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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소원 / 륜혜
에브넬 페스티벌 후, 실낙원 전의 배경입니다.
매니저는 야근이 아니더라도 새벽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엘은 그런 매니저가 걱정되어 종종 우연인 척 다가가 말을 걸거나 그냥 멀리서 지켜보고는 했다. 오늘도 그랬다.
낮에만 해도 모두에게 따스한 빛을 보내주던 매니저의 눈은 가라앉아 있었으며, 미소를 띠고 있던 입꼬리는 축 내려가 있었다. 깊이 내려앉은 슬픔이 보이는 매니저의 얼굴에 엘은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 서 있었다.
영롱한 녹색 빛을 뿜어내는 반딧불이가 사방을 날아다니고 있다. 비단결처럼 반짝이는 별이 콕콕 박힌 하늘 아래 매니저의 모습은 어쩐지 멀게만 느껴졌다.
매니저는 슬픔이 가득 고인 눈으로 벤치에 앉아 반딧불이 날아다니면서 흩뿌리는 빛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시노……. 레비…….”
잃어버린 동생의 눈을 닮은 그 예쁜 녹색이 시선을 끌었다. 시노의 녹색 눈은 축복받은 아이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시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려 잘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매니저는 항상 그게 마음에 걸렸다. 조만간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음은 없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니…….”
사신력으로도 몇 년이 지났건만, 시노와 레비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매니저 일에 익숙해질수록, 이곳 생활이 즐거워질수록 마음속 그늘은 커져만 갔다.
오늘은 1지부 사신 1명이 염원을 이루어 사신 지부를 떠나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축하와 기쁨이었다. 자기 일이 아니어도, 자기 지부의 사신의 일이 아니라도 마땅히 축하하고 기뻐할 일이었다. 긴 시간 만화경에 나비를 모으고 모아 염원을 이루러 떠난 거니까.
순수한 축하와 감탄이 지나간 뒤에 남은 감정은 부러움과 두려움과 같은 긍정적이지 않은 감정들이었다. 염원을 이룬 그 사신이 너무나 부러웠다.
사신들은 언젠가는 염원을 이루고 이곳을 떠나간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할 수 없고, 얼마나 많은 역경과 고난의 시간을 넘어야 하는지 예상할 수도 없지만, 계속해서 나비를 잡아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염원을 이룰 수 있다.
매니저가 되어 이곳에 온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업무를 처리하고 임무에 참여했던가. 앞으로는 또 얼마나 많은 나날이 흘러야 할까. 14지부 사신들도 언젠가는 염원을 이루어 하나, 둘 떠나갈 것이다. 혹시나 모두가 떠나간 후에도 홀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이곳에 남을까 두려웠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놀랐다.
“아…….”
사신지부의 시간은 흐르고 있지만, 멈춰있다고도 볼 수 있다. 환생이 아닌 사신의 길을 택한 영혼은 염원을 이루기 위해 사신이 되는 순간 불로불사의 몸이 된다. 사신 자체의 시간은 멈추고, 그들이 가는 임무지는 다른 세계이거나, 같은 세계라도 시간대가 달랐다. 그들의 시간은 고정되지만, 그들을 둘러싼 세계의 시간은 항상 변화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생각할 만큼 귀가 솔깃한 기회이다. 사신들도 처음에는 아주 의욕적으로 성실히 임무에 임했다. 하지만 그게 1년이 되고, 10년이 되고, 100년, 200년이 되고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도 그들의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상황은 변하지 않아도 개개인의 사신은 조금씩 변화했다. 수많은 세계에서 수많은 원혼과 관련인을 만나고, 사건을 접하고 수습하면서 그들은 조금씩 성장해나갔다. 처음과 크게 달라지지 않아 보여도 그들은 모두 확실히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14지부 사신들도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이 모습을 생각해 보면 성장한 부분들이 확연히 보였다. 모두가 앞을 향해 나아가는 이 공간에서 매니저인 자신만 변한 게 없는 거 같아 마음이 초조해졌다.
