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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지 않는 눈 / 루베아
하얀 벽으로 둘러 싸인 곳. 여느 가정집과 별관 다를 거 없는 공간. 이곳은 나의 고향, 그리웠던 나의 본래 집이다.
당연하게도 그간 아무도 방문하지 않은 집은 이곳을 마지막으로 찾아왔었던 그날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다른게 있다면 그날보다 가구들과 사진을 넣어둔 액자 위에는 하얀 먼지가 쌓여있었다는 것.
'하아.... 예전으로 돌아왔다..'
짐가방을 대충 소파 앞에 놓고 숨소리도 죽여가며 집을 살폈던 나는 다시 시작된 예전의 삶을 회상하며 걸음을 멈추고,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 아 맞다.'
그리고 기억나는 또 다른 한 가지. 급하게 짐가방에서 대량의 종이를 꺼내었다. 이어, 짧은 시간에 침묵이 알 수 없는 감정과 함께 지나간 뒤, 나의 그리움의 대상이 무심한 듯 바뀌었다.
오랫동안 돌아가고 싶었던 곳인데 어째서 이곳에서 나는 울고 있는 걸까.
입어 코, 앞이 흐려지더니 하염없이 눈물이 내 뺨을 타고 떨어졌다.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지면 또 다른 눈물이 다시 내 뺨을 통해 흘렀다. 대량의 종이. 이것은 그곳을 떠나는 나를 향한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편지였다. 그 메시지에는 흐릿하지만 나를 '매니저'라고 부르는 그들의 마음이 담기어 있었다. 언젠가 만나 자라... 모든 게 끝나기 전에 다시 만나 자라. 그게 과연 언제쯤이면 가능한 걸까.
내 앞은 더욱더 흐릿해져갔다.
더 이상 그들이 웃는 걸 볼 수 없기에,
더 이상 그들의 고민을, 슬픔을 그리고 행복을 들을 수 없기에, 함께할 수 없기에.
편지를 하나씩 다 읽어갈 때마다, 회상되는 과거에 앞이 흐려졌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편지.
'매니저님께..... .. 나인 씨의 편지...'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나갈 때마다 나인 씨의 모습이 그려졌다. 손이 얕게 떨리기 시작했고, 편지지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이별을 고하는 것과 상관없이, 내가 사랑하는 그를 볼 수 없기에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저를... 잊지 말아 주세요.]
내가 어떻게 당신을 잊을까. 나에게 당신은 편안한 달과 같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를 그리워하는 생각 뒤로 이제 그곳에 갈 수 없다는 생각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
'뭐라는 거야, 진짜. 정신 차려.. 넌 이제 회사 사람이 아니야.'
나는 약 7년 동안 타국에서 직장 생활을 했었다. 하지만 그 나라의 생활과 그 회사 일을 적응하기에는 7년이라는 시간은 부족했었던 걸까. 상사로부터 받은 부담과 회사 일에 지친 나는 지금의 상황이 선택하게 되었다. 맞다. 그들과의 이별 또한 내가 선택한 것이다. 비행기를 통해 조국으로 돌아오면서 많은 것을 각오하고 다짐했다. 이제는 예전과 다르다는 것 또한, 각오했었다. 이제 그 각오와 다짐이 현실로 다가왔다.
눈물을 닦고 대량의 편지를 모아, 상자에 담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꺼내지 못할 공간에 넣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이라면 이제 미련을 두지 않으리라. 그럴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 . .
"아... 첫눈이다."
편지를 정리하고 먼지가 쌓여버린 집을 청소하려 창밖을 보니, 내가 걸어왔을 때는 보이지 않던 작고 하얀 얼음이 땅으로 쏟아지는 것이 창밖으로 보였다. 이번 해의 첫눈이었다. 아름답게 내리는 눈은 왜인지 이미 끝나버린 그와 나의 사이를 결말짓는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첫눈을 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미신이라지만 정말 그렇지도 않았다. 그와 만날 수 없는 지금, 나는 그와 함께 있지 않으니까. 그럼.. 그와 마지막으로 첫눈을 본 게 언제였을까. 나는 자연스레 그와의 추억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아마 내가 아직 타국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일 것이다.
나는 그날도 상상에게로 받은 부담과 내게 주어진 일을 끝내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일로 바빴었을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일에 지쳐 잠깐 산책이라도 할까 생각이 들던 그때, 나인 씨가 다가와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밖에 첫눈이 오는데 함께 보러 가지 않겠냐고. 아마 지금도 그러겠지만 그때의 나 역시, 그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었다. 그 증거로 나는 나인의 손을 잡고 눈을 보러 갔었으니까.
