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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 이터널플라워 모리 선물 대사 인용
* 유세프↔매니저←모리
불안을 꽁꽁 싸맨 고민은 불현듯 찾아오기 마련이다. 매니저는 바삐 움직이던 손과 눈을 멈추고 불빛이 들어오는 액정을 바라봤다. 별거 아닌 것이 별것처럼 다가오는 것도 한순간. 시계 분침이 딸각, 소리를 내며 정각 알림을 낼 때까지 매니저는 잠시 정지된 화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별이라….”
어쩌면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종착역과도 같은 단어였다. 자신에게 명계에서의 두 번째 기회가 온 것은 다르게 말하면 두 번째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었다. 매니저는 정각 알림이 울렸음에도 고민의 늪에 천천히 잠식되어 벗어날 줄 몰랐다. 이젠 고민에 몰두해버린 듯 쌓인 서류 더미에 볼을 붙이고 만다. 갑작스럽게 매니저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난 자신에게 그 누구도 슬픔을 안겨준 적이 없어서 생각지 못했다. 이별은 언젠가 필연처럼 찾아올 것을. 행복감에 젖어 몰랐다기엔, 생각하기 싫은 마음의 욕심이 부러 외면해 버린 것 같아서 뒤늦게 스스로에 대한 한탄이 한숨과 함께 쏟아졌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면서 우울감에 빠지는 일은 죽어도 싫었는데. 매니저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고민에 빠지게 되면 해소될 때까지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는 건 명계에 오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나쁜 습관이었다.
“휴…….”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올리면, 작게 열어진 문틈 사이로 푸른 머리카락이 천천히 밀려 들어왔다. 매니저는 목소리와 함께 들어온 이를 마주하자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마치 제 한숨 소리를 들어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편안한 얼굴이었다.
“모리였구나, 안자고 무슨 일이야?”
“잠이 오지 않는 김에 가벼운 순찰이랄까요. 매니저님 방에 불이 켜있길래 와봤죠.”
“서류가 많아서 야근을 좀 하고 있었어.”
“야근 때문에 한숨 쉰 건 아닌 거 같았는데, 그렇죠?”
“하하…모리는 속일 수가 없네. 나 그렇게 근심 많아 보여?”
“음, 유세프님이 보셨다면 금세 눈썹을 이렇게. 내렸을지도요?”
모리가 검지를 들어 눈썹 아래에 갖다 대며 말하니 매니저가 이어서 안 되는데, 하는 말과 함께 제 눈썹을 손가락 끝으로 당기며 펴내는 시늉을 했다. 자신과 유세프의 관계를 아는 건 눈치 빠른 모리 뿐이었으므로, 조금은 편하게 농담하듯 대답할 수 있었다. 유세프와 연인 사이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모리에게 들켰지만, 모리는 유세프에게 둘의 사이에 대해 알게된 것을 드러내지 않겠다 약속해주었고 그렇다보니 연애에 대한 고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모리를 찾게 되었다. 물론 연애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모리는 다른 사신들보다 자신을 특별하게 대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매니저는 자연스럽게 머릿속에만 굴리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스팸 문자를 받았는데,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은 불현듯 쉽게 찾아온다는 말에 유세프씨가 바로 떠올랐거든.”
그러니까, 물론 모리와도 그렇겠지만. 우리는 언젠가 이별을 맞이해야 할 거고. 그때가 되면 유세프씨랑도 헤어져야 하는 게 맞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유세프씨의 상심한 얼굴이 떠올라서……. 매니저의 말에 모리는 팔짱을 낀 채 고개만 끄덕였다. 간간이 추임새를 넣듯 그렇죠, 하고 답하는 것 외엔 매니저의 긴말이 끝날 때까지 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매니저는 끝에 유세프씨랑 헤어져야 하는 날이 오면, 자신이 어떻게 웃으면서 보내줄 수 있는지가 걱정이라는 말과 함께 입술을 닫았다. 모리도 그의 말을 다 듣고선 턱을 매만지며 한참을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별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이별 연습?”
