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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염원 / 청햔
눈을 떠보니, 천사장님의 판결을 받기 전이었다.
"돌아왔다!"
엘의 염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완전히는. 하지만 괜찮았다. 이 또한 그의 선택이었으므로.
매니저가 동생을 전부 찾아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간 후 엘의 염원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비는 것으로. 사신력 245년이 지나고 두 개의 달이 동시에 뜨는 날을 두 번째 겪으면서 그만큼의 시간 동안 엘을 비롯한 모든 사신들이 성장을 한 덕분이었다. 물론 외적으로 키가 큰다든지 하는 변화는 당연히도 없었으나 20명의 사신들은 지난 시간에 비해 스스로가, 그리고 서로가 성장했다는 것을 알았다.
엘은 사신지부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16살의 자신이 아니었다. 엘은, 옳은 선을 구분하고 추구하는 법을 배웠고 악을 재단하지 않고 멋대로 판단해 교화하지 않는 법을 배웠으며, 선악을 조율하는 법과 상황에 따른 판단을 배웠으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웠다. 하여, 엘은 스스로와 타협하여 자기 일을 해나가는 일을 배워 행할 수 있었다. 엘은 그렇게 천계에서 이전에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간직한 채로.
*
"...돌아왔네유."
홍수가 나기 전날이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아는 제이미는 반복될 미래를 막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자신도, 아버지도, 마을 사람들도, 누구도 죽지 않았다. 누군가가 보기엔 한없이 가벼울 수 있으나 자신에게만은 늘 진심이었고 간절했던 염원을 이룰 수 있었다. 수없는 상상 속에서만 펼쳐졌던 트윙클 랜드는 그 자체보다도 가족과 함께였기에, 그리고 그만큼 바라온 기억이 있기에 상상보다 훨씬 황홀했다. 제이미는 그 눈부시게 황홀한 기억을, 그리고 그에 준할 아니 어쩌면 그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찬란한 환상 같은 소중한 기억들이 있기에 변함없이 조용하고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농장에서의 자신의 삶 또한 즐거웠다. 제이미는 그가 사랑하는 자연 속에서 그가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간직한 채로.
*
"저는... 여기에 남도록 하죠. 후후후."
기이는, 그의 염원은 사신으로서 14지부에 남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이는 이전에 사신지부에서 겪어온 한참의 시간을 끌어안은 채로 묵묵히 남아 일을 했다. 매니저가 떠나고, 같은 14지부의 다른 사신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도, 기이는 그들에게 웃으며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그 인사는 그들 모두에게 배웅이었고 동시에 약속이었다. 떠날 곳이 없는 기이는 예전과 다르게, 자신이 이곳에 항상 머물러서 언제든 가장 먼저 그들을 마주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조금 더 기뻐했다. 매니저와 19명의 사신들이 떠나고 새로운 사신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가 또다시 떠나가는 동안, 기이는 14지부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 영혼사냥이 아닌 영혼정화의 일을 해나갔다. 두 번째 약속을 간직한 채로.
*
"거기, 배달원!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녀요. 사고 날 뻔했잖아!"
리히트가 돌아온 시점은 사고가 나기 직전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에는 사고가 나지 않았다. 하루 정도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평소답지 않게 넋이 나간 것처럼 굴던 리히트는 다음날이 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일과 손님을 대하는 면에서는 싹싹하고, 성격은 적당히 능글맞은, 평소의 모습으로. 다만 전과 다른 점이라면 알바를 하는 중에 번호를 물어오는 물음을 어쩐지 의미 모를 웃음으로 나직하게 웃은 후에 거절했다는 것. 그리고 알바하는 중에 틈틈이 여러 공부를 시작했다는 것. 리히트는 원하는 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방법을 배웠기에 지금의 생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간직한 채로.
