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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Pro Aeternam / 륜혜
매니저가 사신 지부를 떠나고 크루세이더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가정한 어느 미래의 하루입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이걸 여네.”
“그러니까! 이제 이런 행사 따위 열 필요 없는 거 아니야?”
“저놈들도 배신자일지 어떻게 알아. 여기에서 괜히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떡해.”
악의와 불신이 가득한 모난 말들이 귀를 더럽힌다. 불쾌한 감정들이 뒤섞이며 화려한 공간을 채웠다.
“어딜 가나 저런 놈들이 꼭 있단 말이지.”
매니저와 함께 왔던 때에도 저런 놈들이 있었다. 그때의 주동자는 명백히 그들에게 악의를 품고 사건까지 조작해 그들에게 뒤집어씌우려 했었다. 그리고 그 사건의 범인은 오늘도 이곳에 와 있었다. 여전히 기세등등한 것을 보아 어쩌면, 오늘도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앞으로 무도회에서 사신들과의 공존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없어질 거니까 그거면 충분해.”
자신이 받은 모욕보다 앞으로 다른 사신들의 취급이 나아질 것을 생각하며 웃던 매니저의 얼굴이 생각났다.
“다음엔 다른 사신들도 무도회에서 즐겁게 즐길 수 있겠다, 그치?”
안타깝게도 매니저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부 명계인들은 여전히 사신을 두려워하거나 아니꼽게 여기며 배척했다. 이곳에서조차 부정적인 기색을 숨기지 않는데,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어떨까.
크루세이더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밝힌 채 활동하기 시작하고, 몇몇 사신들이 변절해 그들에게 넘어가자 대놓고 사신을 경멸하는 자들도 적지 않게 생겨났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과 그들은 별개이지만, 외부에서는 하나로 보일 뿐이니.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매니저가 지금 이곳에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런 상황을 마주했다면 매니저는 많이 속상해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속상함을 숨기지 못하는 자신의 미숙함을 책망했을 것이다. 매니저는 이따금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아~ 우리 자기 보고 싶다. 뭐 하고 있으려나.”
지금은 동생과 마음 편히 즐겁게 지내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놓였다. 매니저의 곁에 있을 수 없는 건 슬프지만, 염원을 이룬 매니저를 계속 이곳에 묶어둘 수는 없었다. 매니저가 행복하다면 떨어져 있는 것도 감수할 수 있었다.
“리히트, 거기에서 혼자 뭐 하고 있어요?”
“당연히 자기 기다리고 있었지~”
리히트가 재빨리 보기 좋게 입매를 올리고 능청스레 말했다.
“어머, 뭐예요.”
“리히트, 이쪽으로 와요! 모두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런, 섬세한 자기들이 날 기다리다 병들지 않도록 얼른 가야겠네~”
리히트는 단번에 주의를 돌리며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마스커레이드. 사신과 명계인의 화합을 위한 자리이니 본격적으로 그의 특기를 발휘하여 임무를 수행할 시간이었다.
“나는 귀엽지 않소!”
“귀여워!”
“귀엽지 않다는데 더 귀여워~”
“꼬마야, 케이크 좋아하니? 이거 먹을래?”
“이렇게 어리고 귀여운 아이가 사신이라니. 믿기지 않는걸.”
“너무 귀엽다.”
“전사 아이타치! 난 귀엽지 않소!”
아이타치는 귀엽다는 말이 정말 싫었다. 이타야 부족의 부족장인 그에게 그런 말은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사신이 되고 만난 이들은 모두 그에게 귀엽다고 말했다. 아무리 전사라고 말을 해도 그를 어리고 귀여운 아이로만 보았다. 이곳 사람들도 그랬다.
아이타치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다시 감탄사를 내뱉으며 귀엽다는 말을 연발했다. 아이타치의 눈에 투지가 타오르려 하는 조짐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무기를 소환할 듯이 자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이런. 슬슬 말려야겠는걸.”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이타치의 귀여움을 감상하고 있던 리히트는 슬슬 말려야 할 타이밍임을 눈치채고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땠다. 그가 움직이려 하자 곁에 있던 아가씨들이 아쉬움을 내비쳤다.
“나는 만인의 연인이지. 자기들이랑만 있을 수는 없어. 마음 같아서는 계속 함께 있고 싶지만, 그러면 날 두고 싸움이 날 수도 있잖아? 그건 안 되지. 여긴 마스커레이드니까~”
리히트가 윙크를 건네며 말했다.