“네,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라는 게 닥쳐올 상황을 알고 어떻게 대처할지 연기해보면 무게가 덜어지는 법이니까요. 꽤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으음, 그렇지만 그런 연습을 어떻게 해?”
“저를 유세프님이라고 생각하고 해보세요.”
모리를? 매니저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고 모리는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조건이 안 맞나요? 그의 농담 어린 말에 매니저가 그럴 리가 있냐며 손사래를 쳤다.
“그냥…잘 상상이 안 돼서. 아무래도 본인이 아니면 힘든 걸까?”
“그럼 뭐, 가볍게 생각하죠. 저는 저대로 있을 테니 그냥 이별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거예요.”
모리가 둘 사이의 거리를 조금 더 좁히고, 매니저의 한 손을 가볍게 잡아내었다. 여태 웃고만 있던 얼굴이 천천히 굳고,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동안 매니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곧, 사신 지부를 떠나신다고 했던가요?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인데도 아쉽네요."
매니저는 순간 모리의 표정과 잔뜩 눅눅해진 목소리에 목 뒤가 서늘했다. 연기를 잘한다는 건 모르는 사실이었는데, 이렇게 진심으로 도와준다면 자신 또한 진심으로 임해야 할 것 같아 손을 마주 잡았다. 모리에게는 신세를 많이 져서 그런지 생각보다 평소 속으로만 생각했던 말들이 술술 나왔다.
“괜찮아. 그래도 함께하는 동안은 정말 즐거웠고…내가 어딜 가든 모리를 절대 잊지 못할 거야. 생각해보니 내가 힘들 때 늘 모리가 먼저 알아봐 줬던 거 같아.”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거지? 모리의 눈을 마주하고 물으면 모리는 짧게 네. 한마디를 놓고선 천천히 벌어져 있는 사이를 조금 더 좁혀왔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점점 더 좁혀지는 거리에 둘 사이 얼굴이 한 뼘을 두고 있을 때에야 매니저가 당황하여 뒤늦게 맞잡았던 손을 올려 막았다.
“진지하게 해주는 것 같더니, 바로 장난치는 거야?”
“들켰나요? 왠지 낯간지러워져서요. 그리고…….”
잠깐 발소리 같은 게 나 모리는 자신이 들어왔던, 살짝 벌어져있는 문에 시선을 두었다가 금세 거두었다. 유세프님과 함께였다면, 당연히 이런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했는데. 아닌가요? 모리의 덧붙여진 말에 매니저는 금세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니라고 하기엔 맞고, 맞는다고 답하기엔 연인과의 스킨십 사정까지 말하게 되는 것 같아 부끄러웠던 터다.
“가끔 보면 제일 짓궂은 거 같아.”
“이제 깨달으셨다니 역시 매니저님답네요.”
“뭐?”
매니저의 반응에 모리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서, 도움은 좀 됐나요?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묻는 말에 매니저가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이별하는 느낌을 받지 못해서 모르겠다고 답하자 모리가 한 손으로 서류 사이의 빈 곳을 짚고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럼, 제가 계속 도와드릴까요?”
“뭘?”
“이별 연습이요.”
필요하시면 매일 자정에 찾아올게요. 유세프님 모르게 연습하려면 지금 시각이 좋을 테니까요. 모리는 여유로운 척 다시금 머그잔에 입을 대었다. 매니저는 고민하듯 턱을 괴었다. 매일 연습하다 보면 무던해질까, 상대가 달라도 괜찮은 걸까 등의 고민을 하는 것이 모리의 눈에 선하게 보였다. 이렇게 고민할 때 조금만 부추기면 매니저는 금세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라, 모리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정말 장난 없이 연습에만 임해 드릴게요.”
“공짜로?”
“그럴 리가요. 매니저님이니까 특별히 매일 아침 블랙커피 한 잔으로 도와드리죠.”