그의 손을 잡고 나왔을 때의 세상을 동화 속눈의 나라보다 하얗게 물들어 있었었지. 그리고 눈이 덮은 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차가웠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 주었던 나에게는 그 눈마저 따스하게 느껴졌었지만. 그렇게 그날, 눈마저 따스하게 느껴지게 하였던 그가 내게 말했던 고백은 아직도 그의 목소리와 함께 추억 속에 남아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미신을 믿고 있지는 않지만... 첫눈에 관한 말은 어쩐지 믿고 있어요. 첫눈을 사랑하는 사람과 보면 이루어진다고 하잖아요. 저는 이루어졌거든요. 매니저님과 함께 첫눈을 보고 있으니까요."
그날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진 나는 얼굴이 붉어진 이유로 추위를 탓하며 눈 속을 걸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도 그에게 눈의 순수함처럼 온전히 순수하게 나인 씨를 사랑한다고 고백했었지. 어쩌면 그때, 첫눈의 뜻을 믿고 있다는 그의 말이 그저 고백을 하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할 뿐, 온전히 믿고 있지 않아서 지금 내가 당신을 떠나게 되었던 거일지도 모르겠다.
. . .
터벅터벅-.
그날의 추억을 안고 나는 홀로 눈 속을 걸었다. 딱히 목적지를 두고 있지도 않았고, 이유를 두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그 사람이 없는 차가운 첫눈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결국, 아까 전 미련을 남기지 않으리라고 했던 다짐은 이루어보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무너지게 된 것이었다.
"나인 씨....?"
왜 여기 있는지 모를 나인 씨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익숙한 남자의 모습을 마주하는데 꿈을 꾸고 있다고 아니, 내가 그리움에 미쳐서 환상을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해외에 있어야 할 나인 씨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내, 내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만지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는 환상도 꿈도 아닌 진짜였다. 당황한 나와 달리, 그는 나를 그리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리웠던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부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저 답지 않지만.. 보고 싶다는 마음에 당신이 예전에 알려주었던 이곳으로 와버렸어요... "
"......."
보고 싶어서 이곳까지 왔다고? 로맨스가 주제인 가상세계에서만 있을 법만 일이었다. 여전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느껴졌다. 곧이어, 나인 씨가 먼저 동행하자는 말을 건네었고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그날처럼 함께 걷게 되었다.
목적지도 없이 걸으며 한마디, 한마디. 조금씩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우리 사이에 눈치 없이 끼었던 침묵도 서서히 자리를 피했다. 눈으로 인해, 주위는 점점 차가워졌고 일단은 우리 집으로도 가자고 하려던 찰나, 나인 씨가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계속 이곳에 찾아와도 괜찮을까요?"
"네?"
"그곳에 있으면 보고 싶더라고요, 당신이."
"...... 네, 물론이죠."
이미 무너진 다짐 따위 이제 어떻게 되는 상관없었다. 그러니,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은 고민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단지, 붉어진 얼굴로 허락을 구하는 그가 꽤나 귀여워 보였다. 그 뒤의 일은 우리가 항상 함께였던 그때와 똑같았다. 나인 씨가 내 손을 잡았고, 우리는 다시 눈 속을 걸었다.
아마 집에서 했던 나의 생각은 홀로 있게 된 나의 외로움에서 온 착각이었나 보다. 그래, 나는 아직 나인 씨와 헤어지지 않았는걸.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괜찮았다. 다시 희망이 생겼는걸. 한 해에 처음 내리는 눈처럼 내 인생에 처음 내린 사랑의 첫눈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겠노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왜 웃으시는 건가요?"
"아, 그냥.. 뭐랄까요. 첫눈의 뜻은 진짜라고 생각되어서요."
"네?"
"첫눈이 내리는 오늘 함께 있잖아요, 우리."
나는 그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의 손의 온기를 느끼었다. 그날과 다른 시간대와 다른 공간. 우리는 앞으로 자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각자 다른 일을 하며 서로를 잠깐 잊을 수도 있고, 넘어가면 안 될 유혹에 휘말릴 위험도 있다. 하지만 돌고 돌아 첫눈으로 만난 우리의 인연처럼 다시 돌고 돌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고,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으니까. 차가운 눈에서도 녹지 않은 따뜻한 눈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사랑하는 그대에게 오늘도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 있어서 기쁜 나니까. 또 만나요, 그 어떤한 첫눈이 내리는 날에 우리만 아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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