*
"테오야! 너 괜찮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이와 눈이 마주치자, 테오는 넘어져 손목이 욱신거리는 채로도 그저 웃음이 나왔다. 혹시 머리라도 다쳤냐는 말을 진지하게 하는 얼굴을 보자 덮쳐오는 현실감이 기꺼웠다. 그곳에서, 테오는 친구를 마주하는 법을, 부당함에 맞서는 법을 배웠다. 실수를 용납하는 법과 모나지 않는 방법을 배워서, 테오는 더 이상 처음의 나약한 18살의 자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테오는 이를 그대로 했다. 아버지에게서 듣는 언어들도 이제는 괜찮았다. 테오는 더 이상 이에 상처 입거나 영향받지 않을 수 있었고 그에게는 카이가 있었으므로. 자신과 주변을 사랑할 수 있게 된 테오는 제 나이답게 자신이 당장에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부터 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간직한 채로.
*
"허억–!"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놀란 얼굴, 울먹이는 얼굴, 안도하는 얼굴, 울면서 웃는 얼굴... 수많은 제가 아는 얼굴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사고의 규모에 비해 몸 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의료진들과 현장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이건 다시 살아나도 일어날 수 없을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그런 말을 들으며, 준은 그저 웃었다. 어디 하나 부러진 곳도 금 간 곳도 없이 약간의 타박상만 남았다는 병원의 결과 진단은 준이 꿈을 다시 꾸어도 된다는 희망이었다. 빠른 퇴원에 이어진, 주변의 만류를 통해 갖게 된 잠시간의 휴식조차 즐길 수 있었다. 그에게는 아직 많은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일을 다시 시작한 준은, 이전에도 늘 그랬듯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간직한 채로.
*
"무엇을 원하는가, 아니.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는가."
이번에는, 전처럼 허투루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자신은 처음의, 아니 전의 20살의 루이가 아니었으므로. 조금 더 현명해지는 법과 조금 더 잘 대처하는 법을 알고 적당히 물러지고 적당히 무뎌지는 법을 배운, 왕세자였으므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자신이, 그리고 레인이 잘못한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 바꿔나가야했다. 그게 루이 자신이 할 일이었다. 한순간에 변한 듯한 자신을 보고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놀라는 레인을 보며 루이는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마지막을 보며 느낀 책임감을, 루이는 끝까지 끌어안고 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 또한, 그의 내면이 강해진 덕분이었다. 당장 눈앞의 일이 해결한 후에도 루이는 자신이 굳건하고 유일한 왕세자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간직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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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고 당신의 곁을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잃지 않을 것이다. 지킬 것이다. 다시, 당신을 잃을 수는, 두 번씩이나 이 죄책감을 반복할 수는 없다. 에단은 검을 고쳐쥐며 끊임없이 다짐했다. 해내야만 했다. 할 수 있었다. 이전의 자신보다, 현재의 에단은 그곳에서 보낸 시간만큼 쌓인 수련의 양과 경험이 있으므로, 할 수 있었다. 기억 속의 검끝이 유려하게 그리는 궤적을 다시 눈으로 좇으며 에단은 자신의 검이 그들을 향하게 했다. 뒤에는 소중한 자신의 주군을 둔 채였다. 일단 눈앞에 닥친 일들을 정리하는 게 급선무였으므로, 그리고 그에게는 이제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으므로 에단은 그가 해야 하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간직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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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뒤에! 차 조심해!"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정황으로 미리 피한 덕에 사고는 나지 않았다. 시안 자신도, 같이 데뷔할 멤버들도, 모두 무사했다. 가벼운 사고 후유증이랄 것조차 없었기에 데뷔 준비는 일사천리로 바쁘게 준비되었다. 하루종일 연습실에서 멤버들과 뛰다가 중간중간이 쉬는 참이면, 그곳의 존재 자체가 꿈만 같아서 찬찬히 기억나는 것들을 하나씩 되짚어보고는 했다. 데뷔를 한 현실도 사신으로 지낸 그 시간도 전부 황홀한 꿈만 같아서, 동시에 지독히도 현실인 것이 실감이 나서, 행복했다. 시안은 꿈을 이루었기에 최선을 다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나갔다. 두 번째 꿈을 간직한 채로.
*
"그게... 가족이잖아요."
