워하면서, 정체 모를 짐승을 구하겠다고 제 팔에 생채기를 내면서까지 나무 위에 오른다. 그러다 호수에 빠지면 어떡하려고? 그러다, 팔다리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면 어떡하려고!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리고 왜 화가 나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나뭇가지에 안착해있던 그녀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걸 발견했다.
“기이? 여긴 어떻게― 엇, 어어!”
“조심하세요!”
기이가 몸을 날려 재빨리 나무 아래로 다가간 순간.
철퍼덕!
“커헉.”
중심을 잃고 추락한 그녀가 기이를 무참히 온몸으로 깔아뭉개며 떨어졌다. 척추에 느껴지는 강한 통증에 기이는 신음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엎어져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제 아래 형편없는 모양새로 깔린 인물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서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앉은 기이는, 머리색보다 조금 진한― 그녀의 흙빛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했다. 늘 봐오던 모습인데, 처음 만난 사람처럼 낯선 느낌이 들었다.
낙엽을 닮은 머리색에, 흙을 표현한 듯한 눈동자, 태양처럼 밝은 기운. 정말이지 음습한 호숫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기이로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힉, 기이! 피 나!”
그녀가 기겁하며 서슴없이 기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제야 기이는 제 왼쪽 손목 부근에 길게 상처가 벌어진 것을 발견했다. 엎어지면서 바닥에 있던 돌 따위에 긁히기라도 했나 보다.
주륵, 피가 나긴 했지만 이 정도는 별 게 아니었다. 이 정도는… 저 때문에 상처받은 그녀를 생각하면 작은 흠집 수준도 못 되었다.
“저보다도, 마스터의 상처가…….”
“잠깐만 기다려, 보건실 가서 구급함 가져올게.”
매니저가 휙, 몸을 돌리는 그때. 기이의 본능이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깨어났다. 찬란한 빛을 잃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것을 갈망하는 마음이 말했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말라고, 잘못했다고. 그러니 나한테서 등을 돌리지 말라고.
나 때문에 제발… 상처받지 않았으면 해.
비틀리는 심장이 쿵쾅거리며 아우성쳤다. 돌연 압박감에 시달리는 기이가 손목이 아닌 제 심장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서, 애처로울 만큼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붙잡았다.
“옆에… 있어 주세요, 마스터.”
그러자 놀란 듯이 눈을 끔뻑인 매니저가 제 앞에 스르륵, 무너지듯 앉아 자신을 들여다본다. 부드러운 손길로 제 손목에 난 상처를 덮어준다.
그래. 나로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존재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아…….
기이가 어깨를 흠칫했다. 마음이 통째로 으스러진 기분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크게 쓸어내리는 걸 보면서 매니저도 덩달아 사색이 되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으나, 그녀는 어째서인지 그가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어 하나하나, 겨우 내뱉는다는 듯이 힘주어서 기이가 말을 이었다.
“시간 낭비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까지 심장이 바들바들 떨리는데, 어리석게도. 나는 지금 충분히 만족스럽다며 스스로를 기만했다. 만족스러울 리가 없는데. 사랑스러운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닿고 싶어 절절매고 있으면서 말이다.
“…기이?”
불안한 기색의 그녀가 무릎걸음으로 거리를 좁혔다. 기이의 차가운 말에 상처를 받아 화내고 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상냥한 손길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그의 눈가를 쓸어주었다.
이걸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나. 서럽도록 다정한 당신을 향한, 나의… 탐욕스러운 애정을.
‘천사조차 제 탐욕을 통제하지 못해 사신이 된 마당에, 너는… 충분히 누리고 있다?’
기이는 마침내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천계신은 그의 위선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이제 내 옆에는 많은 이들이 있다고, ‘충분히’ 만족스러운 척하는 알량한 거짓을 꿰뚫어 본 거다. 그래서 기이가 인정할 때까지, 그의 가장 소중한 것― 욕망하는 마음을 빼앗았다.
사실은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그녀를 가슴 저리도록 원하고 있으니까. 제 옆에 많은 이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그녀로 인해서 공허했던 나의 삶이 완전한 형태로 채워지고 있다. 다른 동료들은 공교롭게도 그녀 다음이었다.
“절대로, 시간 낭비 아닙니다.”
“…….”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나만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 그녀에게 나 한 사람만이 소중한 존재였으면 좋겠고, 언제까지나 함께이고 싶은 욕심을 애써 짓눌러 왔는데. 낱낱이 파헤쳐지고 말았다.
‘너의 인연을 만난 것 같군.’
그 말이 축복이 아닌 저주처럼 다가왔던 건, 두려웠기 때문이다. 감히 그녀를 사랑해버려서, 언젠가 다가올 ‘끝’이 너무나도 두려워진 바람에.