어차피 매니저님도 매일 아침 블랙커피를 마시잖아요? 모리의 말에 매니저가 그렇긴 한데, 하고 운을 떼었다. 제가 마실 커피를 준비하는 김에 한 잔을 더 준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결국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답에 모리는 다시 한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럼 내일도 자정에 뵐게요, 매니저님?”
응, 그리고 모리. 웬만하면 밤늦게는 커피 마시지 말고. 아무리 새벽조라지만……. 뒤늦게서야 머그잔에 담긴 커피 향을 눈치챈 매니저가 잔소리하자 모리는 알았다며 문 쪽으로 냉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자취마다 은은한 향이 이어졌다. 매니저가 모리의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고 있자 모리는 문을 나서며 살짝 벌려둔 틈 사이로 눈인사를 건넸다. 매니저 또한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면 문이 온전히 닫혔다. 방을 나선 뒤에야 모리는 눈을 살짝 떠 소리 없이 새벽조의 방으로 걸었다. 너무 순진하게 얽혀드는 매니저와는 반대로 작은 것에도 눈치채는 이가 자신을 기다릴 것이다. 그의 감은 웬만해서 틀린 적이 없었다.
이별연습
w. 화언 / 삽화 익명
“왔어?”
“깨어계셨네요. 유세프님.”
“자려고 보니 네가 없길래. 그런데…….”
매니저랑 무슨 이야기를 하고 온 거야? 평소의 유세프라면 연인 사이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묻지 않았을 말이었다. 아까의 발소리는 유세프가 맞았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을 몰랐다. 게다가 본 직후에 묻지 않고 도망치고 나서야 의문을 품었다는 것, 그 문제를 직접 묻는 것 자체만으로도 매니저에게 관심이 있음을 연실이 드러내는 것이라 한 편으론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예상을 깬 유세프의 행동에 모리는 당황하지 않고 머그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웃어 보였다.
“그건 매니저님과 저만의 비밀이라서요. 죄송하지만, 알려 드릴 수 없네요.”
유세프는 모리의 대답에 깍지 꼈던 손에 조금 힘을 실었다. 손등 위로 튀어나온 뼈들이 긴장하는 모양새가 모리의 눈에 담겼다. 자상하고 여유롭던 유세프도 제 연인에 관한 일에는 종종 점잖아지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밤늦게 미안. 나도 하던 일만 마무리하고 자야겠다. 먼저 가서 자.”
“네. 유세프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모리는 소파에 앉아있는 유세프를 지나쳐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모리가 두고 간 머그잔 위, 남아있는 커피의 물결 위로 유세프의 굳은 얼굴이 일렁였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아도 멋대로 넘쳐흐르는 마음까지는 제어할 수 없었다. 만약 오해라면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확신을 받아두고 싶었다. 솔직히 사실이래도 믿기 싫은 마음이 눈덩이처럼 금세 불어나 버려 부정할 마음만 가득했다. 모리는 쉽게 대답해 줄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여유롭게 굴지 못했다. 오히려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그러나 답을 가진 모리는 평소와 같은 장난스러운 어조로 진실을 함구했다. 그가 엘처럼 알기 쉬운 상대였으면 이렇게 답답하고 불안하지 않았을 터다. 유세프는 덩그러니 남은 소파에 두 손을 얽어 콧등을 누른 채로 한참을 앉아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깊은 한숨이 몇 번 오갔다. 유세프는 다시금 마지막으로 봤던 둘의 모습을 그려봤다. 오해라기엔 매니저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고, 모리 또한 그랬다. 둘이 애틋하게 대화를 주고받다가 결국에는 거리가 가까워졌고, 눈에 새겨진 장면은 입술과 입술이 한 뼘 채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였다. 더는 볼 수 없어 급히 옮겨낸 발걸음을 뒤늦게 원망했다. 제 연인을 의심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변호사의 버릇이 남아있어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얽매일 것을 알았다. 결국, 유세프는 머리를 감싸고 소리 없이 고통을 씹어내며 소파에 몸을 뉘었다. 행복한 꿈을 꾸고 싶다. 밀려오는 스트레스에 유세프는 눈을 감았고, 이내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
“매니저님. 꼭 가셔야 하나요? 이렇게 막연한 기분은 오랜만이라 조금 당황스럽네요. 떠나신 후의 빈자리가 클 거예요.”
