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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지 못할 사계의 편지 / 이아린
매니저. 나다, 키르. 네가 이곳을 떠난지도 벌써 6개월이 지났다. 아니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어. 한 1년은 지난줄 알았는데 말이야. 이 곳은 다들 잘 지내고 있어. 아니, 잘 지내고 있는걸까, 너의 빈자리를 어떻게든 느끼지 않기 위해 더 소란 법석을 떨고 있는 듯해. 그래서 나도 안 하던 짓을 좀 해볼까 한다. 너에게 보내지 못하겠지만 널 그리워하는 이 마음을 한자 한자, 꾹꾹 눌러 담은 편지를 쓰려고 해. 이 글은 그 편지의 서막이 되겠지.
봄
봄이다. 매니저. 사신지부 정원에도 흐드러지게 꽃이 피었다. 너의 붉은 뺨이 떠오르는 튤립, 네가 주로 입던 흰색 원피스를 떠오르게 하는 백합, 네가 지부에서 가장 예쁘다고 했던 장미까지도 아주 활짝, 활짝 피었다. 제이미의 텃밭에도 작고 귀여운 새싹들이 올라왔고, 논논도 , 냥선배도 봄이라 그런지 모두 잠이 많아졌나봐. 사무실을 찾아가도, 사료를 주러가도 꾸벅 꾸벅 졸고 있는 모습들이 아주 귀여워. 아, 얼마 전에는 너와 데이, 리히트 그리고 나인과 함께 했던 그 봄날의 공원을 다시 찾았다. 홀씨의 요정, 드리아데스가 너를 찾더군. 다들 애써 꺼내지 않던 이름이었는데 네 이름이 불리자 다들 눈물을 머금는 그 모습이... 나까지 눈물짓게 했다. 그래도 울지는 않았어. 너와 함께 했던 그 날처럼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우리를 위로해주었으니까. 너도 우리가 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을테니까.. 그렇게 임무가 끝나고 돌아오니 네가 우릴 반겨주는 줄 알았는데, 그저 널 닮은 꽃과 나무들이더군. 그날만큼 서글픈 봄은 없었다.. 너는 우리들의 봄이었나 보다.
여름
너를 떠올리게 했던 꽃들이 시들고 여름이 찾아왔다.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태양은 우릴 뜨겁게 비추었고 너와 함께했던 그 피서지의 바다를 떠오르게 했다. 텃밭의 새싹은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 작은 열매를 맺었다.제이미 몰래 따먹어보았다가 혀가 순식간에 마르고 가시가 돋아난 느낌에 입 안에 넣었던 열매를 모두 뱉어 낼 수 밖에 없었다. 마침 그 모습을 본 제이미가 배를 움켜쥐고 웃더군. 정말, 정말..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 나까지 웃을 수 밖에 없더군. 그렇게 웃다가 정적이 찾아오니 우린 또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럴 때면 항상 매니저가 와서 같이 웃어주었었는데 너의 웃음은 이 싱그러운 줄기들 같았고 우리의 또 다른 햇살이었다. 작열하는 태양, 목을 조여오는 습기, 그리고 바닥에 깔린 벽돌이 타는 듯한 지독한 냄새, 추운 곳에 있던 나에겐 정말 견딜 수 없는 더운 여름이었지만 그보다 견딜 수 없는 사실은 매니저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다. 보고 싶다, 매니저.
가을
파릇파릇 하던 잎사귀들이 지고 붉고 노란 잎사귀들과 함께 가을이 찾아왔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르게 높아진 하늘, 매니저의 머리칼을 떠올리게 하는 허니 블론드 빛의 갈대밭. 알록달록 열매가 달린 제이미의 텃밭, 그리고 한껏 서늘해진 날씨는 어딘가 비어버린 우리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네가 떠나간 그 계절을 준비해야겠지. 아, 그거 아는가? 봄에는 많이 자고, 여름에는 기력이 딸린다고, 가을에는 천고마비라고, 엄청나게 먹고 자던 논논은 이제 아기 돼지가 아닌 어엿하게 살이 통통히 오른 어른 돼지가 되었다. 매니저가 있을 때의 그 귀엽고 작은 논논은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 귀엽기는 해. 매니저, 이렇게 사신지부는 변화해 가고 있어. 다들 조금씩 성장해가며 만화경도 채워지고 있지. 작은 바람이 있다면 이 만화경이 다 차기 전 마지막 임무는 매니저와 함께하고 싶은데... 이루어 질 수 없는 바람이겠지? 그래도 임무들에 소홀히 하지 않고 매니저를 다시 만날 그 날을 기다리겠다. 만나고 싶다, 매니저..
겨울
어제는 첫눈이 소복히 내렸다. 앙상해진 나뭇가지가 새하얀 옷을 차려입었고 이제 서늘하다 못해 차가워진 기온은 온 몸을 감싸고 돌았다. 아, 얼마 전엔 시안이 드디어 만화경을 모두 채웠어. 매니저가 떠나가던 그 날처럼 누군가는 펑펑 울었고 누군가는 눈물을 머금고 앞길을 축복하는 웃음을 지었지. 나는 어땠느냐고? 그저 은은히 웃어주었어. 그가 떠나는 것이 아쉽지 않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까지 눈물을 흘린다면 그의 발걸음이 더 무거워 질테니까. 그렇게 한 명이 더 떠나간 사신지부는 더 소란스러워졌지만 더 조용해졌을 뿐이었다. 그 빈자리들을 어떻게든 채워보려 하지만 역시 다들 역부족인가봐. 이제 덫을 놓으러... 아니다. 이제 그런 일은 하지 않아. 아직 숲을 가르던 눈이 어두워지지 않았고 산짐승의 발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어설프게라도 매니저가 알려준 데로 살아가고 있어. 이제 더 이상 내 투정을 받아줄 이는 없으니까 말이야.. 이제 내 만화경도 얼마 남지 않았어. 나는 이쯤에서 만화경을 채우는 걸 잠시 멈추려 한다. 언젠간, 언젠간, 네가 돌아왔을 때 내가 그 자리에 없다면 매니저가 서운해할테니까. 다른 이들이 모두 이 곳을 떠나게 되더라도 나는 너를 기다리겠다, 매니저.
우리는 네가 떠나간 그 날들을 이렇게 그리며 살아가고 있어. 사실 네가 떠난다고 말하던 그 날, 난 너에게 이 마음을 전하려 했다. 네가 떠나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하지만 네가 떠난 다는걸 알자 도저히 그럴 수가 없더군. 안 그래도 네 무거운 발걸음을 더 무겁게 할까봐 말이야. 그래서 이 편지를 썼지만 이 편지도 전해질 수 없겠지. 먼 곳에 있는 너를 눈물짓게 할 수는 없으니까. 매니저, 잘 지내고 있는 건가? 잘 지내고 있다고 나는 믿겠다. 하지만 힘들다면 아프다면, 그 때도 말했듯이 언제든 이곳으로 돌아와라. 시안은 없어도 우리 19명의 사신들과 세이사감, 그리고 냥선배도 언제나, 항상 널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럼 언젠가 돌아올 너를 기다리며 이만 펜을 놓도록 하겠다. 언젠가 네가 이 편지를 읽을 수 있게될 그날을 기다리며 말이지. 좋아해. 아니, 사랑해. 어떻게 말해도, 어떻게 담아도 모자랄 만큼 나는 널 사랑한다. 매니저.
밤의 사신, 눈밭을 달리는 금안의 늑대.
키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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