자신이 익숙히 아는 그 다정한 얼굴과, 자신을 포함한 그가 사랑하는 자들이 한자리에 선 것을 보며 시릴은 의연히 웃었다. 그때와 다르게. 괜찮은 척이 아니었다. 지금의 시릴은 딱 그만큼의 이해를 충분히 하고도 남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에, 시릴은 정말로 괜찮을 수 있었다. 용서라기엔 너무 어리고 거창한 이해를 이루어서, 시릴은 앞으로의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일도, 가족 관계에 대한 일도 순간순간의 그의 나이답게 어리고 어른스러운 태도로 살아갈 수 있었다. 시릴은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이 속해있고 겪고 있는 모든 일을 진심을 다해 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간직한 채로.
*
"...저는, 노아 카인드이니까요."
자신이 노아 카인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떳떳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노아는 이제 자신이 카인드라는 이유로 숨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카인드이기 이전에 노아였으며, 카인드인 동시에 노아였다. 그래서, 그는 노아 카인드라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했다.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자신만의 삶을 지켜낼 수 있는 법을 배웠다. 또한, 노아는 잘못을 마주하고 옳게 바뀌어갈 수 있는 법을 알았다. 그는 선을 추구할 수 있음을 믿었다. 그것은 그가 이전에 알던 것과는 다른 강함이자 강인함이었다. 그래서 노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는 삶을, 그런 일들을 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가진 채로.
*
"엄마아빠...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하고 사랑해요."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건 새하얀 병원 천장도 팔에 꽂힌 링거도 다리의 깁스도 아닌 부모님과 형의 눈물이었다. 울음에 섞이어 그리웠던 목소리로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이 너무 좋아서, 카티의 시야 또한 그들과 같이 흐려졌다. 절벽에서 떨어져 기절까지 한 것치곤 상처는 크지 않았다. 얼굴이나 팔이 조금 긁힌 것과 한쪽 다리에 살짝 금이 간 것 정도. 그마저도 카티 자신이 나이도 어리고 밥도 잘 먹고 성격이 밝은 덕분인지 회복이 매우 빨랐다. 다시 돌아온 그리운 집은 기억과 똑같았다. 다만 달라진 것은, 카티는 타인의 마음을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어리광이 사라졌나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카티는 아직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나이였으므로, 그는 그렇게 했다. 적당한 선의 정도와 자신의 말에 당연하게도 이어질 부모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카티는 그렇게 제 나이다우면서도 상대를 이해하는 일들을 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가진 채로.
*
"제가 하고 싶은 걸, 계속하고 싶어요."
그것은 욕심이 아니었다. 남아있는 지난 어린 자신의 투정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온 나인의 오랜 꿈이었다. 나인이 인정받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애정을 바란 적도 있었으나, 이제는 그것이 없어도 괜찮았다. 더 이상 인정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거나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단지 말 그대로 괜찮아지는 법을 배웠을 뿐이었다. 세상에는 이유 없이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유 없이 그만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알았고, 나인은 그런 서로에게 소중한 자들의 애정과 바랄 수 있는 꿈이 있다면 충분히 이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있음을 알았다. 하여 나인은, 그가 하고 싶었고 할 수 있었던 아니, 여전히 하고 싶고 계속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간직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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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할 수 있어!"
데이은 늘 강했다. 그의 강함은 그가 선천적으로 가진 신체 물리적인 힘이나 그가 자라온 환경에서 습득한 정신적인 힘을 말하지 않았다. 데이는 사람을 배려할 줄 알았고 다정할 줄 알았고 용서할 줄 알았다. 이미 그는, 이를 모두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데이의 강함이었다. 다만 데이는 거기에, 새로운 것들을 배웠다. 그의 특유의 순수가 타인들에게 이해가 되는 법을, 그리하여 그의 성격 자체만으로 상대가 자신의 편이 되게 하는 법을 배웠다. 그가 가지고 있는 강함을 필요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법을 배웠다. 이 모든 걸 아는 데이는 그렇기 때문에 더 강할 수 있었다. 그렇게 데이는 자신이 할 수 있고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나씩 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간직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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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 늦어서, 미안하다."