“나도 많이 그리울 거야.”
쿵, 쿵. 심장 소리가 크게 울린다. 유세프는 데자뷰처럼 느껴지는 상황에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하지 못했다. 문틈 사이에 서있는 몸이 어떻게 해도 움직여지지 않아서 금세 꿈이란 걸 인지했다. 자각몽이라고 하던가. 꿈이라는 자각은 있지만, 가위에 눌린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팔을 들어 문을 열고 끌어안고 있는 둘을 향해 뭐 하고 있느냐고 묻고 싶어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둘의 대화와 행동을 엿볼 수 있는 것만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옹졸하고 좁은 마음이 고개를 든다.
“사신들도 예전만큼 사고를 치거나 활발하진 않겠죠. 궂은 비가 계속 내리는 날처럼 어딘가 가라앉은 공기가 오래도록 이곳에 남을 거예요. 매니저님은 그만큼 우리에게, 그리고 저에게 햇볕 같은 존재였어요.”
“모리…….”
“아주 짧은 시간을 돌이키는 것만으로도 웃게 되는 사건들이 떠오를 만큼. 떠나보낼 때가 되어서야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게 되는 모양이에요. 저 또한 그렇고요. 이제야 매니저님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고, 서로 확인했는데.”
“미안해, 내가 이곳을 떠나게 되어서….”
“괜찮아요. 그래도 다행인 건…잃어버리는 게 아니라서. 당신이 여기 어딘가에 건강히 잘 지내고 있을 거란 기대에…. 어떻게든 보내드릴 수 있을지도요. 그때에는 우리가 어떠한 장애물도 없이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응. 장담해. 그때에는 내가 꼭, 먼저 모리를 찾아갈게.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매니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모리의 머리 그림자가 매니저의 위로 드리워졌다. 한 뼘보다 더 가까이 마주한 두 사람의 얼굴에 유세프는 눈을 질끈 감고 싶을 정도였다. 마음이 괴롭고, 아릿하다. 꿈인 걸 알기에 이상하리만치 애틋한 대화도 흘려듣고, 그새 마주 얽힌 손에서 최대한 시선을 떼어보려고 노력했는데. 잔인하게도 꿈은 자신을 악몽의 늪으로 끌고 갈 모양이었다. 마음대로 감기지 않는 눈에 담기는, 책장처럼 넘어가는 장면들이 유세프의 심장을 옭아매었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손가락이 얽힐 때마다 무너지는 마음을 주워담지도 못한 채 그저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오해의 씨앗은 악몽으로 돌아와 그의 무의식에 뿌리를 내렸다.
***
“헉…….”
눈을 뜸과 동시에 뜨겁게 차오른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한줄기 떨어졌다. 악몽의 마지막은 어떻게 됐더라. 이별 통보를 들은 것 같다. 매니저에게서 직접, 그것도 모리의 품에 안긴 채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꿈이기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모리도, 매니저도 그럴 인물이 아닌 걸 아는데도 꿈에서 봤던 매니저의 표정이 진심 같아서 두려워졌다고 하면 바보 같을까? 식은땀과 한줄기 흘려낸 눈물을 가볍게 닦아내고서야 유세프는 몸을 일으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모리가 잠들어있는 침대를 한 번 훑고서 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콜록, 감기 기운을 알리는 신호탄이 적막 사이로 울리면 유세프는 조금씩 뜨거워지는 몸을 웅크린 채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매니저가, 정말로 내게서 마음이 떠났다면…….”
