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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하는 시간 / 륜혜
일과를 끝마친 테오는 숙면을 위한 최상의 조건을 갖추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모든 것에 그러하듯 취침 준비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숙면에 좋은 라벤더 향초에 불을 붙이자 심지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익숙해진 향이 서서히 방안을 채워나갔다. 다음은 적정 온도 측정. 18도에서 20도 사이인 19.4도니까 적당했다. 항상 두던 자리에서 수면안대를 집어 든 테오는 그것을 바로 쓰려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오늘은 준이 없으니까 내가 불을 꺼야 하는구나.”
평소에는 안대를 쓰고 누우면 인사를 한 뒤에 준이 불을 꺼주었다. 오늘은 파견 임무로 그가 없으니 스스로 불을 끄고 누워야 했다. 테오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나와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달칵하고 눌리는 소리와 함께 방이 어둠에 잠겼다. 테오는 어둠 속에 가만히 서서 암순응을 기다렸다.
차차 새까만 어둠이 옅게 흐려져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테오는 느긋하게 움직여 안대를 쓰고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적당한 위치까지 끌어올린 이불과 푹신한 매트리스가 몸을 안락하게 감싸왔다.
최적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으니 숙면할 수 있을 것이다. 테오는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였다. 그게 거슬려 손을 들어 바람을 막았으나, 바람은 계속 불었다. 테오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에 눈을 뜨니 비가 오고 맑게 개어 푸르던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날아다니던 작은 꽃잎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떤 색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멍하던 정신이 서서히 깨어났다. 꿈을 꿨구나.
“지금 시간이…….”
시계가 있을 곳으로 손을 뻗으니 시계가 바로 손에 잡혔다. 테오는 시간을 보기 위해 시계를 얼굴 쪽으로 끌어당겼다.
“뭐야?”
분명히 눈을 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약간의 명암도 없이 그저 새까만 어둠만 존재했다. 테오는 당황해 떨리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아……. 안대였구나.”
안대를 끌어내자 그새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시곗바늘을 읽어냈다. 2시 27분. 한창 공부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왜 자고 있었지?
테오는 즉시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나와 책상으로 향했다. 그런데 책상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책상이 왜 없지?”
어떻게 보아도 책상이 있어야 할 자리가 맞았다. 그런데 없었다. 아직 꿈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테오는 과거와 현재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뒤죽박죽이 된 기억에 혼란스러웠다.
그러다가 어디에선가 불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랑이자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 전에 창문을 모두 닫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준의 침대 쪽에 있는 창문이 열려 있는지 커튼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커튼에 가려져 있어 열려 있는지도 몰랐다.
“준…….”
준을 떠올리자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렇지. 여기는 사신 지부지. 나는… 사신이고”
새삼스레 되뇌인 사실이 명확하게 떠올랐다.
“카이…….”
꿈에 카이가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매일 준과 함께 몸을 움직이거나 임무와 당번 일로 몸을 움직여 숙면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준도 없고 임무와 당번도 없어 몸이 덜 피곤하니 꿈이 찾아왔나 보다. 숙면하지 못하면 평소에는 옅은 짜증이 몰려왔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멀지 않은 한때의 기억이지만 아득히 멀게도 느껴지는 반가운 기억이 꿈으로 찾아왔다.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때와 지금은 모든 것이 너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원혼을 정화하고 나비를 모아 염원을 이루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나비를 얼마나 모아야 하는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와 기분을 끌어 내렸다. 이건 좋지 않았다.
일어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으나 다시 잠을 청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와.”
준을 배웅하고 시무룩하던 그를 달래던 매니저의 말이 생각났다. 테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모두가 잠들었을 시각이라 복도는 적막했다. 주홍빛을 드리운 작은 램프가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큼직한 창문으로는 달빛이 들어와 푸른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항상 소란이 일어 소란스러운 낮의 복도와는 딴판이었다.
딱히 어디를 가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옮긴 발걸음은 매니저의 사무실 문 앞에서 멈추었다. 매니저는 아직도 야근 중인지 문틈 새로 빛이 새어 나왔다. 복도로 한 줄기 황금빛 실금이 그어졌다. 이 시간까지 야근이라니. 일이 정말 많은가 보다.