기억 속 그때의 시간까지 거스르기엔, 그것은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일이었다. 동생과 자신의 죽음 사이엔 수많은 일들을 담은 수많은 시간들이 있었다. 그 지나온 모든 시간 또한, 키르 자신이었다. 후회와 죄책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이었다. 그러나 키르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웠다. 소중한 기억을, 소중한 사람들을 끌어안은 채로도 현재를 딛고 미래로 걸어갈 수 있는 법을 배웠다. 지난날을 후회할 지언정 앞으로의 일을 후회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지난 시간 속에서도, 늘 매 순간에 그가 최선을 다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후회를 하지 않아도 됨을 알았다. 그래서 키르는 지난 모든 기억들을 품에 안은 채로 자신의 삶을 살아 현재의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들을 해내었다. 두 번째 염원을 간직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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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내겠소."
그것은 그의 사명이었다. 아니, 그가 해내야 하는 일이자 하고 싶은 일이었다. 이전에도 한 번 마주했던 적은 아이타치가 그곳에서 맞섰던 수많은 원혼들과 닮아있었다. 아이타치는 그를 올바르게 상대하는 법을 알았다. 이전과 다르게 아이타치는, 그리고 그의 부족원들은 그들의 터전을 지킬 수 있었다. 그들의 삶을 지킬 수 있었다. 자신의 부족을 지킬 수 있는 전사이자 후계자는 족장을 물려받기에 매우 적합했다. 그는 어리지만 부족의 성인이었고 가장 용맹한 전사였으며 가장 훌륭한 족장이었다. 그가 느끼는 책임감과 약간의 부담감은 어린 나이에 해가 되기보다는 족장의 지위에 도움이 되는 일이 훨씬 많았으며 오히려 그런 나이임에도 어엿하게 부족 그 자체의 몫을 해내는 모습은 부족원들에게 더없는 신뢰감을 주었다. 아이타치는 그렇게, 자신이 해야 하고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간직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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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네."
깨닫자마자, 이전에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했다.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못하겠으나, 그럼에도 그만이 유일하게 하려고 하는 일. 그는 이전에도 현재에도 자신이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목소리를 내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취했다. 유세프는 걸어야 할 길을 알았고 그 과정에서 그는 결단코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비밀은 세상에 외치고자 만들어진 비밀이었으며 그의 침묵은 세상에 파란을 일으키고자 생겨난 침묵이었다. 유세프는 그렇게 해야 할 일을 했다. 다만 그가 그곳에서 새로이 배운 것은, 막아서는 적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법이어서 이전처럼 누군가에 의해 좌절되지도 않았다. 유세프의 언어는 법정에서의 목소리로도, 책 속의 활자로도 당당했다. 그렇게 유세프는 그라서 할 수 있는 일들을 꾸준히 계속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간직한 채로.
*
"스승님...!"
막을 수, 있다. 할 수 있었다. 돌아오고 난 후의 정신을 제대로 붙잡기도 전에 모리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눈앞의 신사도, 사람들도, 그리고 스승님도 아직 무사했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리며 이리저리 소리를 질렀던가. 놀라는 눈치의 스승님과 눈이 마주쳤던 것도 같았다. 확실한 것은, 이번에는 모두를 지켜냈다는 것. 모리는 여전히 기본적으로 타인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믿지 못하진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 타인을 믿는 법을 배웠고 설령 누군가에게 신뢰를 잃더라도 영영 문을 닫지 않을 수 있음을 배웠다. 그래서 모리는 이제는 자신이 타인을 믿고자 하면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리는 그렇게 자신이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간직한 채로.
*
"내가, 마계의 왕이다."
