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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기억 / 삼챠(곰도리)
나는 여름이 싫다. 정확히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여름에 대해 좋은 기억이 그다지 없는걸….’
창틀에서 턱을 괴고는 비 내리는 바깥 풍경을 멍하니 내다보며 생각했다. 어느 쪽이냐 하면, 역시 여름과 관련해선 좋은 기억보다는 안 좋은 기억이 많다. 물론 여름에도 즐거운 일은 많다. 바다, 축제, 바캉스….
‘전부 나랑은 거리가 먼 얘기들이지.’
사신 지부에 오기 전이라고 해서 사는 게 딱히 더 편하지는 않았다. 공부도, 학교도, 전부 내 손으로 힘들게 다녔어. 동생들. - 동생들도, 책임 지면서…. 거기까지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 커다란 나뭇잎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의 토도독 소리도 경쾌한 음악에서 듣기 싫은 소음으로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이마를 짚으며 탁 소리가 나게 창문을 밀어 닫자, 일순 기묘할 정도로 침묵이 감돈다.
“쉬는 날인데, 안 들어가십니까?”
“까, 깜짝이야!”
너무 조용한 건 또 싫단 생각을 하려는 찰나, 등 뒤에서 익숙하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이! 소리 좀 내고 다니라니까!”
“후후... 아뇨, 방금은 제대로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창밖에 재밌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 말과 함께 붉은 눈동자가 내가 한참을 내다보던 창밖을 향했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재밌는 일을 구경하는 표정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눈치가 있는 것 같다가도 이럴 때면 참 사람 속을 모른다 싶을 때가 있다. 재밌는 사람이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고민은 아닌데-”
어느새 우울한 기분이 조금은 가셔 책상 앞에 자리를 고쳐 앉으며 말을 이었다.
“포탈이 망가져서 사흘 정도는 사신 일을 할 수 없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다들 쉬라는 얘기가 나왔잖아? 그런데 사흘이라는 게 기간이 애매하고. 딱히 할 게 없어서.”
“오호, 그렇다는 건 휴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말이군요?”
“음, 뭐 그런 셈인가?”
사실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할 게 없어서 습관적으로 사무실에 나와서 시간이나 죽이고 있던 것에 가깝지만. 그래도 얘기를 하다 보니 확실히 남은 이틀 동안 뭘 해야 할지 아무런 계획이 없기도 했다.
“봄이나 가을이면 산책만 해도 꽤 운동이 되고 쉬는 느낌이 날 텐데, 여름이라 그런 것도 안 되고 말야. 게다가 비까지 오니까 공기도 눅눅하고 기분이 영 그러네?”
거기까지 말하고 나니 문득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
“그러는 기이는, 어디 안 가고 여긴 왜 온 거야?”
“뭐,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쉬는 날이라곤 해도 평소처럼 이곳저곳을 소리 없이 돌아다닐 뿐이죠. 후후...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쉰다는 느낌이긴 하지만, 역시 조금 심심하긴 하군요.”
“음, 기이는 남은 여름휴가 동안 뭘 할지 아이디어 같은 거 있어?”
얘기하다 보니 어쩌다 생긴 사흘간의 휴일이 어느새 ‘여름 휴가’ 같은 퍽 거창한 것이 되어있다.
“음, 글쎄요? 보통 여름휴가라고 하면...”
가볍게 물어본 질문에 기이가 의외로 꽤 고민하는 얼굴을 지어 보인다.
“바다...? 라거나-”
“풉,”
한참을 고민하다 겨우 꺼낸 아이디어가 생각보다 너무 단순한 발상이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웃어버렸다.
“푸하하...”
“이상합니까?”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표정.
“아니아니, 미안. 그런 거 아니야.”
그 표정이 재밌기도 하고 조금 짠한 마음이 들어 손사레를 치며 황급히 답했다.
“나도 처음에 생각한 게 겨우 그 정도 아이디어라서. 아무래도 여름이라고 하면 바다이긴 한데... 여기서 너무 멀고, 그러기엔 기간이 조금 애매하잖아? 준비도 안 되어 있고...”
“듣고 보니 그렇군요.”
거기까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투의 대답.
“기이, 여름휴가랑 관련된 추억거리 같은 거 있어?”
생각해보니 그랬다. 나도 바다니 축제니 하는 것이 조금은 멀게 느껴지는데, 기이라면, 아마도.