“자기들이 이해해줄 거지?”
“그럼 어쩔 수 없죠.”
“다음에 또 봐요, 리히트.”
“즐거웠어요!”
이곳은 신년맞이 마스커레이드 무도회장. 마스커레이드는 명계 내 명계인과 사신들의 화합을 위한 중요 행사였다. 이런 곳에서 싸움이 터지거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좋을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어?”
아이타치에게 가던 리히트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그리운 이의 것과 유사한 머리카락 끝에 따라붙었다. 살랑이는 연갈색 머리카락. 줄곧 그리워한 이의 것과 같은 색의 머리카락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혹시나. 어쩌면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매…”
“꺄악!”
리히트가 그녀를 부르려던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원혼을 상대하면서 위험 상황에 자주 노출되었던 리히트는 기민하게 반응했다.
“으아악!”
“왜 저게!”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 위에서 커다란 화분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 밑에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머리 위로 화분이 떨어지고 있어도 그것을 멀거니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 파앗! 철컥.
리히트는 무기를 소환해 신속하게 총알을 장전했다. 총을 쏴서 화분을 맞추면 그 바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목숨은 확보할 수 있지만, 깨어진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부상자가 늘어 파티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 뻔했다.
사신에게 불만을 품은 소수는 부상자들이 사신 때문에 다쳤노라 주장하며 명계인과 사신들의 사이를 이간질할 가능성도 있었다. 분명 그들은 그럴 것이다. 도움을 주어도 받은 도움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일어난 필연적인 작은 피해에 더욱 집중하는 이들이었으니. 작은 틈만 보여도 아귀처럼 달려들어 물어 뜯어댈 것이다.
그러나 우선순위는 명확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게 우선이다. 리히트는 화분을 조준했다. 어디를 쏴야 그나마 피해가 적을까 생각하는데 날랜 움직임이 보였다.
“모두 물러서시오!”
근처에 있던 아이타치가 무기를 소환하며 달려 나갔다.
“핫!”
가볍게 뛰어오른 아이타치가 훌쩍 몸을 날려 자기 몸만 한 화분에 검을 박아 넣고 들러붙었다. 재빨리 주변을 탐색한 아이타치가 몸의 균형을 바꾸어 벽을 박찼다. 보다 사람이 적은 곳으로 떨어질 수 있도록 화분의 방향을 돌린 것이다.
“아이타치!”
리히트가 총을 내던지고 화분과 함께 떨어지는 아이타치를 향해 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거리도 멀었거니와, 앞길을 가로막아 시야를 흩트리고, 동선을 방해하는 명계인이 너무 많았다. 리히트는 결국 넘어져 비틀대는 명계인에게 걸려 그 자리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이런 젠장!”
이대로라면 아이타치는 화분과 함께 바닥에 충돌하고 말 것이다. 그게 아이타치가 의도한 행동이라고 해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이타치가 바닥 쪽으로 등을 보이고 떨어지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이제 바닥과 남은 거리는 세 뼘 남짓.
‘안 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아이타치를 구할 수 있을까.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통받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가. 지켜주겠다고 했으나 윈렌을 구하지 못했던 그 날처럼. 모두를 잘 돌보겠다고 장담했으나 결국, 전부를 울려 버렸던 그 날처럼.
곧 벌어질 참사를 예감한 사람들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불안과 공포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걱정하지 말게. 그대.”
잔뜩 경직된 리히트의 어깨에 가벼운 무게가 얹어졌다. 그 매끄러운 목소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잔잔하고 평온했다. 고개를 돌려 본 루이의 얼굴 역시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루이는 오른손을 아이타치 쪽으로 곧게 뻗고 있었다.
“와아.”
“대단해!”
“얘. 괜찮니?”
하얗고 우아한 손끝을 따라가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붉은 장미꽃잎들이 자아를 가진 것처럼 뭉쳐서 움직였다. 구름처럼 군집한 꽃잎은 바닥에서 아주 작은 틈을 두고 아이타치와 화분을 폭신하게 감싸 안아 쿠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놀라운 광경에 주변에 모여있던 이들이 저마다의 반응을 보였다.
