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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MEMO 1/01
결국 와버렸다. 1월 1일. 19살. 오늘부터 나는 부정할 수 없는 고3이다. ㅠㅠ.
내일부터 독서실에서 살 거다 진짜.
목표는 사신대학교! (목표는 크게 갖는 거라 했다!) 파이팅!
… (생략) …
2/01
뭘 했다고 벌써 2월이지? 내 1월 어디로 갔어ㅠㅠ!
아무래도 독서실은 공간이 막혀있어서 자꾸 딴짓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당분간은 도서관을 다녀볼까…?
2/03
도서관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하게 된다.
나 주변의 압박(…?)이 좀 있어야 하는 타입이었네.
… (생략) …
2/24
이제 슬슬 봄이 오려나~ 오늘 날씨 엄청 따뜻했다!
그치만 하늘이 맑고 바람에선 봄 냄새가 나도 나는 하루 종일 도서관에 박혀있어야 했지… 고삼이니까…ㅠㅠ
그래도 오늘은 도서관이 좀 즐거웠다 왜냐면 도서관에서 엄청난 훈남을!!! 봤기 때문에!!!
잘생긴 사람이 앞에 앉아있으니 괜히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 ㅋㅋㅋ
대학생 같았는데 부럽다 대학생… 근처 사나? 자주 왔으면 좋겠다.
2/25
오늘 도서관에 어제 그 훈남은 없었다 글엄글엇치… 그치 잘생긴 사람이 공부까지 좋아하면 너무 불공평하지.
그래도 종종 와주면 안 될까요 그럼 저 수능 잘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ㅠㅠ
2/27
와 훈남 또 왔어 대박! 되게 어려워 보이는 책 읽던데 멋졌다 잘생겨서 그런가 ㅋㅋㅋ 기억해뒀다가 나도 수능 끝나면 읽어봐야지. 과연…
3/02 개학
미쳤어 그 도서관 미남 대학생인 줄 알았는데 새로 오신 보건 선생님이셨어!!!!!
│짝│스│플│
│사│터│래│
│랑│디│너│
w. 키즈
오늘부터 1일 1 보건실이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흙먼지가 일어나는 운동장에 서서 지루한 얼굴로 조회대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서 삼학년은 입학식 마지막 즈음에 신입생들과 마주 인사하는 일, 그거 하나 하려고 지금 여기 서 있는 거다. 이럴 시간에 모의고사 하나 더 푸는 게…라는 생각도 들고, 이렇게라도 공부에서 벗어나니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드디어 교장 선생님께서 말을 마치셨다. 사회를 맡은 선생님이 따로 말하지 않아도 진심을 담은 박수를 짝짝짝 보냈다. 이제 거의 끝난 거나 마찬가지라는 기쁨의 박수. 다음은- 단상 위로 학교 다니는 3년 본 적 없던 얼굴들이 올라온다. 신규 교직원 소개가 있겠습니다. 어?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는 바람에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나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웅성거림이 커졌다. 특히 여학생들의 소리가 크다. 잘생겼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별수 없나. 다른 이름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하나만이 귀에 콕 박힌다.
보건. 세이 선생님.
“잘 부탁합니다.”
도서관 훈남,
아니, 보건 선생님은 목소리도 좋았다.
3/03
고3은 인권이 없지. 그래도 어제는 입학식이랑 수업 OT로 설렁설렁했는데 오늘 바로 폭풍 진도 나갔다. 이것이… 고삼의 참맛…? 살려줘~~~ 보건실 갈래~ 어디가 아파서 왔냐면요 멘탈이요ㅠㅠㅋㅋㅋ (쫓겨나겠지…)
3/04
작년에 반장이었다는 이유로 임시 반장이었는데 아무도 반장선거에 나오지 않아 그대로 또 반장이 됐다. 싫은 건 아닌데… 딱히 좋지도 않은… 그래도 일단 맡았으니 열심히 해야지. 그래도 고3이라 작년과 다르게 자잘한 심부름은 없어서 좋다. 보건실 심부름은 환영이지만!
… (생략) …
3/22
급식실에서 세이 선생님 목격!!! 선생님들은 우리보다 점심 일찍 드시는데 오늘 늦으셨나 보다 ㅎㅎ 인기 진짜 많아서 애들 인사 하나하나 받아주느라 더 늦게 드신 것 같아… 근처 앉고 싶었는데 애들이 너무 많았다. 아쉬워!
3/24
아~~~ 복도창으로 보건실 안 찔끔찔끔 보는 거 감질나~~~ 그렇다고 꾀병 부릴 용기는 없지만…
나 왜 건강하지…
3/25
어제 그런 생각을 하늘이 들으셨나. 배가… 아팠다… 엄청… 생리통 죽었으면……
이런 아픔은 안 된다고요 ㅠㅠ 보건실 가서 뭐라고 말해… 부끄러운데
으아 세이 선생님이 너무 상냥하셔서 미치겠어. ㅠㅠ
조례 때부터 내내 창백한 얼굴로 책상 위에 엎어져 있었더니 결국 5교시 수업인 담임 선생님께서 보건실이라도 다녀오라고 등을 떠미셨다. 보건실에 갈 핑계를 계속 기다리고 있긴 했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정말로 너무 아프기도 하거니와…….
똑똑. 조심스럽게 보건실 문을 두드리자 너머에서 들어오세요, 하고 심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 기록 먼저 적어줄래요? 무슨 일로 왔어요?”