‘괜히 혼자 땅만 파고. 나 진짜 뭐 하는 거야.’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 없었다. 매니저는 상체를 숙여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런 생각들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이대로 있다가는 계속 가라앉아 좋지 않은 생각만 하게 될 것 같았다.
“안돼. 자꾸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난 매니저잖아.”
사신들을 제대로 서포트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많이 성장했다고는 해도 어린 사신들은 아직 미숙한 부분들이 있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계획을 한 번 더 점검하고 사신들에게 제대로 숙지시켜야 한다.
곧 마감인 공문이 여럿 있다. 생산성 없는 우울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었다. 마음을 다잡은 매니저가 숙였던 몸을 펼 때였다.
“매니저님!”
“어, 엘?”
갑작스러운 부름과 함께 어깨가 잡혀 놀란 매니저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급한 얼굴의 엘이 다가와 있었다.
‘언제 왔지? 혹시 내가 땅 파는 거… 봤나?’
아무에게도 보이기 싫었는데. 매니저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아, 그게. 죄송해요! 우시는 줄 알고…….”
매니저의 눈은 젖어 있었지만, 눈물의 흔적은 없었다. 엘은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매니저의 어깨를 짚었던 손을 거두어 마구 흔들었다. 얼굴까지 붉게 물들이고 손만 흔드는 엘의 모습은 지나친 당황이 느껴져 오히려 귀엽게 느껴졌다. 덕분에 매니저는 우울한 감상도 잊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왜 그렇게 당황해?”
“그, 그게 죄송해요.”
“뭐가? 놀래킨 걸 말하는 거라면 괜찮아. 오히려 네가 너무 놀라니까 내가 미안해지잖아.”
“아니에요! 저 진정했어요!”
매니저의 말에 엘이 행동을 딱 멈추고는 ‘이거 보세요’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 똘망똘망한 눈빛에 강아지가 떠올라 매니저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꾸며내거나 어쩔 수 없어 내는 것이 아닌, 정말로 즐거워서 웃는 얼굴이었다.
매니저가 웃는 까닭을 모르면서도 그녀가 웃자 안도한 엘의 얼굴에도 슬며시 웃음이 피어올랐다.
“아~ 덕분에 실컷 웃었어. 너무 웃어서 기분 나빴을지도 모르겠다.”
“아니에요. 저도 좋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슬쩍 나온 눈물을 훔친 매니저가 조금 후련해진 얼굴로 벤치에 기대었다. 그리고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잠시 앉아 있다가 갈래? 잠이 안 와서 산책 나온 거야?”
“네, 네. 맞아요. 저도 잠시 산책 나온 거예요.”
“이 시간에 잠들지 못한 사람이 또 있었구나.”
차마 매니저가 걱정되어 나와 본 거라고는 말할 수 없었던 엘은 냉큼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매니저님은요?”
“음, 나도 그래. 그냥 잠이 안 오는데 조금 답답하기도 하고… 그래서 바람 좀 쐬려고 나왔어.”
그렇게 말하는 매니저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다시금 내려왔다. 매니저가 너무 지쳐 보여서 엘은 자기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괜찮으세요?”
“어?”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질문이 튀어 나갔다. 질문을 들은 매니저와 그 질문을 한 당사자인 엘 모두 잔뜩 당황스러운 얼굴이 되어 굳어버렸다.
두 사람의 흔들리는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한 사람의 눈에는 당혹감과 낭패감이, 또 한 사람의 눈에는 놀람과 미안함 등이 비쳐 보였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매니저였다.
“내가 그렇게 피곤해 보였나?”
얼굴에 그렇게 티가 났나 하는 생각에 보이지도 않는 눈가를 괜히 쓸어내린 매니저는 가볍게 대꾸했다.