충돌을 각오하고 있던 아이타치는 아무 느낌도 없자 얼떨떨한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모두 놀란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움직이는 이가 없어 아이타치는 순간 시간이 멈춘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의심은 곧 깨졌다. 손에 힘이 풀리자 화분이 또르르 옆으로 굴러갔다. 화분은 얼마 가지 못하고 박혀 있던 아이타치의 검 손잡이에 걸려 덜컥 소리와 함께 멈췄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안도의 한숨과 환호성 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상체를 일으켜 앉은 아이타치는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 했다.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아이타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작고 얇고 부드러운 무언가. 그건 고운 붉은 색이 선명한 꽃잎이었다. 바닥에 꽃잎이 가득 쌓여있었다. 드문드문 아이타치의 옷이나 머리카락에도 작은 꽃잎들이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다.
“이 꽃잎은……. 루이 공이 뿌리고 다니던?”
아이타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른쪽 대각선으로 고개를 돌리니 시야 끝에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웃고 있는 루이의 얼굴이 걸렸다. 평소보다 더욱 커진 아이타치의 눈동자를 마주한 루이는 눈꼬리를 휘며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거리가 멀어 소리는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다행이군.
“루이 공! 아니, 루이 형님!”
아이타치는 바로 루이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곧 인파에 둘러싸여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화분과 아이타치가 모두 멀쩡한 모습에 뒤늦게 명계인들이 놀람과 안도의 한숨과 기쁨을 표현하려 몰려든 것이다.
“꼬마야, 괜찮아?”
“어떻게 그렇게 나설 생각을 한 거야?”
“귀여운 줄만 알았는데 정말 멋졌어. 진짜 전사였구나!”
“아이타치, 정말 대단했어.”
아이타치의 작고 귀여운 외견만 보고 판단하던 이전의 말들과 달리 이번에는 그의 행동에 집중한 말들이었다. 아이타치가 진실로 원하던 반응에 가까웠다. 아이타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땅을 단단히 딛고 몸을 곧게 폈다.
“전사 아이타치! 나는 두렵지 않았소. 모두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일 뿐이라오.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오.”
아이타치의 기개에 어느새 마냥 귀여운 아이를 보는 듯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파아앗-
“와.”
“예쁘다.”
“꽃잎이 눈처럼 내리네.”
팡파르가 터지듯이 아이타치와 화분을 받치고 있던 꽃잎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사방으로 흩날렸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듯,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히 분산되었다. 그들은 저마다의 감상을 뱉으며 놀란 눈으로는 휘몰아치는 꽃잎을 구경했다.
“자, 이제 소란은 지나갔다네.”
고요해진 가운데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어느새 3층 계단 난간에 선 루이가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도 꽃잎들이 생겨나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벚꽃 비와 달리 선명한 붉은 색의 꽃잎이 흩날리는 모습은 화려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을 주었다. 방금 있었던 소란으로 인한 불안과 날카로운 공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이 무도회는 오늘뿐이니 우리의 만남도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지.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 아닌가. 지금의 시간을 헛되이 버리지 말고 이제 다시 연회를 즐기도록 하세.”
루이를 멍하니 쳐다보던 리히트가 잠시 깨졌던 완벽한 가면을 추슬러 재차 덧씌웠다. 그의 얼굴에 다시 멋들어진 미소가 피어났다.
“뭐야. 나보다 더 멋있잖아.”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수라장이 될 뻔했던 파티를 구해낸 두 사신은 정말로 멋있었다.
“리히트! 이게 다 뭐야?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던 카티가 소란을 듣고 다가와 물었다.
“자기,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어?”
“지루해서 밖에 좀 돌아다녔어! 정원에 엄~청 큰 미로가 있는데 난 별로 헤매지도 않고 바로 나왔어! 네가 가도, 노아가 와도 내가 이길 거야. 캬하항!”
카티가 신이 나 즐겁게 말했다. 실제로는 미로 정원을 나오는 데에 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체감하지 못해 본인은 일찍 나왔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게 뻔히 보여 리히트가 픽 웃고는 잘했다고 칭찬 세례를 퍼부어주자 카티는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아, 참. 그래서 여기에 내가 없던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왜 사람들이 루이랑 아이타치를 둘러싸고 저러고 있어? 내가 더 귀여운데!”
카티가 볼을 부풀리며 불퉁한 얼굴을 했다. 리히트는 그런 카티를 귀여워하며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대강 설명해주었다.
“아~ 그래서 꽃잎이 이렇게 많았구나?”