세이 선생님 세이 선생님 노래를 부르고 다녔지만 실제로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항상 먼발치에서 흘끗흘끗 본 게 다였는데. ‘도서관 훈남’으로 알았을 때는 마주쳤을 때 속으로 오두방정 다 떨곤 했지만 학생과 보건 선생님으로 마주하니 어쩐지 그러기가 어려웠다.
학번 이름은 어렵지 않게 썼건만 방문 사유 칸에서 펜이 머뭇거렸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세이 선생님이 나직이 물었다.
“혹시 진통제 필요해요?”
“…… 네….”
“평소에 따로 먹는 종류 있어요?”
“아뇨, 딱히 없어요…….”
보건실의 세이 선생님은 얼굴도 잘생기고 목소리도 좋았는데 눈치까지 좋았다.
선생님께서 건네주신 물과 약을 받아 삼켰다. 약효가 바로 돌지는 않을 텐데 플라시보 효과일까. 한결 몸이 가뿐해진 기분. 하루 종일 수그리고 있어서 뻐근했던 허리를 천천히 펴고 통통 두드렸다. 찌릿. 무섭게 다시 올라오는 고통에 나도 모르게 억, 하고 몸을 접었다. 소릴 내고 아차 하여 시선을 드니 보건 선생님께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쉬었다 갈래요?”
조금 혹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담임 선생님 수업이라 빠지기도 좀 그렇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 이거 가져가요.”
받아들고 보니 따뜻하게 데운 물주머니였다. 내가 약을 먹는 동안 부스럭 소리가 나서 뭔갈 찾고 계시나 보다 했는데 이거였나……? 동그랗게 뜬 눈으로 선생님을 쳐다보니 덧붙이셨다.
“하교하기 전에만 반납하면 돼요.”
“아… 감사합니다…!”
품에 안은 물주머니가 말랑말랑 따끈따끈했다. 덩달아 마음도 말랑말랑 따끈따끈해졌다.
… (생략) …
4/18
- 21(목) 체육 -> 신체검사(인바디) ☆☆☆
22(금) 체육 -> 체력검사
4/19
신체검사 걱정이라ㅠㅠ 점심 먹고 애들이랑 운동장 빙빙 도는데 세이 선생님이 냥 선생님이랑 대화하면서 지나가는 걸 봤다! 두 분 친하신가? 의외다. 헉 근데 신체검사면 체육 선생님이 아니라 보건 선생님이 하던가??? 작년엔 그랬던 거 같은데??? 큰일 났다 일단 오늘 내일 매점 끊고 석식 먹지 말자…
4/21
신체검사 선생님이랑 둘이 있고 완전 럭키였지!!! 반장이라서 다행이다!!!
게다가 선생님께서 내 글씨 예쁘다고 해주셨다ㅎㅎㅎ 선생님이랑 좀 친해진 것 같은데?!
… 김칫국인 거 안다… 그냥 마시게 해줘…
“반장! 담임쌤이 불러!”
그래서 교무실로 갔더니,
“아, 반장아. 오늘 체육 시간에 미리 공지했던 대로 신체검사하는데, 너는 쉬는 시간에 미리 내려가서 먼저 측정하고 보건 선생님 옆에서 기록하는 거 도와드려야 해. 괜찮겠니?”
“엇… 네! 완전 괜찮아요!”
이런 행운이!
똑똑. 체육 전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교복을 갈아입고 빠르게 보건실로 이동했다. 노크 뒤로 오늘도 들어오세요, 하는 보건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안녕하세요! 14반 다음 시간이 신체검사라서…. 아, 어서 와요. 14반 반장? 체육부장? 반장이요. 네, 반장은 지금 저랑 14반 기록지 들고 체육관으로 가서 먼저 잴게요.
선생님과 나란히 걸으며 체육관으로 가는 길이 좀 더 멀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1층 보건실에서 3층 체육관까지는 금방 도착할 거리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먼저 신체검사를 마쳤다. 다행히 시력 검사 말고는 혼자 알아서 재고 기록할 수 있었다. 흔치 않게 시력이 좋네요. 앞으로도 관리 잘 해요. 그게 뭐 별말이라고 좋은지.
쉬는 시간이 거의 끝나가니 반 친구들이 하나둘 체육관으로 왔다. 텅 비어있던 체육관에 학생들이 들어차자 곧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나는 선생님의 지시대로 인바디 기계 옆에 준비된 책상에 앉아 기록지를 펼쳤다. 여자애들은 보건 선생님이 아닌 내가 기록해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같이 작게 웃었다.
검사를 마친 친구들은 체육관 한켠에 모여 도란도란 수다를 떨었다. 몇은 공을 꺼내 농구를 하기도 하고 배드민턴을 치기도 했다. 인바디 결과를 기다렸다 기록해야 하는 나보다 시력 검사를 기록하던 선생님이 빨리 끝나셨기에 그 주위에도 애들이 모였다. 여자애들이 까르륵 웃었다. 선생님도 가볍게 웃으신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키 몸무게를 보고 적어야 하는데 자꾸만 신경이 그리로 간다. 부럽…….
“얼마나 남았어요?”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에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책상에 그림자가 지고 바로 위에서 미성이 떨어진다. 고개를 돌리자 훅, 보건실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그것과 뒤섞여도 전혀 불쾌하지 않은 시원한 섬유 유연제 향이 코끝에 스쳤다. 이제 세 명 남았어요. 대답하려는데 선생님의 시선이 나를 살짝 비껴간다.
