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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 오앵
"혹시.. 이 책 어디 있는지 아세요?"
한참을 찾았는데도 제 위치에 책이 보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매니저는 도움을 요청했다. 이제 막 입학해서 낯선 도서관은 유달리 조용하고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다행히 카운터에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머리가 보였다. 쭈뼛쭈뼛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카운터에 앉아있던 남자는 매니저가 한번 더 말을 걸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아. 잠시만."
책 제목이 적힌 종이를 얼마 보지도 않고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러운 반말과 어른스러운 분위기 탓에 매니저와 같은 교복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걸 그때 알았다. 성큼성큼 걸어가서 반납 트레이에 있는 책을 꺼내 오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책이 내밀어지자 정신을 차렸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남자는 키가 컸고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에 반납된 책이어서 미처 가져다 놓는 걸 깜박했네. 미안해."
"아, 아뇨. 괜찮아요."
"더 필요한 건 없고?"
친절하게 마지막까지 확인한 그가 대출 처리된 책을 도로 건네주었다. 자연스러운 동작에 사서 선생님을 대하는 것처럼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도서관을 나서려 했다. 타닥,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매니저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책을 들고 제자리에 꽂는 모습이 보였다. 여느 도서관에서 들려올 법한 조심스런 발소리였는데 무엇에 멈춰 섰는지 모르겠다. 책 하나가 트레이에서 미끄러지는 장면을 보게 하려 했는지도.
매니저가 간발의 차로 책을 잡아챘다. 다행스런 숨을 내뱉고 도로 얹어 놓다가 책장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까만 눈동자가 잠시 매니저를 응시하더니 눈꺼풀을 느리게 한번 깜박했다. 감사의 표시를 하고 다시 제 할 일을 하는 남자의 양손에 책이 그득했다. 주변을 살피고 시계를 한번 보았다. 한적한 주변만큼이나 시간도 여유 있었다.
"좀 도와드릴까요?"
교실에 가도 할 일이 없겠다, 매니저가 두 손을 호기롭게 내밀었다. 가만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책을 건네주었다. 툭, 책과 공기의 떨림이 전달되었다.
[유셒매니] 손
"오늘은 정리할 책이 없어요?"
"응. 이미 발빠르게 정리해뒀더라고."
유세프가 나른하게 웃으며 턱을 괴었다.
모든 게 낯설었던 봄에 만나서 익숙함에 어깨가 풀려가는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따가워지는 햇살에 비해 적당히 차가운 도서관의 공기가 오소소 닭살을 돋게 했다. 매니저가 티를 내지도 않았는데 유세프가 교복 자켓을 건네주었다. 옆에 걸어놨던 탓에 사람의 온기가 없는 자켓은 따뜻하지 않았지만 매니저는 다리위에 둘렀다.
"할 게 없으니 시간 많고 좋네요. 선배님."
"......그렇지."
잠깐 멈칫했지만 유세프는 마저 읽던 책을 들고 카운터에서 일어났다.
유세프 선배님, 유세프 선배. 이렇게 부를 때마다 큰 동요 없는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처음엔 부담스러워서 그런가 했더니 민망한 눈치였다. 이름을 알고 바로 '선배' 라고 부르자 유세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었다. 그렇게 잠깐의 실랑이가 오갔다. 그냥 이름으로 부르면 되지 않느냐는 제안은 아무리 봐도 연장자처럼 보인다는 매니저의 말에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그럼 오빠라고 불러요?' 라는 마지막 기습에 입안으로 들어갔다. 그 단어는 정말로 견딜 수 없었던지 최종적으로 선배로 타협을 보았다. 그럼에도 익숙하지 않다는 반응이 돌아오는게 재미있어 매니저는 종종 상기시켰다.
창가 옆에는 6인용 책상이 있었다. 학기 초반에만 잠깐 보이던 사람들이 발길을 끊은 지 오래된 덕분에 널찍한 공간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맞은편 자리에 유세프가 앉았다. 간발의 차이로 그늘에 들어간 매니저와 달리 유세프는 잔뜩 내리쬐는 햇살을 직격으로 맞았다.
"눈 안 부셔요? 커튼 내려줄게요."
"괜찮아. 따뜻하고 좋아."
"그러고 있으면 책 읽을 때 불편할텐데..."