“둘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몰라. 이 엉아도 완전히 반할 뻔했잖아~”
“씨잉. 나도 할 수 있었어! 내가 있었으면 쟤들보다 더 잘했을 거라고~”
“그래그래.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수습이 되어 다행이지만, 자기의 활약을 보지 못한 건 좀 아쉽네.”
“그러니까~! 다음엔 내가 제일 멋지게 모두를 구할 거야!”
“와, 그럼 기대할게. 카티♡”
카티는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어 리히트에게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다시 혼자가 된 리히트는 소동이 있기 전에 얼핏 본 그리운 이의 머리카락을 찾아 주위를 살폈다.
파티장이 넓고 참석자들이 화려한 가면과 의복으로 자신을 가렸다고는 해도 초대를 받은 이들만 올 수 있는 곳이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사람 하나 찾는 건 일도 아니었다. 눈썰미와 눈치에 자신이 있는 리히트는 금방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어라… 착각이었나.”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이상행동을 눈여겨보다가 하나둘 묻는 이들이 늘어나 리히트는 자기들이 너무 반짝여서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고는 자신이 그리움에 착각했던 거라고 여기게 되었다.
각양각색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어울려 웃고 떠드는 소리, 경쾌한 음악 소리와 발소리, 잔과 잔이 부딪치고 식기가 긁히는 소리 등으로 가득 찬 연회장은 언제 소란이 있었냐는 듯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그 안에서도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고 웃음이 가득한 곳의 중심에는 사신들이 있었다. 아까의 소란을 훌륭하게 수습한 사신들은 그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이들의 인상도 조금씩 바꾸고는 화려한 입담으로 그들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한참을 사람들 속에 섞여 있던 리히트는 잠시 쉬기 위해 살짝 자리를 빠져나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향했다. 옆에 난 창으로 힐끗 바깥을 보았다.
청명하던 하늘에 해의 빛깔이 섞여들고 있었다. 춤을 추고 이야기를 하며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던 무리는 둘씩 흩어져 테라스로 향하는 모습이 제법 보였다. 테라스로 향하는 쌍쌍의 연인들은 가면 너머로도 설렘과 기쁨, 행복의 기운을 가득 뿜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들을 잠시 바라본 리히트는 부러운 마음을 숨기고 미소 지었다.
“보고 싶다, 매니저.”
매니저와의 시간을 떠올리던 리히트는 충동적으로 매니저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테라스 앞에 섰다. 안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방해받지 않길 바란다는 의미의 표시가 없는 걸 보면 아무도 없거나 정말로 쉬기 위해 테라스를 방문한 이가 있을 것이다.
살짝 고민하던 리히트는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약간의 힘을 주어 당기니 소리 없이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해가 반 걸쳐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이었다. 어느새 애터넘 시간이 무르익고 있었다.
마스커레이드에는 한 가지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처럼 해가 반만 떠 있는 시간에 소중한 상대와 코를 맞대고 ‘Pro Aeternam(영원을 위하여)’이란 인사를 건네면, 모든 숨 쉬는 순간을 공유하고 다음 생에도 두 사람의 인연이 이어진다는 이야기다.
저번에 이곳에 왔을 때 리히트는 매니저와 애터넘 시간을 함께 보내려 했으나, 세드릭이 일으킨 소란으로 그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이후에 매니저가 상심한 그를 데려가 주어 그가 애터넘 인사를 했지만, 시간과 방식 모두 다르게 했다. 그래서일까. 이번 생에서도 매니저와 오랜 순간을 공유할 수 없었다.
그런 낭만 가득한 전설이 이루어지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안 이루어질 건 또 없지 않나.
얕게 부는 바람에 입구에 걸린 얇은 커튼이 나풀거리며 시야를 가렸다. 불투명한 커튼 너머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꿈속에서까지 그리고 또 그렸던 누군가의 잔상과 무척이나 닮아 보이는 건 간절함이 만들어 낸 착각일까? 아까 파티장에서도 그러지 않았던가.
나부끼는 커튼 자락이 절묘하게 누군가를 온전히 눈에 담지 못하도록 부분부분 계속 가려대었다. 보일 듯 말 듯 한 그 모습에 더욱 애가 탔다. 그런데도 리히트는 꼼짝할 수 없었다. 움직이면 바람이 멎고 커튼 너머 실루엣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등을 보이고 있던 누군가가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리히트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 공간에 들어서면서부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이 그녀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었다.
왜 그녀가 여기에 있지? 술을 많이 마셨던가? 취했나? 꿈인가? 환상?