“반장, 글씨가 참 깔끔하고 예쁘네요.”
세이 선생님의 눈동자에 글자가 빼곡히 적힌 기록지가 담겨있다. 글씨가, 예쁘네요. 천천히 그 말을 곱씹어 보는데 심장이 두근두근. 와, 선생님 목소리로 예쁘단 말을 들으니까 위험하다. 소리 지를 뻔했어. 감사합니다. 나는 간신히 진정하고 무난하게 인사했다. 조금만 더 수고해 줘요. 그 말에 얼마든지요, 대답하려는 마음을 억누르며.
4/22 <중간고사 D-10>
아아아아
체육 선생님 심부름으로 체력검사지 보건실에 제출하러 갔는데 세이 선생님께서 먼저 14반 반장 안녕이라고 인사해 주셨어~~~! ㅠㅠ 너무 좋아! 반도 기억해 주시네 계 탔다! 덕계못이라고 누가 그래!!!
4/25 <중간고사 D-7>
어린이날을 중간에 끼고 시험 보는 학교가 있다?! 그게 바로 우리 학교지… 일정 누가 짰나요…? 공부할 시간 더 안 줘도 되니까 그냥 빨리 보고 끝나게 해줘…
5/2 <중간고사 D-1>
아ㅠㅠㅠㅠ 몰라 일단 밤새우고 보자ㅠㅠㅠㅠㅠㅠ 코피 나면 보건실 가면 돼 안 돼 생각해 보니까 창피해서 못 가ㅠ
5/6
중간고사 끝끝끝끝! 끝!!!!! 오늘 시험 가채점은 주말에 하자… 고3이 뭐야 몰라 오늘은 놀 거야ㅠㅠ 아니 잘 거야…
집에 오는 길에 보건실 슬쩍 봤는데 아무래도 세이 선생님은 평소대로 근무하시는 듯하다. 애들 다 일찍 가는데… 고생하신다 ㅠㅠ
5/9
아침을 못 먹어서 조례 시작 전에 매점 갔다 왔는데 세이 선생님이랑 마주쳤다!
시험 잘 봤냐고 물어보셨는데 ㅎㅎ… 그저 웃지요.
그래도 세이 선생님이 공부 잘할 것 같은데. 라고 해주셨다!
5/12
성적이 얼추 다 나와서 평균 계산해봤는데… 더 힘내야겠다… 흑흑
세이 선생님께서 나 공부 잘할 것 같댔는데 진짜로 만들려면 열심히 해야지…
… (생략) …
5/19
내일 1, 2학년 체육대회. 3학년 오전 수업(자습). 수업 종 안 침.
= To Do List. 자습 때 국어/수학 모의고사 풀기 -> 귀마개 챙겨오기!
5/20
오늘 1, 2학년이 체육대회라서 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 간다! 사실 오전 수업하는 것도 어이없지만… 오후 수업 야간자율학습 안 하는 걸 위로로 삼아야지.
아, 그래도 구령대 옆에 임시 보건실을 세워둬서 창밖으로 세이 선생님이 보이는 건 좋았어!ㅎㅎ 매번 단정하게 입고 다니시는데 오늘 편하게 입으신 것도 너무 잘 어울리신다…!
와. 일부러 구령대 쪽으로 돌아서 하교했는데 세이 선생님이 3학년은 지금 집에 가는 거냐고 말 걸어주셔서 조금 얘기하다 왔다!!! 선생님 얼굴 보느라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이상한 말은 안 했겠지?ㅎ…
… (생략) …
5/25
망했다. 진짜 너무 대박 완전 망했다.
… 나 어떡해?
3학년은 체육대회에 끼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이 공부만 하다간 미쳐버린 학생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한 학교는 매년 3학년 학생들을 위해 점심시간을 쪼개어 반 대항으로 여자는 배드민턴과 피구, 남자는 농구와 축구로 토너먼트 미니 체육대회를 열었다.
운동은 내키지 않지만 반장이기도 하고 맞기 싫어 전력으로 공 피하는 걸 잘해 참가하게 된 피구다. 기왕 하는 거 우승을 목표로 해야지! 의욕이 과했던 탓일까, 평소보다 판단은 빠른데 머리를 몸이 따라가지 못해 아주 한바탕 제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다리가 화려하게 쓸리고 까지고 무릎에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어떡해! 보건실 가야겠다! 부축해 줄까? 아냐, 괜찮아. 혼자 다녀올게. 친구들의 걱정에 다리를 절뚝이며 보건실로 향했다.
똑똑. 보건실 문을 두드리면 언제나 들어오세요. 하는 목소리. 그러고 보니 덕분에 보건 선생님 보러 올 수 있었네. 히히. 우승에 진심인 반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생각을 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 반장 안녕… 세상에나.”
세이 선생님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셨다. 따라 놀라서 다시 무릎을 내려다봤다. 깊은 상처는 아닌데 넓었고 하필 피가 고여있다가 보건실에 들어오는 순간 뚝뚝 흘러버려 꽤나 심각하게 보였다. 의도한 건 당연히 아니지만… 세이 선생님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기분 좋아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여기 앉아요.”
선생님이 급히 스툴을 끌어오셨고 나는 무릎에서 피가 더 흐르지 않게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 위에 앉았다. 소독약과 거즈를 들고 온 선생님은 내 앞에서 무릎을 굽히셨다. 낮아진 눈높이를 따라 시선을 내리다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항상 올려봐야 했던 사람을 내려다보는 건 어쩐지 간지러운 느낌이다.