내가…먼저 놔줘야 매니저의 마음이 편하겠지. 오해는 때때로 진실을 숨긴다. 한 번 의심하면 진실이 어떻든 간 본 것을 토대로 믿게 되고,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지기도 했다. 유세프는 두려웠다. 사랑에도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기에, 그만큼 매니저를 믿었고 자신을 믿었다. 둘 사이에 오가던 사랑의 무게가 평평한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눈으로 봤던 것과 꿈에서 본 것이 한데 뭉쳐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한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기만 했다.
***
결국 감기에 든 유세프는 새벽조 방에서 나오지를 못했다. 소파에서 잠깐 잠든 사이 밀려온 감기가 생각보다 독했고, 악몽 탓에 흘린 식은땀이 약해진 몸을 깊게 파고든 듯했다. 모리가 방을 나서기 전 유세프의 상태를 알아차렸고, 열이 끓는 이마 온도를 살피고서야 매니저에게 전달했다. 모리가 전달할 때 매니저는 실시간으로 표정이 천천히 굳어졌다. 금세 걱정이 어린 얼굴에 모리는 고개를 돌렸다.
“모리야 이것 좀 냥선배님한테 갖다 줄래? 미안해.”
“네.”
"그리고 네 커피는 내 방에 뒀어! 가져가서 마셔!"
모리는 품에 안겨진 서류 더미 뒤로 급히 뛰어가는 매니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구나. 씁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이별 연습을 하게 된다면 슬쩍 흘려내려고 골라두었던 진심들을 다시 아무도 모르게 심장 뒤편으로 넘겨내고 만다. 아마 평생을 내보내지 못할 말일지도 모르겠다. 쌓여있는 서류 더미가 마치 제 마음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저 당신이 확인하고 넘겨내면 끝나는 일처럼. 매니저의 다급한 발소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매니저의 방에 들어온 모리는 서류를 빈자리에 내려놓고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커피잔을 들었다. 블랙커피의 향은 언제나처럼 진했다. 한 모금을 삼켜내면 특유의 쓴맛이 입안을 가득 맴돌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가 싫었다. 역시 다정은 독이다. 매니저의 다정함이 없었다면 마음에 공간을 내어주지 않았을 테다. 금세 차가워지는 손을 다정히 잡아주는 사람이라, 누구든 가족이 된 것처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말과 행동들이 자신을 욕심나게 했다. 둘 사이의 관계를 눈치챘을 때 그만두었어야 했을 마음이었는데. 결국엔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가끔 생각했다. 누가 ‘짝사랑’이라는 단어를 정의했을까. 짝이 없는데 짝사랑이라니. 모순이었다. 자신이 직접 해보니 더욱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리 외로운 사랑이라면 선택적으로 마음을 지울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 계략도 계산도 통하지 않는 마음 앞에서 자신은 그저 초라해지기만 했다. 진심을 곱씹을수록 혀끝이 씁쓸해졌다. 전해보지도 못하고 홀로 피어난 마음 끝자락을 접고, 제게 왔던 다정함처럼 미지근한 커피를 한 모금 더 삼켰다. 모리는 결국 잔에 남은 커피를 다 마시지도 못하고 내려두었다. 이 온도에도 제 마음이 잔해를 남기지 않고 다 녹아 없어졌으면 좋겠다.
"이별 연습은 제게 필요한 것 같네요. 혼자서겠지만.“
참, 싫다. 당신에게는 내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게. 내가 아프면 한달음에 달려와준대도 같은 마음이 아닐 것 같아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미련이 모리의 마음속에서 한참을 요동쳤다.
***
"유세프씨. 들어갈게요!"
매니저는 노크하려던 손을 거두고 손잡이부터 잡아 돌렸다. 그만큼 걱정스러운 마음이 우선이었고, 아픈 연인의 곁을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니 잠옷도 겨우 갈아입은 듯 열이 어긋나게 잠겨있는 단추들과 조금 발갛게 달아오른 유세프의 얼굴이 눈에 담겼다. 매니저는 한달음에 달려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유세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여전히 불덩이였다. 사감님을 불러와야 해. 매니저가 그리 결심하고 굽혔던 무릎을 폈을 때, 유세프의 뜨거운 손바닥이 그의 손목을 미약하게 잡아내었다.