리히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호흡도 잊은 채 멍하니 앞만 응시했다. 작은 발소리와 함께 그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니면… 진짜인가?
하얀 손이 나부끼는 커튼 자락을 쥐었다. 단정하게 정리된 가지런한 손톱과 흰 피부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 손이 천천히 커튼 자락을 모아쥐자 시야를 가리던 커튼이 서서히 사라지며 그녀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아……”
마침내 마주한 매니저의 얼굴에 리히트가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때와 같은 가면을 쓴 매니저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눈을 빛내며 웃고 있었다. 보기 드문 리히트의 모습에 그녀가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안녕. 잘 있었어?”
낭랑한 목소리가 한껏 반가움을 담아 인사를 전해왔다. 리히트는 목이 메었다.
“매니저.”
“응. 나야, 리히트. 오랜만이지?”
말갛게 웃는 매니저의 얼굴을 본 리히트는 이성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반가움, 그리움, 놀라움, 슬픔, 욕망 등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튀어 올라 가면에 가려진 진짜 가면까지 드러내서는 안 되니까.
“리히트? 괜찮아? 안색이……”
걱정이 담긴 매니저의 물음에 꿈을 꾸듯 몽롱하던 정신이 찬물에 맞은 듯 단박에 돌아왔다.
리히트는 매니저가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그녀를 끌어안았다.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 들릴까 걱정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매니저.”
“어, 어?”
갑자기 끌어안겨지니 놀란 동시에 얼떨떨해 매니저는 굳은 채 눈을 굴렸다. 리히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매니저.”
매니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괜히 울컥하는 기분에 매니저가 팔을 들어 리히트의 등을 토닥여주려고 했다.
“잠깐. 잠깐만 가만히 있어 줘.”
“어, 저기… 리히트?”
매니저의 움직임을 벗어나려는 것으로 판단한 리히트는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매니저의 어깨와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매니저가 당혹스러움에 더욱 몸을 굳히자 리히트는 매니저를 끌어안은 힘을 조금 풀고 밝은 농담조로 말했다.
“내가 그동안 우리 자기 품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연락도 한번 안 하고 나, 무지 섭섭했어. 그러니까 벌이야. 더워도 잠시만 참아.”
“푸흐, 그래. 미안. 미안. 내가 너희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어. 알잖아. 너희랑 함부로 만날 수 없는 거.”
익히 알아 온 그의 모습이 드러나자 매니저는 웃음을 흘리며 몸을 편히 늘어트렸다. 기댄 품이 무척 따듯했다. 가족이 아닌 다른 이의 온기를 느껴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좋다.”
리히트는 순간 자기 속마음이 그대로 나온 줄 알고 놀랐다가 그 말의 주인이 매니저임을 깨닫고는 더욱 놀라 심장이 마구 뛰었다.
“전부 만나지는 못해도 이렇게 잠깐이라도 얼굴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아.”
“응. 좋지.”
리히트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 마음이 자신만을 향하지 않는다고 하여 새삼스레 실망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과분하고 벅차 부정적인 생각이 끼어들 겨를이 없었다. 매니저는 항상 사신들 모두를 위하는 매니저였고, 자신은 그런 매니저를 마음에 두었기 때문에 그녀의 그런 점마저 좋을 뿐이었다.
“전에 같이 왔던 마스커레이드 기억나?”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잊겠어. 자기와 내가 이번 생은 물론 다음 생에도 평~생을 함께하기로 맹세한 날인데.”
뜻하지 않은 소동 탓에 애터넘 시간을 훌쩍 넘겨 무척 아쉬웠었지.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매니저는 사랑스럽게도 그를 이끌고 발코니로 향했다. 비록 애터넘 인사는 실패했어도 그보다 값진 시간을 보내었다. 그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보다 자기, 여기에는 어떻게 온 거야?”
“요정 할머니가 도와주셨지.”
“요정 할머니?”
“응. 드레스와 초대장을 나에게 주시고 또 여기까지 데려와 주셨어.”
검지만 곧게 편 오른손을 입술 앞에 댄 채 매니저가 빙그레 웃으며 속삭였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 외에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어 궁금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므로 리히트는 바로 장단을 맞추었다.
“그럼 내가 왕자님이겠네?”
“글쎄. 어떠려나?”
“자기가 신데렐라면 당연히 왕자님은 나지~”
“그렇다고 하지 뭐.”