충분한 잠은 건강의 필수 요소인데 매니저는 종종 새벽까지 야근하거나 밤을 새우는 거 같았다. 14 지부의 모든 일을 매니저가 하는 거 같았다. 대체 매니저가 없었을 때는 지부가 어떻게 돌아갔던 걸까. 괜찮은 걸까. 일이 많으면 식사를 잘 챙기지도 않는 듯하니 매니저는 지금도 공복 상태이리라.
테오는 주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늦은 시간이니까 위에 부담이 적은 걸로…”
주방 전등을 켠 테오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우뚝 서 너저분한 주방을 훑어보았다. 주방 상태가 아주 엉망이었다. 누군가 봤다면 흠칫 놀랄 만한 얼굴을 한 테오는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위생 상태에 탄식을 흘렸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환기도 제대로 시키지 않았는지 공기부터가 역했다. 이 정도의 냄새라면 음식물 쓰레기를 제대로 처리하지도 않은 것이리라. 가지런히 정리되어 찬장에 들어가 있어야 할 조리기구들이 싱크대와 상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미 다 말랐는지 물기는 없었지만, 양념 찌꺼기의 흔적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었다.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그 끔찍한 광경이 테오의 머릿속 상념들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방 구석구석을 살핀 뒤에 범인을 짐작해냈다.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아침이 되면 당장 찾아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제대로 교육하리라 다짐하고 이를 갈며 청소를 시작했다.
이미 그의 머릿속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돌리고자 하는 생각으로 점령당해 이곳에 온 목적을 새까맣게 잊고 말았다.
“으으, 왜 해도 해도 끝이 없지.”
매니저가 신음하며 서류의 산을 쏘아보았다. 일은 항상 많았다. 겨우 다 처리하고 한숨 돌리고 나면 또 처리해야 할 일이 가득 쌓여 그녀를 반겼다.
꼬르륵. 배에서 소리가 났다. 저녁 식사 시간에는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 다이어트 겸 약간의 샐러드로 간단히 배를 채웠다. 소화가 다 되고도 남을 시간이기는 했다. 간단히 먹을 만한 게 없을까?
“으음… 초콜릿, 사탕, 커피, 차밖에 없네.”
직접 사다 좋았거나 사신들이 선물로 두고 간 음식들이 조금 있었는데 지금 먹기에는 애매한 것들이었다. 특히 초콜릿과 사탕은 잠시간의 달콤함이 몸과 정신을 즐겁게 해주지만, 배를 채우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니 다른 걸 먹는 게 좋을 것이다.
식사 대용 식품도 여럿 있었던 걸로 기억했는데, 자신이 먹거나 사무실에 놀러 온 사신들에게 대접하다 보니 그새 다 먹었나 보다. 다음에 시내에 나가면 쿠키와 빵류를 좀 사서 채워야겠다.
매니저는 잠시 달력을 보며 휴일까지 남은 일수를 세었다. 사흘 후면 휴일이었다. 이틀만 더 버티면 되는 것이다! 휴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하니 지쳐있던 몸에 활기가 솟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꼬르륵. 다시 한번 배꼽시계가 울렸다. 이놈의 배꼽시계는 한번 울리기 시작하면 계속 신경이 쓰여 무시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로 채워줘야만 멈추니 참 성가셨다.
꼬르륵.
“아, 정말. 알았어. 알았어. 으, 늦게 먹고 자면 별로 안 좋은데…….”
매니저가 자신의 배를 원망스레 쳐다보고는 투덜거리며 사무실을 나섰다. 주방에 가면 간단히 먹을만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없다면 만들지 뭐.
“새벽이라 그런가 조용하구나.”
복도가 이렇게 조용한 시간은 이때뿐일 것이다. 시간이 늦어 모두 잠들었는지 어렴풋이 들려오던 소음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워낙 활동적인 사신이 많아 크고 작은 소음이 사라지는 일이 드물어 고요한 새벽 시간이 새삼스러웠다.
삑. 삐익.
“헉. 뭐야?”