그 자리자리함 탓이었을까.
“많이 아팠겠어요.”
“괜찮… 으앗 따가!”
“아하하.”
상처에 닿는 소독약의 따끔함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비명을 듣고 선생님께서 나른하게 웃으시는데,
“아, 웃어서 미안해요. 조금 따가웠나요?”
그리 말하며 안 그래도 조심스러웠던 손길이 더 자상해지는데,
“다치지 마요, 반장.”
그저 보건 선생으로서 모두에게 하던 말이었을 텐데…….
그 순간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쨍한 햇살이 보건실에 내렸다. 가벼운 웃음에 흔들리는 세이 선생님의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빛났다. 운동장 바닥에 쓸린 거죽이 화끈거려 상처 위로 바른 연고는 차갑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연고와 함께 선생님의 다정함도 스며들었다.
그래서…….
정말 좋아하게 되어버렸어.
5/26
누가 들으면 미쳤냐고 하겠지만 빨리 학교에 오고 싶어서 어젯밤 일찍 자기까지 했다.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선도부가 서기도 전에 등교했다. 그냥 날이 좋아서 산책하는 척 단어장 들고 보건실 근처를 알짱거리며 선생님이랑 우연히 만난 척하려고 했는데 선생님은 더 일찍 출근하시는지 이미 보건실에 계셔서 얼굴만 살짝 보고 교실로 왔다…
5/27
3학년 교실이 5층인데 보건실이 1층인 건 너무한 것 같아 ㅠㅠ 우연히 마주침? 그게 뭐죠?
우연 그거 전부 내가 만드는 건데?
6/01
학교에는 나 말고도 세이 선생님 팬이 많아서 자꾸 이름이 들린다. … 다들… 그냥… 팬심이겠지…? 선생님 얘기가 나오니 신경은 쓰이는데 난 팬심…이 아니라서 그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다…… 말실수할 것 같아서
6/02
보건실 심부름 없나요 선생님ㅠㅠ
… (생략) …
6/27 <기말고사 D-3>
이상하다… 분명 지난주에 중간고사 친 것 같은데 왜 내일모레 기말고사지? 말도 안 돼.
7/05
끝-났-다-!
주말에 벼락치기 한 과목은 그래도 괜찮게 본 것 같다! 물론 성적 나와 봐야 알겠지만…
이제는 정말 수능뿐이야.
근데 그전에 생기부랑 자소서 써야 하잖아 갑자기 우울해지는데 오늘은 생각하지 말자!
7/06
시험 끝난 다음 날도 정상 등교를 해야 하다니… 거의 자습이긴 해도…
물론 나는 학교에 와야 세이 선생님을 볼 수 있으니까 싫진 않지만.
7/08
오늘 생기부에 올릴 독서 기록 적으려고 야자 전까지 도서실에 있었는데 세이 선생님도 잠깐 왔다 가셨다! 책 빌리셨었나 보다. 독서를 좋아하시는 것 같다. 선생님 처음 본 곳도 시립 도서관이었는데! 학교 도서실도 이용하시는구나… 나도 열심히 와야지~
7/11
아까 2학년 교실 지나치는데 얘네는 영화 보고 있더라… 부럽다…
나는… 고삼벌레… 어쩔… 수… 없네…
7/13
21일 방학식 -> 20일 오후 각 교실 대청소(야자X)
금요일까지 –> 여름방학 방과후수업 참가 / 3학년 자습실 사용 신청서 가져오기
7/14 목
사심을 약간 담아 (ㅎㅎ) 도서관에 다니려고 했는데 방학에 방과후수업도 있고 고3 자습실도 열기 때문에 보건실도 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방학 자습실 신청하기로 했다. ㅎㅎ…
7/20
반장으로서 교실 대청소 땡땡이치고 운동장 구석에 숨어있던 퀸시를 잡으러 갔는데 무슨 일인지 이미 세이 선생님한테 붙잡혀 있었다! ㅋㅋㅋㅋㅋ 덕분에 오랜만에 세이 선생님 뵙고 얘기도 했어ㅠㅠ 퀸시한테 나중에 떡볶이 사주고 싶은 마음. 물론 땡땡이는 용서 못 하지만.
퀸시, 빨리 교실로 돌아가서 청소해! 아 알겠다고! 투덜거리며 계단을 쿵쿵 올라가는 퀸시를 따라가려는데 세이 선생님의 목소리가 발을 붙잡았다.
“멋있네요. 14반 반장은.”
아, 정말. 그렇게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훨씬 더요.
“방학 잘 보내고요. 여름방학 때 뭐 할 거예요? 3학년이니까 또 공부려나?”
“그…래야죠. 아하하.”
“도서관 가서?”
선생님께서 도서관을 콕 집어 말하자 몸이 흠칫한다. 아니 뭐, 도서관이야 흔히 공부하러 가는 곳이니까 그냥 언급하신 거겠지만, 혹시, 만약에… 내가 겨울방학에 도서관을 다녔던 걸 기억하시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헛웃음으로 생각을 털어버린다. 하하. 김칫국도 적당히 마셔야지.
“그게 저, 자습실 신청했거든요! 계속 학교 나올 거예요.”
“그래요? 저도 방학에 계속 출근하는데.”
알아요. 그래서 신청했어요.