"매니저……."
"유세프씨! 괜찮아요? 열이 많이 나요. 제가 사감님을 빨리 불러와야…."
"있잖아, 혹시…이젠 내가 싫어졌어?"
비몽사몽 한 상태로 눈도 겨우 뜨고 있는 그에게서 예상치 못한 물음이 들려와 매니저는 잠시 멈췄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열이 많이 나니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매니저는 아픈 와중에도 제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며 그리 묻는 그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평소와 다르게 응석 부리는 연인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늘 어른스럽고, 배려하기만 하고 욕심도 낼 줄 모르는 사람이라 은근히 이런 날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연인이 아픈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스스로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저었을 즘엔 유세프가 상체를 반쯤 일으키고선 잡았던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뜨거운 몸을 기대어왔다.
"어, 어어……."
아픈 사람이 기대오면 그 사람의 무게만큼 힘이 실려서 매니저는 그대로 유세프의 위로 넘어지듯 눕게 되었다. 포근한 이불 아래로도 그의 몸이 얼마나 따듯하게 열이 올랐는지 느껴졌다. 유세프가 열이 잔뜩 오른 손가락 끝으로 매니저의 귓가를 쓸어넘겼다. 유세프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한 건지, 평소보다 조금 더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반쯤은 전하는 말이 아닌 푸념과 같은 혼잣말이었다.
"생각을 해봤어. 나는 매니저가 좋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하지만 나만 그렇게 느끼진 않을 수도 있겠다. 나 말고도 매니저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을 수도 있겠다…."
"네?"
"그리고…매니저도 혹시 내가 싫어져서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면, 나한테 먼저 말을 못할테니까. 내가 먼저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매니저는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유세프의 말들에 눈만 동그랗게 뜨고 깜빡일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속으로 말을 골라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파악하려고 애쓴 것에 가까웠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아픈 연인의 응석을 받아주기로 마음을 먹고 나니 당황스러움이 가라앉았다. 매니저도 팔을 들어 유세프를 마주 끌어안고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못하겠어. 나 싫어하지 말아줘, 매니저…."
"제가 왜 유세프씨를 싫어해요. 그럴 일 없어요."
"정말? 믿어도 돼?"
"응. 정말요. 그러니까 이제 약 가져올테니까 푹 자고 일어나서 먹어요. 자고 일어나면 지금 말한 거 기억하려나 모르겠네."
"좋아해, 매니저. 뽀뽀하고 싶다……."
"안 돼요. 지금은."
다 나으면 해줄게요. 매니저가 유세프의 머리칼을 쓸어주고, 식은땀을 흘린 이마를 닦아주고 잠이 들 때까지 계속 어깨를 토닥였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릴 때까지 다정한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품에서 천천히 빠져나와서 다시금 침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뒤늦게 자신과 유세프가 연인인 게 실감이 났다.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14지부 내에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일까.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것이 녹아내린 기분이었다. 정말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나 싶었다. 매니저가 벅차오르는 마음에 상체를 일으켜 잠든 유세프의 콧잔등에 입술을 눌러내며 웃었다.
"나도 진짜 뽀뽀하고 싶으니까 감기 얼른 나아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연인이 곁에 있다면 먼 훗날의 이별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다. 이별에 연습은 필요 없었다. 함께하는 순간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분명 그 끝도 아프지만은 않을 터였다. 갑작스럽게 이별하게 된다 해도, 다시 못 볼 것 같아도. 분명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연인인 유세프 뿐만이 아니라 지금 함께하는 모두와도. 그러니 오늘을 내일같이, 내일을 먼 훗날처럼 마음이 다하는 동안은 꾸준히 사랑해야겠다. 아쉽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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