조용한 복도에서 울리는 낯선 소음이 매니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잠시 멈춰서 주변을 둘러본 매니저가 다시 걸음을 옮기자 작게 삑삑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자 소리는 다시 사라졌다.
‘혹시?’
조심히 걸음을 내디딘 매니저는 이내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소음의 정체는 매니저의 슬리퍼에서 나는 공기 빠지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아, 뭐야. 슬리퍼에서 나는 거였잖아. 낮에 그런 말을 들어서 나도 모르게 겁먹었나 봐….”
그래도 사신들과 함께 생활하고 원혼과도 자주 마주치는 매니저 체면이 있지. 이런 거에 놀라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이게 다 기이 때문이야!”
괜히 투덜거린 매니저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낮에 기이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가 해주었던 기이한 이야기를 떠올리자 갑자기 주변 온도가 내려간 듯 오싹해졌다.
“설마… 그게 진짜는 아니겠지?”
매니저는 부러 씩씩하게 발을 뻗어 바닥을 한 걸음, 한 걸음 밟았다. 어차피 복도에는 등이 켜져 있어 어둡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지!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기이가 한 소리의 대부분은 장난이니 이번 것도 분명 장난일 것이다. 그녀가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매니저의 발걸음은 한층 빨라져 있었다.
이제 다 왔다. 몇 보 앞에 주방 입구가 보였다.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매니저는 그 밝음이 기꺼워 신나게 주방으로 뛰어들려다가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에 발을 멈추었다.
‘잠깐. 주방 불이 왜 켜져 있지? 분명 문단속과 전등 점검을 철저히 하니까 누군가가 켜놓고 갔을 리는 없을 텐데…’
주방 안은 분명 밝은 데도 스산하게만 느껴졌다. 매니저는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누가 있냐고 물어보려고 했으나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불이 꺼졌어!’
갑자기 전등이 꺼져 주방이 어둠에 잠겼다. 그러나 인기척은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어 매니저는 의아함을 넘어 공포를 느꼈다. 조금의 자극만 주어지면 바로 건물 내 모두를 깨울만한 비명을 지를 상태였다.
‘어, 어어, 어떡해! 뭐야? 진짜 뭔가 있는 거야?’
매니저가 주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며 굳어있는 사이에 드디어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발소리 같았다. 아니. 발소리뿐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바닥에 스륵 스륵 쓸리는 것 같은 소리도 들렸다.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머리는 도망가라 경종을 울려대고 있는데, 굳어버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귀신에게 홀린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가까워지던 소리가 어느 지점에서 멈추더니 스위치 눌리는 소리와 함께 한 쪽에만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매니저는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길쭉한 막대기를 든 누군가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전등 빛을 반사한 날붙이에서 서슬 퍼런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반면에, 누군가의 얼굴은 옅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얼굴 형태가 일반적인 사람의 얼굴로는 보이지 않았다.
매니저의 시선은 인영이 든 칼로 향했다. 인영이 매니저에게 다가오며 한쪽 손을 뻗었다. 그 손에 들려있던 막대기가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그 커다란 소리에 놀란 매니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오, 오지 마!”
하필 손에 든 것도 없고, 가지고 있는 것도 없었다. 자신을 방어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했다. 여기는 사신 지부였으니까. 가끔 원혼이 쳐들어오는 일이 있긴 해도 말 그대로 가끔이고 이곳 사신들이 일이 커지기 전에 수습하니까 매니저가 위험할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편이었다. 사신들이 그녀를 든든히 지켜주었으니까.
그래. 여기는 사신 지부다.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순순히 당하지 않을 테다. 매니저는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쥐어짜 가까스로 소리쳤다.
“네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사신 지부야! 내가 소리를 지르면 사신들이 곧바로 전부 달려올 거야! 무려 20명이나 된다고!”
호기롭게 들리길 바랐으나, 떨림이 들어간 목소리는 그녀의 바람과 다른 인상을 만들어주었다. 굴하지 않은 매니저가 조금이라도 위협적으로 보이려고 주먹을 쥐고 어설프게 휘둘렀다. 눈은 감은 채였다.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탓이다.
“매니저님!”
“어?”