“더우면 친구들이랑 에어컨 쐬러 종종 보건실 와도 돼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 매일 갈지도 모르는데요?”
“매일 와요. 공부만 제대로 한다면야.”
선생님, 혹시 알고 계세요?
마음 없는 다정은 유죄라는 말이요. 분명 선생님은 사형일 거예요.
7/21 방학식
오늘부터 방학!!!이지만 나는 내일도 학교 나올 거지롱!!!
그래도 오늘 하루는 방학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오늘은 자습실에 문제집만 옮겨두고 일찍 집에 가자.
7/22 금
보건실… 간다… 만다… 간다… 만다.
매일 와도 된다고 하셨지만 진짜 갈 용기가 없어요 선생님 ㅠㅠ
… (생략) …
8/04 <수능 D-100>
이걸 아까워서 어떻게 먹지?
내일부터 디데이가 두 자릿수라니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종일 심란했는데 표정에 티가 났나 보다. 정신도 차릴 겸 잠깐 1층으로 내려가 산책했는데 보건실에 계시던 세이 선생님께서 창문 밖으로 나를 보시곤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셨다. 더위 먹은 줄 알았다고 보건실 시원하니까 잠깐 들어와 있으래서 방학하고 처음으로 보건실에 들어가기 성공 ㅠㅠ 게다가 오랜만에 세이 선생님 본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는데 수능 백일 남아서 그렇다고 하니까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초콜릿도!!!!! 주셨다!!! 이거 수능 부적으로 삼을래ㅠㅠ
8/05
어제 초콜릿에 답례를 핑계(ㅎㅎ…)로 보건실에 찾아가 비타민 음료를 드렸다. 혼자 찾아갈 용기는 없어서 같이 자습실 쓰는 친구들이랑 같이 갔다. (감사할 일이 있다고만 말하고) 근데 따라와 준 친구가 보건실 너무 시원하다고 더 있다 가도 되냐고 했는데 흔쾌히 그러라고 하셔서 보건실에서 노닥거리다 왔다!!! 덕분에 세이 선생님 얼굴 실컷 봤다 친구야 사랑해.
8/09
그때 보건실에서 수다 떨었던 날 내가 잠깐 자리 비운 사이 세이 선생님께 여자친구 있으시냐고 물었는데 있다고 하셨단다.
당연하지… 그렇게 멋지신데 여자친구가 없을 리가.
울고 싶다 아니 근데 어차피 선생님이잖아. 내가 뭘 해보려고 한 것도 아닌데
8/12 금
선생님. 그렇게 말하시면 기대하게 돼요.
그러지 마세요.
제가 선생님을 더 좋아하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
며칠 잠을 못 잤다. 고백한 적도 없는데 실연당한 기분에 자꾸만 잡생각이 들었고 떨쳐버리려 약간 공부를 무리하게 한 모양이다. 문제집을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두통이 심해 오늘 목표한 공부를 끝내려면 아무래도 약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보건실에 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정확히는 세이 선생님을 보고 눈물을 보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든 깡으로 버텨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냥 집에 갈까? … 결론을 내린다. 그래. 어차피 결국 이렇게 도망갈 거라면 내 귀로 직접 듣고 … 깔끔하게 접자.
자습실에 소리가 울리지 않게 조용히 보건실로 걸음을 옮겼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앞선 것보다 더욱 다정한 목소리로 무슨 일로 왔어요? 반장. 나는 앞으로 모은 손에 티 나지 않게 힘을 꾹 주고 기운 없이 대답한다. 잠을 잘 못 자서 그런지 두통이 있어서… 저런. 두통약 필요해요? 네…. 자, 여기. 학기 초 언젠가처럼 선생님이 건네주신 약과 물을 받아 삼켰다.
“누워서 좀 쉬다 갈래요?”
“눕지는 않고 좀 앉아있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보건실 한편에 놓인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따로 눈길을 주지 않아도 시야 대각선에 선생님이 걸렸다. 두통약을 꺼낸 병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책상 앞에 앉아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신다. 나는 머리를 짚은 채 슬쩍슬쩍 선생님이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난 척 입을 열었다. 저기 선생님 그러고 보니까요.
“… 여자친구 있으시다면서요? 반지는 왜 안 끼고 다니세요?”
“예? 없는데요?”
… 응?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나온 대답에 되레 놀랐다. 이거 물어보려고 자습실에서부터 심호흡을 얼마나 했는데. 허무할 정도였다. 머리 짚은 손을 무릎으로 내리고 선생님을 바라봤다.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어… 하지만 그때 친구가 물어봤을 때는 있다고 하셨…….”
그제야 선생님은 뭔가 생각 나신 듯 눈썹을 씰룩이셨다.
“아, 그거요… 그렇게 말해야 더는 안 물어볼 것 같아서 그랬어요. 그러니 다른 애들한텐 비밀.”
“… 근데 왜 저한테는 솔직하게 말하세요?”
깜빡깜빡. 예상치 못한 되물음인 듯 선생님은 잠시 말을 고르시는 듯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뭐, 거짓말이 좋으면 그렇게 해줄게요.”
아뇨! 치사하지만 입술 위로 검지를 붙이는 그 모습이 좋았다. 삼킨 약 효과가 돌기 시작하는지 두통도 가라앉았다. 그래서인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라. 이유야 아무려면 어때. 세이 선생님은 여자친구가 없으시고, 그걸 나한테만 솔직하게 말해주셨는데. 저 이제 괜찮아졌어요. 돌아가 볼게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반장. 네! 들어올 때와 달리 열고 닫는 문소리에 힘이 있다.