"그럼 이렇게 하면 되지."
가볍게 웃은 그가 팔짱을 낀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거리가 좁혀지면서 유세프의 얼굴이 그늘로 들어왔다. 훅 들어온 탓에 매니저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렸다. 얼굴이 붉게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당황하니 아무 말이나 튀어나왔다.
"어우, 그럼 엎드려서 보는 거 잖아요."
그런가? 유세프가 웃으면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어쩔 수 없네. 그냥 계속 광합성하면서 책 보세요."
"아까는 햇살이 방해된다면서. 매니저, 냉정해."
"햇빛이라도 쐐야 유세프 선배가 덜 추울 것 같네요. 나보다 몸도 차갑잖아요."
"내가 몸에 열이 없는 편이긴 하지."
싱긋 웃는 얼굴이 하얬다. 그의 열을 자신이 다 가져가버린 건지, 매니저는 아직도 붉을 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일어났다. 책장을 하나 넘어가니 베이킹에 관련된 책들이 여러 개 꽂혀 있었다. 이 중 아무거나 뽑아 들고 매니저는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추리소설을 읽고 있었다. 빠르게 몰입한 손이 책장을 넘겼다. 매니저도 앞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유용한 팁이나 시도해볼 만한 레시피 등을 찾고 있다가, 먹음직스러운 사진과 달리 오늘 급식에서 형편없는 맛을 자랑했던 파이가 보이자 윽, 하고 진저리를 쳤다. 동시에 유세프의 시선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냐고 묻는 눈동자가 선했다.
"오늘 급식으로 파이가 나왔는데 진짜 별로였거든요."
"아하하, 안 그래도 애들이 지나가면서 욕하더라."
"그냥 제가 들어가서 만들고 싶었다니까요. 양은...... 좀 어렵겠지만 맛은 보장할 수 있는데."
만들어주면 맛있게 먹어주는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던 매니저의 머릿속에 주말에 만들었던 디저트가 맴돌았다.
"선배. 스콘 먹을래요?"
"......갑자기?"
"주말에 연습해봤거든요. 그때 반응 괜찮았는데, 다음에 제대로 만들어서 가져올게요. 스콘에 커피 좋아한다 그랬으니까."
유세프가 스쳐지나가듯이 말한 적 있었다. 그럼에도 기억하는 이유는, 요즘은 자제한다면서 덧붙인 이유때문이었다. 장난기 없는 진지한 얼굴은 이렇게 말했다.
‘자꾸 책에 부스러기가 떨어지더라고.'
정말 책 덕후, 도서관 지박령스러운 말이었다. 그래서 매니저는 말을 꺼내면서도 유세프의 반응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웃으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도서관엔 음식물 반입 금지인 거 알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래도 생각해줘서 고마워. 기억하고 있었네."
"아, 듣자마자 취향까지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더니 아주 잘 기억나더라고요!"
"..........."
놀림 받은 표정이 웃겨서 매니저는 조용히 큭큭거렸다. 장소를 생각하고 무의식적으로 줄인 소리였지만 둘 뿐인 고요한 공간에 웃음소리가 울렸다. 유세프가 매니저의 말을 귀담아 듣는 만큼 자기도 새겨들을 뿐이다. 라는 속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오늘 수업은 얼마나 지루했고 잠깐 나갔다 온 바깥은 얼마나 더웠는지, 매니저가 신나게 속삭였다.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한 책만 덩그러니 앞에 버려졌다. 진작 읽은 부분을 표시해놓고 덮은 유세프는 그 활기찬 모습을 가만 바라봤다. 바깥에서 간간이 들리는 열정적인 아우성만큼이나 밝았다.
"이제 남은 수업이 문제인데... 아."
요란하기 짝이 없는 예비 종소리가 매니저의 말소리를 묻고 조용한 도서관을 뒤흔들었다. 동그랗게 벌려진 입이 소리 없이 중얼거리는 모양을 유세프는 놓치지 않았다. 벌써 끝났어. 어제도, 그제도, 그 이전부터 들어왔던 투덜거림에 유세프는 놀릴 의도가 없었음에도 비집고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가렸다. 큼큼, 헛기침소리에 매니저의 눈이 샐쭉해졌다.
"너무해요, 진짜."
"....큼, 얼른 가봐. 사서 선생님 곧 오실 테니까."