부름과 함께 매니저의 주먹이 온기에 싸였다. 허공에 팔을 마구 휘두르던 매니저가 그 온기와 익숙한 목소리에 동작을 멈추고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
반그늘에 가려진 얼굴은 역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손을 뿌리치려 힘을 주려 할 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진정하세요, 매니저님.”
이 차분하고 단정한 목소리는…
“테오? 테오야?”
“네. 저예요, 매니저님.”
어둠에 가려져 있지 않았다고 해도 얼굴 전체를 덮는 가면에 가까운 마스크를 머리에 쓰고 있는데 알아볼 턱이 있나.
매니저의 시선을 알아챈 테오는 재빨리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미소 지었다.
“아, 정말 놀랐잖아. 이 시간에 그런 차림으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자다가 깼는데 배가 고파서 왔다가 한바탕 청소라도 한 거야?”
“네…”
우스갯소리로 읊은 말에 민망한 듯 말끝을 늘인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매니저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눈을 깜빡이다가 입을 열었다.
“어? 진짜?”
“역시 매니저님이세요. 말하지 않아도 바로 아실 만큼 저에 대해 잘 아시네요.”
“어, 뭐… 그렇지? 아하하.”
“매니저님이 하신 말 그대로예요. 자다가 깼는데 더 자고 싶지는 않고, 조금 허전해서 주방에 왔다가…”
매니저는 테오의 말을 들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주방은 청결함을 유지하는 편이었지만, 척 보아도 지금의 깨끗함은 평소의 배는 되어 보였다. 간신히 유지한 상태가 그의 성에는 차지 않았으리라.
“그렇다고 배고픔도 잊고 청소만 하면 어떡해. 이제 다 정리하고 나가려던 참이었지?”
“아…그러게요. 그걸 깜박해버렸어요.”
“너도 참. 가장 중요한 걸 잊어버리면 어떡해.”
“그러게요. 그러면 안 되는데. 저도 모르게.”
일련의 상황을 떠올려 보니 이보다 한심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매니저님 간식도 잊고 청소만 하다가 시간을 버리고, 매니저님을 놀라게 하다니!
테오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고개가 내려갔다.
“나무라려는 건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나도 뭘 하려다가 잊고 다른 일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걸.”
“그런가요?”
“응. 며칠 전에도 그랬어. 찾을 서류가 있어서 문서고에 가다가 노아를 만났는데, 둘이 대화만 하다가 서류는 잊고 그대로 돌아온 거 있지. 그걸 바로 떠올리지도 못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떠올렸다니까.”
“노아와의 대화가 즐거우셨나 봐요?”
“처음에 내가 한 실수가 있어서 자꾸 놀리는 거만 빼면 같이 있으면 즐겁고 말이 잘 통하더라.”
“그런가요…….”
테오는 그림같이 웃으며 맞장구쳤다. 노아와의 일을 묻는 테오의 목소리 톤이 한층 낮아졌으나, 매니저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저는요?”
테오가 여상히 물어보았다. 태연함을 가장했으나 매니저의 대답을 기다리는 속은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저랑 있을 때는 어떠세요?”
“그야 당연히 좋지. 테오는 항상 다정하고 야무지잖아.”
“그런가요?”
“응.”
“저도 매니저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정말 좋아요.”
“아이참. 이거 봐. 말도 항상 예쁘게 하잖아~”
매니저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는 놀랐으나, 지금은 그저 기분이 좋았다. 역시 사람은 바람도 쐬고 다른 사람이랑 얘기도 나눠야 한다. 계속 혼자 있다 보면 차츰 정신은 물론이고 몸까지 피폐해지지 않는가.
“매니저님, 샌드위치 괜찮으세요?”
“어어. 당연하지. 같이 만들자.”
“아니에요. 매니저님은 앉아서 잠시 쉬고 계세요. 제가 금방 만들어 드릴게요. 조금 전 일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제가 죄송하기도 하고, 해드리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자, 여기에 가만히 계세요.”
매니저는 부드러우나 단호한 테오의 손길에 의자에 앉게 되었다. 그녀가 일어서지 못하도록 의자를 밀어 넣어주기까지 했다. 테오는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만큼 자신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신이라는 걸 알기에 매니저는 더 고집부리지 않았다.