그 후 자습실에서 목표한 공부량을 무사히 끝내고 집에 돌아왔다.
8/16
아니 내일부터 개학 전까지 학교 이곳저곳을 소독한다고 자습실도 사용 불가랜다. 미리미리 알려줘야지 그런 건! 자습실에 문제집 엄청 많은데 오늘 다 어떻게 가져가!
ㅠㅠ 게다가 개학날까지 세이 선생님을 볼 수 없다니
학교 못 나오는 걸 아쉬워하는 학생은 전교생 중 나 하나뿐일 거야…
도서관 가서 공부나 하자…
선생님 도서관은 또 안 오실까…?
8/17
학교에 계실 테니 당연하지만 세이 선생님은 도서관에 없으셨다…
… (생략) …
8/22 개학
개학! 등교하고 제일 먼저 보건실을 지나쳐 왔는데 역시 일찍 출근하신 세이 선생님이 복도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어 주셨다ㅎㅎㅎ
아 그런데… 이거 너무 연예인과 팬… 같지 않나
8/23
☆☆☆ 9/12-21 수시 원서 접수 ☆☆☆ -> 자소서 미리미리 쓰기!
… (생략) …
9/11
공부 자소서 공부 자소서 공부 자소서… 자소서의 늪…
곧 수시 원서 접수 날이라 아직 자소서 쓰는 애들이 방과후에 많이 남았다. 나도…
담임 선생님께서 적어도 담임을 포함해 선생님 두 분 이상 보여드리고 첨삭 받으라는데
… 보건 선생님께 받으면 이상할까…? 이상하겠지…?
결국 보여드렸는데 과외라도 해보신 걸까?! 엄청 잘 첨삭해 주신 데다 개인 과외 받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선생님 손글씨도 너무 멋있으시다!!!ㅠㅠ
9/14
경쟁률… 보고 넣을까 했지만 자소서도 다 썼고 그냥 일찍 넣어버렸다. 무려 세이 선생님의 첨삭이라 기 만땅!이니까! 이제 수능 공부에 집중이다!
… (생략) …
10/ ■
세이 선생님께.
선생님, ■■ ■■■■■ ■■■ ■■■
- 펜으로 죽죽 긋다가 종이가 찢어진 모양이다. -
11/11 <D-6>
막대 과자의 날이라 세이 선생님께 은근슬쩍 드릴 수 있을까 했는데 뜻밖에 교환을 했다!!! 선생님 한 분이 교직원 모두에게 돌린 걸 받으셨다는데 내가 좋아하는 맛이라 그렇게 말했더니 주겠다고 하셔서 나도 냉큼 받기만 할 순 없다며 가지고 있던 걸 드렸다!!! 겉 상자에 네임펜으로 수능 대박이라고도 적어주셨다ㅠㅠ 박스 영원히 보관할 테야.
11/16 <D-1>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난 잘 할 수 있어. 늘 하던 만큼만 하자.
파이팅!
수험표와 학교에서 나눠주는 수능 응원 간식을 받으니 실감이 난다. 드디어. 선생님들과 자원한 후배들이 남아 오늘 학교를 시험장으로 만들 거고 3학년은 돌아가 내일을 준비한다. 종례는 따로 없으니 종이 치면 수험표 잘 챙겨서 집에 가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알아차렸지만 그래도 막상 눈앞에 두니 울컥 눈물이 날 것 같다. 1, 2학년보다 먼저 하교하는 3학년들을 배웅하러 정문 앞에 주르륵 서 계신 교직원들. 교장 선생님부터 교감 선생님, 담임 선생님, 3학년 수업에 참여하시는 선생님들과 아닌 선생님들도. 그리고…
“반장.”
“세이 선생님!”
“시험 잘 보고 와요.”
아, 그 목소리에 결국 눈물 한줄기가 방울방울 떨어진다. 세이 선생님께서 놀라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차마 눈물을 닦는데 쓰진 못하고 손에 힘만 꾹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마찬가지로 눈물 떨구는 학생들이 좀 있어 크게 시선을 끌 행동은 아니었다.
“많이 긴장했어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감동해서…….”
“그런 거예요? 놀라라.”
눈물을 진정하고 손수건은 돌려드렸지만 손에 향이 남아있다. 향수인지 섬유 유연제인지 모를 향이 간질간질 마음을 풀어주었다. 배시시 웃음이 터진다. 그제야 선생님도 안도한 듯 다시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반장, 파이팅.”
“네. 파이팅 할게요!”
11/17 <D-DAY>
끝났다…….
11/18
3학년 일정
21~25일 -> 5교시, 중식 O
28~30일 -> 기말고사(3학년만)
12/01~방학식 -> 오전 수업, 중식 X
하굣길에 세이 선생님께서 수고했다고 말해주시는 바람에 또 우는 모습을 보여버렸다……
12/02
와 수능 끝나고 스터디 플래너 오랜만에 편다. 수능 전엔 거의 매일 썼었는데.
등교는 했는데 오늘 틀어준 영화도 재미없고 다른 할 일도 없어서 그동안 썼던 메모들 읽어봤더니 이게 스터디 플래너인지 러브레터(ㅠㅠ)인지 모르겠다…
러브레터… 편지…
아니 다시 안 쓸 거야…!