“휴가라... 그러고 보니 마스터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인간계의 휴가철이 다가오면 평소보다 일이 좀 바빠집니다. 아무래도 일상을 벗어난 장소에서 들뜬 상태로 있기 때문일까요? 가끔은 다른 때면 전혀 갈 일이 없는 깊숙한 산 속까지-”
“잠깐잠깐! 그런 ‘추억’ 말고! 일 얘기 말고! 즐거웠던 일들 중에 말야.”
“이 얘기도 꽤 ‘재밌는’ 얘기이긴 합니다만-”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입가에 개구진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으려는 걸 슬쩍 째려보자, 그제야 기이가 입을 다물곤 다시금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음, 아뇨. 역시, 특별히... 즐거운 추억이라 할 만한 건 없군요.”
- 역시 그렇구나. 예상은 했지만 생각한 그대로의 대답이 돌아오자 주제넘게 조금 측은한 기분이 들었다. 꼭 거창하게 휴가를 떠나지 않더라도, 여름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는데.
“그럼 기이야 말로 모처럼의 쉬는 날이니까, 조금은 여름을 즐겨보는 게 어때? 휴가라고 꼭 거창한 걸 할 필요는 없거든. 나도 예전엔 여름이 되면 동생들이랑 계절 음식을 먹거나 조금 선선한 밤에 나가서 동네에서 열리는 작은 야시장에 가거나...”
“후후...어째 다 먹는 것과 관련된 추억뿐이군요.”
“...”
예전 일을 얘기하다 보니 다시금 동생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조금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순간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동생들과 함께했던 일들이 나에겐 여름에 관한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그런 추억이 기이에겐 전혀 없는 거라면-
“...? 갑자기 왜 그런 표정으로 저를-”
“기이.”
그래, 남은 휴가 계획은 그걸로 하자.
“네?”
“내일도 한가하지? 나랑 약속 하나 해.”
진지한 내 표정에 당황한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기이를 향해 짐짓 득의양양한 느낌으로 말을 잇는다.
“좋아. 그럼 내일 날이 맑으면, 나랑 같이 시내에 나가는 거야. 내일 하루는 전부 내가 예약해둔 거야. 알았지?”
*
“흠~ 흠흠, 흐음~”
“...마스터, 기분이 꽤 좋은가 보군요?”
“응?”
“아까부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으니까요.”
“응? 내가 그랬어?”
- 다음날.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기이가 건넨 말에 왠지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딱히 내가 즐길 생각으로 외출한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초여름의 크게 덥지 않은 날씨와 비 온 뒤의 맑은 하늘이 들뜬 마음을 불러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름의 그것’인 걸.
...문제라면, 정작 데리고 나온 당사자의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일까?
“그러는 기이는 그렇게 즐거워 보이지 않네. 나랑 나온 게 별로인 거야?”
“후후, 들켰습니까?”
내 물음에 기이가 마음에도 없는 답을 해온다. 나도 바보는 아닌걸, 상대가 놀러 갈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고.
“에이, 거짓말. 도착하기 전까진 기이도 꽤 기분 좋아 보였는걸?”
“음, 사실은...”
내가 호락호락 놀리는 말에 넘어가지 않으니, 기이가 그제야 시선을 돌리며 조금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낸 일이 많지는 않으니까요. 여전히 조금, 익숙하지 않을 뿐입니다.”
아...그 말에 묘하게 쭈뼛거리는 기이의 태도가 이해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에이, 또 그런 말 한다. 일단 지금 우리한테 신경 쓰는 사람 하나도 없잖아. 괜찮을 거야, 오늘은.”
괜히 분위기가 처지는 게 싫어 그렇게 말하곤 기이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우리, 영화 보자 영화!”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
“아...”
확인해보지 않아도 내용이 빤한 불길한 알림음이 단말기로부터 울려 퍼졌다. 단말기는 애초에 업무용으로밖에 쓰일 일이 없었다. 아무리 휴가 기간이라고는 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겨 나온 거였는데...
“확인해보지 않으십니까?”
“끙...이건 안 봐도...”
그렇게 투덜거리며 열어본 화면에는 아니나 다를까, 냥선배의 구구절절 긴 메시지가 빼곡이 화면을 차지하고 있다. 요는 서류 작업과 관련해 타 지부와 함께 급히 확인해봐야 하는 일이 있으니 당장 돌아오라는 내용이다. 아무리 쉬는 날이라도 그렇지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어떡하냐는 날 선 말은 덤이다.
“...들어가 보셔야 하는 겁니까?”
단말기 화면을 문지르며 한참을 입만 비죽이고 있자, 그걸 빤히 바라보던 기이가 내 눈치를 보며 슬쩍 말을 건넸다.