퀸시는 강했다. 강한 악마였다. 그는 흉악한 외모도, 시커먼 하늘을 찌를 듯한 뿔도, 모든 걸 갈가리 찢어발길 수 있을 것 같은 이빨이나 발톱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퀸시는 악마였다. 그는 그 이전에 현존하는 가장 센 악마에게 영원을 지속하는 저주를 내릴 수도 있었고 다른 악마들과 싸워 그만의 악마다움으로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퀸시는 동시에 생명을 아낄 줄 알았고, 이유 없이 남을 무참히 짓밟지 않을 줄 알았고,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렇기에 퀸시는 더욱 강했다. 그가 마계에 다시 등장하면서 악마다움의 정의는 이전과 의미를 달리하게 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적으로 갖는 외형으로 악마의 정체성이 결정되지 않았다. 남이 함부로 결정하는 것으로 악마나 혹은 그 다른 것의 정체성이 결정되지 않았다. 퀸시가 마계의 왕으로 군림한 곳에서, 자신을 악마라고 지칭하는 자들은 모두 악마라고 불렸다. 퀸시는 후세에도 전설로 오르내릴 역사의 대격변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간직한 채로.
*
"...오랜만이네, 진."
눈을 뜨면, 그리도 익숙한 병원 천장이 시야에 들어찼다. 이 풍경이 그리도 반갑게 느껴질 줄은,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따스한 부모님의 얼굴과 살면서 처음으로 가져본 친구의 얼굴이 그토록 반가웠다. 염원은 본질을 추구하는 것 같았다. 단순히 친구와 함께 락 콘서트에 가고 싶다는 소망이 표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이 아니었다. 돌아온 직후부터 베린의 건강은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나아졌다. 여전히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땀을 흘리도록 뜀박질을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을 한 마디 할 때마다 기침이 나오지도 몸에 힘 자체가 없어 하루종일 가만히 있고 싶기만 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본 진 또한 무척 기뻐하며 베린이 자신의 힘으로 락 콘서트에 참가하여 온전히 즐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을 했다. 베린은 그래서, 그렇게, 이전에 자신이 못 해봤던 일을 하나씩 해나갔다. 두 번째 염원을 간직한 채로.
***
매니저 일을 그만두고 사신지부를 떠난 후로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13지부와 같이 한 두개의달 행사 도중 나타난 원혼이 레비인 것이 밝혀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점 즈음에, 외근 일로 나갔던 곳에서 매니저는 시노를 우연히 찾게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동생들을 찾아 헤매다 사신지부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 무색하게도 다소 허망해 보일 법한 재회였으나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매니저 남매와 그 모습을 뭉클하게 같이 바라보고 있는 14지부 사신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매니저가 '매니저'로서 사신지부에서 일하게 된 이유가 잃어버린 동생들을 찾기 위함이었던 만큼, 계기가 충족되자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냥선배가 매니저에게 동생들과 같이 이곳에서 지내며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선택지를 넌지시 건네기도 하였으나 매니저는 그동안 동생들과 평범한 일상을 못 누렸던 만큼 사신지부를 떠나 원래의 삶을 살아가고 싶단 뜻을 밝혔다. 그렇게 모두와 안녕을 바라는 작별 인사를 하고 나온 지가 벌써 몇 년 전이었다.
그동안 매니저는 동생들과 평범하게 행복하고 안온한 삶을 살았다. 매니저는 다른 세상으로 출장을 나갈 일도 없었으며 원혼정화에 앞장설 일도 없었고 마을 축제를 즐기다가 괴상한 생물체가 튀어나오는 일을 겪지도 않았다. 어느 한 군데도, 매니저 일을 할 때의 삶과 닮은 점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주 일상 속에서 사신지부에서의 일을 떠올리곤 했다. 과일을 살 때 제이미는 잘 지내고 있을지, 시노와 레비가 장난을 치며 시끄럽게 뛰어다닐 때 카티와 데이와 시안은 잘 지내는지, 순진하게 자신에게 혼나며 울상인 동생들을 볼 때 나인과 데이, 키르, 아이타치는 잘 지내는지, 동생들이 아플 때 베린은 잘 지내는지. 그리고 다른 사신들에 대한 생각도. 사신지부가 아닌 곳에서의 일상에서 사신들이 하나씩 겹쳐 보일 때마다 매니저는 그들처럼 하나의 염원을 빌었다. 같은 명계에 살고 있으므로 언제든 다시 돌아와도 좋다는 냥선배와 세이 선배의 말을 기억한 채로.