12/23 방학식
1/09 고3 소집일 - 졸업앨범 미리 받아 갈 사람 받아 가기, 강당에 의자 옮기기
1/10 졸업식 - 학생 10시까지 등교(리허설 참석자 9:15), 졸업식 시작 11:30
1/10
졸업식이다. 나는 여러 가지로 졸업을 했다.
좋아했습니다. 좋아해요. 세이 선생님.
졸업식이 끝났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이 있고 모두가 그에 동의하는 듯 여기저기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 카메라로 찍으면 저 카메라도 찍자고 하고 이제 됐나 싶으면 휴대전화 카메라가 다가왔다. 하도 웃었더니 입꼬리가 부들거린다. 뻐근한 얼굴 근육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하나둘 돌아가 한산해진 강당을 둘러봤다. 축하 꽃다발에서 떨어진 꽃잎들, 구겨진 채 나뒹구는 졸업식 팸플릿, 아직 우는 친구들 몇… 멍하니 서있는 나를 부모님과 동생들이 불렀다. 이제 그만 가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 졸업이구나. 이 학교와 안녕이구나.
“…… 엄마! 저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올게요. 먼저 차에 가 계세요.”
그건 통보였다. 부모님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복도를 향해 달렸다. 목적지는 교무실이 아닌 보건실. 똑똑. 노크는 했지만 마음이 급해서 오늘은 들어오세요, 라는 말을 듣기 전에 보건실 문을 열어버렸다. 세이 선생님, 계세요…? 바로 마주친 눈이 느릿하게 깜빡이더니 곧 휘어진다.
“이런, 반장. 아직 집에 안 갔어요?”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싶어서…… 애들 다 가는데 선생님은 퇴근 안 하세요?”
“졸업식 날 사고 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선생님들 다 야근이에요. 시내 순찰도 하고… 저도 여섯 시까지는 학교에 남아있을 거고요.”
다행이다. 벌써 가셨으면 어쩌나 했는데. 세이 선생님의 얼굴을 보자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았지만. 안 돼. 울면 안 돼. 세이 선생님 당황하실 거야. 속으로 되뇌며 억지로 울음을 삼키고 간신히 밝은 목소리를 뱉었다.
“세이 선생님. …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졸업 축하해요.”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눈빛은 다정하지만 달리 아쉬움이 없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수많은 학생 중 하나고, 선생님은 내 하나뿐인 선생님이셔서 이렇게 다른 기분이 드는 거겠지. 선생님의 초연함에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다정함에 기대어 용기를 쥐어짜낸다. 선생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뭔데요?”
“그… 졸업 축하한다고! 적어서! 주시면 안 될까요?”
“음? 손글씨를 말하는 건가요?”
“다, 담임 선생님한테도 받았고! 친한 선생님들한테는 다 부탁드렸거든요! 그냥 짧게!”
아니. 다른 선생님들께는 그런 부탁드린 적 없지만. 거짓말을 변명처럼 구구절절하고 있으니 세이 선생님이 풋, 웃으셨다.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뭘 그렇게 망설였어요.”
저한테는 정말 어려운 부탁이었거든요. 속으로 말을 삼키고 펜을 꺼내드는 선생님의 손을 눈에 담았다. 어디에 써주지… 아. 선생님께선 책상 모서리에 점착 메모지가 놓여있는데 그냥 지나치시곤 뜬금없이 구급상자를 열었다. 거기에 적을 만한 게 있나?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꺼내는 건 가장 기본 사이즈의 반창고다. 세이 선생님이 반창고 위로 펜을 굴렸다.
건넨 반창고를 받아들고 푸핫. 이번에는 내 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반장, 졸업 축하해요. – 세이 T.
“저는 보건 선생이니까요.”
“하핫, 학교 비품을 이렇게 쓰셔도 돼요?”
“학생한테 쓰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요.”
웃느라 올라간 입꼬리가 비뚜름 어색하게 굳었다. 애써 잊으려고 했던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 이젠 학생 아닌데요.”
“아직 교복 입고 그런 말을 해도요.”
나는 수많은 학생. 그중 하나. 속에서 울컥 무언가 밀려 올라와 눈물이 되려는 걸 간신히 누르고 숨을 골랐다. 시계를 본다. 이제는 가야만 하는 시간이다.
“선생님.”
“네.”
좋아해요.
“다시 한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좋아했습니다.
“저야말로. 그동안 고마웠어요.”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꾹 참은 채로.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은 짝사랑의 막을 내렸다.
…
07. 31.
어떡하지? 아직도 좋은 걸.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것 같아.
정말 좋아해요. 세이 선생님.
스무 살. 졸업하고 바로 돌아온 스승의 날에는 고3 담임 선생님과 세이 선생님 모두 찾아갔다. 담임 선생님께 카네이션과 편지를 건네며 인사드리고 교무실에서 낯익은 선생님들과 수다도 떨다가 오랜만에 급식도 얻어먹고… 돌아가려는 순간 보건실이 눈에 밟혀 그대로 방향을 틀었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익숙한 울림에 심장도 익숙하게 두근두근. 세이 선생님…! 와, 반장. 스승의 날이라고 온 거예요? 네. 담임 선생님 뵙고 세이 선생님도 뵈러 왔어요! 기쁜데요. 선생님이 주신 비타민 음료 하나 받아 마시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준비했던 편지와 카네이션 중 꽃만 건네고 돌아왔던 졸업 후 첫 스승의 날.