"알았어요. 내일 봐요!"
매니저의 활발한 인사에 유세프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도서관 문이 닫히자 매니저의 입가는 내려갔다. 창문을 열어놓은 복도는 도서관과 달리 후덥지근했다. 끈적끈적해서 숨이 막혔다.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겨 계단을 한층 내려가고 또 한층 내려갔다. 매니저가 내려가는 사이 여러 무리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눈길을 주고받지 않았다. 그렇게 한 층을 더 내려가서 매니저는 교실 뒷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근처에 앉은 학생만 잠깐 시선을 줬다. 저들끼리 떠드느라 시끌벅적한 탓에 한 사람 끼어들어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
매니저 자리에 앉아 앞자리 친구와 신나게 대화하고 있던 여자애가 한 말이었다. 대화 흐름이 끊긴 게 불만인 눈치였으나, 별다른 말 없이 나와서 자신의 친구 책상 옆으로 옮겨갔다. 매니저 옆자리는 비워져 있었다. 수업 시작 직전이 되어서야 나타난 남자애는 장난을 치면서 우당탕 자리에 앉느라 잠깐 눈이 마주쳤다.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고 관심도 주지 않았다. 예전부터 따라다니는 소문 때문에 매니저는 투명인간 같은 생활에 익숙했다. 그래서 휴식답게 보내는 점심시간이 싫지 않았다.
한낮의 교실은 고등학교 답지않은 여유로움이 흘렀다. 어쨌건 수업엔 집중하던 매니저도 오늘은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찼다. 어떤 종류의 스콘을 만들지,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도서관인데 반입은 되는지, 그가 먹기는 할지. 종이 치고 다시 주변이 왁자지껄해질 때까지도 매니저는 자리에 앉아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유세프는 바빴는지 다음날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럴 때마다 유세프는 매니저에게 쪽지를 남겨두었다. 오늘이 그가 약속했던 날이었다. 단정한 글씨체로 적은 쪽지를 들고 올라가는 매니저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날로그 적인 방법이지만 마니또 놀이를 제대로 해보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중학교때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학급분위기를 위해 했지만 매니저의 마니또는 항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재수없다는 쪽지를 안 받은 게 어디야. 매니저가 픽 웃었다.
도서관 문을 열자 바로 보이는 카운터에 유세프가 앉아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으면서 다가가자 그도 마주 웃으면서 한쪽을 눈짓했다. 6인용 테이블에 정말 오래간만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얼핏 보이는 체육복 색깔이 같은 학년이었다. 저절로 매니저의 입이 오므려졌다.
"이쪽으로 와."
유세프가 귓가에 속삭이고 매니저의 팔목 소매를 잠깐 잡았다 놓았다. 그리고 반대편 책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손길이 앉았던 소매가 괜히 뜨거웠다. 만지작거리면서 따라가자 저쪽에 앉아있는 사람한테는 보이지 않을, 벽과 책장 사이 공간에 유세프가 의자를 가져다 놓은 게 보였다.
"비밀기지 같아요."
그리고 그곳에서 암호를 송수신하듯 속삭이자 유세프가 웃었다. 잠깐만 앉아 있어. 그가 말하고나서 자기 의자 위에 얹어 둔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느 곳이 제 자리인지 훤히 아는 능숙한 솜씨로 정리하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신기했다. 그러다 매니저는 굳이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나서곤 했다. 끈질기게 앉아있으라던 유세프는 나중엔 포기하고 몇 권을 골라서 건네주었다. 정확한 구역까지 알려주면서. 그러면 매니저는 가져다 놓기만 하면 됐다. 그가 넘겨준 책들은 하나같이 매니저가 힘들이지 않고 꽂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좀 좁을 텐데 미안해."
갑작스런 사과에 멍 때리던 매니저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돌아서 있는 유세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벽에 기대어 앉아서도 다리를 뻗을 수 있는 공간은 오히려 안락했다. 매니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책 읽고 있는 사람 옆에서 떠들 순 없잖아요. 오히려 내가 선배를 차지하고 있는 바람에 저 애를 도와줄 사람이 없겠는데요."
"매니저가 도와주면 되지."
"저는 선배만큼 능숙하지 못해요."