“간단히 해. 간단히. 새벽이니까.”
“네. 걱정 마세요.”
매니저가 얌전히 앉아있는 걸 만족스레 확인한 테오는 부지런히 움직여 냉장고와 싱크대를 오가며 재료를 준비했다. 군더더기 없이 재빠르고 깔끔한 동선에 매니저는 속으로 감탄하며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얼굴로 테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누구네 사신인지 참 잘생겼단 말이야.’
매니저 속 테오의 이미지를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엄친아’가 딱이다. 위생에 관해서는 과해지지만, 웬만한 일은 보통 이상으로 해내는 그다. 반듯한 이목구비와 단정한 태도는 그린 듯한 엄친아 같았다. 다른 지부의 에이스 사신들과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나, 나. 방금 되게 팔불출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은데?’
그러던 중 테오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순간 테오가 눈을 휘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자기가 하고 있던 생각을 자각한 매니저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왜 그러세요?"
"으응. 아냐. 미안!"
"아니에요. 거의 다 됐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생글 웃은 테오는 몸을 돌려 다시 분주히 움직였다. 그런데도 소음이 거의 없었다.
"다 됐어요, 매니저님."
"우와!"
"마음에 드세요?"
"응!“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은 꽃무늬가 점점이 그려진 예쁜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인 샌드위치는 여느 음식 화보 못지않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테오, 너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이렇게 금방 이걸 만든 거야? 보고 있었는데도 신기해."
“별거 아니에요. 어서 드셔보세요. 배고프시잖아요.”
음식은 입으로만 먹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확실히 후각과 시각이 좋은 자극을 받으니 배가 더욱 고파졌다. 놀라서 도망갔던 허기가 단숨에 돌아와 어서 제게 음식을 달라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그럼, 잘 먹을게.”
매니저는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와!”
부드럽고 고소한 빵의 맛이 가장 먼저 느껴졌고, 곧바로 아삭한 식감의 채소들과 햄의 훈제 향과 치즈가 조화롭게 어울려 웃음과 감탄이 절로 나왔다.
“너무 맛있어!”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진짜 진짜 맛있어! 지금까지 먹어본 샌드위치 중에 제일 맛있는 것 같아.”
샌드위치는 먹을수록 더 맛있어 매니저는 볼이 가득해지도록 샌드위치를 밀어 넣었다. 환상적인 맛을 만끽하는 얼굴에 행복이 흘러나왔다. 그런 매니저에게 집중하느라 정작 테오는 자기가 만든 샌드위치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여기. 차도 같이 드세요. 자스민인데 카페인이 적고 혈액순환이랑 소화에 도움이 되는 차라 지금 마셔도 좋아요. 적당히 식혀뒀으니 바로 마셔도 괜찮으실 거예요.”
테오의 말을 믿고 매니저는 받아든 찻잔을 바로 입에 가져다 대었다. 입안에 들어오는 찻물은 정말 딱 먹기 좋은 온도였다. 은은한 자스민 향이 부드럽게 입안을 맴돌며 퍼졌다.
“향 좋다. 뭔가 이걸 마시니까 기분이 더 좋아지는 것 같아.”
“자스민 차에는 스트레스 완화 효과도 있거든요.”
“아, 테오. 고마워, 정말.”
“별거 아닌데 매니저님이 기뻐하시니까 좋네요. 앞으로 더 자주 해드려야겠어요.”
“이 새벽에 남 주자고 음식 하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 게다가 이렇게 예쁘고 맛있는 샌드위치에다 차까지. 아까 점심도 네가 해줬잖아.”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다 제가 해드리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그저 제가 드리는 건 다 기쁘게 받아주시면 좋겠어요.”
그게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제가 주는 모든 것을 매니저가 거부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매니저의 3시 세끼에 간식까지 전부 자신이 챙겨주고 싶었다. 그러고 싶은 게 어디 식사뿐인가? 할 수만 있다면 매니저의 모든 시간을 함께하며 그녀의 모든 것에 간섭하고 영향을 끼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헌신이라면 헌신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그저 제 만족감을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것을 누구와도 나누지 않고 독점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니까. 자신은 그게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강할 뿐이다.
