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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방황의 끝 / 익명
여느 때와 같이 숲을 지나 언덕을 오르던 그는 바람의 결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지부를 떠나고 난 뒤 공허했던 공기의 흐름이 몸을 휘감는 것이 싫었다. 그녀 덕분에 숲에서 나와 지부에 적응 할 수 있었고 생존과 사슴에 대한 생각으로 차디차기만 했던 마음에 따스한 온기가 생겼다. 지금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준 주체는 이 온기만을 남긴 채 떠났고, 온기는 짙은 서늘함이 되어 매일 같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그 공허함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고 편지에 쓴 것처럼 그녀가 일러준 대로 지내본다고 하였으나 그게 말처럼, 마음처럼 쉽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수록 오히려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짙어져서 기적이 아닌 괴로움이 되어버렸기에. 그래서 그녀가 떠난 직후 그는 숲의 깊숙이 안쪽으로 들어가 며칠씩 있다가 가끔 지부로 나왔다. 다른 이들에게는 숲을 한순간에 떨칠 수 없어 조금씩 줄여가겠다는 핑계를 대며.
처음엔 숲에서 지내는 시간이 편안했지만,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평소 숲에서 지내는 것과 다르게 리히트에게 캠핑이라는 것을 배워 다른 형식으로 숲에서의 시간을 보내보며 생존이 아닌 다른 행위로 야생성을 점차 희석하려 했던 시도도 성공하지 못했다.
숲을 가르던 눈이 어두워지고 산짐승의 발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그녀가 나에게 준 새로운 삶이자 기적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 생각과 말을 비웃기라도 한 듯 숲은 그에게 더 밝은 길을 내주고 숲의 아주 사소한 이야기까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의 기적은 너에게 있을 때만 기적이었을 뿐, 그 세계에 있다 해서 그 또한 기적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숲은 자신이 썼던 마지막 편지의 모든 말들을 부정하는 듯이.
약속했던 기적을 갉아먹는 이 괴로움이 더 짙어져 그녀에게 말했던 약속과 같던 편지 속 말들이 전부 잠식되어버리기 전에 떨쳐내고자 그 즉시 숲에서 나와 지부의 생활에 집중해보려 했다. 주어지는 정화도 거의 모든 정화를 참여했고, 제이미와의 텃밭 일도 시간이 될 때마다 찾아가 열심히 했다. 쉴 틈 없이 생활하는 나를 괜찮은 걸까 하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 스스로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고 그 모습을 네가 없는 곳에서라도 더는 하지 않으려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이었다.
퀸시와는 지부의 벌레들을 퇴치하고 가끔 그의 장난에 어울려보기도 해봤다. 나름 재밌기도 했지만 유세프에게 혼났다. 그리고는 나를 도서관으로 데려가 생존에 필요할 것이라며 이런저런 책을 줬다. 그러면서 나눈 대화는 다른 재미가 있었다. 새로운 것도 많이 알게 된 유익한 시간이기도 했다. 조금 졸릴 때도 있었지만. 나인과는 같이 뉴스를 보며 지부와 명계, 인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어떤 문화와 삶을 사는지도 이것저것 물어보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늘 마지막은 어느샌가 와있는 데이와 경쟁하듯 식당으로 달려가는 기억만 있을 뿐이었다. 지부를 청소 할 때 에단과 또 한 번 물총 싸움을 하다 세이사감에게 엄청나게 혼나고 말았다.
그런 시간 속에 다른 이들은 점차 슬픔에서 벗어나듯 웃고 떠드는 시간이 이전보다 조금 늘었고 점차 지부에 익숙해지는 듯했다. 새로운 기적을 향해 한 발 내디뎠다고 생각했는데, 거울 속에서 본 나는 정작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러한 즐거움이 그저 입가에 미소가 띄워지는 것 이상은 못 했다. 그 미소조차 그 시간 사이 모든 순간 매니저가 생각나 지어지는 미소였기 때문에. 그걸 깨닫는 순간 서서히 사라져만 가던 그리움과 공허함이 눈 속에 파묻힌 듯 온몸이 아리는 느낌과 함께 무너졌다. 그동안 기적이라 믿으며 버텨왔던 모든 것들이 이별의 현실 앞에 차디찬 눈 속으로 파묻혀져 버린 것이다.