능청스레 너스레를 떨자 유세프가 몸을 돌렸다. 치켜진 매니저의 고개를 보고, 유세프는 책장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다 자세를 낮춰 바닥에 앉았다. 저절로 매니저의 시선이 따라 내려갔다.
"대신 매니저는 상냥하니까 빠르지 않아도 끝까지 도와줄 거야."
“아.”
매니저의 입이 벌어졌다. 이미 굳어버린 유화에 숨결이 불어넣어지면서 처음 세상을 마주하고 느끼는 기쁨이 이정도일까 싶었다. 상냥하다는 말에 기뻐서 매니저는 얼이 빠지면서도, 이런 말을 들을 만한 행동을 했었나 머리를 굴렸다. 물론 제동이 걸려버린 머리가 제대로 활동하진 못했지만.
“고, 고마워요.”
폭탄을 던져 놓은 장본인은 붉어지는 얼굴을 보면서 소리 낮춰 웃었다. 매니저의 손이 파닥였지만 미약한 바람으로 열기가 가라앉을 것 같진 않다. 도서관이 이렇게 더운 곳이었나, 매니저가 중얼거리며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요즘은 뭐하느라 바빴어요?”
“생각 좀 하느라고. 시험해 볼 것도 있었어.”
“오, 혹시 진로 문제에요?”
매니저가 장난스럽게 던진 질문에 의외로 유세프가 끄덕였다. 미래랑 관련되어있으니 어느정도는 맞지, 하며 수긍하자 매니저의 관심이 단박에 쏠렸다. 지금껏 가벼운 잡담만 나눠봤지 이후에 대해서는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막연하기도 했고,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몰라 불안하기도 했다. 머뭇거리다가 매니저가 먼저 한발 나섰다.
“유세프 선배. 밖으로 나간다면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음, 생각해본 적 없는데.”
잠시 고민하던 유세프가 덤덤한 어조로 부정했다.
“매니저는?”
“저는… 졸업하면 돈 모아서 여행가고 싶어요.”
거창한 계획은 없었지만 바램은 있었다. 이제까지 매니저는 계속 집에서 동생을 돌보거나 학교에만 있어서 유명한 국내 여행지도 많이 가보지 못했다. 그 바램을 입 밖으로 내뱉으니 생각보다 설레어서 매니저는 자신이 웃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미소를 바라보던 유세프도 흐뭇해보였다.
“그래. 매니저라면 어딜 가서든 잘할거야.”
동시에 유세프의 얼굴에 뜻 모를 감정이 스쳤지만 매니저는 보지 못했다. 다짐하듯 말을 꺼내고 나니 구체적인 바램이 떠올랐던 탓이다. 서로가 생각에 깊이 빠져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도서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보진 않았지만 유세프는 조급하게 나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그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매니저. 오늘은 먼저 가는게 좋겠다.”
“왜요?”
“혹시 모르니까.”
매니저가 보기전에 유세프는 표정을 풀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다정하게 말했다. 안심시키는 목소리와 달리 눈빛은 서늘했다. 어리둥절하면서도 몸을 일으킨 매니저에게 유세프는 한마디 덧붙였다.
“네 생각만 해.”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려면 멀었지만 유세프가 떠미는 통에 매니저는 아쉬운 발걸음을 뗐다. 벌써 교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매니저는 바깥에서 시간을 때우다 들어왔다. 후덥지근한 열기에서 벗어나 한숨을 돌리는데 귀에 이상한 속삭임이 들렸다. 고개를 들자 앞에서 수근거리는 학생들이 보였다. 몇 번 복도에서 마주친 적 있던 같은 학년이었다. 마주치면 통과하듯이 시선을 흘렸었는데, 지금은 매니저를 피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거리낄 것 없이 속닥이는 입, 불쾌하게 들러붙는 악의적인 시선. 매니저의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쟤 도서관에서… 그랬대.”
“소문이 사실이었나봐.”
“미친 거 아니야?”