“그렇게까지?”
과했던가. 매니저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테오는 아차, 하고 서둘러 덧붙였다.
“매니저님도 항상 저희를 가장 위해주시잖아요.”
“나는 매니저니까 그렇지!”
“저는 매니저님의 사신인걸요.”
“아니… 그게 그렇게 되나?”
“크게 다를 건 없지 않나요?”
“어, 어? 그런가?”
“네. 그런 거예요.”
너무나도 태연하게 말하는 태오의 반응에 매니저는 얼떨결에 납득하고 말았다. 그래도 무언가 걸리는 것이 남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매니저는 끙끙거리다 남은 차를 마시고는 패기롭게 찻잔을 테이블에 놓고 테오와 눈을 맞췄다.
“테오. 너 이번 주말에 시간 어때?”
“네?”
“선약이나 일정 있어?”
“아니요. 없어요!”
대화의 흐름을 짐작하고 살짝 들뜬 테오가 빠르게 대답했다.
“그럼 나랑 데이트하자.”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너한테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그냥 넘어갈 순 없지 않겠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그렇게 하게 해줘.”
“좋아요. 약속하시는 거예요?”
“응. 약속할게. 자.”
매니저가 테오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테오는 살며시 손을 뻗어 매니저의 새끼손가락을 살짝 잡았다. 테오의 돌발행동에 놀란 매니저가 놀라 테오를 불렀다.
‘이게 아닌가 보네.’
테오는 슬그머니 매니저의 손가락을 놓아주었다. 그는 매니저가 내민 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엄지와 새끼손가락만 남기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접은 그 손은 전화를 의미하는 것도 같았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다른 의미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
조금 전, 매니저는 약속한다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저 제스처는 약속의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 제스처를 받은 상대가 취해야 할 행동은 어떤 것일까?
테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오른손을 매니저의 손 모양과 같은 모양으로 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자기 새끼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매니저가 그의 새끼손가락을 휘감고 엄지끼리 맞붙여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고 놓아주었다.
정답이었나 보다. 잠시 붙어 있다가 떨어진 손이 허전해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매니저가 추가 제안을 했다.
“복사도 필요해?”
“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테오가 냉큼 대답했다. 매니저가 테오의 손을 끌어다가 손바닥을 맞대었다. 그 손이 미끄러져 떨어져 나가려 하자 테오는 자기도 모르게 매니저의 손을 잡아 쥐었다.
“테오?”
“아, 그. 손이 차길래요.”
“괜찮아. 요즘 자주 그러거든.”
테오는 자연스럽게 매니저의 손을 다시 놓아주고 차를 더 따라 건넸다.
“혈액순환이 잘 안 되나 봐요. 차 좀 더 드세요. 앞으로도 종종 챙겨드릴게요.”
“이래서는 누가 매니저인지 모르겠다니까.”
투덜거리는 어조였으나 그 안에는 그의 상냥함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했다.
“주말에 기대 해도 좋아. 최고로 만족스러운 하루가 되게 해줄게!”
“매니저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정말 기대되는데요.”
“나만 믿어!”
매니저가 자기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실로 믿음직스러운 모습에 테오는 기분 좋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지그시 눌렀다.
“어서 주말이 오면 좋겠어요.”
“그러게. 어서 다 끝내고 푹 쉬고 싶다~”
며칠 더 일할 생각을 하자 금세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에 매니저가 기지개를 켜는 사이에 테오가 접시와 찻잔을 모아들었다.
“아, 설거지는 내가 할게. 이리 줘.”
“안 돼요. 마무리까지 제가 다 할 거예요. 금방이면 돼요.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게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니지 않니.”
테오는 빙그레 미소 짓고는 재빨리 식기를 전부 들어 싱크대로 향했다.
매니저는 못 말린다는 얼굴로 자리에 남아 주말에 무엇을 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뭘 해야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날까? 일단 테오는 깨끗한 곳을 좋아하니까 위생이 좋지 않은 것은 전부 배제해야 한다. 그럼 할 수 있는 것이 꽤 많이 줄어든다. 최근에 새로 생겼다는 카페에 가볼까?
“으으음.”