“...바람만 잔뜩 넣어 놓고는, 정말 미안.”
“후후... 아닙니다. 어차피 이런 일은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에 어째 나까지 속상해지는 기분이 든다.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그런 게 어딨어. 음, 꼭 오늘 내가 하려고 했던 일들이 아니더라도... 거창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사람마다 가질 수 있는 소소한 여름의 추억이라는 게 있으니까. 분명 기이도 기이 나름의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거야.”
안타까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에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에 기이가 알 수 없는 미소만 내어 보이며 잠시 다른 곳을 응시하더니, 이내 내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우선은 지부로 돌아가시죠.”
*
“...하아, 결국엔 밤이네.”
허둥지둥 돌아온 지부는 생각보다도 더 험악한 분위기였다. 덕분에 그 후로 줄곧 사무실에 처박혀 꼼짝도 할 수 없었고- 그 결과는 보다시피. 겨우겨우 퇴근 후 밖으로 나오니 이미 밤이 한창이다. 휴가를 통으로 날려버렸어.
“그래도...뭐,”
허무한 마음에 잠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유난히 달이 밝고 별이 잘 보이는 밤이라는 사실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어, 그래도 최악의 퇴근길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숙소로 돌아가는 흙길을 밟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피부로 들러붙은 텁텁한 여름 공기를 조금이나마 덜어가, 희푸르게 빛나는 정원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제법 운치 있게 느껴질 정도의, 기분 좋은 여름밤이다.
호수 옆의 흙길을 따라 여름밤을 만끽하고 있자니 어느새 짜증 어린 기분도 퍽 가셔, 자그맣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고 있자니, -파밧, 하고는. 어디선가 작은 불꽃이 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길옆 수풀 쪽에서 뭔가가 타오르듯 밝게 빛나는 게 보였다. 혹시 잎새에 불이라도 붙은 건 아닌가 싶어 안으로 슬쩍 들여다보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스터.”
“기이!?”
수풀에 쭈그려 앉아 선향 불꽃 몇 개를 손에 든 기이가 내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 아니 그보다... 여기서 날 계속 기다렸다고!?”
“네. 마스터께서 말한... 제 나름의 여름 추억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죠.”
“이런 데서 선향 불꽃을 하는 게 기이가 생각하는 여름 추억이라고?”
내 물음에 답하는 대신, 기이가 선향 불꽃 하나를 내 쪽으로 내밀며 말을 이었다.
“추억이라 하기엔 너무 시시합니까?”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내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기이가 붙인 불에 선향 불꽃이 빠르게 타들어 가며 여러 갈래로 크게 터졌다.
“와...”
그 모양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빼앗겨, 하려던 말도 잊고는 감탄사를 뱉었다.
“후후....”
내 반응에 기이가 여전히 속마음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희미하게 웃어 보인다.
“선향 불꽃은 처음에는 크고 화려하게 타오르지만, 금방 식어 사그라들고 마는 모습이 꼭 인간들을 닮았습니다. 무척이나 덧없지만, 아름답지요.”
그렇게 말하고는 후후, 평소와 같이 나지막이 웃으며 ‘저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따위의 말을 하는 기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거의 다 타버린 불꽃을 한 번, 그러고는 다시 기이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서야 마침내 하고 싶던 말을 떠올려 낸다.
“기이.”
“네?”
“역시, 이건 추억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소한 거 같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음-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내 반응에 살짝 풀이 죽은 듯한 기이의 표정이 재미있다.
“이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추억이라기 보다는, 음.. 여름다운 일?? 여름의 기억? 그래, 여름 기억 정도로 해두자.”
“여름 기억이라.”
“그리고 내년엔, 꼭 나랑 훨씬 더 근사한 여름 추억을 만드는 거야.”
“호오, 내년에는 작정하고 단말기를 부숴버릴 셈인가 보군요?”
“아니, 어떻게든! 내년엔 정말 어떻게든 미리 시간을 빼둘 거야!”
중요한 말을 하는데도 어떻게든 나를 한 번 골려보려는 기이를 향해 강한 포부를 드러내는 와중에 약하게 타들던 선향 불꽃이 힘없는 소리를 내며 마침내 완전히 꺼져버렸다.
순간 어둠에 잠겨버린 수풀 속.
“네, 꼭 그러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마스터.”
답을 하는 기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어떤 표정인지도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조금도 무섭거나 불안하지 않아. 그저 아주 편안하고 즐겁고 소중한, 여름 기억의 한순간에 우리는 함께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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