“요즘 쭉 야근을 해서 말이야. 티가 좀 났나 보다. 괜찮아. 괜찮아. 야근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둘러댄 말이면서 사실이기도 했다. 일이 어찌나 많은지 매니저는 항상 바빴다. 드물게 휴가를 얻는다고 해도 매니저는 주로 사신 지부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일이 생기면 다시 불려가 일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거는 그냥 입버릇 같은 거지. 거의 모든 직장인은 항상 앓는 소리를 내고 피곤해하면서 퇴사하고 싶어 하잖아.”
“퇴사요?… 매니저님도 그런가요?”
“음… 나는 아니지? 애초에 이곳에 온 것도 내가 강력히 원했으니까 가능했던 거고, 다른 곳에 갈 생각도 없으니까.”
동생들을 찾으려고 이곳에 온 거니까 동생들을 찾을 때까지는 절대 그만둘 수 없다. 처음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지만, 지금은 14지부 사신들이 모두 소중해져서 동생들을 찾아도 사신들을 두고 혼자 떠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까 엘.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나는 괜찮아.”
매니저는 엘의 눈을 마주하고 말했다. 끝으로는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매니저’의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본 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에요.”
“응?”
“계속 괜찮다고만 하지 마세요.”
“…….”
엘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매니저의 얼굴이 굳자 ‘아차’하는 얼굴이 되었지만, 그는 그만두지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매니저님은 항상 괜찮다고만 하시잖아요. 사람이 어떻게 맨날 괜찮아요? 괜찮지 않은 날도 있잖아요. 가끔은 정말 힘든 날이 있잖아요. 그게 지금 아니에요?”
“…….”
“지금 제가 굉장히 주제 넘는다는 건 알아요. 그런데 너무 걱정되고 속상해서 그래요. 매니저님은 저희가 힘들어할 때마다 곁에 있어 주시면서 걱정하고 위로해 주시잖아요. 그런데 왜 매니저님은 다 혼자 삼키려고만 하세요?”
결국 엘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혼자 아파하지 마세요. 제가…”
“…….”
“제가 곁에 있어 드릴게요.”
“…….”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의 마음이 닿은 걸까.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매니저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홀로 꽁꽁 담아둔 어두운 마음들이 빛에 닿아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늘 염원을 이룬 사신이 있었잖아…”
그녀는 오늘 염원을 이루어 떠나간 사신을 두고 제가 한 생각과 느낀 감정을 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엘은 섣불리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렇군요.”나 “그래요.”와 같은 경청의 뜻을 담은 추임새를 건네며 그녀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도록 했다. 그 덕분에 매니저는 엘에게 이야기를 전하면서 다시 한번 제 속내를 돌아보고 차분히 정리할 수 있었다.
속내를 털어놓은 덕분인지 매니저의 표정이나 어조는 한결 후련함이 섞여 있었다.
“언젠가는 너희 모두 염원을 이루어 떠나가고 결국 이곳에는 나 혼자 남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터무니 없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었어.”
매니저의 시선은 설명을 시작했을 때부터 엘을 떠나 또다시 초록빛 반딧불이를 쫓고 있었다. 민망함에서 나온 어떠한 의미도 없는 방황이었다.
“매니저가 돼서는 이런 생각이나 하고. 내가 너희를 볼 면목이 없다. 아하하.”
담담히 설명한 매니저가 머쓱함에 어색하게 웃으며 손부채질을 했다.
엘의 시선은 시종일관 매니저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그녀의 기분과 생각을 읽어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알아야 조금이라도 더 적절한 위로를 건넬 수 있을 테니까.
“매니저님.”
조용히 관찰을 끝낸 엘이 나직이 매니저를 불렀다. 줄곧 허공을 떠돌던 매니저의 눈동자가 그제야 엘의 금빛 눈동자를 바라봐주었다. 마주친 눈길에 엘의 가슴이 떨렸다.