교실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제각각 할말만 하면서 시끄럽기만 하던 입들이 매니저를 발견하면서 일제히 조용해졌다. 며칠전에 매니저 자리에 앉아서 떠들던 여자애는 친구 앞자리에 앉아서 놀다가, 옆자리 남자애는 교실 귀퉁이에서 장난치다가 매니저를 보았다. 애써 무시하고 자리에 앉자 킥킥,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시작으로 누구를 굴려대는지 뻔한 수근거림이 시작되었다. 매니저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유세프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면서, 매니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후 매니저가 계속 도서관에 갔지만 유세프는 보이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났다. 여전히 유세프는 보이지 않았다.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 매니저도 쪽지만 적어 놓고 돌아왔다. 빠르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변화는 많았다. 매니저가 도서관에 오래 머물지 않음에도 소문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노골적인 따돌림마저 생겼다. 상황과 별개로 매니저도 고민하는 시간이 늘었다.
그렇게 일방적인 약속의 아침이 밝았다. 매니저는 꼬박 밤을 샜지만 정신은 또렷하고 머릿속은 차분해졌다. 집을 나설 때부터 학교에 도착해 교실에 들어갈 때까지 결연한 상태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대망의 종이 쳤다. 매니저는 점심도 거른 채 바로 도서관으로 올라갔다. 길고 긴 계단을 올라 꼭대기 층에 도착했을 때, 도서관 방향에서 여자애들이 뛰쳐나오는 게 보였다. 유달리 뒤에서 말이 많던 무리였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서 있는 매니저는 신경도 안 쓰고 꽁지에 불 붙은 양 허겁지겁 내려가는 뒷통수를 보다가 서둘러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매니저의 눈이 동그래졌다.
유세프는 책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 손에 가득 찬 책들을 하나하나 제자리에 꽂아 넣는 모습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난동을 부린 것처럼 이곳저곳에 넘어간 의자들만 아니었다면. 반가움도 잠시, 얼떨떨해하던 매니저는 아까 지나친 애들을 떠올렸다. 금세 매니저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아까 걔들이 한 짓이에요? 이게 무슨 짓…!”
“내가 한 거야. 금방 치울게.”
“-이야!......네?”
오늘 날씨가 좋다고 말하는 듯한 덤덤한 말투에 매니저는 다시 멍해졌다. 유세프는 손에 들린 책을 마저 꽂고 매니저에게 다가왔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의자부터 하나씩 들어서 다시 넣는 모습을 보면서 매니저는 다시 떠올렸다. 애들의 표정은 잔뜩 겁먹어 질려 있었다. 상황파악은 어렵지 않았다. 대충 소문을 직접 확인하겠다면서 매니저가 올라오기 전에 먼저 숨어 있으려다가 혼났겠지. 차츰 매니저의 얼굴에 기분 좋은 웃음이 걸렸다.
굳이 일일이 하나씩 치우고 있는 뒷모습이 매니저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후닥닥 달려가 유세프가 집으려던 의자를 먼저 일으켜 세우자 검은 눈동자가 힐끔 매니저를 살폈다. 그 모습에 결국 대놓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신나게 뒤집어 엎고 뭘 그렇게 눈치를 봐요?”
“매니저 일인데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나서 버려서 미안해.”
“잘했어요. 속이 다 시원하네. 저 있을 때 엎지 그랬어요!”
쉬이 진정되지 않는 어깨를 들썩이며 한발 빠르게 나동그라진 의자를 수습했다. 트레이에 쌓여있는 책도 집었지만 금방 유세프가 가져갔다. 매니저는 쫄래쫄래 따라와서, 옆에서 정리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의자들은 어떻게 한 거에요? 한 손으로 휘리릭?”
유세프의 얼굴에 다시 한번 난감한 기색이 스치자 매니저는 정답을 직감했다. 민망해하는 모습에 비해 홍조 하나 없는 멀끔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계속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이참에 매니저는 궁금했지만 묻기엔 사소했던 질문을 꺼냈다.
“책은 왜 하나씩 정리해요? 손짓으로 하면 되지 않아요?”
“보기보단 어려워. 의자야 그냥 넘어뜨리면 되는 거지만 책은 정확한 위치에 꽂아야 하니까. 손상되기도 쉽고.”
“연습은 안 해봤어요?”
“해봤지. 예전에 몇 번 떨어트렸는데 어떤 학생이 보고 기절한 이후론 잘 안 해.”
덤덤하게 말하면서도 그때를 생각하면 꽤나 당황스러웠던지 유세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후로 도서관 괴담이 쫙 퍼졌고, 안 그래도 높은 층에 있어 접근성이 좋지 않았던 도서관이 한산해지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점심은?”