*
"그러니까, 모두가 같은 생각을 아니, 염원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하단 거죠."
"이론상으로는 가능합니다."
"맞아, 그렇다냥."
시노와 레비가 어느 정도 크고 나면 말하려 했는데, 자신의 생각보다 동생들은 속이 깊었다. 자기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을 때쯤이 되자 어느 날 자신에게 먼저 이제 우리 걱정은 안 해도 되니 다시 사신지부에 가도 된다는 얘기를 꺼내왔다. 인간계나 천계, 마계였으면 모를까 매니저 남매가 사는 곳은 명계였기에, 아예 직장을 사신지부 삼아 출퇴근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지부장님의 허락만 있으면. 그렇게 말이라도 꺼내 보고자 하는 심정으로 지부에 찾아갔을 땐, 안 될 지도 모른다는 각오가 무색하게도 들려온 답은 매우 빠르고 긍정적이었다. 매니저는 늘 사신지부의 첫 예외라고 역시 14지부의 일원답다며 웃으시는 모습이 어찌나 호탕하시던지. 그렇게 매니저는 기이와 냥선배, 세이 선배가 남아있는 사신지부로 돌아왔다.
14지부는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영혼정화를 해낸 지부였기에 인원이 빠지면 새로운 멤버가 들어오는 기존의 다른 지부들과는 다르게 만화경을 채운 사신들이 염원을 이루러 돌아간 후에도 새로운 유입이 없이 오롯한 23명의 14지부로 남았다고 했다. 그리고 19명의 사신들이 나가고 기이와 선배들만이 남았을 때엔, 더 이상 지부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어 그들은 다른 지부로 차출되었다. 그렇게, 본래대로라면 명예의 이름만을 가지고 영원히 빈 채로 남을 14지부였던 것인데, 매니저가 돌아온 것이었다.
매니저는 그가 다시 '매니저'로서 사신지부에서 일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자마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아니, 말이 제안이지 그것은 사실상 매니저의 염원에 가까웠다. 모두와 다시 이 14지부에 모여 같이 지내고 싶다는, 염원. 기존의 규칙에 의하면 한 번 사신으로 지낸 자들이 다시 사신으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한 가지 예외는 있었는데, 사신 모두가 똑같이 다시 같이 지내고자 하는 생각을 항시 갖고 있을 것. 그리고, 그 생각이 단순히 바람이나 소망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염원처럼, '염원'이라 불릴 정도로 간절할 것. 기존의 사신들 중 누구도 그런 걸 바란 적이 없었기에 이론상으로만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간절했기에, 마지막으로 붙잡아볼 수 있는 단 하나의 기회였다.
일이 성공해서 사신들이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죽은 존재로서의, 다시 살아나기 전에 거쳐 가는 과정의 사신이 아닌, 직업으로서의 사신이었기에 준비할 일은 많았다.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할 수도 없었다. 4명의 14지부 일원은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서류상의 일은 세이와 매니저의 담당이었고, 실질적인 거처나 그 외의 부가적인 일은 냥선배와 기이의 담당이었다. 그들은 사신들을 다시 불러올 맞이를 하는 동안 혹여 일이 실패할까 걱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 사이에 모두가 같은 것을 바라고 있을 거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보고 싶은 존재들을 다시 만날 준비를 하는 과정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설령 그들을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지레짐작하여 상처받거나 지나치게 서운해하지 않는 법을 모두와 같이 있던 지난 시간 동안 배운 덕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재회에 대한 준비를 끝내고 결과를 앞둔 상황에서도, 매니저와 기이, 냥선배와 세이, 4명 모두의 표정은 밝았다.
셋,
둘,
하나!
눈부시게 찬란한 빛이 잠깐 머물다 간 자리엔 23명의 두 번째 염원이 자리했다. 14지부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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