그 눈동자 속에 자리한 부정적인 감정들에 마음이 아려왔다. 매니저가 괴로우면 자신도 괴로웠다. 엘은 매니저가 홀로 괴로워하지 않길 바랐다.
“저는 떠나지 않아요.”
엘의 얼굴은 전에 없이 진지했으며, 아직 어린 소년의 것인 낭랑한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힘이 있었다. 에브넬 페스티벌에서 정말 굉장했었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매니저는 조용히 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가 매니저님을 두고 먼저 떠나는 일은 절대 없어요.”
“…….”
단호한 부정이었다. 그의 얼굴 역시 그가 뱉은 말과 같은 성질을 품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흔들림 없이 단언할 수 있는 걸까.
“왜?”
“저는… 전…”
엘은 뒷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그의 입이 몇 번 열렸다가 소리 없이 닫히길 반복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가로등 빛이 엘의 등 뒤에서 어른거렸다. 그 형상이 마치 날개처럼도 보였다.
아름다운 빛의 날개와 반짝이는 황금빛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어린 천사. 항상 자신을 위해주고 도와주려 하는 사신이자 기수장인 엘. 엘은 14지부 사신 중에서도 그녀와 가장 가깝고 많은 시간을 공유하는 사신이었다.
빛의 날개를 응시하던 매니저는 문득 한 단어를 떠올렸다.
“네가 수호천사니까?”
“…….”
수호천사. 엘의 오랜 바람이었으나, 이제는 이룰 수 없게 된 잃어버린 꿈이었다. 천사는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해야 한다. 한 사람만을 특별히 더 마음에 담고 사랑해서는 안 된다.
엘은 매니저를 마음에 담음으로써 그 규칙을 어겼기 때문에 하급 천사로서 천계가 아닌 사신으로서 이곳에 있게 되었다. 천사장과 신의 권유마저 거부해가며 감정을 지우지 않고 이곳에 남길 택한 엘은 수호천사가 될 수 없지만…
“네.”
정식 수호천사는 아닐지라도 매니저만의 수호천사가 될 수는 있다.
“제가 매니저님의 수호천사니까요.”
“고마워, 엘. 네가 내 수호천사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저도요. 매니저님이 제 매니저님이시라 너무… 너무 좋아요!”
“이런 걸로 고민하는 내가 한심스럽지는 않아?”
“절대요!”
매니저의 물음을 들은 엘은 단호하게 바로 대답했다. 매니저가 작게 웃었다.
“나 잘하고 있는 거겠지?”
“당연하죠! 매니저님은 언제나 멋지세요. 항상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시고 모두에게 친절하세요. 매니저님은 최고의 매니저님이세요!”
“우왓. 그렇게 띄워주지 않아도 돼. 나 이제 기운 차렸어.”
“사실이니까요. 제 말은 전부 진심이에요. 거짓이나 부정적인 마음이 섞여 있었으면 재채기를 했을 테니까 절대 거짓말이 아니에요!”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재채기가 나오는 천사의 성질이 때때로 불편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꺼웠다. 제 진심을 가장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증거가 되어주었으니.
“응. 믿어.”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매니저를 본 엘은 굳게 내비치는 신뢰의 눈빛에 가슴이 울렸다.
“네가 만약 거짓말을 잘하는 사신이었다고 해도, 나는 지금 네가 한 말을 전부 믿었을 거야.”
누구든 지금 엘의 얼굴을 본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것이었다. 엘을 처음 보거나 그를 적대하는 이도 지금 그의 얼굴을 본다면 그가 하는 말이 모두 진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는 내 수호천사니까.”
“네…”
다감한 어조로 조곤조곤 건네는 신뢰의 말들이 미숙한 천사의 가슴에 살포시 쌓여갔다. 엘의 얼굴에 수줍음이 떠올랐다. 밤이라 붉게 달아오른 뺨이 크게 티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만 들어가자. 이미 늦은 시간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자야 내일을 위한 에너지를 비축하지.”