“그냥 안 먹고 올라왔어요. 메뉴도 별로고, 할 말도 있고요.”
걱정 어린 잔소리를 하려던 유세프가 가만히 바라봤다. 너무 웃어서 눈아래가 붉었지만 흑갈색 눈동자도 그를 바라봤다.
“저 전학가게 됐어요. 학교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부모님이 알게 됐거든요.”
차분하게 나온 목소리에 매니저는 속으로 안도했다.
매니저가 무엇을 하고 어딜 가든 소문은 따라붙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일일이 상대하기엔 매니저가 힘들었고, 부정하기엔 귀신을 보는 건 맞았다. 이전에야 소문을 부풀릴 행동을 하지 않았으니 의심스러운 경계 대상일 뿐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방금 전 도서관에서 나온 학생들을 떠올리니 다시 분노가 차올랐다. 굳이 유세프가 있는 곳까지 찾아와서 들쑤시려 했고, 그의 평화로운 공간을 헤집으려 했다.
그때 차가운 손이 매니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세프는 이제까지 직접적인 신체접촉을 하지않았어서, 매니저의 눈이 동그래졌다. 매니저의 분노를 식혀주려는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 누구보다 산 사람 같았다.
유세프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이미 각오했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덤덤한 표정과 달리 떨어지는 손에 아쉬운 기색이 가득했다. 매니저는 한 숨 들이삼키고, 유세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나갈래요?”
유세프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계속 생각했어요. 선배를 도서관 말고 다른 곳에서도 보면 좋겠어서요. 고민하다가 떠올랐는데, 저는 실재하지 않는 선배의 물건도 만지고 옮길 수 있잖아요. 그러면…”
“……….”
“그럼 제가 선배도 데리고 나갈 수 있을 거에요.”
내내 차분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마지막 말꼬리는 흐려졌다. 그래서 매니저는 내민 손도 떨지 않으려고 애썼다. 매니저도 알고 있었다. 모든 말은 가정일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 의사가 중요했다. 유세프는 우두커니 서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복잡해보이는 그 속이 읽히지 않아 매니저의 속이 탔다.
“매니저. 한 가지는 고려 안한 거 같아.”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싸늘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마저 말했다.
“내가 도서관에 있어야하는 이유가 있다면? 밖으로 나가면 해가 될까 봐 계속 여기서만 머무는 걸 수도 있잖아.”
“그럴 리는 없어요.”
즉각 들려오는 답에 유리가 깨지듯 유세프의 표정이 풀렸다.
“…..그렇게 확신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매니저 답네.”
“학생들을 놀래키지 않으려고 사람 없을 때 직접 책을 정리하고, 갑자기 말을 걸어도 친절하게 도와주고, 끝까지 바깥의 사람들을 걱정하는 선배가 그럴 리 없잖아요.”
말하는 매니저의 웃음이 환했다. 이렇게 웃기까지 그가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유세프는 아마 모를 것이다.
“저 전학 가는 학교에 같이 따라와 달라는 게 아니에요. 유세프 선배가 더 많은 곳의 책을 읽었으면 하고 다양한 공기를 느꼈으면 좋겠어요.”
손이 더 깊게 내밀어졌다. 유세프는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보다 매니저의 손이 작고 하얗게 느껴졌지만 여전히 호기로웠다. 귀신의 시야는 생각보다 넓고 자세했다. 그래서 유세프는 평소보다 더 퀭한 눈 밑과 긴장한 손끝을 가만히 바라봤다. 손 끝이 불 같은 따뜻함에 닿았다. 손이 겹치면서 매니저의 웃음도 환해졌다. 점점 밝아지는 미소를 보는 건 유세프에게도 즐거움이었다. 점점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갑지 않아?”
“전혀요.”
너무 확신하지 말라니까. 웃음 섞인 잔소리를 하며 유세프가 가볍게 손을 당겼다. 일단 가서 밥을 먹자. 매니저가 한걸음 발을 뗐다. 스콘 가져왔어요. 선배 먹는 건 가능해요? 작은 한숨소리와 함께 다시 유세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렇게 부르지 마. 매니저 생각보다 오래 있었거든. 그래요? 그러면…. 매니저가 잠시 고민했다가 방긋 웃었다. 그럼 유세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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