“그러니 고작 저 때문에…… 상처받지 마세요.”
당신이 상처 입으면 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빛을 잃는 것과 같다.
기이가 제 눈가를 쓸어 준 매니저의 손을 동아줄처럼 간절하게 붙잡았다. 그리고는 폭우를 맞은 어린아이처럼 가녀린 모습으로, 그녀의 어깨에 모든 걸 내려놓았다.
기대어 온 이마가 델 듯이 뜨거워서, 걱정스러워하며 매니저가 기이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체온이 높은 것 같지는 않은데, 이 열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겠다. 어느샌가 엉망으로 헝클어진 그의 머리칼을 정리해주고 있으려니, 그가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대답했으니, 마스터도 대답해주세요. 상처 주는 말만 했는데도 제가… 여전히, 무섭지 않으십니까?”
붉은 단풍잎은 그녀의 홍조 띤 볼과도 같고, 내리쬐는 태양은 그녀의 화사한 미소를 그려준다. 그녀의 머리색은 쉽게 바스러지는 낙엽을 닮았고, 갈색 눈동자는 자연의 흙을 담아 왠지 모를 향수를 일으킨다.
그녀는 가을을 닮았다. 쓸쓸하고 차디찬 기이의 그것이 아니라, 풍요롭고 따사로운 그녀만이 품을 수 있는 계절이었다.
기이가 안달하는 그 계절이,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며 말한다.
“응. 무섭지 않아. 그러니까 이제… 내가 알던 기이로 돌아오면 좋겠어.”
“…네, 죄송합니다.”
어둠 속에 파묻혀 있던 내가, 그녀를 만나 빛으로 나온다. 제아무리 차갑고 쓸쓸한 계절이라도 그녀만 있다면 어디든지 언제든지 온 세상이 따뜻해진다.
그저 당연하게 이어지는 일상이 소중해지기 시작한 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너무 당연해서, 의식조차 못 했을 정도로.
기어이 제 마음을 토해낸 기이를 조용히 관찰하는 작은 짐승이 샐쭉 입을 내밀더니 뒤를 돌았다. 이번에야말로, 저 나약한 영혼이 신을 원망하지 않고 제 삶을 충분히 누리기를 바라면서.
6.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새까만 머리칼에 장난기가 다분한 얼굴.
부르지도 않았는데 방으로 찾아온 기이를 매니저가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술은 싱글벙글, 붉게 익은 눈동자에는 생기가 가득 흘러넘쳤다.
지난번 정원에서 매니저가 단풍잎을 끼워준 책을 읽고 있던 기이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업무가 끝나셨다면, 저에게 시간을 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좋아. 이번엔 또 뭐 하려고?”
싱긋 웃은 기이는 소파 뒤쪽에서 커다란 상자 하나를 꺼내 보였다. 최근 명계에서 인기 상품으로 떠오른, 사신지부를 재현한 레고 장난감이었다. 서류 파일을 덮은 매니저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드디어 손에 넣었네?”
“후후. 전 이제부터 원하는 건 반드시, 갖기로 다짐했습니다.”
“아하~ 그래서 그 첫 번째가 레고야?”
“…정확히는 마스터와 함께 조립하는 레고입니다.”
요즘 들어 부쩍 기이는 낯간지러운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라든가, “마스터 때문에 눈부신 아침이군요.”라든가. 얼마나 능청을 떠는지 루이조차 놀랄 정도였다. 처음에는 또 무슨 일인가 싶었으나, 그런 변화가 썩 싫지만은 않아서 매니저도 조금은 즐기는 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고 상자를 풀어 조립 설명서를 유심히 읽고 있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기이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스터한테서는 항상, 좋은 향기가 납니다.”
“응? 뭐라고 했어?”
“후후.”
달달한 꽃 향기, 시원한 바람 향기, 싱그러운 흙과 나뭇잎 향기. 이 가을을 나타내는 모든 것들이 그녀를 상징하고 있다.
아마도 그건, 가을뿐만이 아닐 것이다. 겨울, 봄, 여름 그리고 다시 가을이 되어도. 당연하게 흘러가는 모든 것들에 그녀를 떠올리게 되겠지.
그러니까…….
사르르 녹아내리는 눈웃음을 친 기이가 입꼬리를 의미심장하게 올렸다.
“앞으로도 제가 원하는 걸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음~ 좋아. 당번 땡땡이만 아니라면?”
“후후, 약속하셨습니다.”
블록에 집중해 흘러내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은근한 의도가 담긴 손길로 조심스레 넘겨주면서, 기이는 충동적으로 솟아오른 탐욕적인 욕망을 애써 잠재웠다.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책임져야 한다. 내 세상의 전부는 오직 당신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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