“네. 그래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매니저가 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매니저님이 손을!’
제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멍하니 보며 감격하느라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잠시 기다리던 매니저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손잡는 건 좀 그런가?”
동생이랑 종종 손을 잡고 걷곤 했다. 엘이 곁에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많이 편해져 순간 동생 대하듯이 해버렸다. 혹시 기분 나빴을까 싶어 손을 거두려던 때였다.
“아니요! 아니에요. 좋아요!”
내민 손이 거두어질세라 엘은 매니저가 내민 오른손을 양손으로 덥석 붙잡았다. 그러고는 자기 행동에 자기가 놀라 양손을 풀며 허둥대다가 간신히 진정하고는 오른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왼손으로 바꾸었다.
“헤헤.”
막을 새도 없이 엘의 입에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매니저의 손은 엘의 손과 크기가 비슷했다. 한 손에 감쌀 수 없는 것은 아쉬웠지만 매니저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다. 잡은 손으로 따스한 온기가 전달되었다.
“어?”
“왜 그러세요, 매니저님?”
한발 앞서 걷던 매니저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엘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푸르스름한 밤하늘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은 당연하나, 그곳에는 평소와 다른 특별한 반짝임이 섞여 있었다.
“와! 엘, 저기 봐!”
“우와.”
하늘에 콕콕 박혀 희미한 빛을 발하는 별들 사이로 강렬하게 빛나는 별이 나타나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이동했다. 별은 한순간에 사라졌으나 꼬리는 비행기 자국처럼 길게 남아있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던 엘은 문득 낮에 카티와 데이를 만나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오늘 밤에 별똥별이 비처럼 떨어지는 유성우가 내린다고 했었다.
말로는 어떤 것일지 짐작이 가지 않아 상상하기 어려웠는데, 하늘을 보니 그 이름을 단박에 이해하게 되었다. 정말 말 그대로 별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여기에서도 별똥별을 볼 수 있구나. 예쁘다~”
“그러고 보니 낮에 카티님을 만났었는데, 오늘 유성우가 내린다고 하셨어요. 저게 그 유성우인가요?”
“응. 맞아.”
“카티님이 매니저님께도 알린다고 서둘러 자리를 뜨셨는데 듣지 못하셨나요?”
“아, 정말? 아까 카티를 만나긴 했는데 유성우 얘기는 안 했어. 아마 까먹었겠지.”
“그렇겠네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 피식 웃은 두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계속해서 눈앞에 보이는 보기 드문 광경을 감상했다.
엘은 천계에서 살았지만, 이와 같은 유성우는 처음 목격했다. 매일 보던 하늘이지만, 약간의 새로움과 함께 처음을 매니저와 맞이하니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너무 예쁘다.”
매니저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유성우가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던 별들이 반짝 나타나 흐른 뒤에 사라지는 광경이 어찌 신기하지 않겠는가. 한번 보면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과 신비함이 가득한 밤하늘이었다.
”그렇지. 엘?”
살짝 상기되어 생기가 도는 얼굴의 매니저가 활짝 웃으며 엘을 돌아보았다. 매니저의 물음에 엘의 시선이 하늘에서 그녀에게 이동했다. 그 순간, 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네. 정말… 아름다워요.”
그늘이 완전히 걷히고 기쁨으로 생기가 도는 그녀의 얼굴은 유성우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엘은 매니저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에로스의 연인인 프시케보다 아름다울 것이라 감히 확신했다. 매니저는 다시 유성우에 빠져들었으나, 엘의 시선은 다시 하늘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 별똥별엔 소원을 빌어야지! 맨날 다 지난 후에 생각이 난단 말이야. 가끔 별똥별을 봐도 소원을 빌 틈도 없이 사라지고 말이야.”
“매니저님, 저기요. 저기에 또 별똥별이 떨어져요.”
“앗, 얼른 소원을!”