“자기, 이러기야?”
“그래. 리히트가 왕자님 해.”
발코니에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오랜만에 만난 매니저와 리히트는 도란도란 안부를 주고받고 다른 이들의 소식도 전달했다.
반갑고 애틋하고 즐거운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하늘은 완연한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참 빠르게도 지나가는 시간에 리히트는 짙은 아쉬움을 느꼈다.
“벌써 해가 거의 다 졌네.”
“아, 애터넘 시간!”
“괜찮아. 지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푸흐, 그게 뭐야…”
윙크와 함께 날아온 낯간지러운 말에 매니저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석양빛에 의한 착각이 아니리라. 그에 리히트는 충동적으로 매니저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한 손으로 매니저의 손을 잡고 입 맞추며 살짝 몸을 숙였던 상태 그대로 고개만 든 리히트가 눈웃음을 지었다.
“한 곡 추실까요, 공주님?”
“윽. 공주… 그, 그래! 한번 춰보지 뭐!”
당황해서 과장된 어조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리히트가 쿡쿡 웃으며 몸을 펴고 비어있던 손을 매니저의 허리에 가볍게 얹었다.
발코니는 애터넘 시간을 위해 공들여 꾸며졌고, 뒤로 보이는 보랏빛 하늘과 푸른 빛을 발하는 전등 덕에 제법 운치도 있었다. 홀에서 연주 중인 음악이 들려오니 이곳이 댄스 플로어가 아니라도 춤을 추는 데에는 문제 될 게 없었다.
손을 잡고 몸을 가볍게 맞댄 상태로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하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자니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곡이 끝나고 그 여운에 빠져있는데, 말랑하게 풀어진 공기 속에 섬뜩한 기운이 훅 끼쳐왔다. 순식간에 달콤한 꿈이 깨어지고 현실이 들어찼다.
“원혼이 있어!”
“뭐?”
“희미하지만 느껴져. 홀에 원혼이 있어.”
“이런. 왜 하필 지금!”
“어서 가 봐.”
“이번에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
“그러게… ”
아쉬움에 발이 땅에 붙기라도 한 듯 떨어지지 않는 건 매니저와 리히트 모두 마찬가지였다. 아주 오랜만에 이루어진 재회이건만, 그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
“안녕, 자기.”
아쉬움이 가득 담겨 일렁이는 눈동자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리히트는 그 눈에 입 맞추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눈을 휘어가며 이별의 말을 속삭였다. 그에 화답하듯 매니저는 부러 밝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 미소를 오래도록 잊지 않으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매니저의 모습을 눈과 마음 모두에 가득 담아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매니저의 모습을 뇌리에 새기려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했다.
발코니는 넓지 않았다. 곧 리히트의 뒤꿈치가 문턱에 닿았다. 돌아서려던 찰나에 매니저가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만!”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초조한 얼굴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리히트는 바로 매니저에게 다가갔다. 두 걸음 정도가 남았을 때, 매니저가 리히트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리히트는 매니저의 작은 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다 못해 몸이 완전히 기울어지고 말았다. 매니저와 리히트의 얼굴 사이에 남은 공간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가까워지는 그녀의 얼굴에 그는 온 신경을 빼앗겼다.
매니저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어, 어어? 어떡해!’
속수무책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뭐를 생각하거나 해볼 새도 없었다. 뒤는 난간이고 그 높이가 적어 리히트의 무게가 더해진 매니저의 몸이 난간에 걸치면 함께 아래로 추락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매니저는 등허리에 차갑고 딱딱한 난간이 닿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매니저!”
리히트가 매니저의 등을 감싸 방향을 틀었다. 덕분에 그들은 발코니 밖으로 추락하지 않고 발코니 바닥에 충돌했다. 그러나 충돌한 것은 그들의 몸뿐만이 아니었다. 품에 들어온 그녀를 느끼기도 전에 생각을 모두 앗아갈 일이 벌어졌다. 리히트는 입술을 스쳐 뺨에 꾹 눌러지는 작은 온기가 댈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
“…….”
너무 놀라 크게 뜬 매니저와 리히트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굳은 채로 그렇게 눈만 마주하고 있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매니저의 얼굴과 달리 리히트의 얼굴은 언뜻 봐서는 평온해 보였으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잔뜩 흔들리고 있었다. 목에 드러난 맥박이 금방이라도 몸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뛰어댔다.