그 길로 지부를 뛰쳐나와 숲속을 정처 없이 휘젓고 다녔고 가쁜 숨이 몰아 쉬어지는 그 끝에는 어느새 절벽 아래로 보이는 지부의 밤이 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빛은 아마도 뛰쳐나오는 저를 본 이들의 걱정스러운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내려다본 지부의 밤 곳곳에 그녀가 있었다.
테니스장에서 맹세하던 자신을 피해 도망치던 그녀의 모습을 시작으로 지부 곳곳을 돌며 생존 법칙을 알려주고 지부 옥상에서 마지막에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던 그녀, 도서관으로 가는 그 길목에 있는 벤치에 앉아 졸던 그녀, 제이미와 돌보던 텃밭에 놀러 오던 그녀 등 지부의 곳곳에 그녀가 있었고 가쁜 숨은 멈춰가는 듯했으나 다시 가빠진 것은 눈에서 흐르는 그리움 때문이라.
흐르던 눈물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살을 에는 아픔을 조금씩 덜어주었지만, 그 아픔을 채우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그 그리움마저 토해내듯 입으로 새어 나오는 흐느낌은 막으려 해도 막히지 않았고 그녀의 앞길에 겨울이 없길 바란다고, 그래도 힘들 때는 자신을 찾아오라며 그녀가 준 새로운 기적으로 나아가겠다고 해놓고서는 정작 자신은 그녀와의 이별에 힘겨워하며 하루하루를 그리움으로 채워가는 것이 미안했고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가쁜 숨으로 터져 나오는 그리움을 겨우겨우 누르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도 다시 차올라 번져가는 시야에 지부의 불빛은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보였고 생존 규칙을 알려주던 그 날의 밤, 지부의 옥상에서 그가 그녀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내게 격변임과 동시에 기적이었던 바로 그 순간.
'하늘의 별이 땅에 내려온 것 같다'
'.......'
'우리 모두 미숙하다.'
".... 아니다... 내가.. 내가 미숙한 것이었다. 이토록...... 이토록....."
이번엔 정화를 잘했다며 칭찬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열심히 일군 텃밭에서 난 채소와 야채를 먹으며 행복해하던 그녀의 미소가, 숲에 있을 때면 설치해 둔 덫을 따라 자신을 찾아와 야단치고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채 숲을 나가던 그녀의 작고 여리지만 강한 뒷모습이, 뜻하지 않게 모델이 된 나를 위해 애쓰던 모습과 카메라 속 비치던 작지만 강하고 사랑스런운 그 모습과 살짝 붉어지던 그 두 뺨도... 자신에 입에 초콜릿을 넣어주며 웃던 그녀가...
이외에도 수많은 모습과 말들이 흐르는 눈물과 함께 속절없이 속을 헤집었다. 후회가, 미련이, 지독하게 묻어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얽맬 뿐이었다.
“......그립다.”
수많은 문장이 어지러이 돌아다니다 결국 입 밖으로 뱉어낸 ‘그립다’라는 한 마디. 그 한마디조차 돌고 돌아 나온 말임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알기에 더욱더 무너지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든 생각은 그녀에게 마지막 편지를 다시 써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비록 마음으로만 하는 편지일지라도.
매니저, 그 마지막 편지의 일부는 거짓일지 모른다. 나에게 집중되는 너의 모든 것이 좋아서 어린아이처럼 굴었던 나 자신이 이제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난 아직도 어린아이었다. 네가 없음에도 모든 것에 너를 찾으며 길잃은 어린아이처럼 지내고, 이제는 없는 너를 향해 투정을 부리고 있으며, 눈이 오지 않았음에도 살이 에이는 아픔에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함께했던 비 내리는 여름이 다가올수록 매니저가 짙어지고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토록 애탈 줄 알았다면... 너의 겨울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의 봄이 되겠노라 해야 했다...
너무 늦은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매니저...
기적은 네가 없는 삶에선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너의 봄이 될 테니 나에게로 와 나의 기적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노력은 해보겠지만 안 될 것을 알기에 나는 너를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아가겠다. 부디 우리의 추억에서 나에 대한 마음으로 다시금 나를 찾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내겠다. 이기적일지 모르겠지만 먼 길을 떠난 매니저에게 잠깐의 겨울이 찾아와 나를 찾게 되었으면 좋겠다. 미리 미안하다 매니저. 하지만...
우리가 다시 만날 그날을 고대하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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