그러나 그다음 해에 고3 담임을 맡아주셨던 선생님께서 다른 학교로 가셨다. 차마 담임도 아이고 보건이셨던 세이 선생님만을 찾아뵙기가 민망해 그 후로는 찾아뵙지 못했고. 결국 이대로 희미한 추억으로 남겠지, 하는 생각에 조금 서글펐던 작년과 재작년.
적응하느라 정신없던 1학년과 조금 여유가 생긴 2학년을 거쳐 취업 준비 생각에 본격적으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3학년 1학기까지 다니고 휴학을 했다.
휴학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다. 방학이 시작하고 휴학계를 제출하며 세웠던 알찬 계획들이 무색하게 나태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한 달은 나태한 삶을 즐겼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사회는 언제나 나태한 사람에게 불안감을 심어주었기에. 결국 남들보다 뒤처지고 있어도 괜찮냐는 내면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세워놓은 수많은 계획들 중 가장 만만한 독서라도 시작하기로 했다.
그렇게 정말 오랜만에 방문하는 시립 도서관이다. 학창 시절에 공부를 핑계로 놀러 뻔질나게 들락날락 곳인데 졸업하고 몇 년 안 왔다고 이렇게 낯설 수가 있나. 하지만 몸은 익숙하게 열람실을 향해 움직인다. 열람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 나란히 선 책장 네 개를 지나치면 놓여있는 6인 테이블. 아, 이 자리 가운데를 제일 좋아했는데.
세이 선생님이 도서관 훈남이던 때 제일 처음 봤던 자리가 여기여서. 후후. 추억에 젖은 촉촉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본다, 여기서 공부하다가 뻐근해 고개를 들었더니, 차분한 미남이 책을 고르고 있었지. 아, 그래. 저 사람처럼 저렇게…….
“…… 세이 선생님?!”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목소리에 선생님은 입가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쉿. 그리곤 손짓하며 뻐끔거렸다. 나가서 얘기할까요? 놀라 입을 틀어막고, 당연히 끄덕끄덕. 선생님의 뒤를 따라 휴게실로 향했다.
“오랜만이에요, 반장.”
그 말대로 오랜만에 만난 세이 선생님의 미소는 여전히 다정하고 가슴이 설렜다.
“이젠 반장이 아니지만… 기억해 주시네요.”
“잊어버릴 줄 알았어요?”
“솔직히… 네. 하하.”
“그럴 리가. 졸업하고 통 안 보이던데. 근처 살아요?”
“아, 네! 근데 1, 2학년 때는 기숙사에서 지내서… 이번에 휴학하고 내려온 거예요.”
“도서관엔 어쩐 일이에요? 휴학도 했는데 공부하러?”
“독서… 하러… 왔지만… 아하하. 선생님은요?”
선생님은 대답하는 대신 입을 다무셨다. 그래서 눈치를 보다가 하나의 가설을 덧붙인다.
“혹시 데이트…라던가?”
“참. 학생도 아닌데 도서관으로 데이트를 오진 않죠. 애인도 없고요.”
속으로 아싸, 외쳤다가 아차, 한다. 잠깐만. 좋아해서 뭐 할 건데. 애써 평정심을 되찾고 대화를 이어갔다.
“도서관은 자주 오세요?”
“학교에도 도서실이 있으니까 자주 오진 않았는데….”
“아….”
“당분간은 계속 다닐 생각이에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또 기뻐한다.
“독서하러 왔다고 했죠? 방해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전혀요! 사실 거의 놀고 있었거든요.”
“또 도서관에서 마주치면 밥 한 번 먹어요. 반장이라면 사줄 테니까.”
순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또, 라는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만약 다신 없다면 나는 오늘을 미련에 두지 않을 수 있을까? 결론을 내리기보다 말을 뱉는 것이 더 빨랐다.
“…… 지금!”
“응?”
“저기, 지금은 안 될까요?!”
선생님이 곤란한 듯 표정을 굳혔다. 심장이 철퍽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곤란할 이유 수십 가지가 머리를 스친다. 개중에 최악은 그냥 오늘을 마지막으로 다시 볼 일 없으니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는데 눈치 없이 붙잡은 건가? 하는 생각. 불행 중 다행으로 최악은 아니었다.
“이런… 내가 방금 점심을 먹어서. 아직 밥 안 먹었어요?”
“아뇨… 저도 먹긴 했는데…… 앗, 아니 그러니까.”
“응? 하하.”
생각해 보니 그럴 시간이다. 심지어 마찬가지로 점심 식사 후에 도서관에 온 참이다. 횡설수설 생각도 않고 뱉은 말이 부끄러워 고개가 절로 내려간다. 얼굴을 감싸고 민망함을 삭이고 있는데 툭, 정수리에 손가락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럼 카페는 어때요? 커피 괜찮아요?”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잘생기시고 목소리 좋고 눈치도 좋고 배려가 있으셨다.
“… 네! 저 커피 좋아해요!”
“그럼 갈까요?”
먼저 휴게실을 나서는 선생님의 뒤를 빠르게 따라가 나란히 선다. 더 멀었으면 했던 보건실과 체육관까지의 거리처럼 이번에도 가는 길이 멀길 바란다. 살짝 시선을 올리니 뜨거운 햇살이 내려앉은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결을 따라 살랑였다. 마치 봄과 여름의 경계에 있던 그날 같다.
스물셋. 아무래도 완료인 줄 알고 눌렀던 것이 일시 정지 버튼이었던 모양으로,
겨우 클릭 한 번에 짝사랑 다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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