“매…”
“미, 미안! 리히트, 정말 미안해! 괜찮아? 다친 데는 어, 어, 없지?”
잔뜩 당황한 매니저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살피면서도 눈은 마주치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당황하니 도리어 리히트는 차분해졌다.
“나, 나는 그냥 저번에 못 했던 인사를 얼른 해주려던 거였는데… 그, 으. 정말 미안해.”
매니저는 미안함과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리히트, 정말 미안.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매니저.”
“응……”
눈도 못 마주치면서 변명과 대답은 꼬박꼬박한다.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꼼질 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귀여워 웃음이 났다. 리히트는 조심스레 매니저의 뺨을 양손으로 붙들고 눈을 볼 수 있도록 매니저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난 좋았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자기♡”
“조, 좋았?”
매니저는 그의 말과 마주친 눈동자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까부터 엄청난 속도로 뛰어대고 있는 심장이 더 빠르게 뛰어 무서울 정도였다. 리히트의 눈동자 가득 그녀의 모습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 상은 점점 커졌다.
‘잠깐만. 저게 왜 커지지?’
눈동자에 맺힌 상이 커지는 만큼 리히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 어어? 이거 설마.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나, 매니저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리히트라면 그녀가 거부하는 즉시 물러설 것이다. 아직 거리는 충분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매니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예상과 달리 콧등에 가벼운 무게감이 닿았다가 이내 떨어졌다. 그리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낮게 속삭였다.
“Pro Aeternam. 우리의 인연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길.”
아주 가까이에서 그의 향수 냄새와 함께 훅 끼쳐오던 존재감이 훌쩍 물러났다. 매니저는 얼떨떨해져 눈을 떴다. 리히트는 다시 평소처럼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신이 나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닐 터였다.
“매니저~ 눈은 왜 감고 있었어? 그거 혹시…”
“아, 아니야!”
“응? 뭐가 아닌데?”
“아무튼 아니야! 너! 어, 얼른 가봐야 하지 않아?”
“그렇지. 자기, 더 할 말 있으면 지금 얼른 다 해버려. 아까처럼 그러지 말고~ 잘못해서 떨어졌으면 어쩔 뻔했어.”
목과 귀까지 빨개진 채로 허둥대는 매니저가 귀여워 리히트는 싱글벙글 웃었다.
사실 그는 눈을 감는 매니저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매니저의 코가 아닌 다른 곳에 입술을 내리누를 뻔했다. 닿기 직전에야 간신히 방향을 돌렸다. 이 이상 갔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테니.
그렇게 두 번째 애터넘 시간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마음만은 터질 듯 부풀어 올라 넘실거렸다. 아주 먼 미래가 될지, 혹은 없을지도 모를 다음 생을 기대하는 것보다 함께 있는 이 순간을 소중히 하는 게 백배 천배는 나을 것이다. 욕심이 지나치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고, 이번 생에 함께 하길 원하는 것도 큰 욕심이니.
한번 제대로 드러낸 마음을 다시 눌러 담아 감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가면을 쓰는 게 익숙하다지만 사랑을 숨기는 건 보통 인내심으로 가능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여기에서 만족하자. 매니저가 자신을 위해 이곳에 와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이제는 물러나야 할 타이밍이다.
”잘못했어… 이제 진짜 가봐.”
“응. 이제 진짜 가야지.”
“우리 애터넘 인사 두 번 했으니까. 매니저의 다음 생과, 그다음 생에도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거지? 어떡해. 상상만으로도 너무 행복한걸~”
“푸흐, 그게 뭐야.”
“그럼 다음에 만날 때까지 잘 지내고 나 잊으면 안 된다?”
“당연하지. 리히트 너도 건강히 잘 있어. 다른 사신들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자기는 나만 믿어! 진짜 안녕~”
매니저와 리히트는 발랄한 어조로 빠르게 진짜 작별의 말을 건넸다. 또다시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야속했다.
쾅! 쨍그랑! 홀에서 무언가가 부딪히고 깨지는 큰 소리가 났다. 이제 진짜 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매니저를 돌아보았다. 예쁜 웃음을 머금고 손을 흔들고 있는 매니저는 언제고 그 자리에 있어 줄 것처럼 선명했다. 매니저의 모습을 뒤로하고 떠나는 이 상황이 아쉬울지언정, 슬프지는 않았다. 우리는 꼭 다시 만날 테니까.
Pro Aeternam. 당신과 나의 연이 계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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