매니저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냥 습관이었다. 혼자 생각하다가 막히면 공연히 소리를 내는 것이다. 머리를 쥐고 고민하다가 문득 고개를 든 매니저는 바로 앞에 앉아있는 테오를 보고 깜짝 놀랐다.
“벌써 끝냈어?”
“네. 금방 끝낸다고 했으니까요.”
“역시 대단하다니까.”
금방 끝낸 것 치고는 싱크대와 식기가 완벽하게 정돈까지 되어있었다. 실로 감탄이 나오는 솜씨에 감탄하던 매니저는 문득 무언가를 발견했다.
“테오, 잠시만.”
매니저가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해 보이자 테오는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그녀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주었다. 너무 말을 잘 들어서 순간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으나, 매니저는 어른답게 꾹 눌러 참고 목적했던 곳으로 손을 움직였다. 테오가 샌드위치와 함께 주었던 티슈 중 한 장을 집어 그의 뺨을 문질러 묻어있던 거품을 닦아주었다.
“됐다~ 거품이 조금 묻어있었거든.”
“…….”
테오는 방금 매니저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 행동 때문에 완전히 돌이 되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숨도 쉬지 않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움직이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숨은 어떻게 쉬고 눈은 어떻게 깜빡이는 거였지? 테오는 머릿속이 백지가 된다는 관용구를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매니저가 무어라 말을 건네고 있었으나, 들리지 않고 매니저의 얼굴만 또렷하게 보였다.
“테오.”
“아, 감사해요.”
“거기 좋아해? 다행이다~”
“네?”
“그럼 주말에 거기로 가는 거다? 워낙 인기가 많은 곳이라 얼른 예약해야 갈 수 있거든. 어쨌든 너도 좋다니 다행이야. 내일 바로 예약할게.”
신이 난 매니저가 듣기 좋게 재잘거렸다. 그래서 테오는 차마 ’거기‘가 어디냐고 물을 수 없었다. 단정한 미소를 짓고 적당한 타이밍에 적절한 맞장구를 치며 그녀가 계속 말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어차피 거기가 어디인지 몰라도 상관없다. 그게 어디든 매니저와 함께 가는 것이라면 좋을 것이다. 테오에게 매니저와 함께 새로운 처음을 경험하는 것보다 기분 좋은 일은 없으니.
“정말 좋아요.”
“어떡해. 벌써 주말이 기대되기 시작했어! 힘내서 남은 일도 얼른 다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고요.”
“그럴게. 무리했다가 탈이라도 나면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 테니까.”
“그럼 안되죠!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와드릴게요.”
“그 정도는 아니야.”
기겁하는 테오의 반응에 매니저가 후후 웃었다. 테오는 살짝 원망스러운 얼굴을 했다. 자연히 불퉁한 목소리가 나왔다.
“처음인 게 많겠지만 매니저님이 잘 알려주시면 금방 배워서 도와드릴 수 있어요!”
“정말 그 정도는 아니야. 내가 엄살 좀 부린 거야. 이틀 내로 얼추 끝내고 주말엔 꼭 컨디션 좋은 몸으로 너랑 놀러 갈 거야!.”
데이트. 단둘이 놀러 간다는 생각에 테오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매니저는 언제나 든든하게 겁쟁이인 자신을 이끌어준다. 혼자라면 할 생각도 못 했을 다양한 경험을 매니저 덕분에 해보았다. 매니저와 함께라면 처음에 대한 두려움은 기대로 바뀐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처음을 경험하게 될까? 얼마나 많은 매니저의 모습을 알게 될까? 매니저와의 처음은 언제나 즐겁고 설레었다.
“정말… 기대돼요.”
단란한 새벽 시간은 매니저와 테오, 둘 모두의 컨디션을 잔뜩 끌어 올려주었다. 막연한 그리움과 불안감, 외로움을 모두 날리고 그 자리에 내일을 향한 기대가 싹을 틔웠다.
어서 주말이 오길. 그동안 방에서는 혼자일 테지만, 매니저가 있어 외롭지 않고 든든할 것이다. 더는 혼자인 것도, 처음인 것도 마냥 두렵지 않았다. 매니저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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