엘을 손끝을 따라 몸을 돌린 매니저는 이내 두 손을 꼭 모아쥐고 눈을 감았다. 소원을 비는 그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한낱 미신일지라도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믿어보고 거기에도 걸어 보고 싶은 게 당연할 것이다. 여기에 있는 모두는 평생을 바쳐서라도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어 이곳에 존재하게 되었으니.
‘매니저님은 어떤 소원을 비실까?
여전히 눈을 꼭 감고 간절히 소원을 비는 매니저를 바라보던 엘이 힐끗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양손을 모아 기도 자세를 취했다. 다만, 그는 별똥별이 아닌 신에게 빌었다. 천사인 그는 신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 기원을 올릴 수 없었다.
‘매니저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오늘처럼 괴로운 심정으로 홀로 감정을 삼키는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 그녀가 즐거우면 엘도 즐겁고, 그녀가 슬프면 엘도 슬펐다. 매니저의 감정에 동조해 열병을 일으켰던 적도 있지 않던가.
그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소원은 단 하나. 매니저의 행복이었다.
두 사람이 소원을 빌기 위해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여러 개의 별똥별이 홀연히 나타났다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이 눈을 뜬 때에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별들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 더 지켜봤지만, 더 나타나는 것은 없었다.
“아~이제 끝났나 봐.”
매니저는 아쉬운 마음에 조금 더 하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곧장 엘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엘이 방긋 웃었다.
“별똥별들 정말 예뻤지? 오늘 일찍 잠들지 않길 잘한 것 같아.”
“네. 너무 아름다웠어요. 매니저님이랑 같이 봐서 더 좋았어요…”
맞장구치다가 진심 섞인 말을 보탠 엘의 목소리가 서서히 기어들어 갔다.
“나도 그래.”
매니저가 웃음을 머금고 산뜻하게 대꾸했다. 엘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의 몸에서는 광채까지 뻗어 나왔다. 순간적으로 눈이 부셨던 매니저가 눈을 감고 얼굴을 찡그리며 손으로 눈 앞을 가렸다.
“앗. 죄송해요. 눈부셨죠.”
“아니야. 괜찮아.”
광채는 금방 사라졌다. 엘은 순식간에 풀이 죽어 어깨를 늘어트렸다. 재채기를 하려는 듯 코를 찡긋거리는 게 보였다. 매니저는 엘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정말 괜찮으니까 다시 기운 차려.”
“네!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은 그만하기!”
“네. 네. 죄. 아니. 그럴게요.”
“풋.”
매니저는 엘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 물러간 온기가 아쉬웠던 엘은 매니저의 얼굴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소원은 잘 비셨어요?”
“응.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했으니 이루어지면 좋겠다. 너는?”
“저도요. 꼭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어떤 소원인지 물어봐도 돼?”
“…….”
엘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가로등 불빛을 품은 탓인지 마주친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욱 따스하고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소원은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고 들었어요. 입 밖으로 내뱉으면 기도의 힘이 약해진대요.”
“아, 정말? 큰일 날 뻔했네.”
이 또한 미신에 불과하다. 혹자는 말로 내뱉으면 내뱉을수록 그 힘이 강해진다고도 하고, 혹자는 아니라고 한다.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 혹은 둘 다 진실이거나, 둘 다 거짓일 수도 있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온전한 진실도 아니었기에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았다. 엘은 코를 한 번 꾹 쥐어 눌렀다가 손을 떼었다.
“어, 어서 들어가요. 매니저님.”
“그래. 이제 진짜 들어가자.”
매니저가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엘은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았다. 쉴 새 없이 뛰어대는 심장박동을 들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면서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매니저와 나란히 걸었다.
이 마음이 보답받지 못하고 자신은 영원히 수호천사가 되지 못한 채, 끝내 타락 천사가 된다고 해도… 매니저의 곁에 있는 모든 순간이 엘에게는 크나큰 행복인 동시에 꿈이었다.
오늘도 어린 천사는 매니저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하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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